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10. 9. 09:22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서2:12-18

 

요즘 우리나라는 조국 블랙홀에 빠져 있습니다.

왜 조국 장관은 온 국민의 비난을 받고 있습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한 말과 그가 살아온 삶이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성도들을 비난하는 중요한 이유가 바로 말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그 살아가는 삶은 전혀 예수 믿는 사람처럼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이런 현상들이 나타나는 것입니까?

조국 장관을 보면 그 가지고 있는 이상은 높은데 그 살아가는 삶이 그 이상을 따라가지 못해서 나타나는 결과인 것 같습니다. 이것은 성도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성도들이 세상으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그 가지고 있는 믿음은 하늘에 닫아 있는데 그 살아가는 삶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낮지 않을 때 세상은 성도들을 비난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삶의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빌립보서 2장의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살아가야 할 삶에 대해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그 받은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빌립보서 2:12절 하 반절입니다.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어떤 사람들은 이 말씀을 잘못 이해하여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고 또 지옥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 삶에 구원이 달려 있다고 하는 것이 됩니다.

 

이런 이해는 기독교의 본질을 흔드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효화시키려는 사단 마귀의 교묘한 계략입니다. 사도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이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갈라디아서 1:6-8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 이외의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게 된다고 거듭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전한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받은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언제 이런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습니까?

그가 전에 예수 믿는 성도들을 잡아오려고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 상에서 자신을 찾아오셔서 만나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을 때일 것입니다. 이 때 바울은 교회를 박해하는 자가 180도 변하여 그 박해하던 복음을 세상에 전하는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이때부터 바울이 세상에 전해 온 복음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해 주시려고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시고 3일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이 복음이며 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구원에서 떨어질 수 있고 또 지옥갈 수 있다고 하는 것은 다른 복음입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은 이후에는 아무렇게나 막 살아도 되는 것입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과 구원 받은 이후의 삶에 대해 총신대학교 이상원 교수를 이렇게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개혁주의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구원론을 강조해야 한다. 그리고 이 터전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 구원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내어야 할 성화되어 가는 삶을 철저하게 강조하여야 한다. 이 구원의 은혜와 행동하는 믿음은 모순되는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서 그 영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를 믿음으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빌립보서 2:12절 하반 절에서 바울이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고 하신 말씀한 뜻은 이미 예수를 믿고 있는 빌립보교회 성도들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해 나가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를 믿고 있는 성도들의 가장 큰 문제점이 무엇입니까?

자신에게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그 살아가는 삶을 보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화를 이루어 가는 삶을 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런 잘못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주로 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는 것이지 내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받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삶과는 전혀 관계가 없이 나는 이미 예수를 구주로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어떤 삶을 살든지 관계없는 나는 예수를 믿기 때문에 죽어서 천국에 간다.’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사람들이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런 신앙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그런 삶을 통해서, 자신이 구원 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구원의 단계를 살펴보면 곧 알 수 있습니다.

1. 우리 구원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구원의 첫 번째 단계는 칭의입니다.

칭의는 사람들이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그 법정에서 이제 너는 의인이 되었다.’라고 칭해주시는 것입니다. 이 칭의는 단회적인 사건입니다.

 

이 칭의의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구원은 행위에서 나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에게 거저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에베소서 2:8-9절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

 

또 히브리서 9:27절에서는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고 합니다.

장차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서 그 행위에 대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인데, 그 때 심판의 기준은 그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선했느냐, 악했느냐?, 십계명을 지켰느냐, 못 지켰느냐?’하는 것이 기준이 아닙니다. 이때의 기준은 오직 믿음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었느냐, 믿지 않았느냐? 하는 것이 이 심판의 유일한 기준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3:18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그리고 요한복음 5:24-25절에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우리대신 2,000년 전에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심판을 받아 주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 자신이 지은 죄를 그 때 심판 받게 되지만, 예수님이 우리대신 2,000년 전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우리 죄의 심판을 받아 주신 것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제 더 이상 심판도 정죄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들은 모두 과거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미 2,000년 전에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다 이루어 놓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이미 구원받는 자들입니다. 이미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며, 이미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지옥가고 싶어도 갈수 없는 자들입니다.

