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5
오늘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집니다.
우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기를 즐거워해야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다가 보면, 하나님이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주신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사랑을 깨닫게 될 때 비로써 우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사랑을 주셨는지 모르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며 살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랑을 하며 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어떤 사랑을 주셨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사랑을 주셨는지를 알아야 그런 사랑을 하며 사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가 사랑장이라고 부르는 고린도전서 13장의 말씀을 즐겨 읽고 묵상하며 사는 성도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대해 깨닫고, 이해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라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는 사랑이라도 합니다.
친절하게 대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시기하고 질투하지 아니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자기 자랑을 하지 아니하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교만하고 거만해 지지 않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무례한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에 대한 이해가 더 깊어지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살펴보기 이전에 먼저 말씀의 번역을 교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말 성경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라고 번역되어 있지만, 이 말씀의 본래 의미는 이와 조금 다르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원문을 다시 번역해 보면, 사랑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신 그 사랑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만을 추구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만을 추구하지 않게 하는 이 사랑’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추구하게 하는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이 세상의 원리이며, 자기 자신을 추구하게 하는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비록 사랑의 모양은 하고 있으나 실재로는 자기 이기심에서 나온 행동입니다. 이기심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놓은 것이 바로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게 하는 사랑’은 어떤 사랑입니까?
첫째, ‘자기의 것’을 추구하지 않게 하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이 없이 철저히 자기중심적입니다.
그래서 자기의 이익이나 불이익에 아주 민감합니다. 이런 특성을 가진 사람들이 어떤 일을 시작하는 동기를 보면, ‘내게 얼마의 이익이 있는가?’ ‘내게 무엇이 더 유익한가?’라는 것에 달려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그 일이 내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않는다면 관심조차도 안가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의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이 없이 다 이렇게 이기적입니다. 이기심은 인간의 본성입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 하게 된 원인도 바로 이 이기심에 때문이었습니다. 사단은 하와를 어떻게 유혹했습니까? ‘너희가 선악과를 따 먹는다고 죽는 것’이 아니다. ‘너희가 선악과를 따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 같이 될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 때문에 너희가 하나님처럼 되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신 것이다.’라고 사단은 하와의 이기심을 자극해서 범죄 하게 했습니다.
이기심의 특징은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 생각하게 합니다.
이기심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내가 당하게 되는 작은 손해나 불이익에는 아주 민감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이 받게 되는 상처나 불이익이나 큰 손해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게 합니다. 이기심은 오직 나와, 나의 가족과, 내가 속한 그룹의 이익과 안위를 최고로 중요시 하게 합니다.
지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러시아가 쏟아 붓는 포탄과 미사일에 우크라이나 도시들이 하나 둘 폐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렇게 파괴되고 있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할까요? 또 하루에도 수백 명의 군인들이 죽고 또 1,000명이 넘는 군인들이 부상을 당하고 있다고 합니다. 러시아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보며 마음 아파하고 안타까워할까요?
그러나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모든 살상과 파괴를 마치 자기 일처럼, 혹은 자기 가족의 일처럼 바라보며 안타까워할 것입니다.
이것은 우크라이나 인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우크라이나 군인들이 재블린 미사일로 러시아의 전차를 파괴하고, 넵튠 지대함 미사일로 러시아 함정과 모스크바 호를 파괴하는 것을 보고 마음 아파했겠습니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박수치고 환호성을 질렀을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그 배에 타고 있는 군인들의 생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전쟁에서의 승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사랑하며 사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 자기 자신의 것만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은 나 자신이나 나의 목적만을 추구하지 않게 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게 하며, 또 나와는 별 관계가 없는 사람들의 입장과 처지까지 헤아리고 이해하고 배려하게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게 하는 사랑’ 또 어떤 사랑입니까?
둘째, 상대방의 이익이나 상대방의 유익까지 살펴주는 사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편으로는 자기의 것을 추구하지 않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상대방의 이익까지 살펴주게 합니다.
이기적인 본성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들에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이 세상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런 사랑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서는 기대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오늘날 이 세상의 모습을 보십시오.
이 세상은 극단적인 개인주의, 극단적인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너나할 것 없이 ‘나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만 이익을 얻으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아닌 상대방의 입장이나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해 주고 헤아려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살아오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할 때가 아니었습니까? 이것은 부부사이나, 가정생활이나 형제나 친구사이에 공히 다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배려해 주는 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배려심이 없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은 너무 힘든 일입니다.
