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하나님의 구원과정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12. 4. 13:31




하나님의 구원과정

로마서 8:29-30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정이라는 제목으로 사람들이 어떻게 구원을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는지에 대해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학적인 내용들은 딱딱하기 때문에 사람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주제입니다. 그래서 요즘 강단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대부분의 설교들을 보면 이런 신학적인 문제는 거의 다루지 않고 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한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시대 조류가 이런데도 우리는 오늘 설교에서 신학적인 문제를 다룹니까?

그 이유는 이런 신학적인 문제가 우리 신앙의 기초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구원해 가시는 구원과정을 쉽게 풀어서 다루려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다양한 구원신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원신앙을 크게 둘로 나누면 자력구원과 타력구원으로 구분됩니다. 자력구원이란? 자기 스스로의 힘과 노력으로 구원에 이르려는 구원관입니다. 그런가 하면 타력구원관이란? 자기 이외의 다른 힘의 개입으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구원관입니다.

 

그러면 우리 기독교의 구원관은 어떤 구원관이겠습니까?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죄 가운데 빠져 있으며 그 빠져 있는 죄 가운데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 힘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구원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고 봅니까?

그 이유는 모든 사람들은 다 아담의 죄 아래 함께 팔린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도 죄인이 되어서 죄로부터 구원을 받아야 하는 존재인 사람들이 자신과 동일한 죄에 빠져 있는 다른 사람들을 구원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 죄인인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다면 이런 타력 구원관은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인이 된 사람들이 자신을 그 죄에서 구원할 수는 없기 때문에 죄 없으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오셔서 죄에 매여 살고 있는 사람들을 그 죄에서 구원해 주셔야 한다는 것이 바로 기독교의 구원신앙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의 개입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은 구체적으로 어떤 과정을 통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첫째는 칭의입니다.

 

칭의는 하나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은 창조사역 속에 구속사역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는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의 모습을 보면, 첫째 날에는 빛을 창조하셔서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둘째 날에는 궁창을 창조하셔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시고, 셋째 날에는 궁창 아래의 물에서 땅을 나누시고, 또 그 땅에서는 각종 식물들이 자라나게 하셨으며, 넷째 날에는 첫째 날 창조하신 하늘에 해와 달과 별들로 채우시고, 다섯째 날에는 물속에 각종 물고기들로 채우시고, 하늘의 궁창에는 새들로 채우시고, 여섯째 날에는 땅위에서 살아가는 각종 생물들을 만드시고, 가장 나중에는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하나님을 닮은 사람들을 창조하셔서 거기 살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시는 모습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부모가 앞으로 태어나게 될 그 자녀를 위해 옷을 준비하고 이부자리를 준비하고 귀저기를 준비하고 배내 저고리를 준비하고 우유병을 준비하고 유모차를 준비하는 것과 같이 그 창조하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도록 먼저 모든 준비를 다 마치신 후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인류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 가운데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은혜를 입고 창조된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과 배려에 화답하여 하나님을 잘 섬기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그 모든 사랑과 은혜를 헌 신짝처럼 내어버리고 유혹하는 사단의 말을 따라서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은망덕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이 아담과 하와가 범한 죄이며 이 죄로 인해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이렇게 해서 자신이 죄인이 된 것을 믿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되었다고 믿습니까? 우리가 아담과 함께 죄인이 된 것을 로마서에서는 대표성과 연계성의 원리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대표성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하여 월드컵에 나가서 우승하면 우리는 비록 그 경기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 선수들이 우리나라를 대표해서 우승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나라 국민 모두는 다 자기가 우승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입니다. / 아담이 범죄 할 때 우리는 비록 그곳에 없었지만 아담은 우리 모든 인류의 대표자로 범죄 했기 때문에 모든 인류는 다 죄인이 된 것입니다.

 

연계성의 원리는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범죄 할 때 우리가 아담과 함께 연계되어서 범죄에 참여 했다는 것입니다. 비록 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할 때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아담의 허리에 함께 연계되어 있어서 그 범죄에 참여 했다는 것입니다.

 

이 연계성의 원리를 다르게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이 북한에 살다가 남한으로 내려왔다고 칩시다. 그러면 그 사람만 남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월남 할 당시에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앞으로 그 사람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다 남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연계성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아담 당시 아담과 같이 범죄를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아담이 범죄 할 때 아담의 허리에서 연계되어 있어서 함께 범죄 하였고 또 함께 죄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구원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결 같은 사랑입니다.

