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고린도전서 13:7
존귀한 존재인 사람들
사람에게는 이중적인 존귀함이 있습니다.
하나는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이며, 또 하나는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입니다.
첫째는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이란?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실에서 기원합니다.
창세기 1: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곧 하나님의 이미지로서 우리 속사람에 대한 말씀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사람들은 영적인 면, 내면적인 면, 인격적인 면, 성품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사람들이 가진 그 속성들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사람이 가진 속성들에는 하나님은 가지고 계신데 사람은 가지고 있지 않은 속성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비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이 비공유적 속성에는 자존성, 불변성, 무한성, 유일성 등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것을 사람도 가지고 있는 속성들도 있습니다. 이것을 공유적 속성이라고 합니다. 이 공유적 속성에는 영성, 지성, 진실성, 생명성, 인격성, 도덕성, 주권성 등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이나,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라고 하는 말은, 사람들이 가지고 살고 있는 속사람 즉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소유하고 있는 공유적 속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을 가졌다는 말은 바로 이 공유적 속성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둘째는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이란? 사람이 비록 범죄한 아담 안에서 죄인으로 태어나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것에서 기원합니다.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됨으로 잃어버렸던 그 존귀함을,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회복에 대한 말씀이 바로 고린도후서 7: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에베소서 2:10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존귀한 존재로 지으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존중히 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창조에 속한 존귀함을 소유하고 태어났고, 또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회복된 존귀함을 가진 존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존귀한 대접을 받게 될 때에는 기뻐하고, 무시하고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은 싫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의 마음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마태복음 7: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고 존귀한 존재로 대접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대접을 받으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내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고 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다른 사람들을 존중히 여겨주고 대접해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의 가르침이고 이것이 모든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것을 보면 자기가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존귀한 존재인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가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존귀한 존재인 것을 모르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보아 무시하고 아무렇게나 대우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존귀하게 여기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 맺고 살아갑니다. 서로를 인격적으로 대하며 좋은 관계가 형성하고 살아갑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사람들을 아무렇게나 막 대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 좋은 인격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장하고 명령하고 복종하고 맹종하는 관계 속에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우리 사이의 관계에서도 똑같습니다.
잠언 8:17절 말씀을 보면,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고 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는 가까운 사이 일수록 더 조심해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처음 보는 사람 혹은 가끔씩 보는 어려운 사람에게는 예의를 가지고 대하려고 하지만, 가까이 있는 사람이나 가족들에게는 아무렇게나 말하고 조심성 없이 행동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이것은 올바른 삶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사는 사람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평판에 귀 기울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보여 지느냐? 라는 것보다,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여 지는가? 라는 것에 더 큰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은 그 사람의 직업이 무엇인지, 소유가 얼마나 되는지, 학벌이나, 외모, 그리고 국적이나 피부색이 어떠하냐에 따라서 차별대우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의 존귀함이 그 사람의 직업이나, 소유나, 학벌이나, 외모나, 건강이나, 국적이나 피부색에 근거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살아가는 삶이 문명 세계 속에서 살든지 원시 세계 속에서 살든지 관계없이 사람으로 지으심을 받았다는 그 자체로 존귀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조건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또 이런 조건들을 가지고 스스로를 판단하여서 비하하거나 우월감에 사로잡혀서도 안 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보고, 또 그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있는 존귀한 존재로 인식하며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사람들을 바라보는 올바른 이해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진 사람이 되어야 다른 사람들을 차별하여 대하지 않고 모든 사람들을 존귀한 존재로 보며 진심으로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2. 모든 것을 참아 주는 사랑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3:7절 말씀에서는 ‘모든 것을 참아 주는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는다.’ 말인 헬라어 ‘스테고’는 ‘덮는다.’ ‘감추다’ ‘참다.’ ‘비밀로 하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덮어준다.’는 것은 그 사람이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막아 주고 덮어주는 것을 말합니다. ‘비밀로 부치다.’는 것은 ‘침묵으로 덮어버린다.’ 라는 뜻으로 침묵함으로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납해 주는 것을 말합니다.
이 참아 주는 사랑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들이 성경에 많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중에 한 사람을 찾으라고 하면 누구를 찾아내시겠습니까? 저는 오늘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을 통해 이 사랑을 설명해 보겠습니다.
