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십자가의 복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5. 18. 18:28


십자가의 복음

요한복음 3:16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살펴보려고 하는 요한복음 3:16절은 두 부분으로 분리해 볼 수 있습니다. 그 첫째 부분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죄악에 빠진 이 세상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를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두 번째 부분은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라는 부분입니다. 여기서는 십자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잘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믿는 성도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 사이에 서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이 십자가는 하나님이 죄인이 된 인간을 사랑하는 사랑의 결정체이며, 동시에 이 십자가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인 사람들이 받게 되는 그 모든 은혜의 출발점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십자가를 중심으로 앞부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하고 있고 그 십자가 뒷부분에는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요한복음 3:16절 말씀의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이중적인 구조로 되어 있는 요한복음 3:16절 말씀 속에서 십자가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십자가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바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까?

그것은 골고다 십자가 위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믿게 될 때입니다. 그리고 이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에게서 뗄레야 뗄 수 없는 사건이 됩니다.

 

이 요한복음 3:16절 말씀을 우리는 복음의 요약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이 복음을 요약하고 있는 요한복음 3:16절 말씀의 주어는 누구입니까? 원문을 보면 그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다.’라고 함으로 주어가 하나님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이 십자가 복음의 주도적인 분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주도적으로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죄악 된 이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악된 이 세상을 사랑하시되 이처럼, 이만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죄악 된 세상을 어느만큼 사랑하셨습니다.

죄악 된 세상, 그래서 죄로 멸망을 받아 지옥 형벌을 받을 수밖에 없는 그런 세상을 사랑하사, 그 죄에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자기 독생자를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실 정도로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랑은 사람들이 가진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 사랑은 우리에게 없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오직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사랑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큰 하나님의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없습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실 때 우리는 이 놀라운 사랑을 조금 맛보아서 알게 될 뿐입니다. 그 외의 방법으로 이 사랑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다시 다른 존재로 태어난다는 윤회를 주장합니다.

사람이 죽은 후에 윤회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지만, 사람이 죽어서 윤회한다는 것을 인정을 하고 우리가 그렇게 죽어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100번 하고, 1,000번을 하게 될 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시는 그 놀라운 사랑을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와 차원이 다른 사랑이며 이 세상을 초월해서 계신 하나님 차원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후서 12:2절 말씀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이 계신 3층천을 경험하였고,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그는 십 사년 전에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바울은 이 때 경험한 셋째 하늘을 고린도후서 12:4절 말씀을 보면 낙원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낙원에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유대인은 하늘을 3층으로 되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첫째 하늘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물질세계로 이루어져 있는 이 우주 전체를 말합니다. 둘째 하늘은 하늘에서 쫓겨난 사단 마귀가 지금 공중 권세를 잡은 자로 다스리고 있는 곳을 말합니다. 셋째 하늘은 하나님이 직접 다스리고 계시는 하늘을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십 사년 전에 하나님이 집적 다스리고 계시는 이 셋째 하늘까지 이끌려 올라갔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그 때 자신이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는 모른다고 합니다.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바울은 이 하늘에 올라가서, 이 세상에서 자신이 사용하고 있었던 인간의 언어와 전혀 다른 언어, 인간의 언오로는 전혀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사람들이 의사소통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는 언어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 언어는 이 세상의 언어가 아닌 하늘의 언어였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언어로는 전달해 줄 수 없는 언어였다고 합니다.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사람의)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 (전달해 줄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라고 하였습니다.

 

부연설명을 해보면 이렇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그 모든 언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서로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자기의 마음과 생각과 감정들을 이 언어를 통해 전달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이 세상의 언어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제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사소통 하면서 살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주신 언어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이 언어는 이 세상과 차원이 다른 하나님 나라에서는 사용할 수 없는 언어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물질적인 언어와는 다른 언어, 바울이 3층천의 하늘에 올라가서 들었던 언어, 바울이 낙원에 가서 들었던 그 언어는 영적인 나라인 하나님의 나라에서 사용하게 되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언어를 들었지만 그 들은 내용을 이 세상의 언어로 전달해 줄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의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하늘의 언어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이 말씀을 통해 전달하고 싶은 말씀은 이것일 것입니다.

