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어린아이 같이 되라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0. 5. 3. 14:56



어린아이 같이 되라.

마태복음 19:13-15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제 예은이도 중학생이 됨으로 어린이가 없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금년 어린이 주일에는 조금 다른 설교를 하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19:14절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천국이 이런 사람의 것이니라.’라고 하심으로 천국을 기업으로 누리고 살려는 사람들은 어린 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보통 사람들의 생각과는 많이 다릅니다.

보통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천국은 모세와 같이 믿음이 큰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국은 예수님을 닮도록 성장하고 성숙한 사람들이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전혀 다른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은 어린아이의 시절로 되돌아간 사람들에게 주어진다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8:3절 말씀을 보면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의 말씀이 이해됩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어른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인생을 살아오면서 터득한 삶의 지혜가 있습니다. 수고하고 노력하여 자수성가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높은 학식과 명예와 권세를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이런 것들 즉 남다른 지혜를 가졌어도, 성공한 사람이 되어도, 높은 학식과 명예와 권세를 가졌어도 그런 것들로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은 이미 그 몸은 성장하여 어른이 되었지만, 그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이 그 살아가는 삶이 어린 아이 시절로 되 돌아간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합니다

 

정말 그렇다면, 즉 어른들이 어린아이 같이 되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다면, 어른들이 어린아이 같이 되는 것에 천국과 지옥이 달려 있다면, 우리는 어른들이 돌이켜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를 꼭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2020년 어린이 주일을 맞이한 이 아침에 우리는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는 제목으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첫째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자세가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린아이라고 함은 사춘기 이전의 아이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사춘기 이전의 아이와 성인들을 구분시켜주는 가장 큰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아이들은 사춘기라는 갈등기를 거치면서 자기 가치관이 형성되고 자기 정체성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사춘기를 거쳐 성인이 된 사람들은 다 자기 나름대로의 가치관과 견해를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나름대로의 자기 가치관과 견해를 가지게 된 이후에는 나와 다른 사람들의 가치관이나 견해를 잘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이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아주 좋지 않는 특성입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어린아이들은 아직 자기 견해나 가치관이 형성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부모나 선생님의 가르침에 토를 달지 않고 잘 받아들입니다. 이것이 어린 아이들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라.’라고 하신 이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너희가 나의 가르침을 받을 때 어른들과 같이 자기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려고 하지 말고, 어린아이들과 같이 겸손한 마음으로 나의 가르침을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 같이 배우는 사람들이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 알려고 하면 전후 문맥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마지막 유월절을 보내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던 때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주로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겠습니까?

또 제자들에게 주로 무엇을 가르쳐 주시려고 하셨겠습니까? 이 때 예수님은 그 앞에 놓여 있었던 십자가와 이어질 부활을 주로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때부터 제자들에게 이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런 상황에 대한 말씀이 마태복음 16: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또 마태복음 17:22-23절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더라.’

 

예수님은 십자가로 인류의 죄를 대속해 주시고, 부활로 인류에게 부활의 소망과 새 생명을 주시기 위해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제자들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혀 알아듣지도 못했고 전혀 이해하지도 못했다는 것입니다.

 

성경의 증거를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계시는데,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메시야의 왕국을 선포하시면 그 때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다투며 따라 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제자들은 서로 다른 생각을 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 안에서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와 부활을 가르치고 계셨는데, 제자들은 왜 예수님이 세우시게 될 메시야 왕국을 생각하고 있었냐? 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했던 랍비들의 잘못된 가르침에서 기원합니다. 랍비들은 백성들에게 이제 곧 메시야가 오셔서 그 왕국을 이 땅에 세우실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단 한 번도 고난 받으러 오시는 메시야에 대해 배워본 일이 없었습니다.

