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서

하늘을 바라보며 살자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8. 9. 07:57


하늘을 바라보며 살자

요한복음 17:1-5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한국교회 성도들은 전에 없는 이념적인 혼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국민들 중에는 보수적인 사람들도 있고, 중도적인 사람들도 있고, 진보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이 군사적으로 적대시하고 또 대치중인 관계로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보수적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으며, 보수적인 사람들이 정권을 잡아 왔습니다.

 

그러다가 근자에 와서 전보적인 사람들이 정권을 잡게 되기도 하였지만, 그 사람들도 우리 사회의 보수적인 경향을 크게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가진 사상은 진보적이었지만 그 정권이 지향하는 방향은 보수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진보 정권이 탄생했음에도 불구하고 총리에 아주 보수적인 사람을 기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별다른 무리 없이 국가를 운영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보수정권을 자처하던 박근혜 정부가 탄핵을 당하여 물러나고, 탄핵이라는 특수한 바탕위에 세워진 진보정권이 문재인 정부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문재인 정부는 이제까지 우리가 보아왔던 그런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이제까지 한국사회를 지탱해 왔던 그 모든 것들을 하나하나 무너뜨리고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사회를 새우려고 하는 사람들처럼 보이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무엇입니까?

이념적으로는 공산주의자가 국가 유공자가 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군사적으로는 주적이 없는 시대 북한이 더 이상 우리의 적이 아닌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 공작원들이 타고 내려 왔다고 의심되는 목선들을 그냥 풀어주고, 서해 2함대 사령부를 정탐하고 갔다고 알려지고 있는 반잠수정 침투 사건도 유야무야로 덮어 버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 문제인 정부가 외교적으로는 우리의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 일본과는 사사건건 대립하고 있으며 중국과 북한에는 한도 끝도 없이 양보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북한이 잘 사는 것이 우리 정부의 존립 목적이나 되는 듯이 북한의 도로 항만 철도 교량은 물론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가동을 위해 여론을 조성하고 백방으로 설득하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을 돕지 못해 안달이 난 사람들처럼 국제사회 속에서 북한을 대변하는데 힘을 쏟고 있습니다.

 

정작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서는 이렇게는 더 이상 못살겠다고 아우성인데도 듣지 않습니다.

경제계에서는 이렇게 하다가는 중소기업이 소상공인들이 다 문을 닫게 된다고 하는데도 귀 기울여 듣지 않습니다.

 

이럴 때 정부정책을 비판하고 바로 잡아 주는 기능을 하는 매체가 언론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 언론들을 보면 정권을 홍보하는 기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게 한지 오래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우리 아이들의 미래를 책임지고 있는 교육이 좌편향 된지 이미 오래 되었고, 건강한 사회가 되도록 상호 견재를 통해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 주는 삼권 분립이 애매해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다음 정부가 좌파 정부가 들어서면 어떻게 될지 몰라도 우파 정부가 들어서면 아마 각종 실정에 대한 국정조사와 청문회로 날밤을 지새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날 이 세상은 너무 시끄럽고 어수선합니다.

정치적인 위기와, 사상적 위기와, 경제적인 위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말로는 미국과 동맹 관계라고 하면서, 요즘에는 동맹이라는 말을 부담스럽게 여겨 빼고자 한다는 소리도 들립니다. 우리 정부는 미국의 편에 서기를 거부함으로 미국의 신뢰를 잃은지 오래입니다. 우리나라 안에서는 반미 친미의 대결이 심화되면서, 국민들 중에는 미국이 적인지 북한이 적인지를 구분 못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교계 안에서도 교권다툼과 이단문제, 목회 세습과 목회자의 부도덕한 삶의 문제, WCC 문제 등으로 대립과 갈등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이 세상의 현실은 우리들로 하여금 마치 안개가 자욱한 길 위를 달리고 있는 자동차와 같아 보이게 합니다. 안개가 자욱하게 낀 도로를 운전할 때 가장 무서운 것은 언제 어떤 일이 갑자기 불쑥 나타날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런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측할 수 없는 이 세상만을 바라보며 살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주권자 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사는 것이 필요할 것입니다.

 

이 땅을 바라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자는 한다고 해서, 이 말은 현실을 잊어버리자,’ ‘현실을 외면하자. 현실에 무책임하자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는 현실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 가를 객관적이고 균형 잡힌 시선으로 직시하되, 그 현실에 너무 억매여 살거나, 그 현실에 너무 집착하며 살지는 말자는 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현실에 대한 나의 입장과 나의 견해에 너무 사로잡히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처한 현실에 대한 진정한 대안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자는 말입니다.