 

창조에 나타난 하나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은 우리의 구원에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람들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것을 갖추어놓고 사람을 창조하셨듯이 우리를 구원하실 때도 죄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모든 준비를 다 해 놓으시고 그 이루어놓으신 구원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믿음으로 얻게 되는 이 구원을 우리는 칭의라고 합니다.

칭의는 의로움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고 의롭다고 칭해주시는 사건을 말합니다.

 

우리가 이런 하나님의 구원사건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조 때와 같이 구원사건에서도 하나님은 한결 같은 사랑을 베풀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들은 이 한결 같은 사랑을 너무 잘 압니다.

부모들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은 자녀가 잘 나서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자녀가 잘 났든지 못났든지 자기가 낳은 자녀이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기자가 범죄한 사람의 부모를 인터뷰 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때에도 그 부모는 사람들이 다 외면하는 흉악범이 된 그 아들을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고, 그 아이가 어릴 때난 착한 아이였다친구를 잘못 만나고. 그 성장 환경이 좋지 않아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면서 끝까지 자녀를 향한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부모님들의 한결 같으신 사랑입니다.

이렇게 그 부모가 자기 자녀를 한결 같은 사랑으로 사랑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한결 같은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해 주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사랑은 창조 시에도 나타났고 또 우리의 구원사건 속에서도 나타났습니다.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한결 같으신 사랑에 대해 요한 14:10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느니라.” 이 사랑 안에서 우리는 구원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둘째는 '성화'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모방본능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어린 자녀들에게는 그 부모를 닮고자 하는 모방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가 책을 가까이 하면 그 자녀들도 책을 가까이 하는 자녀가 되고 또 그 부모가 무엇이든지 만드는 것을 좋아하면 그 자녀도 그렇게 무엇인가를 만드는 것을 좋아하는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녀가 가지고 있는 모방본능입니다. 모든 자녀들에게는 그 부모를 닮고 또 그 부모를 모방하고자하는 모방본능이 있습니다.

 

우리 자녀들에게 이런 모방 본능이 있듯이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에게는 그 자신이 영적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자신에게 영적 생명을 주신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창세기 2:7절 말씀을 보면 사람은 비록 하나님과 달리 육체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지만 그 영은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자녀들이 그 부모를 모방하면서 성장하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람들도 그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배우고 모방하면서 성장하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존재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이제 아담의 후손들은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자녀 즉 마귀의 종이 되고 또 죄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 사람들은 그 아비 되는 마귀를 따라 죄를 지으며 사는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 타락이 지금 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모든 죄와 악의 근원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죄의 종 되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그 영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로 그 신분이 다시 회복되었을 때 그 본래 가지고 있던 죄의 본능에 더하여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고자하는 거룩한 본능이 다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때 회복한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본능을 통해 그 마음과 생각과 그 삶이 점점 거룩해져 나가게 되는데 이런 변화를 우리는 신학적으로 성화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그 영이 거듭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우리 안에는 이렇게 거룩함에 이르려고 하는 회복된 본능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안에는 그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따라 거룩하게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고 아직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로서 그 아비 마귀를 따라 죄를 짓고 범죄 하려고 하는 죄의 본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고자 하는 거룩한 본능이 있어야 하고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처럼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야 하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본능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하게 된 사람이라는 것을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아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이런 거룩한 본능을 가지고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반드시 그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을 닮은 삶의 증거들이 나타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증거가 그 사람에게서 나타나면 그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가장 확실한 표시라는 것입니다. 이런 표시는 영적 진보를 이루어가는 삶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고,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열망 속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는 칭의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사역의 결과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루어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구원을 믿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무 한 일도 없는 우리들이 고백하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화에서는 다릅니다.

물론 성화에서도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집니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성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함에도 성화에서는 그 삶의 주도권이 우리들에게 있습니다. 이때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거룩한 열망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 수도 있고, 반대로 아직 우리 안에 남아 있는 육신의 정욕을 따라 마귀의 종처럼 죄를 짓고 살 수도 있습니다. 이 선택이 바로 우리들의 결정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땅에서 이루게 되는 성화에는 그 주도권이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도가 된 사람들이라면 우리가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날마다 거룩해져 가는 그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이런 증거가 있는 사람들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렇게 날마다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는 구원의 과정에 대해 두 가지 다른 학설이 있습니다.

