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선언문
로마서 8:1-4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로마서 8:1-2절에서는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사람, 그래서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결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죄인이라고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그 사람을 해방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 말씀 속에서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하나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율법’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난다고 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었던 율법에서 사람들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었을 때 결코 ‘너는 죄인이다.’ 라는 정죄함을 받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 늘 죄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에게 이보다 더 놀라운 선언, 이보다 더 위대하고 감격적인 선언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믿고 난 후에, 믿음으로 이 선언을 할 때에, 그는 이미 죄를 이긴 자로서서 이 선언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 놀라운 은혜가 어떤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고 있습니까?
사도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 은혜가 주어졌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어떤 사람입니까?
1.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즉 ‘엔 크리스토 예수’ 라는 이 위대한 표현은, 신약 성경 속에 약 168회 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그 기록한 서신에서 애용하고 있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안에’ 라는 의미를 가진 ‘엔’ 이라는 단어는 어떤 경계를 기준으로 삼고 그 안과 밖을 구분할 때 사용됩니다. 예를 들면 여기 우리 교회의 벽이 있습니다. 이 벽을 기준으로 해서 교회 안과 교회 밖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이때의 이 교회 안과 밖을 구분해 주는 기준은 이 벽입니다. 이 벽 안에 있을 때는 교회 안에 있는 것이 되고, 이 벽 밖에 있을 때는 교회 밖에 있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로마서는 지금 사람들을 무엇을 기준으로 구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2.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는 의미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 기준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라고 신앙고백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라고 신앙고백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아주 일반적인 구분법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을 믿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그리스도 예수 밖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이런 구분은 우리교회가 이제까지 살펴본 하나님의 말씀들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전에 살펴본 일이 있는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이렇게 신앙고백을 합니다. 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실 것이라고 구약성경에 약속해 오신 메시야임을 믿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고 계신 그 기적들이 바로 예수님이 그 메시야임을 확증해 주고 있습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너는 내가 행하는 기적을 보고 나를 믿게 되었다고 고백하지만, 그 믿음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네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니고데모는 아직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직접 병을 고침 받고 ‘주는 메시야이십니다.’ 라고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마태복음 11장입니다.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고 나아와서 병 고침까지 받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심판을 받은 후에 간 곳은 낙원이 아니라 음부였고, 천국이 아니라 지옥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병 고침의 은혜를 입었던 이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 신앙고백을 하였을 뿐 아니라, 권세와 능력까지 받아서 ‘예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고 많은 권능까지 행사’하였습니다. 이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했습니까? 자신들은 누구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 충성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나아와서 마태복음 7:22-23절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왜 이 말을 했겠습니까?
자신들이 한 평생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달라고 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이 사람들의 헌신을 불법을 행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이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심지어 히브리서 6:4절 이하에서는 이런 말씀까지 하고 있습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들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던 사람들이라도’ 타락을 하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너무 충격적이지 않습니까?
심지어 예수님이 구별하여 세웠던 12제자라고 해서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가룟 유다가 그것을 아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직접 불러서 제자 삼으신 사람이었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3. 로마서의 증거들
그러면 로마서는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첫째, 예수님이 죄의 형벌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로서, 우리를 죄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행하신 사역 전체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시작되어 무덤에 장사되시기까지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즉 비하와, 예수님의 부활하심에서 시작되어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까지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즉 승귀의 전 과정을 말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가장 먼저 이 예수님의 구속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영혼이 거듭나야 합니다.
그 영혼이 거듭나야 한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성령으로 거듭나서 성령 하나님에 의해 새로 창조함을 받은 피조물로의 다시 태어남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셋째, 이런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성화되어 가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을 통해 새로 창조함을 받아 거듭난 사람들만, 자신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첫째는 값없이 베풀어주신 구원의 은혜를 감사하며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 둘째는 성령의 인도하심 안에서 점점 성화되어 나가는 그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반드시 성화되어 나가는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따라와야 합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 세 가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영혼의 거듭남이 있어야 합니다. 셋째, 거듭난 영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점점 성화되어 나가는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장차 영화로운 몸을 입고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로마서의 증거이고 또 성경의 증거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은, ➀ 예수님의 속죄 사역을 믿는 믿음과 ➁ 성령 하나님의 다시 나게 하시는 중생과 ➂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성화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바울에게 이 믿음 이 확신을 준 것이 바로 로마서 7:25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은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을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구원을 확신하고 있는 바울의 상태는 어떠했다고 하고 있습니까?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은 바울이었지만 그 자신의 육체는 여전히 자신의 죄를 정죄하는 율법 아래 있었지만, 그 자신의 마음으로는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신을 의롭다 인정해 주신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아래 있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육체로 가지고 살고 있는 바울이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고지해 주었던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은 언제나 바울에게 ‘너는 죄인이다.’ 라는 것을 고지해 주었고, 죄인인 사도바울에게 언제나 사망을 선고하는 법이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유대교에 있을 때도 그러했고, 지금 예수님을 믿게 된 이후에도 동일했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란 무엇입니까?
