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7. 17. 14:37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5

 

우리는 지난 시간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게 하는 사랑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랑은 우리에게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 사랑은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랑을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들에게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 중생한 사람들만 하며 살 수 있는 사랑입니다.

 

오늘은 성내지 않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단 두 번 나오고 있습니다. 이 단어의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선행적으로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말 성경에서는 이 단어를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라고 능동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 원문을 보면 파록슈네타이라고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이 단어는 파라 옥시스의 합성어입니다. 파라곁에이고 옥시스날카로운 물체의 끝부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약 날카로운 물체의 끝 부분이 여러분을 향하고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겠습니까? 예를 들면 다른 사람이 여러분을 향해 창끝이나 칼끝을 겨누고 있다면 그 느낌이 어떻겠습니까? 마음이 불편하고 신경이 쓰이고 위협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셋째는 이 단어의 사건적인 해설을 보면 육체적인 표현이 아니고 감정에 대한 표현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날카로운 물체가 육체적인 위협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우리 감정을 자극하고 있는 것의 표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바탕으로 본문의 말씀을 다시 직역해 보면 그 사랑은 자극받지 않으며 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사랑은 날카로운 물체가 주는 위협 속에서도 내 마음이 자극을 받지 않는 사랑, 그래서 화를 내지도 않고, 분노하지도 않는 그런 사랑을 말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사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외부의 위협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그 마음이 자극을 받거나 동요하지 않는 사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사람들이 를 내고 분노하는 것을 보면, 두 가지 서로 다른 분노가 있습니다.

하나는 수동적인 분노이고, 또 하나는 능동적인 분노입니다.

 

먼저 수동적인 분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수동적인 분노란? 자극하는 원인이 내 밖에 있는 분노입니다.

어떤 사람이 날카로운 물건으로 나를 찌르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을 때, 우리 마음은 그런 사람을 경계하며 적개심과 분노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이렇게 나를 분노하게 하는 원인이 내 밖에 있는 이런 분노를 수동적인 분노라고 합니다이 때 우리 마음속에 분노를 촉발시키는 원인은 사람일수도 있고, 물건일수도 있고, 사건일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수동적인 분노는 그것이 내 마음 속에 있는 아담의 타락된 본성을 자극하여서 분노하도록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 우리가 꼭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분노를 자극시키는 그 외적인 요인들이 악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외적인 요인의 자극을 받아서 분노하고 있는 우리 마음도 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선행적인 이해를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현실과 실재적인 모습을 재대로 볼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하면 어떤 목적을 가지고 우크라이나를 침략한 러시아도 악하지만, 러시아를 대항하여 러시아가 침략할 수밖에 없도록 나토 가입을 고집한 우크라이나도 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가까운 예를 들면 성상납이라는 약점을 잡고 이준석 대표를 실각 시키려는 윤핵관들의 의도도 악하지만, 자신의 죄는 숨겨두고 이런 윤핵 관들과 날선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이준석 대표도 악하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왜 분노하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삶 속에는 항상 그 사람을 자극시키는 그 무엇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말일 수도 있고, 행동일 수도 있습니다. 그 말과 행동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 있는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자극할 때 분노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외부의 자극들이 있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이 다 분노하는 반응을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 사람의 마음 안에 그 자극에 반응하는 그 무엇이 있어야 분노로 반응합니다. 그 사람의 마음 안에 그 자극하는 것에 대한 아무런 반응도 없다면 이런 사람들은 분노로 반응하지 않습니다.

 

사단은 우리에 대해 너무나도 잘 압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면에 약한 지, 우리의 어디를 건드리면 분노로 반응하는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사단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자극하여서 우리가 분노하도록 유도합니다.

 

사실 사단이 우리가 분노하도록 하는 도구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습니다.

사단은 사람들로 하여금 우리 자존심을 건들이게 하고, 우리 인격을 모독하도록 합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외부적인 자극이 올 때 곧 바로 반응합니다. 그래서 분노를 폭발하기도 하고, 상대방을 공격하기도 하고, 폭언을 하기도 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런 자극들에 반응을 보여 분노하느냐? 반응을 보이지 않고 분노하지 않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이런 자극들에 한 번 반응을 보이게 되면, 이 반응들은 점점 더 강한 반응을 유발하여서 점점 더 강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사단이 가장 무너뜨리기 쉬운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처음에는 우발적으로 분노를 폭발하고 반응하게 되었더라도, 이 분노의 반응은 그 횟수가 더해지면서 점점 더 강한 반응을 하게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 속으로 들어가게 합니다.

