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고린도전서 13:6
고린도전서 13장을 우리는 사랑장이라고 부릅니다.
사랑 장에서는 사랑의 다양한 모습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이 사랑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부어주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랑들은 하나님께서 성도 된 우리들에게 은혜로 주신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을 이미 받아서 이 사랑을 하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모든 성도들은 이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그 존재와 신분의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전에는 마귀의 자녀였던 사람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변하게 됩니다. 전에는 육체에 속하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바를 행하며 살던 사람들이, 이제는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안에서 선한 일을 하며 의의 열매를 맺으며 살도록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사람으로 그 존재가 변화 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었던 우리들이 이제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우리가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가져다 준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그 삶의 변화가 따라 옵니다.
그러면 어떤 변화가 따라 옵니까? 그 변화는 예수를 믿기 이전에 좋아하고 중요시하고 즐기던 것들을 예수를 믿은 이후에는 별로 좋아하지도 않게 되고, 중요시 하지도 않게 되고,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도 않게 되는 변화입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야구경기나 축구 경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예수를 믿은 이후에는 이런 운동경기에는 관심도 흥미도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이전에는 세속적인 유행가 부르기를 좋아하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이후에는 유행가 대신에 찬송가를 즐겨 부르는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예수 믿기 이전에는 게임이나 오락을 좋아하여 거의 중독이 될 정도로 빠져 있던 사람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는 게임이나 오락에 별 흥미를 느끼지 않는 사람으로 변화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을 가지게 되면 따라오는 삶의 변화는 사도바울에게도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 중요시 하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바울은 자신이 ‘이스라엘 족속이고, 베냐민 지파이고, 히브리인이고, 바리새인이고, 할례를 받은 자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는 것을 아주 자랑스러워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는 어떻게 변화되었다고 합니까?
자신이 그렇게 중요시 해오던 그 모든 것들을 마치 배설물 즉 똥과 같이 여기며 내다 버렸다고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고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갔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왜 이런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런 변화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그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이 임하시게 되는데, 그렇게 임하신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이런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성령은 세상에 속하여 살던 사람들을, 하늘에 속하여 사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십니다. 세상을 사랑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기뻐하던 사람들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진리를 기뻐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삶의 변화에 대한 말씀이 바로 고린도전서 13:6절입니다.
성령이 가져다 준 그 사랑은 성도들을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한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두 번째 살펴볼 것은, 그러면 그 ‘진리란?’ 과연 무엇이냐? 는 것입니다.
먼저는 어원적인 고찰을 해 봅니다.
이 진리에는 ‘알레데이아’라는 헬라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아’라는 ‘거슬러 올라가다.’라는 단어와 ‘레데’라는 ‘망각의 강’이라는 단어가 하나로 합쳐진 합성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진리는 무엇이라는 말씀입니까? 이 진리는 ‘망각의 강을 거슬러 올라가다. 망각의 강을 건너다.’라는 의미를 가진 단어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망각의 강’은 기독교의 ‘요단강’과 같이 죽음의 강을 의미합니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을 때 건너게 되는 강을 요단강이라고 하듯이, 헬라인들은 사람이 죽을 때 이 망각의 강을 건너간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 이 ‘망각의 강’을 건너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헬라인들은 이 강을 건너면 ‘인생의 모든 아픔과 슬픔, 눈물과 고통, 비애와 한탄, 분노와 억울함 등등이 다 잊혀 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망각의 강을 건너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고통들은 다 잊어버리고, 그 죽음 너머에 있는 새로운 삶 행복한 삶이 찾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었던 헬라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는, 죽기 전에는’ 인생의 참 행복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행복한 삶은 죽음 이후에 찾아온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런 헬라 철학의 영향으로 죽음을 통해서만 인생의 참 자유와 행복이 온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요한복음 8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죽음이 아니라 ‘진리가 너희에게 참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당시 헬라 문화권에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는 아주 혁명적인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너희가 진리를 알게 되면’ 그 알게 된 진리가 너희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어서, 지금 너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이 자유와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자유를 준다는 말입니까?
진리는 사람들을 죽음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물질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질병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세상 권세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진리는 사람들을 현재 일이나, 장래 일 등등 그 모든 일들에서 자유 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예를들어보면, 사형수가 복음을 전해 듣고 그 마음속에 진리를 받아들이게 되면, 그 진리는 사형수로 하여금 이전에 보지 못하던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 세계를 볼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래서 이 사형수는 비록 이 세상 속에서는 그 지은 죄의 정죄를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질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음 이후에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살아가게 될 새로운 삶에 대한 눈을 뜨게 됩니다. 이것이 사형수로 하여금 죽음 앞에서도 자유 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아멘.