 

1. 자유의지

하나는 구원에서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에서는 그 사람이 비록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받아 들여서 그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사람이라도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의 선택에 따라 하나님의 구원에 이를 수도 있고 또 그 구원이 무효화 될 수 도 있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고 있는 견해입니다.

 

2. 성도의 견인

다른 하나는 성도의 견인을 강조하는 견해인데 성도의 견인이란? 하나님께서 한 번 구원해 주신 사람들은 결코 그 받은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고 그 받는 구원이 무효화될 수도 없다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있는 견해입니다.

 

여러분은 어느 견해를 믿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두 번째 견해를 믿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모든 부모에게는 자기자녀를 지켜 주고 보호해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듯이 우리 영의 부모이신 하나님께도 그 자녀가 된 우리들을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보호해 주시고 지켜주시고자 하는 마음이 성도의 견인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삶의 예를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야곱에게는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라헬은 요셉의 동생 베냐민을 낳다가 죽게 됩니다. 야곱은 사랑하는 아내 라헬이 해산하면서 고통 할 때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신이 아니라서 지켜주지 못하였습니다.

 

이 때 야곱은 라헬을 장사지내면서 한 가지 결심을 하게 됩니다.

내가 당신을 지켜주지는 못했지만 당신이 낳은 두 아들은 당신 내가 반드시 지켜줄 것이라고 단단히 결심합니다. 야곱은 이후 이 약속을 지키기 위해 다른 아들들은 들에서 양을 치게 하고 소를 치게 하면서도 요셉은 늘 그 옆에 두고 키웠습니다.

 

이것을 요셉의 형들은 오해하여서 아버지가 동생 요셉을 편애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야곱의 입장에서 보면 이것은 편애가 아닌 것입니다. 이것은 전에 라헬의 죽음 앞에서 약속한대로 요셉을 끝까지 지켜주려고 하는 야곱의 한 방법이었습니다. 그러나 형들은 아버지를 오해하여서 이런 요셉을 미워하고 또 애굽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야곱의 아들들이 장성하여 자신들도 아버지가 된 이후에는 이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이해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요셉을 편애한 것이 아니고 어미 없는 자식을 그 어미 대신 지켜 주려고 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어디서 이것을 알 수 있습니까?

나중에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요셉의 형들은 곡식을 사러 애굽에 갔습니다. 그 때 이들은 애굽의 국무총리가 되어 있었던 요셉을 만나게 됩니다. 요셉은 그 형들을 알아보고 그 가족사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고 형들은 가나안에 있는 집에 아버지와 막내 동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요셉은 그 형들이 자신을 미워한 것처럼 동생 베냐민도 미워하고 있는지 떠보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너희가 정탐 군이 아니고 너희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너희 막내 동생을 내게로 데려와서 보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말을 전해들은 아버지 야곱은 베냐민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야곱은 라헬을 지켜주지 못한 자기가 또 그 아들 요셉까지 지켜 주지 못하였는데 이제 하나 남은 베냐민까지 잃게 될까봐 베냐민을 보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기근이 너무 심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야곱은 어쩔 수 없이 각종 진기한 예물과 함께 베냐민을 형들과 함께 보내면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라고 하며 야곱은 그 가족을 살리기 위해 베냐민을 잃을 각오까지 하고 보낸 것입니다.

 

그런데 애굽의 총리로 있던 요셉은 마치 베냐민이 자신의 은잔을 훔쳐 간 것 같이 손을 썼고 그래서 베냐민은 범죄자가 되어 애굽에 잡혀 있게 될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 때 유다는 요셉에게 나아가서 자기 가족사를 이야기 하면서 우리 아버지가 이 아이의 어머니 라헬과 그 형 요셉을 지켜주지 못한 것 때문에 그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계신데 만약 이제 하나 남은 이 아이까지 잃게 되면 그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죽게 되실지 모른다고 하면서 자기가 동생 베냐민을 대신하여 평생 애굽에서 종이 되어 살게 해 주셔서 내가 가나안을 떠나 올 때 아버지에게 약속한대로 베냐민을 지켜 아버지에게로 돌려보낼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요셉의 형 유다는 이제 어떻게 달라져 있습니까?