이미 천국을 소유한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 받을 때 이루어진 일입니다.

 

구원의 두 번째 단계는 성화입니다.

 

성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면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그 순간부터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의 과정을 시작됩니다. 그리고 이 성화는 우리가 이 세상 떠나는 날 까지 계속됩니다.

 

칭의와 성화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해 볼 수 있습니다.

칭의가 아기가 태어나는 출생이라면 성화는 아기가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2절에서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갓 태어난 성도들에게 이런 교훈을 한 것입니다. 갓난아기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아가야 할 성화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게 하는 성화는 이 땅에서의 축복된 삶과 천국에서 받게 될 상급과 연관이 있습니다.

 

구원의 세 번째 단계는 영화입니다.

 

영화는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죽은 이후에, 또는 예수님이 재림하신 이후에 낙원에 가 있던 성도들이 천국을 유업으로 받기 위하여 거룩한 몸을 입고 부활하게 될 때 이루어지게 됩니다. 

 

그러면 왜 성도들이 영화롭게 되어야 하는 것입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사는 이 육체 즉 혈과 육은 영적인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상속 받을 수 없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려면 신령한 몸이 필요합니다. 영화는 우리 몸이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완전하신 몸을 닮아서 영광스럽게 변화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우리 구원이 완성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이렇게 세 가지 모습으로 구분됩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구원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 앞 뒤 문맥을 통해서 그것이 칭의인지, 성화인지, 영화인지를 잘 분별하여 해석해야 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그러면 빌립보서 2:12절에서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이 말씀은 어디에 속하는 구원이겠습니까? 이 말씀은 칭의와 영화에 대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바로 성화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빌립보 성도들에게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여 예수님의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어 가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린 아기가 새로 태어나면 그 때부터 움직이고 숨을 쉬고 활동하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아기가 새로 태어났는데 움직이지도 않고 숨도 쉬지 않고 활동하지도 않고 있다면 그 아이는 죽은 아이입니다. 야고보 사도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은 바로 여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를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새롭게 살아가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고 구원 받았다고 하면서도 구원 받은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되는 새로운 삶이 전혀 없다면 이런 사람들이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는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구원에 이르게 되는 세 단계를 살펴보았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칭의입니다. 두 번째 단계는 성화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빌립보서 2:12절의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라는 이 말씀은 성화에 대한 말씀임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래서 두 번째로 살펴볼 내용은

2. 성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우리들의 구체적인 삶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를 믿고 거듭나 의롭다 함을 받은 성도들이라면, 날마다 삶 속에서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빌립보서 2:12절 말씀에서 어떻게 성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까?

 

첫째, 나에게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구체적인 삶이 없으면,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될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12절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회 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어 구원받은 성도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구원 받은 성도로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구원 받은 성도로 사는 삶입니까? 그것은 우리 믿음의 주요 우리 신앙의 푯대가 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닮아서 온유하고, 겸손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빌립보 성도들의 삶은 어떠했습니까?

이들은 복음을 전하면서도 서로 경쟁하며 전했습니다. 1:15절입니다. 어떤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또 서로를 향한 다툼도 있었다고 합니다. 4:2절입니다.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이런 빌립보 교회의 모습을 보아온 사도바울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뿐 아니라, 지금 내가 없는 때에도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점점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어가야 한다.’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을 보면 고린도 교회 안에서도 다툼과 분쟁이 있었습니다.

고린도 교회 성도들도 나는 바울 파다. 나는 아볼로 파다. 나는 베드로 파다. 나는 그리스도 파다.’ 라고 하면서 시기하고 분쟁하고 다투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성도들을 향하여 언제 내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언제 베드로가 너희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느냐? 오직 너희들의 죄의 값을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복음을 전해 준 자신이 있든지 없든지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사람들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1:1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신앙생활의 표준은 목사나 장로가 아닙니다.