사형수만 그렇습니까?
불치의 병으로 고통당하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진리를 깨닫게 되면, 그 깨달은 진리는 질병의 고통과 절망 가운데서도 하늘 소망을 갖고 살게 하며, 이 하늘 소망은 질병의 염려에서 그 영혼을 해방시켜 주고,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 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예수를 믿고 있는 사람이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자유 함을 갖고 있지 못하다면, 이런 사람들은 아직 진리를 알지 못하고 있는 사람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은혜를 경험하게 해주는 진리는 무엇입니까?
첫째, 성경은 예수님이 ‘진리’이시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6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이렇게 성경은 예수님이 진리시라고 하고 있습니다.
둘째, 성경은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4:17절입니다.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이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한복음 15:26절입니다.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요한복음 16:13절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성경은 성령님을 진리의 영이시라고 합니다.
셋째,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고 합니다.
시편 119:151절입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가까이 계시오니 주의 모든 계명들은 진리니이다.’
요한복음 17: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고린도후서 6:7절입니다. ‘진리의 말씀과 하나님의 능력으로.....’
에베소서 1:13절입니다.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리라고 합니다.
넷째, 성경은 하나님이 ‘진리’이시라고 합니다.
시편 31:5절입니다. ‘내가 나의 영을 주의 손에 부탁하나이다.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여 나를 속량하셨나이다.’
이사야서 65:16절입니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상의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이 진리이시고,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이고, 예수님이 진리이시고, 성령님이 진리의 영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이고, 예수님을 아는 것이고, 진리의 영이신 성령님을 안다는 것을 말합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이 진리를 알고 진리에 이르게 되는 사람들’입니다.
요한복음 18:37-38절에는 예수님이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때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러 왔다.’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는다.’ 라고 말씀하시자, 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빌라도가 예수님을 향해 ‘그러면 진리가 무엇이냐?’ 라고 묻습니다. 당시 빌라도는 인생의 가장 핵심적인 질문을 예수님께 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 나오는 38절 말씀을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께 이 질문을 하고 예수님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갔다고 합니다. ‘빌라도가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인들에게 나가서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빌라도는 왜 예수님께 진리에 대한 질문을 하고, 그 대답은 듣지 않고 나갔을까요?
만약 그 때 빌라도가 예수님께 주시는 대답을 들었더라면, 그 자신의 인생이 바뀌지 않았겠습니까? 인류의 역사가 바뀌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왜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라는 질문만 하고 예수님이 주시는 대답은 듣지 않고 나갔을까요.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진리는 빌라도처럼 자신감이 가득 차 있는 자신 만만한 사람들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그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발견하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은 스스로 자신감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진리에 대해 별 관심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진리는 어떤 사람들에게 발견됩니까?
진리는 마태복음 5:3절 이하의 말씀 즉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 중에 있는 8복의 말씀처럼 그‘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등등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이 완전히 깨어진 사람들, 그래서 그 마음이 완전히 무너진 사람들에게 깨달아지고, 발견되고,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전에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1:25절입니다. ‘천지의 주제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진리는 이 세상의 욕망과 탐욕에 젖어 있는 사람들에게는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 세상에 대한 욕망과 탐욕이 다 무너지고 다 깨어진 사람들, 그래서 마치 어린아이 같이 낮아진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깨달아지고, 이런 사람의 삶에 ‘기쁨이 되고, 즐거움이 되고, 양식이 되고, 양약이 된다.’ 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그 삶은 가난하고 굶주리는 삶을 살면서도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이런 사람들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욕을 먹으면서도 진리를 사랑하게 되고, 심지어 그 가진 믿음 때문에 목숨을 잃게 되는 상황이 되더라도 여전히 진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되고,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더 그 깨닫고 그 소유하게 된 진리를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왜 빌라도와 같이 자신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발견되지 않는 것입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과 그 살아가는 삶에 자신감 있는 사람들에게는 진리가 그렇게 가치 있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과 이 세상에 있는 것들에 욕망을 두고 살기 때문에 진리가 값어치가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빠져서 살고, 이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진리와는 전혀 관계없는 삶, 진리와 무관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네 번째 살펴볼 것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삶’을 살펴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믿음 안에서 진리가 주는 기쁨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이 세상이 주는 기쁨으로 살아가고 있는 세속적인 사람들입니다.