요셉은 한 동네에 사는 마리아와 결혼을 약속하고 정혼을 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혼한 1년 후에 결혼식을 하는 풍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요셉은 지금 어떤 상태에 있었습니까? 마리아와의 결혼을 앞둔 상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셉과 정혼한 마리아는 그 친척 엘리사벳의 집에 다니러갔습니다.
그리고 몇 개월을 보낸 후에 집으로 돌아왔는데 임신한 상태로 돌아왔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요셉은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당시 요셉의 나이는 아직 10대의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청년 요셉이 자기와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하고 돌아온 것을 보았을 때 그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여러분이 10대 때를 되돌아보십시오.
10대의 소년들에게 얼마나 큰 참을성이 있고 자제력이 있겠습니까? 무슨 돌발적인 사건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요셉은 어렸고 그 받은 충격 또한 컸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요셉이 이 사실을 알고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물론 많은 시간동안 갈등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있었겠지만, 요셉이 어떤 결론을 내렸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예수님의 양아버지로 선택함을 받았던 요셉은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요셉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었겠습니까? 당시 요셉은 보통사람이 가질 수 없는 마음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한 것을 보고, 마리아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임신하게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분노하는 마음으로 마리아를 찾아가서 그 임신하게 된 경위를 묻고 따지고 책망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요셉은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마리아가 임신하게 된 경위는 알 수 없지만,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마리아를 찾아가서 왜 그랬냐고 이유를 묻고 따지는 것은, 마리아의 마음만 더 아프게 할 것이라는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않고 마리아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기 앞날을 잘 선택해 갈 수 있도록, 자신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그 정혼한 관계를 가만히 끊어주는 것이 좋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요셉에게서 우리는 마리아의 허물을 덮어주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마음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모든 것을 참아 주는 사랑’ ‘상대방의 허물을 덮어주고 용납해 주는 사랑’의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실 이런 사랑은 10대의 청년이 할 수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들이 철없던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으로부터 받아 왔던 사랑입니다. 우리 부모님들은 하나님처럼 공의로우신 분들은 아니시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죄에 대한 단호함은 없으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허물과 죄를 감싸주고 덮어주시려는 사랑은 가지고 계십니다. 우리가 실수하고 잘못하게 되었을 때 꾸중하고 책망하시지만 이보다는 더 큰 사랑으로 우리를 감싸주고 덮어주시고 사랑해 주신 분들이십니다.
우리 모두는 부모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입고 자라왔습니다.
사람들은 나이가 든 후에서야 비로써 나의 허물과 잘못을 사랑으로 덮어주셨던 부모님의 그 큰 사랑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자신도 부모가 되어서 자녀들을 양육해 가면서 이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이 부모님의 사랑보다 더 크고 더 넓은 사랑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 사랑을 빨리 깨달은 사람들은 효도하는 자녀가 되고, 이 사랑을 늦게 깨달은 사람들은 돌아가신 부모님을 그리워하면서 후회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많고 많은 사람 중에 왜 요셉을 예수님의 부친으로 선택하셨는지 이제 이해가 되십니까? 하나님은 아직 청년인 요셉이 가졌던 그 큰 사랑을 보셨습니다. 자기 나이 또래 아이들과는 다른 사랑의 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요셉에게 성육신 하실 자기 아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당시 요셉이 가지고 있었던 이 사랑은 사실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며, 예수님을 믿음으로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사랑입니다. 아멘.
3 죄와 악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법
우리가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한 가지를 정리하고 들어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덮어주는 사랑이라고 해서, 성령으로 맺게 되는 사랑이 덮어주는 사랑이라고 해서, 이 세상의 죄와 악을 무작정 덮어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죄악을 기뻐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며, ‘죄는 그 모양이라도 용납하시지 못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성경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범죄한 영혼은 죽을 것이라.’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죄와 악을 보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가장 먼저는 죄와 악을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성경에는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시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아주 많습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그 백성들의 죄를 통렬하게 지적하고 들추어 내셨습니다. ‘하늘이여 들으라. 땅이여 귀를 기울이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 도다 하였도다.’ ‘너희 소돔의 관원들아 고모라의 백성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통해 다윗 왕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셨습니다.
세례요한을 통해 종교지도자들과 백성들과 헤롯왕의 죄를 지적하고 책망하셨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종교지도자들의 죄를 지적하고 드러내시는 것을 보면 준엄하기 까지 합니다. ‘화 있는 진저 너희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먼저 죄를 드러내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또 하나님이 죄와 악을 보실 때 어떻게 하셨습니까?