 

이런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분노와 다툼은 성도 개개인의 기도생활을 무디어 지게하고, 찬송생활을 그치게 하며, 성도들 사이에 거룩한 교제의 관계를 파괴합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교회가 영적인 힘을 다 잃어버리게 하고, 영적인 파탄과 파멸을 가져오게 합니다. 이렇게 해서 교회는 무너져 가는 것입니다.

 

헤롯왕의 예

 

수동적인 분노의 대표적인 예로 헤롯 왕을 들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은 사실 유대인이 아닌 이두메 출신이었습니다. 그래서 늘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 정통성이 의심을 받아 왔습니다. 헤롯은 이를 극복해 보려고 정략적으로 하스모니아 왕가미리암 1와 결혼을 해서 그 정통성을 인정받으려고도 하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의 종교적 유산을 보전하고 복원하는 일에 열정을 기울임으로 그 정통성을 인정받아 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돈을 들여서 유대인들이 가장 중요시 하는 성전을 과거 솔로몬 성전의 영광에 버금가는 모습으로 개축하는 일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헤롯이 이두메 출신이라는 이 콤플렉스는 자신의 왕위에 도전한다고 여겨지는 사람들을 가차 없이 처단하도록 하였습니다. 헤롯은 미리암 1세에게서 난 두 아들 알렉산더아리스토불러스를 대역죄로 몰아 사마리아에서 처형한 일도 있습니다. 또 죽기 직전에는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하였던 안티파스를 왕이 지위에서 축출하기도 하였습니다. 헤롯은 다양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으면서도, 정치적인 면에서는 누구보다 잔인한 군주였습니다.

 

이런 헤롯에게 어느 날 그가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말이 들려왔습니다.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분을 계시해 주는 별을 보고, 그 태어나신 왕에게 경배 드리기 위해 먼 동방에서 왔다는 말을 듣게 됩니다.

 

동방박사들의 이 말은 헤롯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습니다.

지금 유대인의 왕은 누구입니까? 헤롯이 유대인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방박사들은 헤롯이 모르는 유대인의 왕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왕에게 경배하러 왔다고 했습니다.

 

헤롯은 즉시 서기관들을 불러 유대인의 왕이 어디서 나겠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서기관들은 유대 땅 베들레헴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르되 유대 땅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 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으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헤롯은 그 동방박사들을 베들레헴으로 보내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아기를 찾거든 내게도 알려 주어서 나도 가서 그 왕에게 경배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습니다. 동방박사들이 그 아기를 찾게 되면 죽이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은 베들레헴으로 가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동방박사들은 그 밤에 천사의 지시를 받고 왔던 길과는 전혀 다른 길로 고국으로 돌아갔습니다. 동방박사들이 다른 길로 돌아갔다는 소식은 헤롯의 마음에 분노를 일으켰습니다. 분노한 헤롯은 동방박사들이 별을 보았다고 한 그 때를 기준으로 2살 아래 영아들을 다 찾아서 죽이라는 잔인한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이때 보인 헤롯의 분노는 동방박사들의 말에 자극을 받은 분노였고, 또 그 동방박사들이 자기를 속이고 몰래 떠나갔다는 말에 자극을 받은 수동적인 분노였습니다.

 

다윗의 예

 

수동적인 분노다윗 왕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사무엘 상 25:21-22절입니다. 다윗이 이미 말하기를 내가 이자의 소유물을 광야에서 지켜 그 모든 것을 하나도 손실이 없게 한 것이 진실로 허사라 그가 악으로 나의 선을 갚는 도다. 내가 그에게 속한 모든 남자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아침까지 남겨 두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이 말씀을 보면 당시 다윗의 생각은 이러했습니다.

나는 이제까지 나발을 선대해왔는데 나발은 나의 선의를 악으로 갚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그 악한 나발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대신 집행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을 대행하는 것처럼 분노하고 있습니다.

 

이 다윗의 분노는 정말 정당한 분노입니까?

