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이신칭의의 신앙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6. 5. 12:56

 

 

 

이신칭의의 신앙

로마서 4:9-16

 

오늘 우리는 기독교의 독특한 신앙관인 이신칭의의 신앙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신칭의의 신앙이란?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인정함을 받게 되는 것은, 어떤 행위나 공로에 의한 것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된다는 신앙관입니다.

 

아브라함의 예

 

로마서 4장에서는 이 이신칭의의 신앙의 대표자로 우리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데아 우르에서 우상을 숭배하며 또 우상을 만들어 팔며 살았던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런 데라의 아들로 있으면서 함께 우상을 팔고 또 우상을 숭배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찾아가셔서 만나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이 여호와 하나님이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창세기 15:6절입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이 바로 이신칭의의 신앙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에 의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것은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의 고백

 

이것은 다윗의 고백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다윗은 사람이 해서는 안 될 죄를 지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아내를 넘보았고, 그 지은 죄를 감추려고 여러 가지 시도를 하다가 잘 되지 않자, 그 신하 요압에게 친서를 보내어서 우리야를 아무도 모르게 죽게 하라고 명령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다윗이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그 죄를 지적해 주는 나단 선지자의 책망을 받고, 그 지은 죄를 회개하게 됩니다. 다윗이 이렇게 하나님 앞에 그 죄를 회개하자마자 하나님은 다윗이 죄를 사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다윗이 전혀 죄를 짓지 않은 사람, 의로운 사람인 것처럼 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죄 사함의 경험을 했던 다윗의 고백이 시편 32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허물이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신칭의의 신앙의 근거

 

그러면 이렇게 사람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근거합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 주셔서 구원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구약시대 사람들과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의롭다 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 그런데 다른 점이 있다면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이 보내주실 메시야에 대한 약속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만, 신약시대 성도들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가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으심을 죽어주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신구약의 성도들은 오실 메시야! 오신 메시야! 에 대한 이해의 차이만 있지, 모든 인류는 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 왔고, 또 받고 있고, 또 앞으로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외에 다른 구원의 길은 없습니다.

창세기 3:15절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이사야서 7:14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라 약속하신 대로

 

갈라디아서 4:4절에서는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서 나게 하셨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5:8절에서는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고 하십니다.

 

사도행전 16:31절에서는 이렇게 오신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하였고, 사도행전 4:12절에서는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0:9-10절에서는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갈라디아서 2:16절에서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육체가 없느니라.’

 

우리가 매 주일 마다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사도신경입니다. 어떻게 고백합니까?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행전 13:48절에서는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우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사람들의 죄를 지시고 사람들 대신 죽어주신 그 죽으심을 통해 성취하신 의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에게 전가해 주시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게 되는 이신칭의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실재로 그 사람이 의로워진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의를 덧입고 있는 그 안에는 여전히 전과 똑 같은 사람, 아담의 타락된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전혀 변화가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에는 신적인 능력이 있으셔서, 하나님이 사람들이 가지고 고백하는 믿음을 보시고 이제 너는 의로운 자다.’ 라고 칭해 주실 때 실재로 의롭게 되는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그 마음 안에는 아담의 죄악된 본성을 소유하고 있는 옛 사람과 하나님이 의롭다 칭해주실 때 주어진 새 사람이 함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전에는 세상에 속하여 오직 죄 가운데 살아가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새로운 사람으로의 삶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그 삶의 방향전환이 이루어진 사람들의 마음 안에서는 서로 다른 두 본성 사이에 치열한 영적 싸움이 있게 됩니다. 이런 영적 싸움을 통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가는데 이런 과정을 성화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이 성화의 과정은 일생동안 계속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생애를 마치게 되는 그 날까지 믿음을 지켜 나가면서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렇게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죄악 된 옛 사람은 점점 죽고 예수님을 닮아가는 새 사람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이런 성화의 과정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산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신칭의의 신앙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오늘은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로마서 4:9-16절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이신칭의의 신앙이란? 실재로는 그 사람이 의롭게 되지는 않았으나,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를 믿는 그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의인이라고 인정해 주시는 신앙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의는 사람이 가진 의에 기초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고백하는 믿음을 보고 하나님께서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해 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신칭의의 신앙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어떤 상태에 있는 사람이든지 전혀 차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이전의 75년간의 삶을 전혀 문제 삼으시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무슨 죄를 저질렀든지 전혀 관계 하지 않으시고 그 지은 죄를 회개하고 나오는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인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의 죄는 어떻게 하십니까?