직장을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지 별로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나만 잘되고 오직 나만 승진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장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 다른 가게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습니다. 오직 우리 가게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교회는 어떻게 되든지 상관하지 않고 오직 우리 교회만 잘 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기심은 바로 자기 옆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돌아보지 않게 합니다.
이 세상에는 상대방의 이익이나 상대방의 유익을 염려해주고 살펴주는 사랑은 없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은 또 어떤 사랑입니까?
셋째, 이 사랑은 이 세상 속에는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교훈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신 자신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다른 것도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성경을 보면 ‘자기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없습니다.
자기 사랑은 이 세상에 속한 사랑의 특징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사랑하라고 말하지 않아도 모든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사랑은 거의 본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삶을 보면 ‘내 자식만 잘 돌보면 되었지, 남이 자식까지 신경써줄 필요가 어디 있느냐?’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이것이 세상이 가진 보편적인 사랑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너희는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고,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눈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라고 합니다. 여기에 이 세상의 사랑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차이점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인의 비유
누가복음 10장을 보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이 나옵니다.
그 내용을 보면,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런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 때 예수님께서는 네가 율법교사가 아니냐? ‘율법에는 무엇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너는 어떻게 읽고 있느냐?’ 라고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율법교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제가 읽어 본 율법의 내용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대답을 듣고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 대답이 옳다.’‘이를 행하라 그리하면 살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해 주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율법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라는 것을 아는 것에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깨달아서 알게 된 말씀대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이 율법교사가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또 다른 질문을 해 왔습니다.
선생님 그렇다면 내가 사랑하며 살아야 할 대상인 ‘이웃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이 율법교사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이 주신 비유의 말씀이 바로 우리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끝에 예수님께서는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 라고 물으셨습니다. ‘너는 ‘레위 인’과 ‘제사장’과 ‘사마리아 상인’ 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겠느냐?’라고 물으신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레위인과 제사장은 강도만난 사람의 동족이었지만 그 이웃이 되어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이 무시하고 멸시하였던 사마리아 상인이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래서 율법교사는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이 어려울 때 도움을 주며 이웃이 되어 주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대답을 들으시고 예수님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너도 그렇게 이웃이 되어 주는 삶을 살라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 유익을 위해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강도만난 동족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내가 이 자리에 머뭇거리고 있다가는 나도 강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자기 자신의 유익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며 살았던 이 두 사람에게는 강도만난 사람을 생각하고 배려해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움이 필요한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을 때 무슨 생각을 했겠습니까? 물론 이 사마리아 상인도 내가 이곳에 머뭇거리고 있다가는 똑 같이 강도들에게 해를 당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마리아 인에게는 강도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릎 쓰고 가까이 가서 응급처치를 해 준 다음, 자기 짐승을 태워서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밤을 지새우며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장사를 위해 길을 떠나면서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더 주며, 이 돈을 받고 내 대신 이 사람을 잘 돌보아 달라고 했습니다. 만약 경비가 더 들면 내가 물건을 팔고 돌아올 때 갚아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마리아인이 가진 사랑은 어떤 사랑이었습니까?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은 서로 원수 같이 여기는 사이였지만, 자기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게 했던 그 사랑이 곤궁에 처한 유대인의 안타까운 입장과 처지를 생각하게 하였으며, 그 사람을 입장을 배려하고 도움의 손길을 베풀도록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7:12절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 말씀을 황금률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리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배려해 주는 사랑이 율법의 내용이고 선지자들의 가르침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율법이요 선지자’라는 말은 곧 율법과 선지서로 구성되어 있는 구약성경이라는 말도 됩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구약성경의 주된 내용이 무엇이라는 것입니까? 구약성경을 압축하고 요약하면 다른 사람의 입장을 배려하는 사랑을 가진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랑을 가진 사람들이 구약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을 통해 해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 서서 그 사람의 처지를 헤아려 주고 배려해 주는 이런 사랑은 사실 이 세상에는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랑이며, 이 사랑은 하나님이 그 백성 된 사람들에게 주신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랑은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만 행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참 하나님의 백성이 된 사람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제사장과 레위 인이라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유대인이 그렇게 무시하고 천대했던 사마리아 인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율법교사에게는 아주 충격적인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아주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었던 제사장이나 레위 인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사마리아 상인이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우리 ‘구원의 문제’를 다시 살펴보게 합니다.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얻게 되며, 구원 받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구원 받은 사람들은,
첫째,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예정하신 사람들입니다.
구원은 사람들이 받고 싶다고 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주십니다. 하나님이 예정하시지 않은 사람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기로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은혜이며 선물입니다.