오직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신 예수님이 우리 신앙의 표준이 되어야 하며, 우리는 항상 두렵고 떨림으로 예수님을 본받으며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성도들의 행위를 보고 비판하고 정죄합니다.

이 사람은 이래서 싫고, 저 사람은 저래서 싫다고 합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 누구라고 다 잘할 수가 없습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이 다르고, 그 받은 사명과 직분이 다 다릅니다. 그런데 어떻게 다 내 마음에 들 수가 있겠습니까? 내가 내 자신을 보아도 마음에 안 드는 것이 많이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들이 내 마음에 들도록 요구할 수가 있겠습니까?

 

또 사람을 보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사람들의 평판에 굉장히 민감합니다.

누가 좀 칭찬을 해주면 금세 안색이 좋아 졌다가도, 누가 좀 싫은 소리 하면 금세 어두워집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말에 과도하게 귀를 기울이고, 사람을 너무 심하게 의식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마음은 우리 신앙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만 바라보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사람들의 판단에 너무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고린도전서 4:3절입니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 파, 게바 파, 아볼로 파, 그리스도파로 나누어서 서로 비방하고 모함하고 헐뜯고 있을 때, 다른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고 말하든지, 나는 그들의 말에 개의치 않겠다.’ ‘다른 사람에게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다. 나는 사람들의 말에 신경 쓰지 않겠다.’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4절입니다.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바울은 자신을 판단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일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가져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는, 오직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만 바라보고, 그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서 순종하며, 예수님을 닮아가는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사람의 말에 너무 과도하게 귀를 기울이거나 사람의 말에 선동되지 말고, 바울처럼 나를 판단하시는 이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믿음을 가지고 그 하나님 앞에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말씀에 복종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런 삶이 우리 모두의 기본적인 신앙의 삶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2:12절 말씀에서 어떻게 우리들이 성화를 이루는 삶을 살 수 하고 있습니까?

첫째, 나의 신앙의 삶에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구체적인 삶이 없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 받지 못하는 것처럼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어떻게 성화를 이루며 살아갈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까?

둘째, 바울은 성화를 이루어 나가기 위해서는 두 가지를 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13-14절입니다.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그 작정하신대로 세상만사를 주관하시고 또 사람들을 이끌어 가십니다.

그 목적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해서이며, 그 방법은 성령을 통해 성도들의 마음에 소원을 주셔서 행하도록 하십니다. 성령이 성도들의 마음에 거룩함을 이루며 살겠다고 하는 선한 마음을 주시고, 때로는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고 싶어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강한 소원을 주시기도 하십니다.

 

이렇게 볼 때 내가 하기 싫은 일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또 그 일을 생각할 때 마음에 기쁜 마음이 없으면 그것 또한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만약 그 일을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그 일을 하고 싶은 간절한 소원이 내 마음속에 생겨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마음에 소원을 주셔서 인도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 아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소원을 주셔서 인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아직 어린 학생인데도 불구하고 믿음 안에서 나는 의사가 되어야 되겠다. 나는 선생님이 되어야 되겠다. 나는 사회사업가가 되어야 되겠다.’라고 하는 목표를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이루기 위해 거기에 맞게 공부하고 노력합니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마음에 소원을 주셔서 인도해 주시기 때문에, 친구들이 놀 때도 자신은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하여 공부하고 노력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공부하고 노력하는 일이 힘들기는 하지만 기쁜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들은 나는 의사가 되어야 되겠다. 나는 선생님이 되어야 되겠다. 나는 사회사업가가 되어야 되겠다.’ 라고 말은 하면서도 전혀 노력하지 않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은 하나님이 소원을 주셔서 인도하고 있는 아이들이 아닙니다. 이런 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꿈은 개꿈입니다. 헛된 꿈이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우리가 성화를 이루어 나가려면

