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9. 10. 20:54

사랑은 모든 것을 믿으며

고린도전서 13:7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이라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안에 담겨 있는 다양한 성품들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랑 안에는 어떤 성품들이 들어 있다고 합니까? 4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이 모든 성품들이 사랑 안에 담겨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랑에 대한 이해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우리에게 너희 기독교인들은 늘 사랑을 말하는데, 사랑이 도대체 무엇이냐?’라고 묻는다면, 우리는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쉽게 대답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사랑을 설명해 주실 때, 사랑은 이런 것이라고 간단히 설명해 주지 못하시고, 사랑은 오래 참는 성품이다. 사랑은 온유한 성품이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는 성품이다.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성품이다.’ 등등등,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성품을 가지고 사랑을 설명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이 그 마음 안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런 성품들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그 마음 안에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런 성품들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소유하고 있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라면 다른 것은 몰라도 이 사랑만은 꼭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을 가지고 있느냐? 가지고 있지 못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내가 그리스도인이냐? 그리스도인이 아니냐?를 구분하는 표식이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24-25절입니다.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제인 중 알리라.’

 

이 사랑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게 해주는 능력이 되고 동력이 됩니다.

그래서 이 사랑을 소유한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고, 이 사랑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들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의 마음이 있습니까?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죄를 사함받고 구원을 받게 되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사람의 마음 안에 성령을 부어주시는데, 이 부어주신 성령을 통해 그 사람의 영혼이 거듭나게 되고, 그 거듭난 영혼 안에 하나님은 사랑의 마음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이 사랑 안에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다양한 성품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 다양한 성품 적인 특성 중에서 고린도전서 13:7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을 믿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어떻게 모든 것을 믿게 됩니까?

찻째는, 하나님이 사랑을 그 마음 안에 부어주실 때입니다.

 

사람들이 모든 상황과 환경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게 되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실 때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7절에서는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믿게 한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지면, 사람들은 하나님이 나를 사랑해 주신 그 사랑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해한 하나님의 사랑을 공유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을 가지게 되며, 이 믿음은 모든 것을 믿게 해 주는 믿음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해서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그 믿음이 변화는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들이고, 아직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부어주시는 사랑은 그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해줍니다. 이것이 사랑이 가진 능력이요. 역사입니다.

 

찬송가 299장의 하나님 사랑은이라는 찬송가 가사를 보면,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사랑이라고 합니다. 이 고백은 하나님의 사랑은 완전하여 무엇을 더 보탤 필요가 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사랑은 햇빛과 같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침에 해가 떠올라서 햇빛이 비춰오면 어둠은 한순간에 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3절에서는 햇빛과 같은 이 사랑이 우리를 비춰오면, 그 사랑 앞에서는 인생의 풍파도 다 그치게 된다.’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오게 되면, 어둡던 우리 마음이 밝아지고, 우리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던 염려, 근심, 걱정이 간곳없이 사라지고, 우리 마음 안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과 감사와 평안과 희망과 용기가 흘러넘쳐 나오게 됩니다.

 

요한14:18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은 모든 두려움을 내어 쫓아 준다.’ 고 합니다.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았던 사도바울은 어떤 고백을 했습니까?

로마서 8:35-39절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사도바울은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라도, 아니 믿음 때문에 당하게 되는 순교까지라도 자신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 속에 당하며 사는 그 모든 일들에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면, 그 사랑은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고, 또 하나님이 가지신 성품들을 함께 갖게 해줍니다. 이렇게 해서 가지게 된 영혼의 거듭남과 마음의 변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해주는 것입니다. 아멘.

 

또 성도들은 어떻게 모든 것을 믿게 됩니까?

둘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가져다주는 믿음을 갖게 될 때입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이 사랑의 위대함모든 것을 믿고 신뢰할 수 있는 마음을 갖게 해주신다.’고 합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믿는다.’라는 말 피스튜에이신뢰한다.’는 말입니다. 또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모든 것은 첫째, 우리가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말하고 있을 뿐 아니라, 둘째,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있는 그 모든 일들과 상황들과 여건 들과 환경들까지를 모두 포함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을 고린도전서 13:7절에서는 그 사랑은 모든 것을 믿게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이고, 다른 하나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고 있는 믿음입니다. 성경에서는 이 두 믿음에 똑같이 피스튜에이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심지어 그 대상이 어떤 사실이거나 어떤 사물일 때에도 같은 피스튜에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람들이 나는 내가 지금 타고 가고 있는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을 것을 믿는다.”라고 말할 때에도 이 단어를 썼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이제까지 비행기가 추락하지 않고 날았었던 확률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우리 집이 무너지지 않을 줄을 믿는다.’라고 할때에도 이 단어를 썼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튼튼하고 견고하게 지어진 사물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나는 북한이 1950625일에 남침을 했다는 것을 믿는다.’라고 할때에도 이 단어를 썼습니다. 이때의 믿음은 역사적인 사실에 대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런 것들이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이 믿음들에는 어떤 특징이 있습니까? 이 믿음들은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믿음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 믿음들은 그 영혼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다릅니다.