자신이 비록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인 신약성경의 거의 절반을 기록하였지만, 자신이 낙원 즉 3층천에 올라가서 들은 그 말은, 하나님이 영감으로 주신 그 말씀과는 전혀 다른 하늘의 언어 하나님의 차원의 언어였기 때문에 이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는 표현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용하며 살아가는 한국어 일본의 영어 중국어와 같은 언어를 주신 분이실 뿐 아니라, 육체를 가진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늘의 언어까지 주신 분이십니다. 우리가 장차 낙원에 들어가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면 이 하늘의 언어로 의사소통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복음 3:16절의 말씀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을 통하여 이 세상의 사랑이 아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로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차원의 사랑으로, 하나님께서 사랑할 수 있는 최대한의 사랑으로, 그처럼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내 보여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을 완전히 이해할 수 있을까요?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존재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고 살고 있기 때문에 무엇을 알아도 부분적으로만 압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존재와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제한을 전혀 받으시지 않기 때문에 부분적으로 알지 않으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단 한 순간에 그 전체를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과 물질의 제한 속에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거리만 조금 멀리 떨어져 있어도 희미하게 밖에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의 차원에 존재하고 계시는 우리 하나님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는 전혀 거리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시간과 공간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단 한 순간에 다 아시는 전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모르시는 것이 전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이해를 우리들이 언제 할 수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까? 지금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아나’, 우리 구원이 완성되어 하나님의 나라에서 살아가게 될 그 날이 오면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우리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지금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들을 알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에게 진리를 계시해 주시면 우리는 제한된 지적 능력으로 희미하게 또 부분적으로 알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마다 신앙이 다르고 믿음이 다르고 이해력이 다른 것입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믿음과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믿음과 다른 교회가 고백하는 믿음이 다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큰 줄기는 같지만 세분하여 들어가면 이해가 다양한 것입니다. 우리가 산상설교의 서론에서 살펴보았듯이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보는 입장이 서로 많이 다른 이유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힘써 기도해야 하는 한 가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셔서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은혜를 바로 알게 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바울은 늘 이것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마음눈을 밝히사 그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인지, 또 성도들이 앞으로 받게 될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무엇인지, 또 하나님의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무엇인지를 늘 알고자 기도했고, 또 다른 성도들도 이것을 깨달아 알 수 있게 해 주시기를 기도 했습니다.

 

구약의 성도들은 누구입니까?

신약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입니까? 신구약의 성도들은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때때로 사람들에게 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맛보아 알게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사랑을 맛본 사람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삶을 살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약시대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맛본 사람 중 한 사람인 하박국이 한 고백을 살펴보십시다. 하박국 시대에는 이스라엘이 이방인들과의 전쟁에서 패하여서, 집들은 파괴되고, 가족들은 희생되고, 그 산업을 다 폐허로 변하였습니다. 하박국은 이 전쟁의 폐허 위에 서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합니다.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고 계시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통치가 어디 있습니까? 어찌하여 우리보다 더 악한 사람들이 우리와 싸워서 승리하게 하시며, 우리가 왜 그렇게 악한 사람들에게 져서 이 고통을 받게 하십니까? 하나님이 이 문제에 대해 대답해 보세요. 내가 묻는 이 질문에 대해 대답해 보세요.’ 라고 질문합니다.

 

이런 질문하고 있는 하박국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답이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렇게 멸망당하도록 한 이유는, 그들이 이 고통 속에서 그 범죄를 깨닫고 돌이켜, 다시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고 돌아오는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주신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 놀라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닫고 난 후에 무엇이라고 그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까?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저는 이 하박국의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신약시대에 이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 맛본 사도바울이 한 고백을 살펴보십시다.

사도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는 삶을 살 때에, 예수 믿는 사람들을 잡아 오려고 이방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인생이 180도 변하여 복음을 박해하던 자가 이제 복음의 증인으로 평생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이 복음의 전도자, 복음의 증인으로 살아갈 때에 많은 고난을 당하게 됩니다. 그가 당한 고난에 대해 고린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창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고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고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게 되면 내가 애타지 아니하더냐

 

사도바울이 당한 고난이 어디 이것뿐이었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고난의 삶을 살았던 사도바울은 무엇이라 고백합니까?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 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바울은 자신이 당하며 사는 그 무엇도 그 어떤 고난의 삶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자기를 끊을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바울의 고백이 저와 여러분들의 고백이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우리가 즐겨 부르는 찬송가 중에 304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이 있습니다.

