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 있는 사람
마태복음 5:1-12
여는 말
우리는 지지난주에 시편 1편을 중심으로 구약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면 구약성경은 어떤 사람들이 복 있다고 하고 있습니까?
시편 1편이 증거 해 주고 있는 복 있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기 위하여 힘쓰고 애써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하나님의 은혜 밖에 있는 복 없는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은 이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아 누리며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이미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고 있다는 것을 그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사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하여서, 복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말고, 오히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워하며 그것을 주야로 묵상하며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산상설교의 말씀에서도 동일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 ‘온유한 자가 복이 있다.’ ‘화평케 하는 자가 복이 있다.’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자가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시니, 나는 ‘교만한 마음, 거만한 마음, 오만한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이런 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내 마음을 성경이 복 있다고 하는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기도하고 금식하고 애쓰고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당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마음의 변화가 내가 수고하고 노력한다고 되느냐는 것입니다.
그리고 산상설교에서 요구하고 있는 도덕적인 기준 또한 너무 높아서, 사람이 아무리 애쓰고 수고하고 노력해도 이런 수준에 이를 수 없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산상설교가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기준은 얼마나 높습니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이 세상의 모든 법은 나타난 행위를 문제 삼습니다. 마음과 생각을 문제로 삼는 법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것은 구약의 율법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도 사람의 드러난 행위를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문제로 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21-22절입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욕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태복은 5:27-28절입니다. “또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거룩한 마음과 생각을 가지고 살기를 요구하는 이 예수님의 요구를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옛 사람에게 준 율법은 행위로 나타난 죄를 문제 삼고 있지만, 나는 너희의 마음과 생각 속에 있는 죄를 문제 삼는다.’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1. 산상설교 말씀에 대한 역사 속의 논쟁들
그래서 이 산상설교 말씀의 해석을 놓고 역사상 다양한 논쟁들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사람이 행할 수 없는 이상론에 대해 말씀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로마서를 보면 마음이 부패한 인간의 상태에 대해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더 부패하고 죄악된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고 우리가 이미 선언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부패하고 죄악 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의 요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사람들이 살지도 못하는 그런 요구를 하고 계신 것입니까?
그 이유는 ‘사람들이 살아야 할 이상적인 삶은 이런 것이다.’라고 하는 기준으로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기준에 이르기 위해서 힘쓰고 애쓰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들은 단지 이상적인 기준일 뿐이며, 나는 그렇게 살려고 수고하고 노력할 뿐이지 이 모둔 사람들은 사람이 지켜 행하며 살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에 지켜 행하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라고 합니다.
둘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구약의 율법이 사실 사람들이 다 지켜 행할 수 없는 말씀이고, 이 율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 죄를 깨닫게 하는 기능을 하였듯이, 산상설교의 말씀들도 사람들이 지켜 행하며 살 수 없는 말씀들로서,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해 주는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산상설교를 보면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옛 사람에게 말한바”와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 라는 말씀을 반복하시면서, 옛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구약의 율법과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고 있는 산상설교의 말씀을 비교해서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구약의 율법과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들이 같은 기능을 하는 말씀, 연관성이 있는 말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산상설교의 말씀들이 율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견해는 한국교회가 지지하고 있는 견해입니다.
현존하는 주석의 60-70%는 이 견해를 지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 수세기 동안 세계적으로도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아온 견해입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수많은 지지자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예비적인 복음의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율법이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고, 또 그 깨달은 죄의 문제로 고민하는 사람들에게 율법은 그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몽학선생의 기능을 하였듯이,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도 사람들의 죄를 깨닫게 하고, 또 그 깨달은 죄를 가지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율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산상설교를 예비적인 복음으로 이해합니다.
산상설교가 예비적인 복음이란 의미는, 산상설교가 사람들을 구원을 얻게 하는데 직접적인 관련은 없지만,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그런 고차원적인 삶을 전혀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여서, 나의 수고와 노력으로 얻게 되는 구원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길로 사람들을 인도 한다는 것’입니다.
넷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를 위기를 맞이한 사람들을 초청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았습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산상설교는 언제 무너져 내릴지 모르는 삶 즉, 삶의 벼랑 끝에 서게 되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초청의 말씀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제 이 땅에서 살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사람들에게, 하나님 차원의 높은 윤리적인 기준을 제시해 주심으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하여서, 그 죄를 회개하고 예수님께로 나아올 수 있도록 주신 마지막 초청의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다섯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성도들이 아닌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견해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로마 카톨릭 교회가 주장하고 있는 견해입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도 산상설교의 윤리적인 요구들이 너무 높다는 것 때문에 고민하다가 한 가지 공식적인 견해를 내놓았습니다. 로마카톨릭 교회가 내 놓은 공식적인 견해는 이렇습니다.