여러분들은 무엇에 기쁨을 느끼고, 무엇을 기뻐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그 사람의 응답을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인지, 아니면 이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진리가 예수님이고, 하나님의 말씀이고, 성령님이고, 하나님이시니, 우리가 진리와 함께 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 하며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것은,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것이고, 예수님으로 기뻐하는 것이고,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나도 함께 기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누가 우리로 하여금 진리로 기뻐하는 삶을 살게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리의 영이 되시는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이 주는 기쁨을 버리게 하고, 하나님이 주는 기쁨 즉 진리를 알고, 진리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을 가지고 살도록 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성령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기쁨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주시는 이 기쁨은 우리 마음 안에 자리 잡고 있던 고통과 눈물, 탄식과 슬픔들을 다 밀어내고 잊어버리고 망각하게 해 줍니다. 그래서 성령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을 소유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던 삶의 모든 아픔과 고통들을 다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 잊어버릴 뿐 아니라 다시는 기억조차도 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기쁨이 진리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성령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통해서 주어집니다. 이렇게 주어지는 기쁨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시는 하늘의 기쁨입니다.
우리 가운데는 삶의 아픔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우리는 나름대로의 아픔과 고통과 슬픔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남모르는 아픔이 있고 슬픔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살아가는 삶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좌절들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채워지지 않는 외로움이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홀로 삭이며 속알이를 하는 마음속의 응어리와 섭섭함도 있습니다. 또 우리에게는 삶의 고달픔과 안타까움도 있습니다. 홀로 고민하고 고뇌하는 고통들도 있습니다.
이런 아픔들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른 사람들보다 더 큰 아픔을 느끼며 삽니까? 그것은 사람들이 모두 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이 아픔이 가장 큰 아픔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힘들어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를 소유하게 되면, 그래서 진리가 가져다주는 기쁨이 우리 마음 안에 충만해 지게 되면, 그 소유한 진리, 그 깨달은 진리가 주는 기쁨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워오면서, 우리가 가지고 살고 있던 그 모든 아픔들을 다 잊어버리게 합니다. 진리가 가져다주는 기쁨이 우리 마음 안에 있는 그 모든 아픔들을 다 몰아내 버려서, 우리를 아프게 하던 그 모든 아픔으로부터 자유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하는 이런 문제에 집중해서는 자유도 기쁨도 누리며 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자유와 기쁨을 누리고 살려면 진리에 집중해야 합니다. 진리에 집중하다가 진리가 주는 은혜를 받고, 진리가 가져다주는 기쁨을 깨닫고 소유하게 될 때, 진리가 주는 이 기쁨이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아픔들을 극복하고 자유와 기쁨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 기쁨을 누리며 사셨습니다.
누가복음 10:21절에서는 70인의 전도대가 돌아와서 승리의 보고를 할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셨다.’라고 합니다. 70인의 전도대 또한 주의 이름의 권세로 귀신들이 자신들에게 항복하는 것을 보고 기뻐하며 돌아와 선교보고를 했다고 합니다.
성도들은 진리가 가져다주는 하늘의 기쁨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삶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 살아가는 삶 속에 경험하게 되는 아픔들은 있어도 원수는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우리들로 하여금 내게 아픔을 준 그 원수에게서 우리를 자유하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진리가 우리에게 역사하여서 원수의 관계를 사랑해야 할 관계로 긍휼을 베풀어야 할 관계로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삶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진리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는데 달려 있음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진리 되시는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진리는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우리에게 준 그 모든 아픔과 상처를 이기고 극복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원치 않은 결혼을 하고, 그 결혼생활 속에서도 남다른 아픔을 경험했습니다. 호세아는 이런 아픔 속에서 진리 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와 기쁨을 경험하였습니다. 호세아는 자신 경험했던 이런 은혜의 경험을 가지고,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 안에서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교훈한 것이 바로 호세아 6:1-3절 말씀입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니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사람들이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을 보면 거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진리 되시는 예수님께로 돌아가서 구원을 받게 되면, 산천초목이 새롭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 가족과 이웃 사람들이 이전과 달리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그것은 진리 되시는 예수를 믿고 그 안에서 내가 변하였기 때문입니다. 내가 변하니까 내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이 이전과는 다르게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선지자는 ‘진리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서 내가 변하는 것에 모든 문제의 해답이 있다.’라고 소리쳐 전하였던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호세아는 그 백성들에게 ‘우리가 여호와께 돌아가자, 그래서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라고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호세아는 여호와께로 돌아가서 여호와를 아는 것에 삶의 해답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까? 호세아는 진리 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에 인생의 진정한 해답이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아멘.
