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십자가 신앙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4. 23. 04:52



십자가 신앙

누가복음 23:44-46

 

오늘날 교회의 상징으로 사용되고 있는 십자가는 본래 사형을 집행하는 한 도구였습니다.

십자가를 형벌의 도구로 처음 사용한 나라는 페르시아입니다. 페르시아는 자신들의 지배와 통치에 항거하는 외국인들을 십자가에서 처형하였습니다. 이 십자가형벌이 나중에 로마로 전해져서 로마는 주로 탈주한 노예, 흉악한 살인자, 내란을 선동한 반역자 등에게 사용하였습니다.

 

유대역사가 요세푸스에 증언에 의하면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았던 당시 골고다 언덕 위에는 항상 세 개의 기둥이 세워져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흉악한 범죄자와 로마에 반역한 사람들을 그 기둥 위의 십자가에 매어 달았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십자가에 매어달려 죽으셨다는 것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대 산헤드린 공의회에 의해 가이사에게 고발될 때 그 고발된 죄목이 반역죄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유대종교지도자들은 거짓 증인을 내 세워서 예수님이 로마에 반역을 꾀하려고 하는 정치범이라고 고발한 것입니다.

 

우리가 종교영화를 보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직접매고 가시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적인 고증을 거친 것이 아닙니다. 요세푸스가 증언하는 바에 의하면 예수님은 골고다 언덕 위에 이미 세워져 있는 그 기둥 위에 얹을 가로로 된 기둥을 메고 골고다로 가신 것이 됩니다. 이 메고 간 기둥을 이미 골고다 언덕위에 세워져 있는 기둥 위에 올려놓고 고정시키면 십자가가 형벌을 집행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죄인의 앞가슴에는 그 죄를 기록한 명패를 붙였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앞가슴에도 이 명패가 붙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명패에 기록된 죄명은 유대인의 왕이었으며, 당시 공용어로 사용되었던 세 개의 언어 즉 히브리어, 라틴어, 그리스어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죄명을 십자가가 완성된 이후에는 십자가 윗부분에 달았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는 이 십자가형에 쓰일 나무 기둥 하나를 지고 갈 수 없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군병들은 예수님이 지고 가시는 나무 기둥을 대신지고 갈 사람을 찾다가, 유대인의 명절을 지키려고 이제 막 예루살렘에 도착한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 시몬을 붙잡아서 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시몬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놀라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레네 출신 시몬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반강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이 시몬이 초대교회의 유명한 사람이 되고, 그의 가족들도 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종교지도자 되었습니다.

 

이런 사건을 보면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프리카 구레네 출신 시몬은 예수님이 누구신지 전혀 알지 못했고 또 스스로 원해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도 아닙니다. 그는 우연히 그 때 예루살렘에 도착하여서 반 강제적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지고 갔지만 이것이 복이 되어서 자신은 물론 그 가족까지 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요? 예수님께서 늘 이렇게 말씀해 오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믿는 어떤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대접하면 그 대접을 마치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생각하셔서 그 선행을 예수님이 대신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믿지 않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또 믿는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작은 선행이라도 한다면 그것을 마치 내게 한 것으로 간주하여서 내가 그 사람을 대신해서 갚아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구레네 시몬은 누구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었습니까?

몸이 허약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져 주었습니다. 이 십자가는 자기 스스로 원해서 진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군병들의 강압을 이기지 못하고 대신 져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이것을 기억하시고 늘 말씀해 오신 대로 그와 그의 가정에 복을 주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더 가치가 있는 구원의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군이 되게 하는 큰 영적인 복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성도들을 보면 이런 믿음을 상실한 것 같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혹 가족 중에 처음으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거나 혹은 가족 중에 목회를 하는 목회자가 있거나 또는 자기 친구와 이웃에 개척교회를 하는 목회자의 가정이 있어도 그런 사람들 그런 교회를 향하여 마음을 열어 섬기려고 하지 않습니다. 요즘 개척교회가 어렵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 어려움을 함께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요즘 성도들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살기보다 자기의 생각과 판단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이 시대 성도들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것이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중요한 특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런 시대적인 조류를 따라 살기 때문에 저희가 교회를 개척했다는 것을 아는 가족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저희가 개척목회를 시작했다는 것을 아는 친척 친구 이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리고 오늘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개척하는 저희들과 어려움을 함께 나누겠다고 나서는 사람들은 별로 없었습니다. 혹 어떤 사람들은 함께 하겠다고 왔지만 견디지 못하고 얼마 있지 않아서 돌아가 버리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간 이런 시대에도 우리 교회와 어려움을 함께 한 사람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오늘까지 지내 온 것입니다. 제가 이런 분들에게 무엇으로 보상을 해 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 예수님이 약속하신 말씀을 붙잡고 기도할 뿐입니다. 하나님 가까운 형제도 친척도 외면하는 저와 참빛교회를 위해 헌신하고 계신 분들 아시지요. 이분들이 하고 있는 그 모든 헌신을 예수님께 하신 것으로 받아주시고 성경에 약속하신대로 그분들과 가정과 일생의 삶 속에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이 받은 것과 같은 복을 이 분들에게 주시기를 원합니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어떤 복으로 저와 교회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에게 갚아 주실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 돌이켜 보니 이제 하나님이 복을 주신 그 결과가 조금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분들이 한분 두분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이 골고다로 가시는 길은 너무 힘드신 길이었습니다.