바울이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 비로써 깨닫게 된 것이 바로 이 법입니다. 바울은 예수를 믿게 된 이후에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율법과는 다른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에 대해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이 법 안에서 늘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았습니다.
이렇게 볼 때 로마서 7:25절의 말씀이 전해 주고 있는 내용은 이것일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받은 이후에도 여전히 그 육신은 죄의 종으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죄를 정죄하는 율법의 정죄 아래 매여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마음으로는 달랐습니다. 그 마음으로는 전혀 새로운 삶 즉 성령을 통해 얻게 되는 놀라운 해방과 자유로움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경험하게 된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 믿음의 변화를 경험한 바울이 고백한 것이 바로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런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입니다.
우리들이 예수 믿고 구원 받아 성령으로 그 영이 거듭난다고 해서 곧 바로 그 사람이 완전해 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도 여전히 죄를 짓고 게으르며 잘못을 범하며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향해 율법은 그런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어 보여주고, 또 그 지으며 산 죄에 대해서는 사망을 선고합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은 다른 점이 있습니다.
그 거듭난 마음은 더 이상 죄를 정죄하는 율법의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 마음은 언제나 자신을 죄에서 구원해 주신 그 크신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게 됩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그 살아가는 삶 속에 죄를 짓고 범죄 하게 되면 어떻게 됩니까?
이때도 그 마음은 하나님의 크신 사랑 앞에 서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서서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치 세상 사람들처럼 죄를 범한 자신의 모습을 아파하며 그 지은 죄를 회개하며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그 지은 죄를 회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역사하십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바울은 1절에서 선언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고백은 예수 믿고 죄 사함을 받고 그 영이 거듭나 이제 성화를 향해 달려 나가는 사람들이 하게 되는 고백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하나님의 법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제 결코 정죄함이 없으니 그 마음대로 살도록 하는 방종의 법은 아닙니다. 전에 계명으로 지켜 행하며 살아왔던 그 율법은 사람들에게 그 죄를 정죄하는 법으로 역사했다면, 이제 복음 안에서 새롭게 깨닫게 된 생명의 성령의 법은 사랑으로 죄의 용서를 베풀어주는 하나님의 법입니다.
이렇게 볼 때 율법을 계명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법으로 알고 있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알고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율법은 사랑의 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확신을 가지고 로마서 8:2절의 고백을 하게 됩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매주 교회를 다니고, 매 주일마다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직분 받아 섬기는 사람, 혹은 모태신앙을 가지고 평생을 믿음 안에서 살아온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성취해 주신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며, 복음을 믿음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며,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 로마서 8:1절을 킹 제임스 버전(KJV)으로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개역개정판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킹 제임스 버전(KJV)에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는 말씀 뒤에 ‘그들은 육체를 따라 행하지 아니하고 성령을 따라 행하느니라.’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에게는 왜 정죄함이 없다고 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들이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어떻게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되는 것입니까? 여기에 대한 말씀이 바로 8:2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성도들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게 된다고 합니다. 아멘.
이런 말씀들을 통하여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더 이상 육체를 따라 자기주장을 하며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으로 부르는 찬송가가 아마 288장의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가 아니겠습니까?
1.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2. 온전히 주께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보리로다.
3.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후렴 /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라고 합니다.
그러면 정죄가 무엇입니까? 정죄는 합당한 법조항에 근거하여, 합당한 절차를 따라 이루어진, 죄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을 말합니다. 이것이 정죄입니다. 그런데 로마서 8장의 이 말씀은 예수를 믿고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를 이루어가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대 즉 흰 보좌 심판대 앞에서 결코 정죄함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는 육체를 따라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는 육체가 아닌 성령을 따라 사는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살아가는 전 삶을 오직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그때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생애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5.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히브리서 6:4절 이하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그러면 여기서 맛보았다는 것이 어떤 뜻입니까?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이 맛있는지 맛이 없는지 입으로 맛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음식이 입에 맞지 않는다며 뱉어 버렸습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음식을 먹은 것입니까? 먹지 않은 것입니까? 먹지 않은 것입니다. 오직 맛 만보고 뱉어 버립니다.
히브리서 6:4절 이하에서는 이런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본’ 사람들입니다.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본’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들을 먹고 소화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든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 중에 누가 있습니까?