시편 103:12절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이사야서 44:22절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 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라.’

아사야서 38:17입니다. ‘... 주께서 내 영혼을 사랑하사 멸망의 구덩이에서 건지셨고 내 모든 죄를 주의 등 뒤에 던지셨나이다.’

이사야 43:25절입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본문 강해

 

먼저 바울의 질문입니다.

로마서 4:9-10절입니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 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 그런즉 그것이 어떻게 여겨졌느냐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아니요 무할례시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이 복은, 로마서 4:7-8절의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는 그 복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복은 속죄의 복이며, 이신칭의의 복입니다.

 

그런데 이 복은 할례 시에 받은 복이 아니고 무 할례 시에 받은 복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복을 받는 데는 아무 조건이 없고, 사람의 의나 무슨 행위가 전혀 필요가 없으며, 오직 믿음을 얻게 되는 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질문하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신칭의의의 은혜가 주어진 것이 할례시냐? 무할례시냐? 하는 것입니다. 이신칭의의의 복을 받게 되는 조건이 있느냐 조건이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은 아무런 조건도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성취해 주신 구속에 근거하며, 사람이 할 일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일방적으로, 값없이, 의롭다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의 단회적인 속죄가 바로 이신칭의의 신앙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신앙의 삶을 보면

1.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장면 창세기 12:1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이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 갔고...’ 아브라함은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납니다.

2.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장면 창세기 15:5-6절입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3. 할례를 행하라는 명령 받는 장면 창세기 17:12, 14절입니다. 너희의 대대로 모든 남자는 집에서 난 자나 또는 너희 자손이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를 막론하고 난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을 것이라....할례를 받지 아니한 남자 곧 그 표피를 베지 아니한 자는 백성 중에서 끊어지리니 그가 내 언약을 배반하였음이니라.’

4. 그 믿음이 인정을 받는 장면 창세기 22:12절입니다. 사자가 이르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5. 이런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바로 메시야에 대한 약속이었습니다. 창세기 22:18절입니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살았던 전 생애의 요약입니다.

1.은 약 75세 때인데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믿음으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지만 아직 의롭다 함은 받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일방적인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한 것입니다.

2.는 약 80세 때인데 아들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의롭다 여김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때 이신칭의의 신앙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신앙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3.99세 때인데 하나님께서 할례 행하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할례를 받는 자와 할례를 받지 않는 자를 구분하여 할례를 받지 않는 자는 언약을 배반한 자라고 하셨습니다. - 할례를 받음과 받지 않음에 따라 그 선택의 결과까지 달라진다고 하셨습니다.

4.는 약 135세 때인데, 이때 아브라함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하나님이 완전히 인정해 주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아브라함은 약 80세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고 한 후에, 99세 때에는 할례를 받으라는 명령을 주시면서 할례를 행하지 않는 자는 벡성 중에서 끊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하심을 받은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지 않는다고 믿음에서 떨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까?

 

이것을 가지고 어떤 사람들은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지만, 믿음에 따르는 행위가 따르지 못하면 구원에서 떨어짐을 잘 보여주고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믿어도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어도, 행위로 그 받은 구원을 지켜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 관계는 이렇습니다.

2번과 같이 앞으로 하나님을 믿게 될 아브라함의 후손들 중에는, 3번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할례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과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로 갈라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 때 순종하여 할례를 받는 사람들은 진짜 믿음의 사람들이고, 이런 사람들은 결국 아브라함과 같이 하나님이 완전히 인정해 주시는 데까지 순종하게 될 사람들이고, 이 때 순종하여 할례를 행하지 않고 거역하는 사람들 즉 순종하는 삶이 없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믿음에서 떨어져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그 사람이 가진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느냐 불순종하느냐를 통해 가려진다는 것입니다.