그 가사가 이렇습니다.

 

1절을 보겠습니다.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말로다 형용 못하네, 저 높고 높은 별을 넘어 이 낮고 낮은 땅위에

죄 범한 영혼 구하려 그 아들 보내사 화목제물 삼으시고 죄 용서 하셨네.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1절에서는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 인간이 전혀 짐작해 볼 수도 없는 하나님의 차원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괴로운 시절 지나가고 땅위의 영화 쇠할 때, 주 믿지 않던 영혼들은 큰 소리 외쳐 울어도

주 믿는 성도들에게 큰 사랑 베푸사, 우리의 죄 사했으니 그 은혜 잊을까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2절에서는 지금은 괴롭고 힘겨운 삶을 살지만 주님이 재림하시는 그날이 되면 상황이 역전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땅위에서 영화를 누리던 그 모든 영화들은 쇠하게 될 것이나, 하나님을 믿는 자신은 그 날에 하나님의 큰 사랑 안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은혜와 위로를 받게 될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3절입니다.

하늘의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리

하나님 크신 사랑은 측량 다 못하며, 영원히 변치 않는 사랑 성도여 찬양하세

3절에서는 자신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하늘을 두루마기 삼아도, 바다를 먹물 삼아도 다 기록할 수 없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찬송가 3절에서 인용되고 있는 이 찬송 시는, 11세기경에 유대인에 의해서 기록된 하다무트라는 시에서 유래했습니다. 거기에는 하늘을 양피지로 펼치고, 세상의 모든 갈대와 나뭇가지가 펜이 되며, 대양을 즉 바다를 모두 잉크로 채우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능숙한 서기관이 될지라도, 하나님의 크신 영광에 대한 기이한 이야기를 다 적을 수 없으리라.’ 라고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와 사랑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를 잘 알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2차 대전 때 독일군에게 잡혀서 그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이 수용소에서 600만이나 되는 유대인이 독gas를 마시고 죽고, 또는 살아 있는 채로 생체 시험도구가 되어 죽어갔습니다. 그 때 그 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던 어떤 유대인이 그 수용소 벽에 이런 글을 써 놓았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도, 한없는 하나님의 사랑 다 기록할 수 없겠네, 하나님의 크신 사랑 그 어찌 다 쓸까? 저 하늘 높이 쌓아도 채우지 못하네.’

 

이 글은 자신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독가스로 죽어가고, 생체 시험의 도구로 죽어가고 있었던 처참한 현실 속에서도, 이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며 죽어갔던 그 사람들이 가지고 살았던 놀라운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수용소 벽에 기록되어 있던 이 글을 접하게 된 어느 미군 병사가 수용소 벽에 있는 그 글을 기록해 갔고, 이 글이 나중에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 부인에게 전해졌고, 그 사모님은 통해서 찬송가 304장의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찬송시를 작사한 프레드린 레만 목사님에게 전해졌던 것입니다.

 

당시 프레드릭 레만목사님은 시골에 있는 어려운 교회를 담임 목회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만으로는 도저히 생활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목회를 할 뿐 아니라 세상적인 직업도 가져야 했습니다. 그래서 주간에는 노동자로 일하면서 주일이면 교회를 섬겼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겠습니까? 그래서 힘들어 하고 있었습니다.

 

이 목사님은 어느 날 점심시간이 되어서 사모님이 싸준 도시락을 먹으려고 펼쳤습니다.