가롯 유다가 있습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제자로 부르심을 받아서 누구보다 예수님의 은혜를 더 많이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다는 예수님을 자신의 주로 믿고 영접하지는 않았습니다. 유다는 누구보다 예수님을 잘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맛만 보고만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예수님을 은 30에 판 것입니다. 히브리서 6장의 표현을 빌리면 ‘타락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 6:4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도 타락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까지 그 믿음을 지키지 못하고 타락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사람들도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끝까지 지켜)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집사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같은 사람입니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요한계시록 2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지도자였던 니골라도 같은 사람입니다.
‘이와 같이 네게도 니골라 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도 있도다.’
이 니골라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인지, 아니면 당시에 살고 있던 동명이인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니골라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라는 가정 하에 살펴보면, 성령과 믿음이 충만했던 이 니골라는 나중에 니골라 당의 괴수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니골라도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이 아니고 단지 은혜의 맛만 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8:2절에서는 하나님의 최종적인 심판에서 정죄함을 받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설명을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여기서 ‘해방하였다.’는 말씀은 과거 완료형이 아닙니다.
현재 진행형입니다. 그러므로 ‘해방하였다.’는 이 말씀은 ‘해방해 오고 있다.’ 라는 뜻입니다. 전에 어느 시점에서 이미 해방이 시작되어서 지금까지 계속 해방해 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그 즉시 완전해지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깎이고 다듬어지면서 완전을 향해 계속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우리 신앙은 계속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화를 이루어 나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어떻게요. 예수님과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의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화되어 나가는 것 바로 이것이 우리의 신앙생활입니다.
6. 그러면 하나님께서 죄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해방시켜 주신 방법은 ‘죄가 없으신 자신의 아들을, 죄가 있는 사람의 육신을 가지고 보내셔서, 그 육신으로 우리 죄를 대신 처리해 주는 방법으로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는 말씀은, 예수님이 죄인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자 하나님으로써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지만, 죄인이었던 사람의 모습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4:15절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와 같이 사람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똑 같은 생애를 사셨지만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원죄는 없으셨던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그런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어주신 것은 바로 겟세마네 동산에서입니다.
마태복음 26:39절 말씀을 보면 십자가를 바로 앞에 두신 예수님이 그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잔은 내일이면 십자가에서 당하게 되실 고통의 잔이 아닙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의 잔을 대신 마시시고 죄인이 되시는 잔이었습니다.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게는 이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없으셨을 것입니다. 죄를 조금도 용납하시지 못하시는 예수님에게는 이것보다 더 싫고 이보다 더 거부감을 일으키는 일은 없으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그 잔을 마시기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십니까?
그것은 그 잔을 마시지 않고서는 죄에서, 죄의 형벌에서 인류를 구원해 낼 수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일을 위해 이 세상에 사람이 되어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에게는 십자가의 고통과 죽음보다 사실 더 고통스럽고 절망스러우셨던 것이 바로 겟세마네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의 잔을 마시는 것이 얼마나 싫으시고 고통스러웠으면, 성부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하게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 주세요.’ 라고 기도를 하셨겠습니까? 얼마나 그 죄의 잔을 마시기 고통스러우셨으면 그 부르짖으면서 흘리시는 땀방울이 마치 상처가 나면 그 상처에서 떨어지는 핏방울같이 땅에 떨어졌다고 하였겠습니까?
우리가 참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라면, 예수님이 우리대신 죄인이 되셨던 겟세마네의 고통, 예수님이 우리 대신 생명을 내어 놓으신 십자가의 고통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고통 속에서 예수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한 희생과 사랑이 얼마나 큰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미가엘 찬송가 864장에는 겟세마네 동산의 예수님을 찬양하는 복음송가가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 하실 때 주님의 땀방울은 피로 변했네.
아! 아! 아-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하나님을 거역한 나를 위하여 순종의 속죄 피를 흘려주셨네.
아! 아! 아-아 주의 사랑 깊고 크셔라. 내 영혼에 파도처럼 메아리쳐 온-다.’
7. 그러면 이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히브리서 6장에서 말씀하는 사람들처럼 더 이상 하나님과 그 은혜들을 맛보고 끝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이 성찬식을 제정해 주시면 하신 말씀처럼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 안에서 이제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야 할 믿음의 삶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우리는 이제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삶, 성령과 동행하여 사는 삶, 성령으로 사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이 우리 모두의 삶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델이 구약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5:21절을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삼백 육십 오세를 살았더라.’
히브리서 11: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구약성경을 보면 에녹은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에녹의 삶은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모델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믿음으로 살아가게 될 때 비로써 우리의 삶은 점점 성화되어 나가고,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서는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 안에 자아가 왕으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직 이런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그 왕으로 고백하며, 자신의 왕이신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여 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는 이렇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사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고백하게 되는 고백이 바로 로마서 8:1-2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모두는 이 믿음에 우리 자신을 굳게 세우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하루하루의 삶을 믿음으로, 확신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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