 

바울 서신을 보면 언제나 앞부분에서는 믿음에 대해 기록하고, 뒷부분에서는 언제나 삶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이런 기록을 통해 바울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바른 믿음은 그 뒷부분에서 기록하고 있는 말씀과 같은 삶을 살아가는 모습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없는 사람들은 믿음에서 떠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3:31절에서는 결론적으로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은 율법을 굳게 세워나가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마귀의 종, 죄의 종이 되어서 율법을 지켜 행하며 살 수 없었지만,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이후에는 하나님의 자녀 의의 종으로 그 신분이 변하였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만약 이런 능력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에게 주어지지 않는다면, 예수님께서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붙잡혀 끌려온 여인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 라고 하시는 이 요구는 할 수 없으셨을 것입니다. 왜요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 여인에게 자신이 지킬 수도 없는 요구를 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하나님의 우리의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 칭해 주실 때, 우리에게서는 실재로 의롭게 살 수 있는 능력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로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를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 되었다고 하고, 로마서 6:17-18, 22절에서는 의의 종이 되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해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니라.’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은 15장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난 후에 짐승을 잡아 놓고 하나님과 언약을 체결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언약은 하나님이 일방적으로 선포하신 언약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 언약에서 한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한 일이 창세기 17장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할례를 행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할례를 아브라함과 그 후손들이 대대로 지킬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10절입니다.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 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하신 일은 15장에 나옵니다.

이것은 일방적인 언약이며 피로 맺은 언약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한 일은 17장에 나옵니다. 할례를 행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언약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르게 말씀드리면 하나님은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값없이 은혜로 의롭다 해 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다는 것을 순종하는 삶을 통해 보이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15장과 17장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볼 때 창세기의 말씀들은 바울서신과 일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그 믿음에 따라오는 존재의 변화와 그 존재의 변화가 가져오는 변화된 삶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믿음 안에서 변화된 삶을 통해 그 증거를 보여주고 있는 믿음이 참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잘못된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도 없이, 율법 지킴으로 의를 얻으려고 했던 바리새인들이 가진 믿음이 잘못된 믿음입니다. 성령을 통해 거듭나지도 않았으면서도 스스로 믿음으로 살고 믿음을 고백하며 천국 가려고 했던 니고데모의 믿음도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과 권세와 능력을 알고 있었으나 하나님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던 귀신들이 가진 믿음도 잘못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7장의 이 할례 사건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할례는 남자가 그 표피의 일부를 베어 내듯이, 그렇게 자신이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에게 꼭 있어야 하는 것은 바로 자신의 죽음입니다. 자신의 죄악 된 옛 사람은 죽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구약시대의 할례는 신약시대의 세례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에 대해 로마서 6:11절에서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자신의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에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세례는 아담에게 속한 죄악 된 옛 사람은 죽고, 그리스도께 속하여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새 사람으로 사는 삶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16장에서 제자들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의 연장선상에서 사도 바울은 나는 날마다 죽는다.’(고전15)라고 한 것입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기독교는 자신의 죄악 된 옛 사람 예 자아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을 입어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피조물로 사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먼저는 죽고 이후에 다시 사는 종교입니다. 자신이 죽지 않는 자는 예수님의 제자도 될 수가 없고, 하나님께서 끊어지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할례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입장에 서게 되면 성경의 난 해 구절로 알려지고 있는 히브리서 6장도 쉽게 해석됩니다.

히브리서 6:4-6절입니다. 한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 박아 드러내 놓고 욕되게 함이라.’

여기 타락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졌으나 죄악 된 자기가 죽지 않아서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면 초대교회 성도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문제도 쉽게 해석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믿음을 가졌지만 자기가 죽지 않은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재산을 정리하여 바치면서, 자기들을 장래를 위해 그 판 돈의 일부를 감추어 두었던 것입니다.

 

초대교회의 니골라 집사의 문제도 해결됩니다.