당시 상황을 정리해 보면, 다윗은 사울 왕을 피해 갈멜 지방에 있는 광야에서 숨어 지내고 있었습니다. 당시 이 갈멜 지방에는 마온 지방에 사는 나발이라는 큰 부자가 와서 방목을 하고 있었는데, 다윗과 그 따르는 용사들이 무서워서 그곳에서는 좀 도둑들이 다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나발은 평안하게 방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 양털 깎는 계절이 와서 나발은 양털을 깎으며 잔치를 하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나발에게 사람을 보내어서, 우리 때문에 도적들에게 해를 당하지 않고 평안하게 방목을 하였으니, 이 좋은 날 우리 소년들에게도 먹을 것을 조금 나눠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나발은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사무엘 상 25:10-12절 말씀을 보면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라고 했습니다.

 

나발이 한 이 말은 다윗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분노하게 했습니다.

만약 나발의 지혜로운 아내 아비가일이 다윗을 설득하며 막지 않았더라면 나발은 무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일로 인해 다윗은 그 생애 일생일대의 오점으로 남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다윗의 이 분노도 수동적인 분노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은 나발의 말에 자존심이 상하여서 분노하였던 것입니다.

 

수동적인 분노를 죽인 예도 살펴보겠습니다.

 

우리는 사무엘 상 25장에서 다윗의 수동적인 분노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이후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난 이후의 삶을 기록하고 있는 사무엘 하 16:5-11절 말씀에서는 전혀 다른 다윗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당시 다윗 왕은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 때문에 예루살렘을 버리고 피난을 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사울 왕의 친척 중 한 사람인 시므리가 피난을 가는 다윗의 행렬을 따라 오면서, 다윗 왕을 저주하고 다윗과 그 신하들에게 돌을 던지며 희롱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당하면 분노하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젊은 날의 다윗 같으면 분노하지 않았겠습니까? 당시 다윗 왕을 수행하고 있던 장군 아비새가 분노하면서 다윗 왕에게 그 시므리의 머리를 베어버리게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 때 다윗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왕이 이르되 스루야의 아들들아 내가 너희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하고, 또 다윗이 아비새와 모든 신하들에게 이르되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이 때 다윗이 보여주고 있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외부의 자극에 분노하는 수동적인 분노를 완전히 죽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윗은 내 몸에서 난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고 하는데 베냐민 사람들이야 어떠하겠느냐?’ 라고 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셨으면 저가 이런 일을 할 수 있었겠느냐? 하나님이 욕하도록 허락하셨으니 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라고 하며 그냥 욕하도록 버려두라고 했습니다.

 

노년의 다윗은 어떻게 수동적인 분노를 죽인 삶을 살 수 있었겠습니까?

사람이 분노를 죽이기 위해서는 먼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자아를 죽여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24절 말씀과 같이 그 육체와 함께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합니다. 자아가 살아 있는 사람은 외부에서 자극이 올 때 반드시 분노로 반응을 합니다. 그러나 자아가 죽어 있는 사람은 외부에서 반응이 와도 전혀 반응하지 않습니다. 왜요. 죽은 자가 말하는 것을 봤습니까? 죽은 자가 반응하고 움직이는 것을 봤습니까?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죽은 자는 반응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다윗은 어떤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까?

다윗이 젊었을 때에는 아직 자아가 완전히 죽지 않은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늙었을 때에는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 그 신앙이 성숙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아가 죽고 신앙이 성숙하였던 다윗은 고린도전서 1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자극받지 않는 사랑’ ‘화를 내고 성을 내지 않는 사랑 을 하며 살았을 정도로 그 신앙의 수준이 아주 높은 성도가 되어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차원 높은 신앙의 삶을 우리는 모세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12:1-3절 말씀을 보면 모세가 구스 여자를 아내로 취함으로 미리암과 아론이 모세를 비방하며,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모세와만 말씀하셨느냐 우리와도 말씀하지 아니 하셨느냐?’ 라고 했습니다. 이 말은 모세의 리더십에 심각한 타격을 입히는 아주 뼈아픈 비방의 말이었습니다.

 

당시 모세는 200만이 넘는 백성들을 인도해 가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지도자였습니다.

이런 모세에게 이들이 한 말은 아주 날카로운 자극이었을 것입니다. 모세가 보통 사람이었다면 이 때 어떻게 반응했겠습니까? 아주 예민하게 반응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이들의 말에 모세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였다.’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모세는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까?