그런데 그 도시락 위에 사모님이 써서 함께 넣어놓은 글이 있었는데 바로 그 글이 아우슈비츠 수용소 벽에 기록되어 있었던 그 글이었습니다. 이 글을 읽고 목사님은 다시 힘을 얻어서 목회하게 되었으며, 그 글을 바탕으로 찬송시를 썼고, 이 찬송 시에 그 딸이 곡을 붙인 것이 바로 찬송가 304장이 된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박국 같이, 사도 바울 같이,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 같이, 요한복음 3:16절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조금 맛본 사람들이 아닙니까? 이 세상의 관점으로 볼 때에 십자가는 저주의 십자가 고통의 십자가이지만,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맛본 사람들에게 그 십자가는 영광의 십자가요 승리의 십자가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전해주는 십자가가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현재 삶은 어떻습니까?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의 삶과 같이 괴롭고 힘든 삶은 아닙니까? 비록 우리의 삶이 괴롭고 힘든 삶일지라도, 그 힘든 삶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을 찬양했던 프레드릭 레만 목사님과 같이 우리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그 놀라우신 사랑을 믿고 찬양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늘 백성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서를 보면 천국은 그 밭에 보화가 묻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 모든 소유를 팔아 밭을 산 사람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모두는 교회가 간직하고 전해 주고 있는 복음의 보화를 발견하고, 우리의 삶의 중심을 교회로 생각하고, 무엇보다도 먼저 교회를 통해 하나님을 예배하고 봉사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직도 이 복음의 보화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우리가 발견한 이 보화를 전해 주고자 기도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어서 살펴볼 것은

둘째,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제가 먼저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우리의 원수 마귀 사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건, 그래서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사건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갈보리 언덕에 세워졌던 십자가일 것입니다.

 

운전을 하다가 실수로 사고가 나서 가족을 다 일어버린 사람은 그 교통사고를 평생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 때 조금 더 조심해서 운전할 걸 하면서 후회하고 후회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사탄도 갈보리 십자가에서 실수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죽인 그 사건을 지금까지 잊지 못해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단은 지금도 그 십자가 사건만 아니었으면 온 세상 사람들을 죄의 종으로 멸망으로 끌고 갈 수 있을텐데, 그 십자가 사건 때문에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하고 또 아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사탄은 그 십자가 사건을 생각하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후회하고 있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골고다 언덕, 예수님의 십자가가 서 있던 바로 그 자리가, 사탄에게는 실패의 자리이고, 패배의 자리이고, 그 모든 권세를 다 잃어버리게 한 자리였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그 십자가의 사건만 아니었더라면 아직도 이 세상의 신이 되어서, 아담에게서 취한 만물통치권을 행사하며 살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 사건이 그의 모든 권세와 능력과 특권들을 다 빼앗아가 버렸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으로 보면 갈보리 십자가 사건은 마치 패배의 자리처럼 보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치 죄인처럼 갈보리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패배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마호메트문선명 같은 이단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메시야로서의 사명에 실패했다고 까지 말합니다.

 

그러나 실재적으로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의 모함으로, 빌라도에 의해 정죄함을 받고, 죄인들과 함께 달려 돌아가신 그 갈보리 십자가는, 하나님께서 태초부터 계획하셨고, 또 계속해서 그 종들을 통해 증거 해 오셨던,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대속사역을 완성한 자리였습니다. 이렇게 갈보리 십자가는 외형적으로 보면 실패의 자리 같아 보이나, 실재적으로는 승리의 자리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룬 성취의 자리였습니다.

 

찬송가 151장의 만왕의 왕 내 주께서 라는 찬송가 가사를 보면 십자가 십자가 내가 처음 볼 때에 나의 맘에 큰 고통 사라져, 오늘 믿고서 내 눈 밝았네 참 내 기쁨 영원하도다.’ 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이 가사와 같이 예수님의 갈보리 십자가는 우리의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 우리의 눈을 밝혀 주었으며, 우리에게 영원한 희망을 주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여러분들 중에도 드라큐라오멘 같은 공포영화를 보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이런 영화들을 보면 악령이나 사탄이 무엇을 제일 두려워하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갈보리 언덕에서 사탄에게 치명적인 실패를 가져다 준 십자가입니다.

 

이런 세상 영화들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런 세속적이고 상업적인 영화를 만들어서 돈을 좀 벌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어쩌면 자신이 참 알라의 예언자라고 하고, 또 자신이 참 구세주라고 하는 마호메트문선명보다 더 지혜로워 보인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들은 마호메트문선명이 전혀 알지 못하는 십자가에서 패배한 사탄에 대해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무지한 사람들을 교주로 믿고 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 이 사람들에게만 숨겨졌던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따랐던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한 때는 숨겨졌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메시야의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가르치셨을 때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할 것이라고 강하게 십자가를 부정하였습니다.