둘째, 구원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그 존재의 변화가 따라옵니다.
아담의 죄에 속하여 태어난 사람들, 육체에 속한 채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구원을 받으려면 반드시 믿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그 존재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게 되면, 반드시 그 존재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이 존재의 변화를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이 중생도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입니다.
셋째, 그 존재의 변화는 그 성품의 변화, 품성의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중생하게 되면, 이 존재의 변화는 반드시 그 성품의 변화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전에는 아담 안에서 이기적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성령 안에서 이타적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전에는 오직 자기만을 생각하며 살던 사람이, 이제는 다른 사람들의 입장도 헤아릴 수 있는 사람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이런 변화의 과정을 우리는 성화라고 합니다.
넷째, 그 성품의 변화는 거룩한 열매를 맺으며 사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그 존재가 변하고 그 성품이 변한 사람들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그 맺으며 사는 변화된 삶의 열매를 통해 보여주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이 ‘구원사건’을 ‘선한 사마리아 인의 비유’의 말씀과 결부시켜 보면, 이 비유에 등장하는 사람 중에서 하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서, 그 존재가 변하고, 그 성품이 변하고, 그 살아가는 삶이 변한 사람은 누구라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사마리아 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늘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았던 제사장과 레위 인은 어떤 사람이었다는 것입니까?
이들은 비록 종교적인 일에 종사하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믿고 그 존재가 변하고 그 성품이 변한 사람들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사랑, 즉 자기의 유익을 추구하지 않는 사랑의 삶을 살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람이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방식의 차이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의식적인 율법과 율법의 행위를 통해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 결과 율법의 정신인 사랑은 잃어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서 멀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사마리아인은 달랐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도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부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중심으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삶이 결국 사마리아인으로 하여금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했고, 열매 맺는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런 현상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유대인이었던 바리새인과 세리 사이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구주로 오신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대적함으로 구원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깊이 있게 깨닫고 예수님께 나아왔던 세리와 죄인들은 그리스도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됨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구원은 자기 죄를 깨닫고, 그 죄에서의 구원을 갈망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이렇게 해서 은혜로 믿음으로 주어지는 구원은 반드시 그 존재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킵니다. 그리고 이 존재의 변화는 반드시 그 사람의 성품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며, 존재가 변하고 성품이 변화 된 사람들은 또 자신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입고 그 존재와 성품이 변화된 사람이라는 것을 그 변화된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비유에서는 이런 믿음과 존재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가 생략되어 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의 말씀에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서 열매로 나타나는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의 삶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픔과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배려하는 이타적인 사랑의 삶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이 사랑은
첫째, 하나님이 가지셨던 사랑이었습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계셨던 성부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아담에게 복음을 전해 주셨습니다.
내가 장차 성자 하나님을 보내 주어서, 너희들을 죄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복음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그 약속대로 아들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이 세상에 보내주셨습니다.
또 자기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 이 사랑은
둘째,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자신을 추구하는 사랑을 가지셨더라면 신성을 부인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림이 되셔서 우리의 구주로 이 세상에 오실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낮아지시고,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고, 결국 십자가에 자신을 내어주심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에 대해 빌립보서 2:6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어떻게 전해주고 있습니까?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을 보면
첫째로, 예수님은 이 사랑 안에서 자기를 비우셨다고 합니다.
여기서 ‘비우셨다’는 말씀은 ‘텅 비웠다.’ ‘내용을 다 빼 버렸다.’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신성을 다 비우시고, 죄의 노예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의 모양을 취하셨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그리스도의 비하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그 신성과 신적인 권위, 신적인 위엄, 영생과 불멸, 영광과 같은 속성들을 다 비우셨습니다. 예수님은 신성의 모든 것을 다 버리셨습니다. 그래서 아무 가치도 없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왜요. 죄의 저주를 받아 결국 죽고 멸망해 가는 사람들을 너무나도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사랑하신 예수님을 모습을 보십시오.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 불쌍하게 되신 분이 있습니까? 사람인 우리가 보기에도 예수님의 모습은 너무 불쌍하신 모습을 하고 계시지 않습니까? 전해 내려오는 구전에 의하면 예수님의 얼굴은 이웃 아줌마가 끼얹은 뜨거운 물에 심한화상을 당하였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사람들은 예수님을 아비 없이 태어난 사생자라고 놀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심지어 종교지도자들은 바알세불 들렸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공생애 기간 동안 그 당하신 고난, 고생은 또 어떻습니까?