기독교에서 말하고 있는 믿음은 사람들이 경험하고, 이해하고, 판단해서, 가지게 된 믿음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믿음을 말합니다. 이 믿음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사람들에게 주시는 믿음으로서, 반드시 그 사람의 영혼의 변화가 선행된 후에 주어지는 믿음입니다.

 

마태복음 16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해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베드로가 이 믿음의 고백을 했을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바요나 시몬에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하신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네 아버지시니라.’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믿음을 주셨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 말씀을 보면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게 되는 것은, 성령을 통해서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 중생을 경험한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이 믿음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다 성령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요 성령으로 하지 않고서는 누구도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성령을 통해 그 영혼이 거듭나는 변화를 우리는 중생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3절에서는 그 영혼이 거듭나지 않는 사람, 그 영혼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도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도 없다고 합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으니라.’

 

이런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에 이르려면 먼저 회개하고 죄 사함을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데, 이때 주신 성령이 사람들의 죽어 있는 영을 살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듭남이라고도 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음이라고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육신의 부모로부터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런 우리 모두는 성령을 통해 영적인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렇게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의 중생과 우리의 믿음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중생을 통해서는 우리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중생하기 이전에는 잘 믿어지지 않던 하나님이, 중생하고 난 후에는 저절로 믿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믿음을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믿음,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신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이 믿음과 영적인 변화는 우리들로 하여금 모든 것을 믿을 수 있게 해 줍니다.

 

그러면 중생만 하면 그 즉시 모든 것이 다 이해되고 믿어지는 것입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제 막 중생한 영혼은 갓 태어난 아기와 같습니다. 어린 아기들은 자기 엄마 아빠를 알아본다고 엄마 아빠의 마음 까지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중생도 이와 같습니다.

중생을 통해 하나님을 믿고 아는 믿음은 주어지지만, 하나님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아기들은 그 부모님의 사랑을 받으며 키가 자라고, 이해력이 성장 해갑니다.

마찬가지로 중생을 통해 하나님을 믿게 된 성도들도, 신앙생활을 거듭함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이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력이 점점 커 갑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도 점점 자라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고린도전서 13:7절 말씀처럼 모든 것을 믿는 믿음 즉 어떤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잃지 않는 장성한 분량의 믿음에까지 자라가게 됩니다. 아멘.

 

또 성도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믿게 됩니까?

셋째는,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될 때입니다.

 

사람들은 감정의 기복이 심합니다.

감정이 조석으로 바뀌기도 합니다. 이렇게 늘 변하는 것은 사람입니다. 또 늘 변하는 것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입니다. 오늘 가정이 평안하다고 내일도 평안할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늘 내가 건강하다고 내일도 건강할 것이라는 장담은 그 누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은 변해도 하나님은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야고보서 1:17절입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하나님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13:8절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하나님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영원토록 동일하신 분이시라고 합니다. 이뿐 아닙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동일하신 분이시고, 모든 국가들에 동일하신 분이시며, 모든 시간과 문화와 환경 속에서도 동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흔들림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도 늘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조그마한 어려움만 다가와도 낙심하고 좌절하며, 작은 생활의 변화 환경의 변화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들어야 할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5:17-18절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지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주신 약속의 말씀들은 이 세상 역사가 끝이 나게 되는 그때까지 단 하나도 폐하여지지 않고 다 이루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약속의 말씀을 믿고 흔들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1: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해 주셨다.’고 하십니다. 7절 말씀을 보면 택하신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주시고 구원을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13절 말씀을 보면 우리 구원을 성령으로 인치시고 보증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구원을 2:18절 말씀에서는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며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라고 간명하게 요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우리를 구원해 주셨다는 말씀이 성경에는 수도 없이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은혜로 구원해 주신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도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같이 명확한데도 자꾸 어떤 사람들은 예수를 믿어도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런 사람들은 절대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구원 문제를 보지 않고, 조석으로 변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구원 문제를 보기 때문에 이런 이해를 갖게 된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은 절대로 변하지 않으십니다.