그 다음에는 바로 그 드러난 죄를 덮어주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죄를 무조건적으로 덮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먼저는 그 죄를 지적하시고 적나라하게 드러내시어서, 사람들이 그 지은 죄의 심각성을 알고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렇다고 죄를 지적받은 모든 사람들이 다 회개한 것이 아닙니다.
죄를 지적 받고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이것은 과거 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늘날에도 똑같습니다.
우리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죄를 지적해 주고 그 잘못을 깨닫게 해주면 회개하고 돌이키는 사람들이 많습니까? 회개 하고 돌이키기는커녕 오히려 반발하고 반항하는 사람들이 더 많습니까? 예수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 죄를 지적해 주면 즉각적으로 반발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청년 때 철야기도하고 새벽에 산을 내려오다가 제 나이 또래의 스님을 만났습니다. 새벽시간 산에서 같은 또래의 스님을 만나니 왠지 관심이 갔습니다. 그래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제가 조심스럽게 스님은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십니까? 라고 묻자, 그 스님은 즉각적으로 반발하면서 ‘내가 왜 죄인이냐고, 이 젊은 나이에 죄 짓지 않고 살기 위해서 스님이 된 것을 보면 모르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강하게 반발하는지 더 이상 대화를 하지 못하고 산에서 내려온 일이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 믿으면서도 자신이 죄인인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그 마음이 완악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무리 오래 믿어도 그 신앙이 성장하지 않고, 그 인격이 성숙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 중에는 그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며 나오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죄를 사해주시고 이런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십니다. 그러므로 죄를 지적받게 될 때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죄를 인정하고, 그 죄를 회개하는 것입니다. 먼저 죄에 대한 회개가 있고 난 후에, 죄의 용서와 죄를 덮어주심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렇게 죄를 회개하며 나아오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라는 것입니다. 완전한 용서라는 것입니다. 이 죄의 용서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모든 것을 참아주는 사랑’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랑은’ 죄를 무작정 덮어주는 그런 사랑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먼저는 죄를 들추어내어 지적해 주고, 그 지적을 듣고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면, 그 다음으로 따라오는 것이 바로 죄를 참아주고 덮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게 된다는 것입니다.
4.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
이렇게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을 동시에 보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에게는 이 공의와 사랑 두 가지 성품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먼저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는 그 어떤 것이든지 용납하지 않으시며, 죄에 대해서는 참지 않고 분노하게 합니다. 시편 7:11-12절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매일 분노하시는 하나님이시로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그가 그 칼을 가심이여 그의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죽일 도구를 또한 예비하심이여 그가 만든 화살은 불화살이로다.’
공의의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의 모습으로 나타나신다고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은 죄에 대해서는 매일 분노하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매일 진노와 형벌의 칼을 가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죄를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이미 심판의 활을 당기고 계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미 죄인들을 죽일 도구를 다 예비해 두고 계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죄인들을 심판하시는 도구로 예비한 화살은 진노의 불화살이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대하면 그 지은 죄를 회개하지 않고 사는 것이 얼마나 두려운 삶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말씀들을 들으면서 죄에 대해 분노하시는 하나님이 느껴지십니까?
예레미야서 17:9절입니다. ‘내가 너를 아껴보지 아니하며 긍휼히 여기지도 아니하고 네 행위대로 너를 벌하여 너의 가증한 일을 너희 중에 나타나게 하리니 너희가 나를 여호와인줄 알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때, 그 죄를 책망하시고 때리시고 심판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되는 것이 은혜라고 합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으면서도, 자신이 왜 그런 징계를 받고 심판을 받고 있는지 알지 못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왜 내게 이런 어려움이 오고 고난이 왔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 지으며 살고 있는 죄에서 돌이킬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신을 때리고 심판하고 계신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자신의 죄를 심판하시고 계신 하나님을 아는 지혜를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돌이켜 회개할 가능성이 아주 높습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고, 또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알고, 그 지은 죄를 회개하며 나아오는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시고 기억조차 하지 않게 합니다. 요한1서 1: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여기 ‘미쁘시다.’라는 말은 그 하신 약속에 믿음직스럽고 신실하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깨닫고, 자백하고, 회개함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은 그 약속하신 대로 아주 믿음직하고 신실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자백한 죄를 어떻게 사해 주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까?