그러면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은 어떤 기쁨을 가지고 계셨습니까?
요한복음 4:34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그 전도함을 듣고 진리를 깨닫고, 자기 동네 사람들에게 전도하러 가는 사마리아 여인을 보고 기뻐하시면서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 가지길 바라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있는 좋은 것을 가지려고 하는 마음은 온대간대 없어지고, 하나님이 나에게 은혜로 주신 그 모든 시간과 재능과 물질과 지혜 등등을 모두 다 예수님을 위해 바치고자 하고, 또 진리를 위해 기쁘게 바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부귀영화를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진리를 기뻐하고 그 기뻐하는 진리를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아멘.
그러면 진리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그 마음 안에 성령이 부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성령이 오셔서 주시는 그 사랑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게 하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6절에서는 ‘그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아멘.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를 즐거워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고백들이 성경에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진리이신 하나님을 기뻐했던 고백입니다.
느혜미야서 8:10절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시편 37:4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주시리라.’
시편 32:11절입니다.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마음이 정직한 너희들아 다 즐거이 외칠지어다.’
둘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을 기뻐했던 고백입니다.
시편 119:24절입니다. ‘주의 증거들은 나의 즐거움이요 나의 충고자니이다.’
시편 119:92절입니다. ‘주의 법이 나의 즐거움이 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내 고난 중에 멸망하였으리이다.’
시편 119:103절입니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
시편 119:162절입니다. ‘사람이 많은 탈취 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
셋째, 진리이신 예수님을 기뻐했던 고백입니다.
누가복음 1:46-47절입니다. ‘마리아가 가로되 내 영혼이 주를 찬양하며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아보셨음이라.’
넷째,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기뻐한 고백입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도 ‘성령으로 기뻐하셨다.’ 라고 하며, 사도행전 13:52절에서는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주시는 이런 기쁨을 경험해 보셨습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은 이 세상이 주는 그런 기쁨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형편과 조건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하늘에서 주어지는 기쁨입니다. 이 기쁨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27절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이 기쁨을 경험한 사람들은 그 기쁨이 세상이 주는 기쁨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늘의 기쁨이라는 것을 압니다. 그러면 이런 하늘의 기쁨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입니까? 그것은 바로 이 세상을 삶이 목적으로 삼고 살지 아니하고, 진리를 그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진리를 그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살아서 날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이 기쁨 속에서 자신을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마귀를 이겨나가는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 다섯 번째 살펴볼 것은, ‘진리를 그 삶의 목적’으로 삼고 산 사람들입니다.
진리를 기뻐하고 진리를 그 삶의 목적으로 삼았던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령님이 그 마음 안에 부어진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하고 그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진리는 이런 사람들의 삶 속에 역사하여 자유를 가져다줍니다.
진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하여서, 이 세상의 고통은 잊게 하고, 하늘의 기쁨은 맛보게 함으로 자유 함을 누리며 살게 합니다. 이 진리는 사형수라도 그 죽음의 공포와 고통을 잊게 하고 하늘의 기쁨 속에 살게 해 줍니다. 이 진리는 중환자들에게도 그 병이 주는 고통을 잊게 하고 하늘의 기쁨을 맛보고 누리며 살게 해 줍니다.
이렇게 진리가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면, 진리는 세상의 걱정, 근심, 고통, 염려를 다 몰아내고 망각하게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이 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자유와 평안을 부어주십니다. 이렇게 진리 안에서 사람들은 이 세상이 주는 고통과 환난과 근심 걱정을 다 잊어버리고 극복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진리가 주는 이런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이렇게 ‘진리와 함께 기뻐하는 성도’로 살아가게 합니다. 이것이 진리가 우리들에게 주는 자유 함이고, 진리로부터 이런 자유 함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진리가 주는 기쁨 안에서, 이 세상 속에서 당하며 사는 걱정과 근심, 아픔과 고통, 좌절과 절망, 외로움들을 다 몰아내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부어주시는 하늘의 기쁨과 참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이 하나님의 은혜는 누구에게 주어집니까? 이 은혜는 진리 되시는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굳게 붙잡고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어집니다.
우리 모두는 진리 되시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이 기쁨과 자유 함을 누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은혜 충만한 속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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