그들은 마태복음 5:1절에서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일반 대중인 무리들에게 주신 말씀이 아니고, 예수님께서 제자로 선택하신 12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석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높은 윤리적인 기준을 담고 있는 이 말씀들은 일반 성도들이 지켜 행하며 살 수 없고, 예수님의 제자들에 상응하는 종교지도자들이나 수도원에서 수도에 전념하는 수도사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함으로 로마 카톨릭 교회는 이 말씀들은 신자들이 지키지 않아도 되는 말씀이 되게 했습니다.
이런 주장의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버리고 조상들이 전해 준 전통에 목을 매었듯이, 이런 견해를 가진 로마 카톨릭도 예수님이 주신 말씀들은 지켜 행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고,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칠 성례에 참여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교회는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했던 것과 동일한 잘못을 지금 또 다시 반복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섯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천년왕국 시민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는 세대주의자들의 견해입니다.
이 세대주의 자들은 근대 교회에 가장 큰 피해를 입힌 이단적인 사람들입니다. 한국교회는 과거 이 세대주의의 영향을 받지 않은 목회자와 교회가 없을 정도로 세대주의는 이전 시대를 주도했던 신학사상입니다.
이 세대주의의 영향력이 아직도 한국교회에 남아 있습니다.
각종 종말론적 이단들은 다 이 세대주의에서 나왔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역사를, 창세기에 나타난 무죄시대부터 천년왕국시대까지 일곱 세대로 나누어서 각각의 시대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 다르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사람들은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성도들을 위해 주신 말씀이 아니고, 이 세대가 끝이 난 후에 있게 될 가장 이상적인 왕국인 천년왕국 시대 백성들이 지키며 살아야 할 말씀이라고 보았습니다.
이 세대주의 자들의 견해도 로마 카톨릭과 같아서, 오늘날 성도들은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지키며 살아야 할 의무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우리와는 관계가 없는 말씀이 됩니다. 이 모든 견해의 같은 점은 예수님이 주신 산상설교의 말씀들은 죄인인 사람들이 다 지켜 행할 수 없는 말씀이기 때문에 지키지 않아도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단히 잘못된 견해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구약의 율법들을 죄인들이 다 지켜 행할 수 없다고 해서, 또 율법을 다 지켜 행함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다고 해서, 성경 그 어디에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산상설교의 말씀들이 요구하는 윤리적 기준이 높아서 사람들이 이것들을 다 지켜 행하며 살 수 없어 보인다고 해서,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지키지 않아도 된다고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이 모든 견해들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칩니까?
이 모든 견해들은 사람들이 성경의 말씀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거룩한 동기를 약화시킵니다. 그리고 이것이 ‘이신칭의’의 구원교리와 맞물리게 되면 믿음은 강조하나 실천적인 삶은 경시하는 풍조를 가져오게 됩니다. 그래서 믿음은 있으나 윤리적인 삶은 없는 교인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가 공히 앓고 있는 문제가 아닙니까?
오늘날 신앙의 풍조를 보면 믿음은 강조하고 믿는 자의 삶은 등한시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인의 도덕수준이 아주 낮아진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 세상에서나 일어날 수 있는 폭력, 사기, 편 가름, 이기주의, 지역주의 등등의 현상들이 교회 안에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의 모습인 것입니다.
교회가 이렇게 교회다움을 잃어버리게 된 이유는 교회에서 믿음을 강조하고 믿는 자가 지키며 살아야 할 삶을 강조하지 않는데 그 원인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 문제는 오늘날 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나온 이론이 바로
일곱째,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윤리적인 기능을 한다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되지만, 구원 받은 성도들의 신분은 그 살아가는 윤리적인 삶으로 확인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견해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 산상설교의 말씀은 천국 시민의 윤리로서 구원받은 성도들이 지켜 행하며 살아야 할 말씀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견해는 다시 두 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라고 말씀하셨으니, 지금 내 심령은 비록 거만하고, 교만하고, 굳어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 자신의 심령으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이 되게 하기 위해서 기도하고, 금식하고, 철야하고, 회개하므로,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가난한 심령을 만들어가는 그런 사람들이 복이 있다고 하는 견해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이렇게 해석해서, ‘당신도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고 싶으면 굳은 마음을 회개하고 마음속에 있는 쓴 뿌리들을 제거하십시오. 그래서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지난주에 시편 1편을 통해 살펴본 구약성경에서 복 있는 사람에 대해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이, 이미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이 그 자신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 변화된 가난한 심령을 통해 애통하는 심령을 통해 온유한 심령 등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된다는 견해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견해 중에 팔복에서 복이 있다고 말씀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2.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
지금부터 마태복음 5장의 말씀을 통해 이것을 살펴보겠습니다.