십자가의 재료가 될 나무 하나 지고 가실 수 없으실 정도로 힘든 길이었습니다. 그 힘든 와중에 예수님이 하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님이 십자가에 쓸 나무를 지고 골고다로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여인들이 울며 따라 왔습니다. 그런 여인들을 보면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를 위해서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정죄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지고 장차 로마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인데 그 때 이 여인들이 사랑하는 가족들이 당할 아픔을 미리 내다보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형벌 받는 길을 가시는 그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그를 믿고 따른 백성들을 걱정하시고 염려하셨습니다. 이 분이 우리 주 예수님이십니다.

 

이렇게 해서 골고다 언덕까지 올라온 죄수들에게 로마 병사들은 쓸개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쓸개 탄 포도주는 사형수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한 일종의 마취제였습니다. 그러면 왜 로마 군인들은 사형수들에게 마취제를 주었을까요? 그것은 십자가형이 너무 고통스러운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맨 정신으로 십자가형을 받아 낸다는 것은 견디기 힘든 형벌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십자가형이 얼마나 끔찍한 형벌인지 전에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로마군인들이 죄인들을 십자가에 달 때 그 길이가 20Cm 가 넘는 큰 대못으로 양쪽 손목뼈 사이를 박습니다. 그리고 포개 놓은 두 발 위에 이 대못을 하나 더 박습니다. 십자가형을 받게 되는 사람은 이 세 개의 대못으로 그 무거운 몸 무개를 지탱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몸 무개는 주로 받았던 양쪽 손목이 조금씩 조금씩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 보십시오.

그 몸 무개를 전부 받아야 했던 양 손목이 찢어질 때 느꼈던 고통이 얼마나 심했겠습니까? 이 때 죄수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고통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는 손목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두 발로 온 몸을 버티면서 손목의 아픔을 조금 덜어 보기도 하고 그래도 손목이 너무 아프면 한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몸 무개를 한쪽 손으로 지탱하면서 다른 한쪽 손은 쉬게 하고 또 그 한쪽 손목이 너무 아프면 그 반대로 하여 또 다른 쪽 손목으로 쉬게 하면서 아픔을 참았다고 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이 십자가 위에서 3일에서 일 주일 정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동안 몸 안에 있는 피와 물이 조금씩 조금씩 흘러나오면서 죄수는 목이 타 들어가는 갈증을 느끼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몸 안에 있는 진액이 다 빠져나가서 죽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형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십자가형은 몸서리치는 형벌이었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형벌도 바로 이 십자가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끔찍한 사형도구였던 십자가가 콘스탄틴 황제 이후 기독교를 상징하는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십자가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었기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을까요?

고난 주일을 하루 앞에 두고 있는 이 종려주일에 우리는 십자가는 무엇인가? 십자가가 왜 기독교를 상징하는 도구가 되었는지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십자가는 저주를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신명기 21:22-23절입니다.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나무에 달려 죽는 것 곧 십자가에서 죽는 것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었다는 상징이었다고 합니다. 이 말씀에 근거해서 사람들은 십자가 형벌을 받고 죽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님을 고소할 때 로마에 반역을 꽤한 선동자라고 고소하였고 군중들에게는 예수님을 신성 모독자라고 고발하면서 군중들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라고 외치도록 선동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렇게 예수님께서 신성모독자로 로마 당국에 의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게 되시면 이것을 보는 제자들이나 군중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것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고 이것은 예수님이 메시야가 아니라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종교지도자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게 로마에 반역한 자로 고소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종교지도자들의 오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닙니다. 죄의 종 된 인류의 죄를 대신지시고 인류를 대신 저주받아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해 갈라디아서 3:13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것은, 죄인 된 우리들을 대신하여 죽으신 대속적인 죽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율법의 저주는 곧 사망이데,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저주를 받고 십자가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사람에게 내려지는 율법의 저주가 이렇게 십자가 위에서 구체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면 반드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21:22-25) 그런데 죄는 우리가 지었는데 처벌은 예수님께서 대신 받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우리 죄에 대한 형벌을 받으신 것입니다. 이 예수님의 대속적 죽으심을 믿는 믿음이 우리를 죄인에서 의인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사단의 나라에서 하나님 나라로 옮겨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거저주시는 은혜입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은혜를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잘못 생각합니까? 첫째는,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다 사해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는 완전히 의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모두 사해주셔서 나는 이제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은 잘못된 주장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는 칭함을 받았다고 해서, 우리가 죄와 전혀 상관이 없는 의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구원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죄의 속성을 지니고 있는 죄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이후에도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이후에는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서, 죄와 상관이 없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이후에는 다시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하는 구원파의 주장은 사실이 아닙니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내 죄를 사해주셨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죄에 매여 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잘못된 생각입니다. 우리가 말로 행동으로 물질로 죄를 범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다른 사람에게 고통을 주었다면 우리는 그 죄의 값을 치루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내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과는 별도로 우리가 범한 죄의 값을 우리는 치루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디에서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모든 죄가 예수의 십자가 안에서 다 사해졌다는 것을 누구보다 확실하게 믿었습니다. 그런가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그가 전에 지은 죄를 빚으로 여기고 빚진 자의 심정으로 평생 그 지은 죄의 빚을 갚아나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다윗은 하나님의 나라를 하나님 대신 다스리면서 그 나라가 마치 자기 나라인 것처럼 인구조사를 하면서 그 강대함을 자랑하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다윗은 이 교만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다윗의 죄는 용서하셨지만, 그 죄에 대한 형벌은 치루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3일 동안의 온역이 발생하여서 약 7만 명의 백성들이 죽게 됩니다.