 

유대인이었던 제자들도 이런 가르침을 받아왔기 때문에 예수님이 가르쳐 주시는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면서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거듭 가르쳐 주셨지만, 제자들은 랍비에게 배워서 알고 있던 메시야 왕국을 기대하며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라고 하신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너희가 이제까지 랍비들을 통해 배워왔던 그 잘못된 가르침, 그래서 이미 너희의 믿음이 되고 너희의 신앙적인 관점이 된 그 가르침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너희는 돌이켜 마치 어린아이가 부모님과 선생님들에게 듣고 배우는 것처럼, 내가 너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이 십자가와 부활의 가르침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만일 너희에게 이런 돌이킴이 없다면 너희는 내가 전해주는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십자가와 부활을 이해하지 못하면 너희는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우리들에게도 이미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해 정립되어 내려온 신학이 있고 신앙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체계화된 신학과 신앙적인 가르침을 받아 왔습니다. 그런데 때로 이렇게 배운 신학과 신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경 말씀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때도 있습니다.

 

제가 전에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부활과 부활의 순서에 대해 나눈 일이 있습니다.

그 때 목사님들의 반응이 어떠했겠습니까? 목사님들은 나름대로 성경을 보고 이해하고 있을 뿐 아니라, 2,000년 교회 역사 속에서 있어왔던 신학적인 논의들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르친 것과 같은 말은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이것이었습니다.

부활이나 부활의 순서에 대해 이야기 하려면 적어도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미 논의 되어왔던 어느 한 견해에 서서 말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견해가 타당한지 아닌지를 생각해 보고 타당하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 속에서 논의되어 온 일이 없는 전혀 다른 견해를 말하면 나는 받아들일 수가 없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완고한 어른들의 마음입니다.

어른들은 일단 이론적으로 정립하여서 내 견해가 되고 내 관점이 된 것을 잘 포기하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도 이미 역사 속에 정립되어 내려온 신학과 신앙의 창으로만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알고 있는 신학과 신앙의 창으로 하나님의 말씀까지도 제한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모든 시대 모든 사람들에게 성경을 다 열어주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성경 말씀들이 당대 사람들에게는 닫혀 있는 말씀으로 전해 내려왔습니다. 그러다가 그 예언의 말씀들이 이루어져야 할 시대가 되면 비로써 열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조상들로부터 배워오던 말씀을 버리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말씀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런데 역사가 증거하고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은 이것을 잘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한 후에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이스라엘이 바벨론과의 전쟁에서 진다는 것을,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게 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70년 포로생활을 하고 난 후에 해방되어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 들리기나 했겠습니까?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분명한 계시의 말씀을 주셨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누구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기 불과 몇 년을 남겨둔 시기에 다니엘이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70년 포로 생활을 한 후에 고국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계시의 말씀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전에는 닫혀 있던 말씀들을 그 말씀이 성취될 때가 가까워오자 하나님이 열어 깨닫게 해 주신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을 깨달은 사람이 있습니다.

에스겔 선지자입니다. 에스겔도 예레미야서를 읽다가 이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이 사실인지 알기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이런 에스겔에게 하나님이 주신 응답이 에스겔서 36:37절 말씀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셨느니라. 그래도 이스라엘 족속이 이같이 자기들에게 이루어 주기를 내게 구하여야 할지라.......’

 

이 응답의 말씀에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명백백한 뜻이 성경에 기록 되어 있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 명백한 뜻을 이루어주시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명백한 뜻을 알게 되었을 때에는 그 일을 위해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을 통해 그 약속하신 말씀들을 이루어 가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모든 면에 다 적용되는 내용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의 공식과도 같은 내용입니다.

 

우리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명백한 뜻 중의 하나가 바로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성도가 되어야 합니까? 우리가 기도하든지 기도하지 않든지 예수님은 재림하실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재림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성도들은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재림의 약속을 알고 있지만 기다리지 않는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은 기도하며 기다리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것이지, 기도하며 기다리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는 약속인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시자, 마라나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바로 기도로 요청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고 기다린 성도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다니엘서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류역사 마지막 때 일어날 사건들을 말씀해 주신 이후에 4절 말씀에서는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글을 봉함하라...’라고 하셨습니다. 9절 말씀에서도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봉해 두신 말씀들은 그 사람이 아무리 유명한 신학자라고 할지라도 그 사람이 아무리 성경 박사라고 할지라도 열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70년 바벨론 포로생활이 다 마쳐갈 즈음에 영적으로 깨어 있던 다니엘과 에스겔이 깨닫게 해 주셨듯이, 하나님이 다니엘에게 마지막 때까지 봉함하고 간수하라고 하신 이 말씀들도 이 말씀들이 성취될 종말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열어 주셔서 깨닫게 해주실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비로써 그 말씀의 의미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이 봉함해 두었던 이런 말씀들을 때가 되어서 열어 주실 때입니다.