모세는 자기 자신을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자아가 완전히 죽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모세였기에 그도 고린도전서 1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누가 자극을 해도 자극받지 않는 사랑을 소유하고 살았던 아주 수준 높은 성도의 삶을 살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그러면 모세는 처음부터 이렇게 높은 수준의 성도로 살았습니까?

아닙니다. 모세가 젊었을 때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살인까지도 망설이지 않았던 아주 다혈질적인 사람이었습니다. 혈기 충만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믿음 안에서 변하여서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했던 것입니다.

 

이런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의 고백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것이 바로 자아가 죽은 사람그래서 외부의 자극에 반응하는 수동적인 분노를 완전히 죽인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고백이 바로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

 

다음으로는 능동적인 분노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분노한다고 해서 다 똑 같은 분노가 아닙니다.

좋은 분노도 있고 나쁜 분노도 있습니다. 수동적인 분노는 나쁜 분노라면, 능동적인 분노는 좋은 분노입니다. 능동적인 분노는 좋은 분노라는 말이 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덧붙여서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능동적인 분노는 왜 좋은 분노입니까?

능동적인 분노는 내 속에 있는 타락된 본성이 자극을 받아서 나오게 되는 분노가 아닙니다. 능동적인 분노는 하나님의 진리에 이끌려서 나오게 되는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능동적인 분노는 그 속사람이 거듭난 사람, 그래서 수동적인 분노를 완전히 죽인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를 우리는 거룩한 분노 혹은 의분이라고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능동적인 분노를 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비록 그 사람이 나는 믿음으로 분노한다. 나는 하나님 안에서 분노 한다. 나는 하나님과 그 영광을 위해서 분노한다. 라고 말할라도, 그 분노하는 것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그 이면에는 수동적인 분노가 그 추악한 얼굴을 감추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앞에서 다윗이 악한 나발을 향하여 그 신앙의 고백을 담아,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하려고 했던 수동적인 분노, 나쁜 분노에 대해 살펴 본 바가 있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내가 분노하는 것은 교회의 거룩 성을 위해서이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이다. 내가 분노하는 것은 거룩한 분노 즉 의분라고 말할지라도, 그 분노가 타락한 자기 본성에서 나온 것이라면 좋은 분노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때 그 분노가 좋은 분노가 아니라는 것은 자기 자신이 가장 먼저 압니다.

또 전지전능하셔서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도 알고 계십니다. 우리가 늘 마음속에 명심하고 살아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를 모르는 사람들은 다 속을지라도 우리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아멘.

 

능동적인 분노를 표출한 사람의 예로 비느하스를 들 수 있습니다.

민수기 25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싯딤에 머물러 있을 때 모압 사람들이 발람의 가르침을 따라 이스라엘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압 사람들이 브올 산에서 섬기고 있었던 바알 숭배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또 바알의 여 사제들과의 음행에 동참하게 되었습니다. 이 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염병을 보내셔서 24,000명이 염병으로 죽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에 책임이 큰 수령들을 잡아 죽이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지은 죄를 회개하도록 하라는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여서 회개하고 있는데, 이런 와중에 시므온 지파의 한 지도자가 이방여인과 통간하려고 이방여인을 자신의 장막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을 비느하스가 보았습니다.

 

이것을 본 비느하스는 회중 가운데서 일어나 창을 들고 그 두 사람을 따라 장막에 들어가서, 엉켜 있는 두 사람의 배를 꿰뚫어 죽이게 됩니다. 이 일을 성경은 비느하스가 내 질투심으로 질투하였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능동적인 분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리에서 이끌려 나오는 분노입니다. 이런 분노를 우리는 거룩한 분노 혹은 의분이라고 합니다.

 

능동적인 분노를 표출한 사람으로 모세를 들 수 있습니다.

신명기 9장을 보면 모세가 호렙 산에 올라가서 40주야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십계명의 두 돌 판을 받아 내려오게 됩니다. 그 때 산 아래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고 하면서, 애굽 사람들이 섬기던 황소 신인 아피스를 만들어 그것을 신으로 섬기고 있었습니다. 이를 보고 분노한 모세는 하나님께서 직접 써 주신 십계명 두 돌 판을 깨뜨려 버립니다. 모세는 이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의 계명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모세의 이 분노도 능동적인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죄와는 완전히 떠나 계셨던 예수님의 분노 또한 능동적인 분노였습니다.