유다는 지금까지도 그 아버지가 이제는 요셉 대신 베냐민을 편애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이들은 이제 어릴 때 어미를 잃은 불쌍한 자식을 어미 대신 지켜 주려고 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안 것입니다. 그래서 전에는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여 죽이려고 하였지만 이제는 자기가 베냐민 대신 희생하더라도 베냐민을 지켜 아버지에게 돌려보내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또 우리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전에 아담 안에서 우리를 다 잃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다시 찾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잃었다가 다시 찾게 된 우리들을 다시는 잃지 않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이 어디에 나타나 있습니까?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목자의 심정을 통해 하나님은 그 마음을 보여주시고 있으십니다.

또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탕자의 비유를 통해 그 마음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에 대해 고린도전서 10: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할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치루신 대가는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은 그 신성을 부인하고 사람이 되셨고 또 나중에는 인성까지 부인하고 자기 생명을 우리대신 십자가에 내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이 큰 대가를 치루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는데 우리가 삶 속에서 당하는 여러 가지 시험으로 인해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내 버려두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들이 감당할 수 없는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혹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 우리에게 올 때에는 어떻게 하십니까? 그 시험 당할 즈음에 피할 길을 주사 우리로 파하게 하신 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런데 피할 수 없는 시험이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어떻게 하실까요? 이때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베푸셔서 라도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시고 또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아멘

 

이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를 마치 눈동자 같이 지켜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에서 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의 견인입니다. 하나님은 예수 안에서 구원하신 우리들을 결코 포기하시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저희 집에는 사내아이가 둘, 여자 아이가 하나 있습니다.

사내아이들은 남자이니 그래도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여자 아이는 세상이 험악하여 걱정입니다. 부모 된 저의 생각으로는 언제까지나 예은이를 험한 세상 속에서 지켜 주고 싶습니다.

그래서 예은이가 이 험한 세상 속에서 시험에 들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어떻게 교육시켜야 하나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이 제가 예은이를 교육시킨다고 되겠습니까? 지금은 아무리 교육을 시켜도 소용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에는 유혹하는 일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아이가 커서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때까지 교육도 시키고 지켜주어야 하겠다는 것이 바로 부모의 마음입니다. 이것이 또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셨고 또 아버지 야곱의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욥을 보십시오.

욥이 왜 그 자녀들이 모여서 즐거운 잔치를 마치게 되면 그 자녀의 수대로 짐승을 잡아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까? 자녀들이 부지중에라도 혹시 하나님께 범죄 했을까 봐 그렇게 속죄제를 드려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자녀들을 지켜 주고 싶어 하는 부모 된 욥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면서 입고 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켜주시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큰 하나님의 지켜 주시는 사랑 때문에 우리 모두는 2018년도에 별 일 없이 살아올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할 때 마다 이 지켜주신 은혜에 대한 감사도 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또 우리의 구원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입니까?

 

셋째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장차 이루어주실 구원의 완성을 말합니다.

예수를 믿고 성령을 통해 그 영혼이 거듭나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칭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때 우리는 우리 영의 아버지가 되시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사람들은 이제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그 삶을 통해 드러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고 하신 말씀처럼 거룩함에 이르고자 하는 소원이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삶은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그런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왜 구원받은 성도들에게서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그 이유는 예수를 믿고 난 후 성령 하나님의 역사로 그 영이 살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치 어린 아이가 한 생명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면 점점 자라가듯이 영이 살아난 사람들은 거룩한 열망에 의해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까지 점점 자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받아 새로운 피조물이 된 우리들이지만 우리는 육신의 소욕도 함께 가지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성장은 재한 될 수밖에 없고 우리의 성장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딜레마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성령을 통해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새로운 피조물이 된 성도들이라도, 자신이 아직 육신에 속해 있음을 탄식하며 양자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고 고백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우리의 완전한 회복이 이루어집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고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가 완성되는 그 날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 때 이 세상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창조될 것이고, 우리의 다시 살아난 영과 함께 우리의 몸까지 완전한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그 때 비로써 우리는 죄와 전혀 무관한 존재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이르게 되고 신의 형상을 입게 되며 하늘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사야는 그 때 메시야가 오셔서 성취하실 왕국에 대해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11:6-9절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이끌리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라

요한 계시록에서는 메시야 왕국 이후 우리 구원이 완성된 천국 생활에 대해 증거하고 있습니다.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다시는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데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이 날의 소망에 대해 사도바울은 로마서 8:24절에서 이렇게 증거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약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기다리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우리가 소망하는 그 완전한 회복의 날이 우리 믿음의 목적지입니다.

