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13장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4. 27. 16:57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고린도전서 13:4

 

고린도전서 13장에서는 하나님의 사랑 속에 있는 15가지 속성들에 대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15가지 사랑의 속성에 대해 4절 말씀에서는 그 사랑은 오래 참고, 그 사랑은 친절하며, 그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그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한다....’ 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이 자랑하지 아니하는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1. 자랑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자랑의 의미입니다.

 

여기 자랑하다라고 번역한 이 단어는 페르펠유에타이입니다. 이 단어는 신약성경에 단 한 번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이 단어의 의미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어 왔습니다. 오늘날 이 단어는 자랑하다.’ ‘허풍을 떨다.’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자랑한다.’라는 말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랑한다.’라는 말은 사실여부를 떠나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돋보이게 하기 위해서 무엇인가 부풀려서 말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왜 자랑을 합니까?

둘째, 자랑은 열등감에서 시작됩니다.

 

사람들이 왜 자랑을 합니까? 사람들은 열등감을 자랑으로 보충하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자랑은 열등감에서 벗어나 보려고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속에 있는 열등감을 다른 무엇을 자랑함으로 보상을 받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랑을 통해 열등감이 보상을 받는 방법은 다양합니다.

 

1. 지식인들은 내가 나를 자랑하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나를 칭찬할 수밖에 없도록 유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심한 열등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있는 열등감을 극복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유도하고, 다른 사람들이 나를 칭찬할 수 있도록 은연중에 자기 자랑거리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그래서 상대방이 그 칭찬거리를 통해 자신을 칭찬하게 되면, 그런 칭찬을 통해 내 존재를 확인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자랑은 열등감의 또 다른 표현입니다. 열등감이 있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간절히 바라며, 또 칭찬이나 인정에 목을 맵니다.

 

2. 때로 열등감은 쓸모없는 잡담을 통해 자기 자신을 확인하려고도 합니다.

여자들이 만나서 아무 의미도 없는 수다를 떠는 이유도 그런 잡담을 통해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험담함으로 자기를 과장하고 자기를 부풀려서 자기 확인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은 공중이 모인 장소에서 그렇게 수다를 떨지 않습니다. 성적으로 진한 농담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100% 성적인 열등감이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그 하는 일이 잘 될 때에는 그 가진 열등감이 곧 바로 교만으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래서 자기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한 단계 수준이 낮은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있는 사람들은 좀처럼 자랑하려고 하지 않고 교만해 하지도 않습니다. 사실 교만도 그 뿌리는 열등감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셋째, 자랑은 육신적인 성품입니다.

 

사람들이 자랑을 왜 합니까?

나에게는 내 말을 듣고 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 않은 자랑거리가 있다는 것 아닙니까? 이 말을 조금만 바꾸어서 생각해보면 자랑하는 사람은 그 자랑하는 만큼 상대방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랑을 통해 당신들에게는 이런 것이 없지 않으냐?’ ‘나는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목회자 부인들이 모이는 자리에 가면 이런 일이 많이 일어납니다.

목회자 사모들이 모이면 그 중에는 꼭 이런 분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 우리 교회의 어떤 분이 많은 헌금을 해서 무엇을 샀다.’라든가, 우리 교회에는 그 지위와 신분이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있다.’라든가, 우리 교회 목사님은 이런이런 분이시다.’라는 자랑을 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목회자 사모들은 세상 사람들과 같이 이렇게 대 놓고 자랑하지는 않습니다.

될 수 있으면 겸손으로 포장하고 믿음으로 포장하여서 말하겠지요. 그러나 그렇게 포장하고 자랑하는 그 마음 안에는 내가 상대방보다 우월하다는 것을 우리교회가 당신들의 교회보다 낫다는 것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자기과시와 자기자랑이 담겨 있습니다.

 

사람들이 하는 대화를 들어보면 이렇게 믿음으로 포장하고 하는 자랑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렇게 성장하게 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혹은 겸손으로 포장을 하고 나는 정말 벌레보다 못한 사람인데 하나님께서 내게 이런 큰일들을 해 주신 것은 너무나 큰 은혜라고 말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 목적은 다 자기 자랑을 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들을 얼마나 많이 보아 왔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한 사람 앞에서가 아니라 회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자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자랑 거리가 될 만한 일을 들추어냄으로 자기를 들어내고 자기를 과시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자랑들은 육신적인 성품이며 아담 안에서 소유하게 된 죄성의 일부입니다.