어디 이뿐 입니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그 처절한 기도는 또 어떻습니까? 이 뿐입니까? 예수님은 벌거벗은 몸으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가 봐도 너무 불쌍한 모습이 아닙니까?
왜 예수님께서는 이런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너무 사랑하셨기 때문에 자기를 다 비우시고 바보가 되신 것입니다. 그래서 마치 사랑에 눈이 머신 바보처럼 우리를 위해, 우리대신 그렇게 불쌍한 모습으로 고난을 당하시고 또 죽으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하며 사는 사랑도 이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처럼 자기를 비우고 상대방을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자기를 비우지 않고 하는 사랑은 참 사랑이 아닙니다. 참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게 하고, 자기를 다 버리고 사랑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이 속도 없는 사람처럼, 자신을 개. 돼지 취급하며 살았던 유대인, 강도만난 어려움을 당하였던 유대인을 구해 주기 위해서 한 그 사랑이, 우리가 늘 하며 사는 사랑의 모습이지 않습니까?
둘째로, 예수님은 사랑 안에서 자기를 비우시고, 우리와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그 신성을 다 비우고 사람과 같이 되셨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 되신 이 사건을 우리는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같은 죄인이 되신 것을 또 다른 말로는 동화(同化)라고 합니다. 동화란? 성질, 양식(樣式), 사상 따위가 다르던 것이 서로 같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을 섬기겠다고 자청한 목회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록도 사람들은 이렇게 헌신을 각오하고 부임해 온 목회자들에게 마음을 잘 열지 않았습니다. 이 목회자들은 몇 년간 소록도에서 경력을 쌓고서는 곧 소록도를 떠나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달랐습니다.
소록도에 부임해 온 손양원 목사님은 자신이 나병환자가 되는 것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그들의 상처를 만져주고 입으로 그 진물을 빨아 주는 일을 했다고 합니다. 손양원 목사님이 이렇게 하자 소록도의 나병 환자들과 동화가 일어났고, 비로써 소록도 사람들이 마음을 열더라고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도 같습니다.
우리들이 우리와 같이 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될 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 동화가 일어납니다. 이렇게 동화가 일어난 사람들이 되어야 비로써 예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셋째로, 우리와 같이 되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시기까지 복종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랑은 십자가에 나타난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자기희생적인 사랑의 대표적인 표상입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이 십자가보다 더 은혜롭고 더 영광된 것이 없습니다. 이 십자가에 기독교 신앙의 모든 진수가 녹아 있습니다. 아멘.
또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이 사랑은
셋째, 성령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랑이었습니다.
갈보리 언덕 위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보여주셨던 그 사랑,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그 사랑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면 잊을 수 없는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사랑을 갖게 되었습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해 이 사랑을 우리 마음에 부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이 부어주신 이 사랑으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자기희생적인 이 사랑을 하며 살게 된 것입니다.
어떤 친절한 그리스도인이 구멍가게를 하게 되었는데 아주 장사가 잘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슈퍼로 가게를 확장하였고, 나중에는 대형 슈퍼마켓을 세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장사를 잘 하고 있던 어느 날 자기 슈퍼마켓 옆에 있는 작은 구멍가게를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게는 전에 꽤 장사가 잘 되었는데, 그 옆에 대형 슈퍼마켓이 들어서면서 지금은 어렵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날부터 자기 슈퍼마켓에서 파는 물품을 하나, 둘, 줄여 나갔다고 합니다.
바로 옆에 있는 작은 가게에게 파는 물건들을 하나 둘씩 팔지 않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점점 물건을 줄여나가서 나중에는 자기 슈퍼마켓을 유지하고, 자기 가족이 생활하는데 필요한 소득만 올릴 정도의 물건만 팔았다고 합니다.
이 슈퍼마켓 주인이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우리는 이 슈퍼마켓 주인에게서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참 된 사랑의 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은, 내가 비록승승장구하고 있을 지라도 실패한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삶 속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지라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웃의 입장을 이해하고 배려할 수 있게 됩니다. 나의 삶 속에 감사할 일이 많이 있을 그 때에도 슬픔을 당하여서 울고 있는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이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사랑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이 사랑이 우리 성품을 변화시켜서 이기적인 우리들로 하여금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살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아직 우리의 인격과 성품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고 성화시켜 나갈 기회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기회를 선용하여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 성숙한 사랑을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 나가고 성숙해 나가고자 하는 수고와 노력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인격을 성숙시켜 나가는 일이 우리의 남은 신앙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장차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은혜와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녀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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