하나는,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주시는 소원을 따라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화를 이루어 나갈 수 있다고 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원망 시비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14절입니다.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주의 일을 할 때에는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해야 합니다. 빌립보 교회 성도들은 함께 예수님을 믿고 있으면서도 그 마음은 하나가 되지 못했습니다. 원망하고 서로 다투고 싸웠습니다. 이렇게 살았던 빌립보 교인들의 마음도 편치 않았을 것입니다. 이런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바울은 너희가 주의 일을 행할 때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원망과 시비로 하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그 뜻을 성도들에게 알려 주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그 마음에 소원을 갖고 행하게 하십니다. 내 뜻대로 하려는 사람에게서 원망 시비가 일어납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특징은 다른 사람들이 하는 일을 보며 뒤에서 이러쿵저러쿵 간섭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뜻을 알려 주셔서, 그 마음속에 그 일을 하고자 하는 소원을 갖고 있는 성도들은 다릅니다. 여러모로 부족함이 많은 자신에게 하나님이 그 일을 맡겨주신 것을 생각하며, 늘 자신을 믿고 맡겨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그 앞에서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가진 믿음이 점점 커지고, 예수님을 닮아 거룩함과 성화를 이루어나가게 됩니다. 바울은 이를 통해 너희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원망과 시비가 없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내가 한다고 생각하면 원망과 시비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해 주심을 믿고 일하게 될 때 원망과 시비는 사라지게 됩니다.

 

사도행전 16장을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서 귀신들인 아이를 고쳐 주었습니다.

이 때 바울이 잘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그것 때문에 매도 수없이 맞고, 감옥에 갇히기 까지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도바울은 그런 당국자들의 처분을 원망하거나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 ‘내가 무슨 법을 어겼냐?’라고 대들며 따지지도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시고 계심을 믿었기에, 이런 부당한 대우에도 하나님의 선한 뜻이 있겠지 생각하면서 감옥 안에서 그 하나님께 기도 하고 찬양하였습니다. 바울이 믿었던 하나님은 로마서 8장의 말씀과 같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삶 속에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이셨던 것입니다.

 

바울이 찬양하고 기도하던 바로 그때 갑자기 감옥이 흔들리고, 매였던 모든 착고가 풀리고, 옥문이 활짝 열렸습니다. 지진에 놀라 간수가 졸다가 깨어 보니 옥문이 활짝 열려 있었습니다. 간수는 당황해 하며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당시에는 간수가 죄인 하나를 놓치게 되면 그 놓친 사람을 대신해서 간수가 죽어야 했습니다. 그 때 바울은 그 간수를 말리면서 우리가 도망가지 않고 여기 있다고 라고하면서 죽지 말라.’고 했습니다.

 

간수가 정신을 차리고 감옥에 들어가 보니 옥문이 열리고 모든 착고가 다 풀어져 있는 대도 바울이 도망가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이렇게 묻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그 때 바울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간수는 회개하고 그 밤에 온 가족을 데리고 와서 세례를 받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이 가정을 중심으로 해서 빌립보 교회가 세워지게 됩니다

 

출애굽기를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도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다 죽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삶에 어려움이 다가오면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원망하고 또 하나님의 종 모세를 대적하고 시비했기 때문입니다. 그 불신앙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광야에서 다 죽은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0:10절에서는 그 때 상황에 대해 이렇게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원망하다가 멸망시키는 자에게 멸망하였나니 너희는 그들과 같이 원망하지 말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원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원망과 시비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독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어도 불평하고 원망하고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개인과 모든 교회와 이 세상의 일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주관해 나가십니다.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대로, 각 교회에 주신 사명대로 이끌어 가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섭리하심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원망하거나 시비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아주 다양한 사람들이 모인 단체입니다.

신앙의 색깔이나 신앙의 방법과 신앙의 크기가 다 다릅니다. 직업도 다양하고 학벌과 취미도 다 다릅니다. 개성도 성격도 제 각각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모인 교회에서 그 생각들이 일치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나와 생각은 다르다 할지라도 원망하거나 시비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어떤 사명을 주셨든지 그 사명을 감당하는 과정에서 원망하고 불평하지 말고, 오히려 감사하면서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원망과 시비를 그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예수님을 닮아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성화를 이루어 나가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3. 어그러지고 거슬리는 세상 속에서 세 가지를 실천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첫 번째는, 순전하고 흠 없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15절입니다.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이 세상이 어그러졌다.’는 것은 비뚤어지고 구부러졌다는 뜻입니다.