 

또 다윗이 밧세바와 죄를 지었습니다.

다윗은 그 죄를 지적하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듣고 하나님께 죄를 지었음을 아뢰며 회개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이 지는 그 죄를 그 즉시 사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다윗의 이후의 삶을 보십시오.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다윗은 이 후 수많은 고난과 고통을 삶을 살게 됩니다. 다윗은 고난과 고통 받는 삶을 통해 그가 범한 죄의 값을 치루어 나갔던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지 못하면 뻔뻔스러운 신자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이 지은 죄가 하늘까지 닿아 있는데도 자신은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처럼 위선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사람의 돈을 떼먹고도 조금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고 뻔뻔스럽게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습니다. 가족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을 하고서도 자책하는 마음을 가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내 죄를 사해 주신 것만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죄를 사해 주셨어도 죄를 지은 그 사람은 자신이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루도록 하십니다.

 

전에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밀양이라고 하는 영화가 고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고 기독교인이 된 웅변학원원장이, 자신이 유괴해서 죽인 아이 엄마가 면회를 와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학원장은 자기가 죽인 아이 엄마가 자기 때문에 당하게 된 그 고통에 대해 사죄하지는 않고 자신이 예수 믿고 그 죄를 사함 받았으며 나는 지금 죄에서 구원받은 기쁨과 행복과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신앙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큰 죄를 예수님 안에서 다 용서해 주셨다고 해도 내가 이웃에게 지은 죄와 그 죄가 가져다 준 아픔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참으로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이라면 내 죄 때문에 아파하는 이웃에게도 진실한 마음으로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그 손해 입은 것을 배상하려고 하는 빚진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빚을 갚아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이웃에게 입힌 피해를 갚을 수 없게 되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성경은 죄를 지었으되 갚을 수 없는 죄의 값이 있다면 하나님의 성전에 대신 갚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한번도 우리가 이웃에게 지은 죄를 갚지 않아도 된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신 것과는 별도로 우리가 이웃에게 손해를 입힌 것이 있으면 반드시 갚으려고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달리신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첫째, 십자가는 죽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특히 이 십자가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죽은 자라는 것을 나타내 보이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이 저주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저주를 다 제거하시고, 우리에게 다시 새로운 생명을 주셔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선한 일군이 되고 하나님의 충성된 일군이 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 할 일입니다.

 

또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둘째, 십자가는 속죄를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로마서 3:24-25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율법의 저주 아래에서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이었습니다. 또 우리 모두는 마귀의 종으로,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던 진노의 자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을 따라 지으신 우리들을, 영원한 죽음의 길로 가는 것을 원치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를 위해 여자의 후손을 보내주실 것이라는 복음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대로 때가 되매 우리 주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성취로 오신 예수님은 자기에 대해 스스로 증거하시를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고 왔다"(10:4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또 바울은 증거 하기를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다"(1:7)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구약의 모든 제사를 완성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구약의 제사를 완성하셨습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제물이 되심으로 단번에 우리의 죄를 사하는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완성하셨습니다.(10:4-14).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이 대속의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원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아담의 죄 아래 태어났기 때문에 그 자신도 죄로 죽어야 하는 인간이 어떻게 스스로를 죄에서 구원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죄인인 인간이 다른 사람의 죄를 사해주기 위해서 대신 죽어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죄인인 우리가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죄 없으신 분이 계셔야만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다 아담의 죄 아래서 죄인으로 태어나기 때문에 인간은 구원주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구원주가 될 수 있습니까? 죄와 떠나계시는 분이 구원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와 떠나 계시는 분은 누구입니까? 죄와 떠나 계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을 그 죄에서 구원하실 수 있으신 분은 오직 하나님 밖에 없으십니다.