요한복음 2장을 보면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께서는 장사꾼들이 이방인의 뜰을 다 차지하고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팔고, 또 여행자들을 위해 돈을 환전해 주고 있는 모습을 보고 분노하셨습니다. 장사꾼들이 이방인들이 하나님께로 나올 수 있는 것을 막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사건을 보고 예수님도 분노하셨다고 하면서 자신의 분노를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분노는 능동적인 분노입니다. 이 능동적인 분노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온 분노가 아닙니다.

 

수동적인 분노가 이기심이나 상처, 열등감, 교만, 등등 내 속의 타락한 본성이 반응하여서 한 분노라면, 능동적인 분노는 이기적인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 그래서 수동적인 분노가 완전히 죽어 있는 그런 사람들이 하게 되는 분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이런 사람들은 성령 안에서 자신의 옛 자아를 완전히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 그래서 아담 안에 있었던 옛 죄악 된 본성들이 완전히 통제되고 있는 사람들이 하게 되는 분노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능동적인 분노는 나의 옛 자아가 완전히 죽은 사람들에게서만 나올 수 있습니다.

능동적인 분노는 성령이 주시는 열매가 그 삶 속에서 맺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나오는 거룩한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서는 전혀 자극을 받지 않는 사랑 외부적인 요인들에 의해서 화를 내거나 분노하지 않는 그런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들이 될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살펴 볼 것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작품을 만들어 가시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2:10절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작품은 포이에마로서 하나님이 직접 만들어 가시는 세공품을 말합니다.

이 단어의 끝에 라는 동사가 붙어 있는 것을 보면 에베소서 2:10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작품은 완제품 즉 만들고 만들어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이 만드신 작품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만드셔서 최종적으로 완성된 상태를 보고 하는 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다윗을 소개할 때, 그는 나와 마음이 합한 사람이다.’라고 하셨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이 말씀을 하셨던 그 당시의 다윗의 모습을 보고 하신 말씀이 아니시고, 하나님이 다윗을 빚으시고 빚으셔서 최종적으로 만들어진 상태를 미리 내다보시며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도 젊은 날에는 성숙되지 못한 인품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나발의 행위를 보고 분노하였던 젊은 날의 다윗의 모습 속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다윗이 왕위에 오르고 또 왕으로 한 나라를 다스리면서 그 인격이 성장하고 그 인품이 성숙해 갔습니다. 그래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 일어났을 때에는 이 인격과 인품이 아주 성숙한 단계에 올라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세도 같습니다.

모세가 젊은 날에는 그 혈기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보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족은 변호해 주려고 하고, 애굽 사람은 죽이는 살인까지도 했었습니다. 이런 모세가 나중에는 어떻게 달라졌습니다. 성경은 모세가 지면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보다 온유하기가 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다윗을, 모세를 작품으로 빚어 가셨습니다.

이것은 신약의 베드로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구약의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시몬을 빚으시고 빚으셔서 베드로로 만들어 가셨으며, 야곱을 빚으시고 빚으셔서 이스라엘로 만들어 가셨습니다. 아멘.

 

이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도 빚어 가시는 중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만들어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독특한 작품으로 만드시기 위해 다양한 삶의 환경들을 우리에게 허락하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신 모든 환경들은 우리를 작품으로 빚어 가시는 도구로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환경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원망해서는 안 됩니다. 늘 기도생활을 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범사를 감사해야 합니다. 아멘. 이런 삶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입니다. 아멘.

 

지금 우리들의 모습을 보면 많이 부족해 보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들을 위해 계획하시고 계신 모습은 지금과 전혀 다른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금과는 전혀 다른 작품으로 만들어 가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우리를 하나님의 작품, 거룩한 하늘 백성으로 빚어 가시고 계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는 삶을 통해 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날마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런 열매들은 우리가 맺어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로 하여금 맺어가게 하시는 열매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아담 안에서 죄악 된 옛 자아와 타락한 성품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는 우리 안에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하셔서 고린도전서 13:5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외부에서 가해 오는 유혹에 자극을 받지 않는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해 주십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 안에서 매일 매일 성장하고 성숙하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