 

2,000년 전 예수님의 제자들은 어떤 마음으로 예수님을 따랐겠습니까?

제자들이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것은, 예수님께서 그 기적의 힘으로 로마 세력을 몰아내고, 이스라엘 나라를 정치적으로 회복시켜 주시기를 갈망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른 입장이었고 견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현실 세계에 강한 집착을 가지고 있었던 제자들을 향해서, 현실 세계 속에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에 과도한 집착을 보이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한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하늘을 바라보며 하늘로부터 임하실 성령을 바라보고 기다리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시는 그 순간에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이루어진 마지막 대화가 바로 이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주여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입니까?” 라고 물었고,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에게 때와 기한은 아버지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것은 세상일을 다 잊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지배하시고 땅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결정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때, 이 세상 삶에 대한 답이 나오고 이 세상을 살아갈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소망이 생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골로새서 3:1절에서 바울사도는 골로새 교회에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면 하나님이 그 하늘에서 세상과 역사의 핸들을 잡고 계시고 그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함께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가 보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과 우주를 통치하고 계시는 모습을 볼 때 비로소 우리는 안심할 수 있고 오늘 내가 여기서 반드시 해야 할 일에 소홀함이 없게 되는 것입니다.

 

1. 먼저 살펴볼 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고 살도록 훈련하신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제자들을 훈련시킨 중요한 내용이 바로 이 세상과 땅을 바라보고 살아온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첫째,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실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실 때,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 기도는 제자들이 하늘을 향해 눈을 들고 역사의 주권자가 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소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왜 제자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살도록 훈련하셨습니까?

둘째,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잠간이고 하늘의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땅에 보물을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라.’ ‘땅에서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도적질을 해 가지만, 하늘에서는 그런 일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더하여 네 보물 있는 그곳에 네 마음이 있게 되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은 왜 제자들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도록 훈련하셨습니까?

셋째, 우리의 본향은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 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본향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믿음의 사람들은 이 땅에서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 믿는 성도들을 위해 예비 해 두신 본향집인 천국을 사모하고 그리워하면서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3년 동안 제자들이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자가 되도록 훈련하신 것입니다.

 

2. 다음으로 살펴볼 것은, 우리들이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왜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첫째, 예수님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라고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갈릴리의 한 산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설교가 있습니다.

이 설교를 우리는 산상설교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설교의 초점은 하늘입니다.

그래서 팔복의 내용을 보면 이 세상의 복이 아니라 하늘 복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라고 하늘의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성공과 행복에 집착하며 살고 있던 제자들에게 이 설교를 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제자들이 이 예수님의 설교를 듣고 전에는 땅에 일에 관심을 갖고 살던 그들로 하여금 앞으로는 하늘의 일에 관심을 갖고 사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또 예수님은 구제할 때나, 기도할 때나, 헌금을 할 때에도, 자기의 영광이나 사람들을 의식하며 하지 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그 하늘을 바라보고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 기도를 할 때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라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 돈을 벌 때도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두기 위해서 벌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을 하든지 하늘을 바라보고 하라고 말씀했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예수님 자신도 자주 하늘을 바라보시곤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남자만 오천 명을 먹이실 때,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시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14:19).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사실 이 땅에 임하는 모든 축복들이 다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먼저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무덤에서 일으키실 때도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셨다고 합니다.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11:41). 예수님이 이렇게 하신 이유는 사람이 죽고 사는 이 일도 모두 하늘에서 정해지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하루 전에도 하늘을 바라보시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복음 17:1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이르시되 아버지여 때가 이르렀사오니 아들을 영화롭게 하사 아들로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게 하옵소서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하시는 이 일도 하늘에서 정해지는 일이기 때문에 하늘을 바라보고 기도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제 자신은 제자들을 떠난다고 하시자 제자들은 근심과 걱정과 두려움에 쌓여 있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유언의 말씀을 하시면서도 하늘을 바라보라.’고 말씀했습니다. 요한복음 14:1-2절 말씀입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이 말씀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 장소는 8학군인 강남이나, 신도시인 분당의 멋진 아파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 집이 우리가 살 집이기 때문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하늘 집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하늘을 향하여 아버지 하나님께 부르짖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승천하여 올라가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이 올라가신 그 하늘을 쳐다보고 있을 때 갑자기 천사 둘이 나타나서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 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후 제자들은 다시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마라나타 신앙 즉 예수님의 재림을 고대하는 신앙을 가지고 그 남은 생애를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 땅만을 바라보고 살면 마음이 복잡해지고 마음이 무거워지고 또 마음이 좁아집니다. 땅만 바라보고 살면 걱정 근심이 많아지고 답답해지고 그래서 몸과 마음에 병들게 됩니다.