이 세상이 거스르는 곳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역행한다는 것입니다. 정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시대를 살아갈 때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 세상 본받지 말고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빛과 보존하는 소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5:13-14절에서 비슷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소금이 되어라.’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의 빛과 소금으로 태어나 존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대해 에베소서 5:8-9절에서는 너희가 전에는 어둠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 빛의 열매는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에 있느니라.’ 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두움을 밝히는 빛, 썩고 부패하는 것을 막는 소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 착하고 의롭고 진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성도들은 이런 삶을 통해 그 자신의 거룩함을 이루어 나가고 성화를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생명의 말씀을 밝히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16절입니다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생명의 말씀은 바로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어 구원받는 사람들은 생명의 말씀인 복음을 세상에 전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신 중심적인 일은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떠나 하늘로 돌아가시면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하신 명령은 것도 바로 영혼구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 28) 사도행전 1:8절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복음을 전하여 영혼을 구원하라는 명령은 예수님의 명령이고 유언입니다.

이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 증거 하는 것은 힘이 듭니다. 그러나 힘들지만 순종하여 복음을 전해 나가는 과정을 통해 거룩함을 이루어 가고 성화를 이루어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재림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있게 되고 또 그 수고와 헌신에 합당한 상급을 받게 될 것입니다. 빌립보서 2:16절입니다.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사도 바울은 마치 마라톤 선수가 경기에 우승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달리는 것처럼 자신이 그렇게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달려 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자신의 자랑거리이며, 그렇게 달려온 달음질과 수고가 헛되지 않아서 예수님 재림하실 그날에 받을 상급이 예비되어 있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다른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빌립보서 2:17-18절입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전제는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 마지막에 제물 위에 양의 피나 포도주를 붓는 의식을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이 하나님께 제물로 바쳐지는 일을 위해 혹 자신이 피 흘려 죽게 될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런 자기희생과 헌신의 삶에 대해 예수님은 요한복음 12:24절에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밀 한 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오히려 많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죽어서 많은 빌립보 성도들이 신앙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면 나는 그렇게 죽는 것도 기뻐한다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빌립보 교회가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내가 죽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희생해야 열매를 맺을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희생이 없이는 어떤 열매도 거둘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원리대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지금 기독교가 전 세계에 복음이 전파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중해 연안의 작은 지방에서 복음이 전 세계에 퍼진 것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제자들과 선교사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원래 불교를 믿었던 나라입니다

무당을 섬기며 살았던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 조그마한 한국 땅에서 역사상 보기 힘든 복음의 부흥을 이룬 것은, 미국의 언더우드 선교사(장로교) 아펜젤러와 같은 선교사님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느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게 될 때에는 반드시 그 교회를 위해 사도바울처럼 자신을 전제로 드린 성도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20:26-27절입니다. 세상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이지만,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이렇게 섬기고 희생한 사람들이 하늘나라에는 가장 큰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믿음은 삶으로 드러납니다.

바울이 가진 믿음은 어떻게 그 삶으로 드러났습니까? 바울은 그 자신의 섬김과 희생을 통해 주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진다면 나는 그 일을 위해서 내가 죽는 것 까지도 기뻐하고 기뻐한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가진 믿음의 열매가 바로 초대교회를 세웠던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바울과 같은 희생과 헌신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날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거룩한 삶과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우리의 행위로 노력으로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행위구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성령의 은혜 안에서 끝까지 지켜나가면서 그 신앙을 성장시켜 나가고 발전시켜 나가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성령을 통해 우리를 강권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가진 믿음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참 믿음, 진실한 믿음임을,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신앙생활을 통해 교회 안에서, 세상을 향해 보여주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런 복된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한 주간 한 주간의 신앙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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