니골라도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으로 뽑힐 정도로 대단한 믿음의 사람이었지만, 자기를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후에 니골라 당을 조직하여 교회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을 믿었으나 버림받았던 사람들이 문제도 쉽게 해석됩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관점에서 보면 이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을 가졌으나 자기가 죽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하는 삶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법을 행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부터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라는 책망을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바른 신앙은 날마다 죄악 된 자아를 죽여 나가는 신앙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바울처럼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과정 속에는 내적으로 외적으로 치열한 싸움이 우리에게 있게 됩니다. 바울은 이런 치열한 싸움의 과정을 겪으면서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어갔다.’라고 합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피 흘리기까지 싸워야 하는 싸움이 아직 그 앞에 남아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11-12절에서는 할례를 믿음의 인침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창세기로 옮겨 보면, 창세기 17장에서 행한 할례는 창세기 15장에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을 확정하는 인을 찍는 것, 즉 도장을 찍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도장을 찍지 않으면 계약은 효력이 없습니다.

부동산 계약을 할 때도 반드시 계약금 중도금 잔금을 치루고 도장을 찍어야 합니다. 하나님과 맺은 언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이라는 잔금을 치루는 마지막 도장을 찍지 않으면 언약은 파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17:14절에서는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은, 할례로 믿음의 도장을 찍지 않은 사람들은 그 믿음에서 끊어진다고 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은, 죄에 대해서는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는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신이 믿음으로 의롭게 그 존재가 변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성숙한 단계, 성화된 단계까지 계속 나아가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이 단계까지 나아갔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창세기 22장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리는 행동을 통해 그 완성된 믿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순종하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인정해 주심을 받았습니다. 창세기 22:12절입니다. 네가 네 아들 네 독자 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세기 22장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던 아브라함의 완성된 이신칭의의 신앙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신칭의의 신앙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후 외적 내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치열한 영적 싸움을 통해 자기의 죄악된 본성은 죽여 나가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주신 새 사람 안에서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나가는 성화 즉 성장과 성숙을 이뤄 나가는 과정을 통해 결국에는 완전한 신앙에 이르게 됨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신칭의의 신앙은 한 순간의 믿음의 고백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일생동안 소유하고 싸우고 고백하고 성장과 성숙을 이뤄 나가야 할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신앙입니다. 바울이 전해 준 말씀과 같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음으로 시작되었지만, 야고서가 전해준 말씀처럼 일생동안 삶으로 행함으로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경우처럼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라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대까지 나아가야 하는 신앙인 것입니다.

 

신약성경은 사도바울은 그의 인정받은 신앙, 완성된 신앙에 대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디모데 후서 4:6-8절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바울이 지킨 믿음이 무엇입니까?

바로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던 이신칭의의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지킨 바울의 신앙을 하나님은 어떻게 인정해 주신다고 하십니까? 의의 면류관을 씌워 주심으로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 그리고 이것은 바울과 같이 끝까지 믿음을 지킨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만난 그 날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씌워 주실 면류관이라고 합니다.

 

그 조건이 무엇입니까?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이 이신칭의의 신앙 안에서, 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만날 날을 사모하며 사는 것이 그 조건이라고 합니다.

 

이 사모하는 신앙이 아벨이 가진 신앙이었으며, 이 사모하는 신앙이 아브라함이 가지고 산 신앙이었으며, 오늘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하는 신앙입니다. 우리 모두는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이 신앙을 가지고 늘 깨어 주어진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경건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구원은 율법을 행함으로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것은 신구약 성도들이 다 같습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구원 받은 성도들은 자신이 구원 받았다는 것을, 옛 사람의 죄악된 속성들을 죽여 나가면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보여주며 살게 됩니다. 자신이 죄악 된 속성들을 죽여 나가지 않아서 여전히 죄악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구원에서 떨어진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행위로 구원을 얻는 다는 말은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 세상에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제외하고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부자나 가난한 자나, 어른이나 어린 아이나 차별이 없이 모두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이것이 이신칭의의 신앙입니다.

그런데 안식교인이나 루터교인, 로마 카톨릭과 일부 개신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율법준수에, 행위에 그 구원이 달려 있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그럴 지라도 우리들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되는 이 이신칭의의 신앙위에 우리 믿음을 굳게 세우고, 예수님을 본 받아 살아가는 경건에 힘쓰며 살아가는 복된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 마태복음 16장 24절 말씀

바울의 고백 - 갈라디아서 2장 20-21절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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