그 대신 우리가 눈을 들어 하늘을 바라보게 되면 우리 마음이 시원해지고 무겁던 마음이 가벼워지고 좁아진 마음이 넓어지고 불안한 마음이 평안해 지고 근심 걱정이 가득했던 마음이 즐거워지고 그래서 몸과 마음이 건강해 집니다.

 

예일대학교의 펠리칸박사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땅을 바라보면 비관주의자가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낙관주의자가 된다.” “사람이 땅을 바라보면 우울한 사람이 되고 하늘을 바라보면 밝고 즐거운 사람이 된다.”

 

왜 그렇습니까?

하늘을 바라보고 살기 시작하면 하나님이 약속하신 말씀들이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이 땅을 바라보고 살면 세상의 근심 걱정들이 밀려오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의식적으로라도 이 땅만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고 살려고 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늘을 바라보고 삽시다.

거기에 우리 하나님 아버지가 계십니다.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는 이유는 이 지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사실 그 하늘에서 결정 난들 일입니다. 하나님의 결정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나의 삶을 맡기고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삶이 우리가 살아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우리는 왜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까?

둘째, 우리의 믿음의 선배들 또한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기 때문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믿음의 사람들은 모두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데리고 나가서 하늘을 바라보게 했습니다.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이르시되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15:5-6). 이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후손에 대한 약속을 주신 그 증표가 되는 하늘을 우러러 보면서 평생을 살았습니다.

 

야곱도 꿈에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합니다.

"꿈에 본 즉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28:12). 하나님은 이 꿈을 통해 야곱의 관심을 하늘로 향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야곱으로 하여금 하늘을 바라보며 살도록 하시기 위해 이 꿈을 주신 것입니다.

 

다윗도 하늘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며 살았습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19:1).

 

솔로몬은 성전을 건축한 다음 하늘을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했습니다.

"솔로몬이 무릎을 꿇고 손을 펴서 하늘을 향하여 이 기도와 간구로 여호와께 아뢰기를 마치고...."(왕상8:54) 솔로몬이.... 이스라엘 모든 회중 앞에서 무릎을 꿇고 하늘을 향하여 손을 펴고 이르되......,(대하6:13).

 

히스기야 왕도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했습니다.

이러므로 히스기야왕이 아모스의 아들 선지자 이사야와 더불어 하늘을 향하여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대하32:20). 히스기야 왕이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한 결과 하나님께서 한 천사를 보내셔서 앗수르 왕의 진영에서 모든 큰 용사와 대장과 지휘관들을 멸하신지라. 앗수르 정예부대 185,000명이 하루아침에 죽었습니다. 히스기야 왕은 하늘을 바라보고 언제나 당당하게 살았고, 위기에서도 언제나 승리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성도들 뿐 아닙니다. 신약의 성도들도 하늘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신약성경은 스데반이 순교 당할 때 하늘을 우러러 보았다고 합니다.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7:55). 스데반의 설교를 듣고 분노한 이스라엘 사람들이 던진 돌이 날아오고, 그 돌로 인해 난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는 그 순간에, 죽음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그 순간에, 스데반이 바라본 것은 그 험악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었습니다. 그가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스데반이 이렇게 하늘의 영광을 바라보는 그 순간 그의 얼굴은 마치 천사의 얼굴처럼 변화되었다고 합니다.

 

사도 바울도 언제나 하늘을 바라보고 천국을 사모하며 살았습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을 아느니라.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고후5:1,2).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3:20).

 

베드로도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벧후3:13).

 

히브리서 11장 믿음 장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 같이 살면서 하늘의 본향을 바라보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들이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11:13-16).

 

사도 요한도 늘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하늘에 열린 문이 있는데...”(4:1).

보라 하늘에 보좌를 베풀었고 그 보좌 위에 앉으신 이가 있는데....”(4:2).

내가 보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오른 손에 두루마리가 있으니(5:1).

 

당시에는 세계 만민의 운명이 로마황제의 손에 달려있는 줄로 알던 시대입니다.