 

그런데 율법을 보면 동해보상법칙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에 의하면 인간이 지은 죄는 반드시 인간이 갚아야 합니다. 비록 하나님께서는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셔도 인간의 죄를 대신 갚아 주실 수가 없습니다. 무죄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갚아주시려고 하면 반드시 죄가 없는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셔야만 합니다. 그래서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태를 빌려서 여자의 후손으로 예수라는 이름의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무죄하신 자신을 우리 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 주시고 구원해 주신 것입니다. 아멘.

 

이것이 우리의 구원사건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죄 아래 태어난 인간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자꾸 인간이면서 자신을 구세주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 가짜 구세주입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이 인간이 되어 오심으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7절 말씀을 보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또 바울은 증거 하기를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4:12)라고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내가 곧 유일한 길이요 유일한 진리요 유일한 생명이시라 고 증거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속죄함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구원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속죄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고 사망에서 구원해 주고 하나님의 저주에서 구원해 줍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배로운 피에 구원하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보혈의 피를 늘 찬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보혈의 피가 우리의 모든 죄를 속해 주고, 또 우리를 죄와 저주에서 구원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들마다 십자가 종탑을 높이 세우고 세상에 증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십자가에서 속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속죄함의 은혜를 입은 자들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먼저 속죄의 은혜를 입게 해 주셨습니까? 먼저는 우리들로 하여금 이 속죄함과 구원받은 자의 기쁨을 가지고 살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가 받은 이 은혜를 아직 알지도 못하는 세상에 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종려주일을 맞이한 우리가 새롭게 다짐해야 할 사명입니다.

 

자신의 임의대로 믿고 임의대로 삶의 방식을 정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청빈한 삶을 살려고 했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자기보다 훨씬 크신 하나님의 기준과 하나님의 증거를 무시하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정죄함을 받게 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국가가 정해 놓은 높은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 법을 지키면서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런 국가의 법을 무시하고 자신의 생각과 기준대로 살아간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런 삶이 국가의 법에 저촉되면 어떻게 됩니까? 그 사람은 결국 국가의 실정법을 어긴 범법자로 재판을 받고 그 죄의 값을 치루게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법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구원의 길과 방법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법과 이 길과 구원의 방법 안에서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자기는 자기 법대로 자기 기준대로 자기 방법대로 살고 또 구원을 받겠다고 고집하면 어떻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인정하지도 않고, 하나님의 증거도 받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는 이 사람을 죄인으로 정죄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저와 여러분의 모든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를 죄를 속죄하셔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신 다 담당하신 예수님을 믿고 늘 찬양하고 늘 경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또 십자가는 무엇이었습니까?

셋째, 십자가는 승리를 상징하는 도구였습니다.

 

골로새서 2:13-15절입니다.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통치자들과 권세들을 무력화하여 드러내어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십자가로 그들을 이기셨느니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승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승리의 십자가를 믿음으로 우리도 그 승리에 함께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패배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실망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라고 믿고 따랐는데 그 예수님께서 저주를 받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니 이들의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던 십자가의 신비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은 패배의 상징인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셨고 또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증거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우리의 죄를 소멸하셨다고 하셨습니다.(2:16) 또 십자가로 하나님과 죄인 사이에 화평을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1:20) 그러므로 십자가는 치욕과 패배의 상징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며 하나님과 우리를 화목하게 한 가교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사단의 모든 권세를 파하셨습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여자의 후손의 뱀의 머리를 짓밟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오셨습니다. 그 약속대로 예수님께서 오셔서 뱀의 모든 권세를 십자가로 파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실 때 사단은 승리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승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이 승리는 일회적인 승리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의 승리를 믿고 나가는 사람들에 의해 이 승리의 역사는 주님이 다시 재림하시는 그 날까지 계속될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이 있는 사람들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룩하신 승리를 자신의 삶 속에서 계속 이루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십자가만 자랑하고 십자가만 의지하고 십자가 복음만 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이 있었던 바울은 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만 전한다.”고 했습니다(고전1:23).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2)고 했습니다.

 

우리가 꿈에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이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과 원수로 살아가던 우리를 구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누리며 살고 있는 모든 은사와 축복들이 다 십자가를 통해서 왔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가진 신앙은 십자가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믿고 확신하는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종려 주일에 바울이 십자가만 믿고 의지하고 자랑하고 승리하였던 것처럼, 우리들도 십자가 신앙을 굳게 붙잡고 십자가 그늘 아래에서 남은 생애를 늘 승리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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