시편 103:12절에서는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라고 하심으로,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동쪽 이 끝에서 서쪽 저 끝으로 영원히 옮기신다고 합니다.
이사야서 44:22절에서는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마치 빽빽한 구름이 사라지는 것 같이, 마치 안개가 떠오르는 해 빛을 받아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 같이 그렇게 없이 해 주신다고 합니다.
이사야서 1:18절에서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흰옷에 물감이 쏟아지면 얼룩이 진 그 옷은 더 이상 입을 수 없게 됩니다. 죄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로 물들어 있는 사람이 그 죄를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흰 양털 같이 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 어떤 죄의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하게 사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시편 32:3-5절에서는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재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 이 말씀은 죄를 회개하지 않을 때의 곤고함과 죄를 회개하였을 때 받게 되는 죄 사함의 은혜를 비교하고 대조하며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죄를 회개하면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사는 삶이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방법입니다. 아멘.
5. 우리가 행하며 살아야 할 사랑
그러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 예수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은 하나님의 어떠하심과 같이 우리들도 그렇게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짓고 은폐하는 사람들에게 노를 격발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그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그 모든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양면성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회개하지도 않는 사람들을 죄를 용서해 주고 덮어주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히 하나님의 방법을 따라야 합니다.
먼저는 죄는 철저히 드러내고 들추어내어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 우리의 권면을 듣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따라 우리도 그 모든 죄를 참아주며 덮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권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죄에서 돌이키지 않을 때에는 이방인과 세리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8:15-17절 이하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게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
이렇게 성경은 아주 품격이 있는 그리스도인의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죄인들까지도 분별없이 용납하는 무지한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죄를 지은 사람들의 죄는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거룩함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그 죄를 깨닫고 회개하며 나오는 사람들의 죄는 참아주고 덮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차원 높은 품격을 갖추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합니다. 이런 삶이 바로 우리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아멘.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이 땅을 살아가지만 천국 신민에 준하는 품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천국에는 천박한 사람들은 전혀 없습니다. 천국에서는 모두가 서로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며 사는 곳입니다.
우리가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런 천국신민의 품성들을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 만들어 나가야 합니다. 이런 천국신민의 품성을 만들어가는 삶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개개인으로는 점점 성화되어 나가는 삶을 살고, 공동체로서는 이 땅의 백성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 되어 서로 협력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할 삶입니다.
이와 반대로 마지막 때, 종말의 날에 이 땅 백성들의 삶은 어떨 것이라고 합니까?
디모데 후서 3:1-5절입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게 돌아서라.’
이것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자랑하고, 부모를 거역하며, 불평하고, 비방하고, 무시하고, 배신하고, 배약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종말 시대 사람들은 이 천박한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세상 사람들 속에 살면서도, 세상의 죄악 된 삶과 구별되게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런 시대를 역행하여 점점 천국백성을 닮아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따라 죄는 미워하면서도 그 죄를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고 조건 없이 받아주는 사랑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런 삶이 고린도전서 13: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을 참아주는 사랑’ 다르게 설명하면 ‘모든 죄를 덮어주는 사랑’의 삶입니다. 이 사랑의 삶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살아가야할 삶이라고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마지막 때는 참과 거짓이 이렇게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확연히 구분되는 시대입니다.
우리가 ‘가라지 비유’에서 보았듯이 신자와 불신자들이 그 맺으며 살아가는 삶의 열매를 통해 확실하게 구분되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는 어떤 성도로 살아가야 합니까?
우리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죄를 덮어주는 삶을 사셨듯이, 우리들도 죄를 회개하고 나오는 사람들의 죄와 악을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 사랑에 대해 고린도전서 13:7절에서는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주는 사랑’이라고 전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 지은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며 나오면, 우리는 하루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그 죄를 덮어주는 삶을 살아감으로,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사랑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사랑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갈 뿐 아니라, 이런 삶을 통해 거룩한 사랑의 열매를 맺어 나아가는 성도로 살아가는 것이, 한 주 한 주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1) | 2023.09.10 |
---|---|
사랑은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0) | 2022.10.23 |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1) | 2022.07.17 |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0) | 2022.07.03 |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0) | 2022.03.0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