로마 황제의 말 한마디에 사람들의 생사가 결정되었던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에 사도 요한은 하늘을 우러러 보다가 세계의 운명이 로마 황제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후 사도바울은 늘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마지막 본 하늘의 모습은 바로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성이었습니다.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사도요한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다가 지금의 이 땅과 전혀 다른 천년 왕국과 또 천년 왕국과 전혀 다른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되고 있는 천국의 모습까지 친히 보고 증언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고 살라고 하신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았던 우리 믿음의 선배들의 삶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또 우리는 왜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합니다.

셋째,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신앙이 곧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재림신앙이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바라보고 살고, 그 하늘에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사는 신앙을 재림신앙이라고 합니다.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신앙이 바로 이 재림신앙입니다.

 

그런데 2,000년 전 유대인들은 메시야를 간절히 기다렸으면서도 불구하고 메시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거부하고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전서 10:11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유대인들에게 있었던 이런 일이 교회의 본보기로 기록된 말씀 교회에 깨우침을 주시기 위한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들에게 일어난 이런 일은 본 보기가 되고 말세를 만난 우리를 깨우치기 위하여 기록되었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유대인들이 했던 것과 같은 동일한 일을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교회도 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방인의 교회의 대부분이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유대인들과 같이 환영하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교회가 재림 신앙에서 실족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성경은 종말의 때에는 깨어 있어야 할 때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이런 내용을 열 처녀의 비유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모든 처녀들이 다 졸고 있었지만 다섯 처녀는 재림의 주로 오시는 신랑을 맞을 준비인 등과 기름을 준비 하고 있다가 혼인 잔치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등은 가졌으나 기름을 준비하지 못하고 있었던 나머지 다섯 처녀는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늘 재림의 주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종말의 때에 대해 보여주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보면, 7, 7나팔, 7대접의 재앙이 이 땅에 내린 이후에, 19장에서는 그리스도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자가 있으니 그의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그 옷과 그 다리에 이름을 쓴 것이 있으니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라 하였더라.’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대해 기록 하고 있는 요한계시록 20장에서는 이 땅과 달리 새롭게 창조된 세상에 세워지게 될 메시야 왕국 즉 천년 왕국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

 

천년왕국이 끝난 후에 하늘 군대와 마귀와 땅의 왕들 사이에 최후의 전쟁인 곡과 마곡의 전쟁이 있게 될 것입니다.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의 모래 같으리라.’

 

그 후에 하나님께서 인류의 죄를 심판하실 최후의 심판인 흰 보좌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희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더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 못에 던져지리라.’

 

그리고 요한계시록 21장과 22장은 하늘나라에 대해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이 하늘나라를 사도요한에게 계시해 주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하늘나라를 바라보고 평생을 살아온 사도 요한은 이렇게 응답합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들,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신앙은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재림신앙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재림신앙을 가지고 다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사느냐? 하고 살지 않으냐? 하는 것에 따라서 깨어 있는 신앙의 삶을 살게 되느냐? 잠자고 조는 신앙의 삶을 살게 되느냐가 결정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신앙생활의 성공과 실패가 갈라진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나눈 하늘을 바라보고 살자.’는 이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신앙은 하늘을 바라보는 신앙이며, 하늘에 계시면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이라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신앙이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땅만 바라보면 사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남은 2019년 하반기의 삶 속에는, 이전에 우리가 보고 경험하지 못한 일들일 아주 많이 일어날 것입니다. 어떤 일은 두려운 일이 될 것이고, 어떤 일은 무서운 일이 될 것이며, 어떤 일은 듣기에도 황당한 사건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그리고 빈부격차는 더 벌어질 것이고 사회불안은 더 심화될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일일이 마음을 쓰게 되면 세상 염려와 근심이 우리 마음을 어둡게 할 것입니다. 또 한 번 강연을 하고 천만 원을 넘게 받은 그런 사람들을 바라보며 욕심이 우리마음에 충동질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 물질에 집착하다가 보면 하나님을 놓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을 바라보고 살면 하나님과 천국이 더 가까이 친밀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우리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께로 가까이 가게 될 것입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나는 하늘과 가까워지고 하늘은 나와 가까워지게 됩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이렇게 해서 날마다 새사람을 입어 가는 존재의 변화는, 오직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리고 또 이런 사람들만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도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사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남은 이 한 해 동안 땅을 바라보며 살지 말고 하늘을 바라보며 살아서,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을 통해 하늘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일에 쓰임을 받으며 사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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