 

그러면 이것이 제자들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일일까요?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적용되는 일은 아닙니까? 오늘날 예수를 믿는 성도들은 이 십자가를 얼마나 깊이 있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요? 제가 성도의 숫자도 얼마 되지 않는 개척교회에서, 그래서 단 한 사람이라도 아쉬운 개척교회를 담임목회 하면서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성도들의 심령 속에 십자가에 대한 신앙이 얼마나 확실하게 자리 잡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은 다 몰라도 이 십자가 신앙 하나만은 우리 교인들에게 확실하게 심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이 그 권세로 바람과 바다에게 명하시자 바람과 바다도 그 권세에 복종하였습니다. 귀신을 명하시자 귀신이 떠나갔습니다. 각종 병자에게 말씀하시자 병이 나음을 받았습니다. 죽은 자에게 명령하시자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이 권세를 우리에게도 회복해 주셨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믿음으로 예수님의 이름의 권세를 사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회복하신 이 권세를 믿음으로 사용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의 권세가 담긴 그 이름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하면 귀신도 떠나갑니다.

불신앙도 물러갑니다. 병도 고쳐집니다. 저주도 물러갑니다. 예수 이름에 이런 권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믿고 선포하면 우리가 믿고 선포한 그대로 우리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오해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단지 예수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전하니까 십자가 복음이 아무 가치도 없는 것인 양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을 마치 아무 값도 치루지 않고 그냥 주어지는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의 가치는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 있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 복음의 가치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하면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알고 싶어서 흠모했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십자가 복음의 가치를 오해해서 어떤 교회에서 앎 병이 나았다고 하면 대단한 일이 일어난 것이 같이 야단법석을 떱니다. 그 교회에 무슨 기적이나 신비한 일이 있다고 하면 우르르 그런 교회로 몰려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들에게 이 십자가 복음을 전하면 성도들은 시큰둥해 합니다.

왜 그런지 모르겠습니다. 이 십자가 복음이 앎 병을 고치는 것보다 기적보다 신비한 체험과 역사보다 더 가치 없는 것입니까? 아니지요. 그런데도 오늘날 성도들의 형태를 보면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제가 여러분에게 한 가지를 물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앎 병을 고쳐 주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예수님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이 쉽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앎 병을 고치시는 것은 우리가 손가락 조금 움직이는 것 우리가 나사 못 하나를 빼는 것 보다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병 고침의 기적을 보고 야단 법석 떠는 사람들을 볼 때 감격하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복음의 참된 가치를 알고 믿는 사람들을 볼 때 감격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복음 앞에서 감격하는 그런 사람들을 하나님은 옳다 인정하시고 성령으로 그런 사람을 인 치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하나님께서 하나님이 사랑할 수 있으신 최고 최선의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다고 합니다. 그 사랑의 증거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하나님께서 십자가에서 그 아들 예수님을 내어 주신 그 사건이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하기 가장 힘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생명을 다른 사람을 위해 주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 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게 했던 사건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분신이요 생명같이 아끼던 그 아들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헌신을 통해서 자신 전부를 하나님께 드린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향한 사랑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사랑하는 아들을 포기해야 하는 아버지의 이 아픈 마음을 경험하면서, 죄인 된 자신과 인류를 사랑하시기에 그 독생자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랑을 포기해야 하셨던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을 맛보았던 것입니다. 이 하나님 차원의 사랑을 맛본 아브라함이 바로 우리 믿음의 조상이 되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독자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어려운 일이었듯이, 하나님께서 하시기 가장 어려웠던 일은 바로 세상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그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일이셨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이 보다 더 어렵고 힘든 일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복음에 나타나고 있는 이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십자가에 나타난 복음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복음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복음 보다는 기적을 추구하고, 은사를 추구하고, 뭔가 신비한 것을 쫒아갑니다. 그러나 십자가 사랑을 아는 우리들은 바울과 같이 이런 것들을 자랑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만 의지하고 자랑하고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은혜를 아는 신앙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고백하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둘째,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이 받게 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들고 있는 우리 모두는 골고다 언덕에 세워졌던 예수님을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과 권세, 십자가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믿고, 십자가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한 주간의 삶을 믿음을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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