그러면 자랑이 왜 죄입니까? 자랑은 그 이야기를 듣는 상대방에게 죄를 짓는 범죄 행위 일뿐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도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우리는 자랑은 죄를 짓는 행위라는 것을 꼭 명심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랑이 왜 죄를 짓는 행위입니까?

넷째, 자랑은 하나님의 은혜 도둑질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5:10절입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을 겸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를 낮추고 자기 업적을 감추게 합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가면을 쓰고 자기가 그 하나님의 영광을 취하기도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는 겸손의 가면을 쓰고 하나님이 받으셔야 하실 영광을 자기가 가로챕니다.

 

죄가 무엇입니까?

죄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의 육적인 성품을 교묘하게 충동하여서 사람들로 하여금 교묘한 방법으로 자기를 자랑하게 함으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짓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이런 모습을 얼마나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까?

이렇게 볼 때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일을 한 후에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일을 한 후에 그 일을 통해 자기를 자랑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숨기는 것 이것이 너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 사모님이 대학원을 다녔는데 그 학기에 학교에 내려고 준비 해둔 등록금을 등록금이 없어서 그 학기에 공부를 할 수 없게 된 어떤 다른 학생에게 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학교에 내야 할 등록금은 없어진 것이지요. 이 사모님은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였고 그 이야기를 들은 누군가가 이 사모님의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끝났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 사모님은 사람들을 만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신다는 것을 이야기 하면서 꼭 이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은 모두가 다 대단한 사모님이라고 칭송을 하지만 가까이 사귀게 되면 그 이야기를 수도 없이 다시 듣고 또 다시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새로 듣게 되는 사람들은 사모님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라고 칭찬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그냥 어느 교회 사모님인가보다 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를 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그 사모님 정말 대단한 믿음을 가진 사모님이라고 칭찬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일을 우리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어떻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에게 이 일을 말하지 않아도 다 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면 비록 사람들은 이 사모님이 한 선행을 몰라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시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알아주시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이 사모님은 사람들도 그 일을 알아주길 바라고 계속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적어도 나는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드러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 자신의 마음 안에서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 라고 하는 자긍심을 갖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성경의 증거입니다.

성경은 이런 말을 하고 다니면서 내가 그 영광을 취하게 되면, 장차 하나님께 받을 상급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내가 이 일을 말하지 않았으면 사람들은 그 일을 모르고 지나갔을 것입니다. 그러면 장차 하늘에서 그 희생에 합당한 큰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일을 자랑하고 다니면서 세상에서 상을 영광을 다 받아버렸으니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 놀라운 헌신을 하는 삶을 살고도 장차 아무런 상급도 받지 못하게 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이런 자랑을 하지 않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우리는 신앙으로 포장을 하고 겸손으로 포장을 하고 하는 그 어떤 자랑이라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늘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큰 상을 받게 되는 비결입니다.

 

저도 이 말씀을 묵상하면서 깨달은 점이 많이 있습니다.