이 때 어른들과 같이 이미 자기 견해와 자기 관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때가 되어서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말씀들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봉함해 두셨던 말씀들을 열어주시는 것을 듣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은 오직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입니다. 오직 이런 사람들만 하나님이 열어 주시는 말씀들을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결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라는 하신 것입니다. 믿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에 당시 하나님의 백성들이었던 유대인들이 왜 하나님의 구원에서 멀어졌습니까?

왜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거부했습니까? 그 조상들이 가르쳐 준 율법적인 가르침과 예수님의 가르침이 너무나 달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조상들의 가르침을 따랐고 예수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대적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후에도 계속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성전제사가 완성된 이후에도 여전히 성전제사를 고집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은 어떻게 막으셨습니까? AD 70년 로마의 디도 장군을 통해 예루살렘 성전을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도록 완전히 파괴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더 이상 유대인의 땅에서 살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발표하도록 했습니다. 그 이후에 비로써 성전 제사가 중단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얼마나 완고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신 후에도 모세의 율법을 지켜 행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그 조상들이 전해 준 종교의 틀을 지키고 유지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사도바울이 예수 믿기 이전에 왜 예수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는 선봉장을 자처했습니까? 바울은 그 조상들이 전해준 성전과 율법을 보전하는 일에 자기 목숨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도바울이었기 때문에 성전과 율법의 가치를 무시하는 듯한 스데반의 설교를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스데반을 죽이는데 가표를 던집니다. 그리고 초대교회를 무너뜨리는 일을 자신이 하겠다고 자청하여 나섰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아주 중요한 장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당시 유대인들과 다른 점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뜻과 생각이 예수님의 뜻과 생각과 다를 때에는 언제나 자신들의 뜻을 버리고 예수님의 뜻을 따랐습니다. 심지어 때로는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도 알지 못하면서도 그 주시는 모든 말씀이 자신들을 영생으로 인도해 주시는 말씀이라고 믿고 따랐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삶을 우리는 어린아이 같이 된 삶이라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런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을 따르다가 나중에는 결국 예수님이 하셨던 그 말씀들을 이해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이해하여 믿게 된 그 말씀을 전하는 일에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가 다 순교자의 길을 걸어 간 것입니다.

 

첫째,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우리의 자세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이런 겸손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또 무엇입니까?

둘째는, 그 가지고 살아가는 마음과 삶의 태도가 어린아이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른들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세상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질과 명예와 학식과 건강과 행복한 삶 등등을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삽니다.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런 조건들에 매여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은 다릅니다.

어린 아이들은 그 아버지가 부자이든지 가난한 사람이든지 관계없이 내 마음에 드는 아이를 친구로 사귀고 또 가깝게 지냅니다. 아이들이 친구를 사귀는데 그 가정 형편을 문제 삼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어른 들이 추구하며 살아가는 물질이나, 명예나, 학식 등에도 얽매이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주된 관심이 어디에 있습니까?

성도들이 주로 그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성도들은 무엇을 하며 살까? 무엇을 해서 더 많은 수입을 올릴까? 어떤 직장을 가지는 것이 나의 삶에 도움이 될까? 라는 등등 자신의 삶에 직접적인 유익을 주고 도움이 되는 것에 관심을 두고 살아갑니다.

 

오늘날 거의 모든 성도들이 이런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압니까?

교회에서 말씀을 전해보면 금방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진리에 대해 구원에 대해 하나님에 대해 성령에 대한 말씀들을 전하면 성도들은 별로 관심 있게 듣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런 말씀들이 나의 삶에 주는 직접적인 유익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그런 말씀들은 들어도 그만 안 들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합니다.