로마서 8:28-29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 받게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라고 아주 분명한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구원받을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미리 아시고 미리 정하시고, 그 사람들을 가장 알 맞는 때, 가장 적당한 때에 불러주시고, 그렇게 불러주신 그 사람들을 의롭다 칭해 주시고, 의롭다 칭한 그 사람들을 결국에는 영화롭게 해주실 것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들이 있고, 또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어도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입장에서 보는 사람들의 특징은, 우리 신앙에서 아주 중요한 문제 즉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이 참된 믿음이냐? 참된 믿음이 아니냐? 하는 믿음에 대해서는 문제 삼지 않습니다. 오히려 믿음보다는 그 사람이 살아가고 있는 , 그 사람의 드러난 행실만 보고 이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구원의 문제는 사람들의 삶의 문제라기보다는 믿음의 문제입니다.

믿음이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그 사람이 말씀을 지켜 행하는지 행하지 않는지와 같은 삶으로 나타나 보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사람이냐? 주지 않은 사람이냐? 로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믿음을 주신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게 되고, 하나님이 믿음을 주지 않은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삶으로 평가해 보면, 베드로와 가롯 유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사울 왕과 다윗왕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누구는 범죄하고 누구는 범죄하지 않았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의 구분은 그 살았던 삶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가지고 살았던 믿음으로 구분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가롯 유다는 범죄한 후에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자살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없었던 사울 왕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고 버림받은 불쌍한 사람으로 그 남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던 베드로는 달았습니다.

그 지은 죄를 아파하고 회개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믿음이 있었던 다윗 왕은 달랐습니다. 그 지은 죄를 자백하고 진심으로 회개하였습니다.

 

다윗이 진심으로 회개하였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다윗에게 그 지은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지만, 다윗은 자신이 지은 죄를 아파하며 밤마다 눈물로 그 침상을 띄우는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였을 뿐 아니라, 남은 생애 동안 자신과 같은 범죄자들에게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구원의 은혜, 그 구원의 복음을 전해 주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를 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믿음의 유무가 사람들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을 살게 한 것입니다.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믿음이 있었던 베드로나 다윗이 범죄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 부모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것 같이 그렇게 징계는 하셨어도 멸망 당하게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었던 가롯 유다나 사울 왕은 다릅니다. 죄를 지었어도 징계가 없었습니다. 성경은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징계가 없는 사람들은 사생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수차 말씀드렸지만, 우리가 가진 믿음이 어떤 믿음이냐?’ 하는 것입니다.

이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는 하도 많이 말씀드려서 더 이상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확실한 것은 우리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믿게 될 때, 우리는 그 어떤 환경 속에서도, 그 어떤 여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성도들이 어떻게 모든 것을 믿게 됩니까?

넷째는, 사랑의 하나님이 역사를 주관하심을 믿게 될 때입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다니엘의 세 친구는 풀무 불(용광로)에 던져져서 죽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겠습니까?

 

다니엘서를 보면 이 세 사람은 다니엘과 함께 전쟁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이들은 바벨론에서 노예같이 살아가면서 미래에 대한 꿈도 희망도 다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오직 하나님만 믿고 섬기는 삶을 살겠다고 뜻을 정하고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이 청년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셔서, 바벨론 제국의 관리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이때 이들은 또 어떤 뜻을 정하게 됩니까?

우상에게 바쳐진 왕의 진미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고 관리 교육을 받을 수 있기를 환관 장에게 구하였습니다. 이때도 하나님께서 이들을 도와주셔서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먹지 않고 바벨론 관리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특별한 지혜를 주셔서 관리 교육을 받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그 성적이 우수한 사람들이 되게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네 사람은 모두 왕의 신임을 받아 바벨론의 관리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이 네 사람은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 속에 살았습니다.

이 네 사람은 자신들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서 3장을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그 높이가 60큐빗이나 되는 거대한 신상을 만들어 두라 평지에 세웠습니다. 한 큐빗이 약 45cm 정도 되니 이 금 신상의 높이는 27m 나 되는 거대한 신상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전국 각 도의 관리들을 두라 평지에 모아 놓고 신상 낙성식을 하면서, 모든 관리들에게 그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도록 했습니다. 만약 신상에게 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사람을 맹렬히 타는 풀무 불(용광로)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제 정해진 때가 되어 신상의 낙성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 등등의 악기가 연주되었습니다. 이때 모든 관리들이 왕이 세운 금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였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는 절하지 않고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어떤 갈대아 사람이 이 모습을 보고 왕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왕이 대노하여서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잡아 오도록 했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은 왕의 심문을 받았습니다. 왕이 보니 이들이 충성된 신하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 때문에 절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은 이들을 아끼는 마음이 있어서 다시 한번 기회를 더 줄테니 이번에는 신상에게 절하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 불 속에 던져 넣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를 내 손에서 건질 신이 없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이때 이 세 사람의 대답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해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그래서 이 세 사람은 평소보다 7배나 더 뜨겁게 한 풀무 불 속에 던져지게 됩니다.