팔복에 나오는 복 이라는 단어에는 형용사 ‘마카리오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마카리오이’는 어떤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까? 이 ‘마카리오이’는 우리가 지지난주에 살펴본 시편의 ‘아쉬레이’와 같이 동사가 아니고 형용사입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동작이나 행위와 관계된 단어가 아니고, 그 존재와 상태를 가리키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은,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려고, 애통하는 자가 되려고, 온유한 자가 되려고’ 수고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 있는 사람은 ‘이미 그 심령이 가난해 져 있는 사람들, 애통하고 있는 사람들, 온유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미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누리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이 증거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은 시편이 증거하고 있는 복 있는 사람과 같은 사람입니다. 이들이 받으며 살고 있는 복도 ‘내가 수고하고, 내가 노력하고, 쟁취해야 하는 복’이 아니고, ‘내가 이미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런 복된 상태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천국을 누리고, 위로를 받고, 땅을 기업으로 받아 누리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산상설교의 말씀이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을 말씀하고 있다는 견해나, 율법적인 기능을 한다는 견해나, 예비적인 복음의 기능을 한다는 견해나, 위기를 맞이한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적인 말씀이라는 견해나, 일반 대중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견해나, 천년 왕국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견해는 설 곳이 없어 보입니다.
그리고 또 산상설교의 말씀이 윤리적 기능을 하되 그것은 ‘내가 애쓰고 노력해서 쟁취해야 그런 윤리’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그 영이 거듭난 성도들의 심령상태와 그로 인해 파생되어 나온 삶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약 시편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과 신약 복음서에 나오는 복 있는 사람의 같은 점과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3. 구약과 신약의 복 있는 사람의 같은 점과 차이점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다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그 삶 속에 받아 누리며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구약시대는 하나님께서 장차 이루어 주실 구원의 약속을 믿는 시대이며, 신약시대는 그 약속이 예수님을 통해 이미 성취된 것을 믿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도들이 받아 누리며 살았던 복도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첫째, 구약시대의 복 있는 사람
그러면 구약시대를 산 복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구약시대는 아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약속이 성취된 시대가 아닙니다. 고로 구약시대 사람들은 하나님의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아브라함이 무엇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 하늘의 뭇별과 같이 많아질 것”이라고 약속을 주셨고, 아브라함은 이 약속을 주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아브라함의 믿음을 보시고 의로 여겨 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구약시대 복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조상들에게 가나안 땅을 주신다고 하신 약속을 믿고 바라보았던 여호수아 갈렙이 복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을 믿지 못하였던 사람들은 복 없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복 있는 사람이 된 그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사는 사람처럼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면 복 있는 사람이 살았던 삶은 어떤 삶입니까?
이 사람들은 시편 1편의 말씀이 전해 주고 있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일은 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들이 이렇게 믿음으로 살자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산 그들을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또 그들의 삶 속에 형통의 복을 주셨습니다.
둘째, 신약시대 복 있는 사람
그러면 신약시대를 산 복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신약시대는 구약에 약속되어 오던 그 모든 구원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약시대 복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복음을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그 존재가 완전히 새롭게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구약시대 복 있는 사람의 강조 포인트는 하나님과 그 주신 약속을 믿는 믿음에 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의 복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신약시대에는 구약에서 약속되어 오던 그 모든 구원의 약속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된 시대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 성취된 복음 안에서 실재로 그 죄가 사함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 그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는 변화가 따라 왔습니다. 그러므로 신약시대의 강조점은 이제 그 사람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못했느냐? 에 있으며, 그 사람이 거듭난 자녀로서 살았던 그 변화된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 의가 바리새인의 의보다 낫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시는 바리새인의 의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존재가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이 그 자신의 수고와 노력으로 행하며 사는 의입니다. 이런 인간의 의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신약시대에는 예수님을 통한 구원이 성취된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의 성취는 사람들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게 했습니다. 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의 상태에 대해 예수님은 “심령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온유한 자” 등등으로 표현하신 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이런 존재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이 참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는 아직 구원이 완성되지 않은 때입니다.