설교를 하다가 보면 성도들에게 신앙의 유익을 주기 위해서 가장 확실한 저의 경험을 말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내가 살아온 삶을 예화로 쓰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어쩌면 일종의 자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앞으로는 될 수 있으면 어쩔 수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나를 예화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2. 자랑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사랑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는 자랑하지 않는 특징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서 볼 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자랑하지 않는 사랑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이 시대를 사람들은 자기 PR의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오늘 이 시대를 보면 자랑이 아주 일상화 된 시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자기자랑에 목을 매고 자기자랑에 취해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세상 사람들만 자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들도 자기 교회 자랑을 하고, 목사님들도 자기가 어떤 비전 어떤 능력을 가진 목회자인지 자랑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성도들로 하여금 자랑하지 않게 하고, 그 이룬 업적을 숨기게 하고, 그 행한 선행과 희생을 감추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도들은 그 업적과 선행과 희생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믿음으로 그런 일들을 행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행한 그 일 자체를 만족하고 사람들로 부터는 칭찬과 영광을 받으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첫째, 누구든지는 연령이나 신분, 그리고 사회적 지위 같은 제한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인간적인 모든 조건들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을 구별해 주는 용어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밖에 있는 사람들은 새로 창조함을 받은 일이 없는 그대로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새로운 피조물이다.’라는 말씀에는 카이노스가 사용되고 있는데, 카이노스 라는 말은 아무 것도 없는 데서 즉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쓰이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존재로 완전히 다시 태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이 가지신 그 사랑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그 신의 성품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죄악 되고 타락한 성품을 고쳐 주시는 분이 아니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육의 속성 땅에 속한 속성은 아무리 고쳐도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신의 성품에 하늘의 성품에는 이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속성과 성품과 하나님의 사랑을 가진 존재로 우리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 속에서 우리들은 자랑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따라 자랑하지 않는 사랑을 하며 살게 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둘째,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은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창조하신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으로 자랑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자랑하지 않는 사랑은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새롭게 부여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주신 성령 안에서 이 사랑을 우리 마음 안에 부어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이전에 살던 삶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고린도 후서 5:17절 말씀에서는 이런 그리스도인의 상태에 대해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말 성경에서는 이 말씀을 과거형으로 해석하고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옛 것들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새로운 것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라는 현재형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나게 되는 칭의는 순간적으로 일어나지만 그 후에 우리 안에 있는 옛 성품들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어 가는 것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런 변화를 다르게 말해보면 우리가 믿음 안에서 새롭게 변화되어 나가는 그 만큼 우리의 옛 성품들이 사라져 간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점진적으로 이루어지는 성화의 속도는 우리의 노력의 유무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경에는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이 167회 기록되어 있다고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라는 말은 이렇게 많이 언급되고 있는 단어이며, 특히 바울서신 안에서 많이 언급되고 있는 단어입니다. 그 뜻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제외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님 안에 있는지 예수님 밖에 있는지를 어떻게 알게 됩니까?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은 기적을 통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베풀어주시는 능력과 역사를 통해서도 아닙니다. 또 우리가 믿음 안에서 이루고 성취한 업적을 통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속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통해서 알게 됩니다. 우리 안에서 죄악된 나의 옛 성품들이 점점 사라져 가고 하나님의 닮은 새로운 성품으로 변화되어 나가는 것을 보고 우리는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마다 그 변해가는 속도는 다를지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서는 끊임없이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러면 이런 속사람의 변화는 어떤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것입니까?

우리가 할 일은 나의 육체와 열정과 탐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우리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만큼 새로운 성품으로 채워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이 새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의 삶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 있습니다.

땅에 속한 성품을 가진 사람은 자랑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새로운 성품을 가진 사람들은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랑은 육신에서 온 것이며 육신의 열매입니다. 야고보서 3:14-16절입니다. 너희 마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려 거짓말 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 온 것이 아니요. 땅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야고보서 3:17-18절입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사람들은 이 두 가지 서로 다른 삶을 잘 구분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가진 사람처럼 겸손으로 포장하면 잘도 속아 넘어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속지 않으십니다. 그 사람이 첫째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인가? 아니면 둘째 아담인 예수님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인가? 하는 것을 하나님은 정확하게 아십니다.

 

어떤 사람에게 땅의 것을 자랑하려는 욕구가 있다면 그 사람은 땅에 속한 사람입니다.

이런 욕구가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가지고 그 안에 있는 이런 욕구를 죽이려고 기도하며 이런 육체의 욕구를 밀어내려고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가끔씩 자랑하는 실수를 할 수는 있으나 곧 그 실수를 깨닫고 가슴을 치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똑 같은 실수를 매번 상습적으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여전히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루터의 말과 같이 새가 우리의 머리 위를 날아가는 것은 어찌할 수가 없지만 새가 내 머리에 둥지를 트는 것은 막아야 합니다. 이 말씀은 죄가 우리 성품이 되는 것 죄가 우리의 습관이 되는 것은 막아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셋째, 자랑하다가 망한 사람들입니다.

 

자기가 이룬 업적, 인맥, 이룬 역사들을 자랑하는 영성은 이 땅에 속한 영성입니다.