그런데 왕이 보니 결박하여 풀무 불에 던져 넣은 사람은 세 사람인데, 풀무 불 속에는 결박되지 않은 사람, 마치 신의 아들과 같은 또 한 사람이 더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네 사람은 풀무 불 속에서도 전혀 타거나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름을 부르며 풀무 불에서 나오라고 했습니다. 풀무 불에서 나온 그들을 보니 몸은 전혀 상하지 않았고, 심지어 머리털과 옷도 타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세 사람은 어떻게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까?

당시 상황은 사람으로서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그래서 왕의 명령대로 고난을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상황을 주관하고 계시는 만유의 주권자이시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다스림 밖에서 일어나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그 극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이들의 신앙은 이렇게 표현되고 있습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 이 고백은 정말 위대한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보다 더 위대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이 믿고 있는 대로 구원해 주시지 아니하실지라도, 이들은 거짓된 신인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할 것이며, 자신들의 생명을 하나님께 맡기고 죽을 각오가 되어 있다고 한 것입니다. 이 신앙을 어떻게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 중에는 요셉도 있습니다.

요셉을 애굽에 노예로 판 것은 형들입니다. 형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는 요셉을 시기하고 미워하여서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은 애굽에서 13년간 노예 생활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그 나이 17세에 팔려 가서 30세까지 노예 생활을 했습니다. 요셉은 인생의 황금기를 노예로 다 보낸 것입니다.

 

나중에 요셉의 형들은 그 아버지 야곱이 죽게 되자 요셉의 복수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한 말이 무엇입니까?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자신들의 죄를 용서해 주라.’ 하셨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이런 형들에게 요셉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려 하셨으니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이 요셉의 고백 속에서 우리는 요셉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주관자가 되실 뿐 아니라, 역사 속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통해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이심을 믿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을 로마서 8:28절은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것이 요셉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이었습니다.

이 믿음이 요셉으로 하여금 노예 생활이라는 악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요셉이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도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런 요셉에 삶에 함께해주시면서 형통함을 주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이 인류역사와 우리 생애를 주관하고 계신다는 이 믿음을 가지고,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하며, 하나님 허락해 주신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믿게 해준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는 전에 지존파 사람들이 부자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고급 외제 차를 몰고 가는 여성들을 납치해서, 금품을 빼앗고, 손에 피를 묻히기 싫다고 하며, 목을 부러뜨려 죽인 후 생매장해온 사건을 잘 알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끔찍한 범죄를 인해 치를 떨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언론사에서 그 부모와 인터뷰를 한 내용이 방송되었습니다. 그 자식을 사랑하고 있었던 그 부모는 어떤 말을 했습니다. 우리 아이는 집안이 가난해서 제대로 공부시켜 주지는 못해서 그렇지 그 심성은 너무나 착한 아이였다고, 다른 사람에게 그런 해를 입힐 아이가 아니라고 하면서, 기자들에게 뭐 잘못 알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기자 선생님이 우리 아이가 그런 아이가 아님을 좀 밝혀 달라고 오히려 부탁하지 않았습니까?

 

세상 사람들이 모두 다 살인자라고 하며 배척했지만, 자녀를 사랑하였던 그 부모는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녀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사랑이 그 부모의 마음에 이런 믿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이 세상은 에덴동산에서의 삶도 아니고, 천년왕국이나 천국에서의 삶도 아닙니다. 아담의 범죄로 어그러지고 망가진 죄악 된 세상 속에서의 삶입니다. 그래서 우리 삶 속에는 어려움도 있고, 고난도 있고, 환난도 있으며, 결국에는 늙고, 병들어서, 죽음으로 끝마치는 것이 우리들의 인생입니다.

 

이런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들 주신 사랑, 모든 것을 믿게 해주는 사랑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이 사랑 안에서,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고 있습니다.

 

사랑이 가져다 준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매사를 긍정할 뿐 아니라, 장차 우리 구원을 완성 시켜 주시려고 오실 예수님을 바라고 소망하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오늘이라는 하루, 한 달, 한해의 삶을, 지금보다 더 성실하고 더 책임성 있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