이 때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믿는 성도들 위에, 곁에, 그 삶에 함께 하시는 역사로 나타났습니다. 이때는 아직 성령의 내주하심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되는 존재의 변화 심령의 변화는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는 다릅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구속을 통해 구원이 완성되었기 때문에, 믿는 성도들 안에는 성령이 들어와 거하시고, 그 성령의 역사를 통해 그 심령도 변화되는 역사가 있게 됩니다. 이런 심령의 변화에 대해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될 때, 전에는 육에 속하여 살던 사람이 이제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거듭난 영은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알고 예배하는 자가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이 뿐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의 심령 상태에 대해 많은 말씀들을 주시고 있습니다.
빌립보서에서는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이니” 라고 말씀하심으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성도들은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갈라디아서에서는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성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라고 하심으로 예수 믿고 거듭난 우리들의 심령 상태를 성령 하나님의 신적인 속성과 비교하면서 이것이 성도들의 이상적인 심령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렇게 성령의 역사 안에서 완전히 변화된 성도들을 이제 ‘형제라 하시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으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믿고 중생하고 거듭난 성도들은 하나님을 부를 때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아바’ 즉 ‘아빠’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렇게 영광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가 얼마나 존귀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우리의 변화된 신분에 걸 맞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나는 아담 안에서 어쩔 수 없는 죄인’이라고 생각하면 우리는 우리가 믿고 생각하는 대로 그런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예수의 복음 안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고 생각하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복음 안에서 우리를 거듭나게 하시고 또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우리는 아직도 나 자신을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렇게 자신을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술을 마시고 담배 피우면서 심지어 길거리서 술주정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그런 삶을 살 때는 아직도 죄의 종이라서 그런다고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➁ 또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을 이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곳곳에서 목회자와 장로들이 분쟁을 하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어떤 교회에서는 지방색을 따라 서로 다르게 그룹을 지어서 모이는 교회도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이런 세속적이고 저급한 삶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예수 믿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이전 것은 지나갔고 완전히 새 사람이 되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 안에서 주시는 이 놀라운 변화를 아는 사람들만 변화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변화된 삶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리해 봅니다.
신구약 성경이 증거 하는 복 있는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구약 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살았던 외형적인 행동 즉 믿음으로 살았던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성경은 복 있는 사람이 믿음 안에서 변화되었던 심령 상태에 그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거룩한 삶을 열매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차이가 납니까? 시대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구약시대는 성부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사역하시던 시대이며,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 결과로 오시는 성령 하나님께서 아직 오시지 않으신 시대입니다. 그래서 구약시대는 하나님의 약속을 내다보고 바라보고 기다리며 살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 삶을 통해 그 믿음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나 신약시대는 예수님을 통한 구속이 완성되고 성령 하나님도 임하신 이후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고 성령 하나님의 은혜로 영적 은사들과 심적인 변화들이 이루어졌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성령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적 은사들과 변화된 심성들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약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신앙의 삶은 어떠해야 합니까?
우리는 성령을 통해 영적인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처럼 신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성령의 역사 안에서 그 마음과 인격이 완전히 변화된 사람들처럼 살아야 합니다. 신약시대에는 이런 삶의 증거들이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의 말씀을 통해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닫는 말
왜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교회는 이렇게 낮은 윤리의식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왜 오늘날 교회는 이렇게 세속화 되었습니까? 왜 오늘날은 세상 사람들과 성도가 별로 차이가 나 보이지 않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고 왜 우리는 이렇게 윤리의식이 낮아진 교회, 세속화 된 교회, 세상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 교회의 모습을 보고도 별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시대 속에서 왜 우리들은 나만이라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자기 개혁의 강한 소원을 갖고 있지 못합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라고 기대하고 계시는 기준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산상설교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들이 가지고 살아야 할 심령상태에 대해 말씀해 주셨는데도, 교회는 이 말씀들을 실현 불가능한 이상론이라고 하고, 율법적인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고 하고, 예비적인 복음 기능을 하는 말씀이라고 하고, 위기를 맞이한 사람들에게 주신 임시적인 말씀이라고 하고, 일반 대중이 아니라 종교지도자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고, 천년 왕국 백성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하여 왔습니다. 이런 견해들은 예수님이 주신 말씀들이 우리와 무관한 말씀이 되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교회는 오늘 날과 같이 세속화된 교회가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떤 성도가 되고 또 어떤 교회가 되어야 합니까?
그것은 예수님의 설교를 기록하고 있는 이 산상설교의 말씀들을 오늘 내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하신 말씀대로 믿고 살아가는 복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한 주간 이 팔복의 말씀들을 붙들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들에 대한 바른 이해와 깨달음을 주시길 기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깨닫게 해 주시는 은혜 안에서 우리 각 개인이 살아나고, 또 우리 교회가 살아나고, 또 우리가 속해 있는 한국교회가 다시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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