이렇게 자랑하는 영성은 정욕 적이고 마귀 적이고 귀신적인 영성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자기를 감추고 그 업적을 숨기는 영성은 하늘의 영성입니다.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자랑하지 않는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서 4:29-33절 말씀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기가 이룬 업적을 자랑하다가 망하게 된 것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왕도 자기영광을 자랑하다가 충이 먹어 죽었습니다. 만약 내 속에 이렇게 자랑하고자 하는 이런 욕구가 있다면 나는 장차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무엘 상 24:2-13절 말씀을 보면 다윗이 자기 나라의 번영을 자랑하려고 인구조사를 하다가 하나님의 징벌을 당한 기록이 나와 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하나님은 선지자를 통해 세 가지 징벌 즉 칠년 기근이나 3달 동안 원수에게 쫓김이나 3일 동안 전념 병이 창궐하는 것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셨습니다. 다윗은 3일 동안 전념 병이 창궐하는 것을 택하였고 이 일 때문에 수많은 백성들이 죽게 되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을 잘 섬긴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으로부터 그 생명을 15년간 연장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은혜의 사건이 있은 후 바벨론 왕이 병든 히스기야를 문병 왔습니다. 이 때 히스기야는 이스라엘의 영광을 자랑하고 싶어서 성전에 있는 보물들과 내탕고에 있는 무기들을 다 보여주었습니다. 이런 히스기야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그것은 그 자랑한 것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스라엘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랑하기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랑하려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합니다. 자랑하려는 육신의 소욕대로 살면 반드시 망합니다. 시편 115:1절 말씀에서 시편기자는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는 인자하시고 진실하시므로 주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소서.’라고 겸손한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과 삶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넷째, 부득이 자랑하려면 주안에서 자랑해야 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자랑은 주안에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절입니다.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 고린도후서 10:17절입니다.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할지니라.’

 

바울은 그 자신의 타락한 성품이 죽는 것 자랑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의 유일한 자랑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5:31절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고린도후서 11:22절입니다. 바울은 자신에게도 세상 사람들이 자랑하는 그런 자랑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히브리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이스라엘인이냐 나도 그러하며 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냐 나도 그러하며그러나 나는 그런 것들은 배설물처럼 여기고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약한 점 중 하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9:23-25절입니다.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내리니라.’

 

바울은 자기의 약점을 자랑하되 나는 나를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을 피해 살고 싶어서 이렇게 밤에 광주리에 담겨서 성벽을 넘어 도망하였던 사람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 바울은 자기는 이렇게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했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이렇게 못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랑은 일종의 자기선전입니다.

고린도 교회는 각종은사들이 많이 나타나서 자랑한 것이 많았던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자랑이 많아지자 고린도 교회는 곧 육신적인 교회로 변했습니다. 우리가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려면 자랑을 줄여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꼭 자랑하려고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하고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해야 합니다.

 

아마추어 화가는 그림을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그림을 자랑합니다.

그런데 그림의 대가인 피카소와 같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자랑하지 못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사람들 앞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자랑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전능하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면 결코 자랑할 수가 없습니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이 할 수 있는 일은 겸손히 순종하는 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 살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 밖에 사는 사람들임을 잘 보여줍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자랑하지 못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 하나님께는 자랑할 것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하나님의 창조하심만 보아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창조 속에 나타난 그 능력 은혜 역사 배려 친절 사랑 긍휼 자비 등등 얼마나 자랑하실 일이 많으시겠습니까? 우리를 구속해 주신 구원 사건 속에는 또 얼마나 자랑할 것이 많이 있겠습니까?

이뿐 아닙니다. 우리 개개인의 삶 속에 베풀어주신 은혜 베풀어주시고 계신 은혜 그리고 장차 베풀어주실 은혜 그리고 전 인류의 삶 속에 베풀어주신 은혜 베풀어주시고 계신 은혜 장차 베풀어주실 은혜들에 대한 자랑들이 얼마나 많으시겠습니까?

 

그런데 어디 하나님께서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시고 계신 곳이 어디 있습니까?

우리가 숨 쉬고 살아가는 공기만 해도 얼마나 자랑할 만합니까? 우리가 마시지 않으면 살 수 없는 물을 주시고 계신 것은 어떻습니까? 모든 생명체가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태양을 주심은 어떻습니까? 먹을 수 있는 과일들과 양식들을 주심은 어떻습니까? 지구를 품고 있는 저 바다 주심은 어떻습니까?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함을 드러내 주고 있는 자랑거리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단 한 번도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자랑거리도 아닌 것을 가지고 하찮고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지고 자랑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랑은 자랑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 모두는 자랑하고자 하는 죄성을 버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의 자랑하지 않는 사랑을 가지고 내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내가 할 수 있는 충성을 다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일생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은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0) 2019.10.24
사랑은 교만하지 아니하며  (0) 2019.05.05
사랑은 시기하지 아니하며  (0) 2019.04.19
사랑은 오래 참고  (0) 2019.04.15
사랑은 온유하며  (0) 2019.04.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