그 날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창세전부터 우리들에게 주시고자 하셨던 그 모든 은혜들을 완전히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구원과정은 창조에서부터 영원까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어느 시편기자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하심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른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 우리는 과거에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칭의입니다.

- 현재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날마다 구원을 이루어 갑니다. 이것이 성화입니다.

- 그리고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 우리 구원은 완성될 것입니다. 이것이 영화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 우리에게서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 달라진 것들 중 하나가 바로 시간에 대한 이해입니다. 전에는 오직 오늘만 바라보고 이 땅만 바라보고 지금 내게 무엇이 유익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우리 영이 거듭난 이후에는 영이신 하나님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하나님과 같이 영원의 시간 속에서 오늘을 볼 수 있는 시간을 보는 눈이 우리들에게 열린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시간의 의미를 아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에 매여 살아가는 사람들은 시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내일에 대해서 전혀 모르면서 오늘이라는 한 순간의 유익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우리들은 시간의 의미를 압니다. 하나님의 창조에서 종말에 이르는 전 시간을 보면서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오늘이라는 한 순간에 집착하여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영원의 차원에서 오늘을 보고 또 영원의 차원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보고 그 은혜를 덧입고 또 누리고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이 땅에서 잘되고 이 땅에서 복을 받는 것에 집착할 수 있겠습니까? 이 땅의 삶과 이 땅에서 받게 되는 복에 집착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시간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오직 그들이 아는 이 땅에서의 삶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영원의 관점에서 시간의 의미를 볼 수 있는 영적인 안목을 가진 사람들은 결코 한 찰나를 사는 이 땅의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요즘 기독교 안에서는 구복신앙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런 사람들은 시간의 의미를 잃어버린 소경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원의 차원에 좌정해 계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영원의 차원의 구원과 영원의 차원의 복을 안다면 우리는 결코 오늘이라는 시간에 매여 살지는 않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신앙 안에서 회복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영원 속에서 자신을 볼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이렇게 영원에서 오늘을 보는 눈이 열리게 되면 예수님은 더 이상 성경 속에 계신 분이 되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이 되시는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이런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다.

바로 변화 산 사건에서 예수님은 이것을 보여주셨습니다. 변화 산에서는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었습니다. 이 세 분은 동시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어떻게 함께 나타나셨습니까? 이것이 오직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살게 될 때 우리도 오늘 모세를 만나고 엘리야를 만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영원의 차원에 계신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내가 드리는 새벽 기도시간에 지금 하나님을 예배하는 이 시간에 나와 우리와 함께 하심을 믿을 수 있고 또 함께 하시는 그 하나님을 만나는 놀라운 은혜의 경험을 할 수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 이런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과거에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 그 영이 거듭나고 의롭다 칭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재 그 영이 거듭난 사람답게 영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을 닮고자 하므로 그 삶에 성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미래에 그 거듭난 영과 함께 그 육신까지도 신령한 육신으로 영화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자녀의 영광에 참여하게 될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미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오늘 구원받은 자로서 거룩함을 사모하면 날마다의 삶 속에서 구원을 이루어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또 우리는 미래에 이루어질 완전한 구원을 소망하면서 그 날을 사모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받아 누리게 될 구원의 과정이며 이렇게 우리의 구원신앙은 통전적인 신앙인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한번 예수를 믿고 끝나는 신앙이 아닙니다. 과거에 예수를 믿고 거듭났고 오늘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또 미래에 완성될 구원의 날을 소망하는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오직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있는 사람들의 믿음을 바른 믿음이라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고 듣는 우리 모두는 영원부터 영원에 이르는 하나님의 구원과정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 귀한 믿음을 주신 것에 감사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예비해 놓으신 그 구원의 완성의 날을 소망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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