 

성도들이 설교를 들을 때 관심이 있어 하는 것은, 내게 유익을 주고 나의 삶에 도움을 주는 그런 설교입니다. 또 내 삶에 지혜를 주고 깨달음을 주는 그런 설교입니다. 그래서 이런 부류의 말씀들을 전하면 아멘 소리가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성경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주된 가르치심은 이런 것들에 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천국에 대해, 십자가에 대해, 믿음으로 받게 되는 구원에 대해, 또 성도들이 회심과 중생과 성령 받음에 대해, 구원 받은 백성들의 삶에 대해, 기도생활과 예배생활에 대해, 복음 증거와 예수님의 재림 등등에 대해 주로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많은 사람들이 나아왔지만 나중에는 다 실망하고 돌아갔습니다.

왜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말씀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삶의 문제에 대한 말씀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한 직후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셨을 때 사람들은 열광했습니다.

이런 능력이 있는 예수님을 왕으로 삼으면 로마의 압제에서도 벗어날 수 있고, 또 그 살아가는 생활의 문제들도 다 해결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강제로라도 붙잡아서 자신들의 왕으로 삼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는 너희의 세상 적인 욕구를 만족시켜 주려고 오지 않았다. 나는 세상에 생명을 주려고 온 산 떡이다. 또 나는 죄악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너희 마음과 영혼을 시원케 해 주고 회복시켜 주는 신령한 음료를 주려고 왔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시자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은 이해하기 어렵고 또 알아듣지도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다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여기에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이 세상에서 얻게 되는 유익에만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디에 속한 사람들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100이면 100이 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세상일에 그렇게 큰 관심을 보이는 것입니다.

 

천국에 속한 하늘 백성들은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천국에 속한 사람들은 자신이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께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그 삶을 통해, 천국에 관심을 두고 살아가는 삶을 통해, 예수님에게 관심을 두고 그 주신 말씀을 붙들고 살아가는 그런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이 진짜 하늘에 속하여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는 또 이와 비슷한 모습을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의 모습 속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부자청년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편으로는 하나님을 잘 믿고자 했던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 마음이 그 가진 많은 재물에 가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청년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요구하셨습니까? 네가 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려면 재물에 대한 욕망을 버려야 한다.’라고 하시면서 그 재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고 나를 쫒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예수님이 요구를 듣고 부자청년은 근심하며 돌아갔다.’고 합니다. 부자청년의 마음에는 재물에 대한 욕망이 가득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자 청년은 재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를 통해 부자 청년은 자신이 세상에 속한 사람임을 잘 보여주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과 그 나라를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겠습니까? 적겠습니까?

오늘날 이 시대의 영적인 특징은 하늘에 대한 무관심과 냉담함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이 시대 사람들의 영적인 특징을 알려고 하면 다른 사람들을 살펴볼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이 달라지고 그 행동하며 살아가는 삶이 달라집니다. 그 마음 안에 하나님과 예수님과 천국의 소망을 가득 담고 있는 사람들과, 그 마음 안에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성공과 일락을 가득 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같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 시대 성도들의 영적인 상태를 보고 얼마나 답답했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함이 없이는 구원도 없다.’ 라고 했겠습니까? 너희가 그렇게 세상을 추구하며 살고도 천국 갈 줄 아느냐?’ 라는 도전적인 제목의 책을 썼겠습니까? 야고보서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이 없는 신앙은 죽은 신앙이다.’ 라고 소리치고 있겠습니까?

 

이런 우리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는 아주 분명해 보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네 마음이 어디 있느냐?’ 라고 묻고 계십니다. 네 마음속에 무엇을 가득 담고 살고 있느냐?’라고 묻고 계십니다. 말로만 나는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라고 하지 말고, 말로만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며 살고 있다.’라고 하지 말고, 네가 하며 사는 말을 통해, 네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네 마음 안에 담겨 있는 믿음을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을 열망하고 있는 마음을 네 말과 삶을 통해 보여 달라고 하십니다.

 

서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을 여러분은 아십니까?

사랑하는 사람들은 방금 만나고 헤어졌는데도 또 그냥 있을 수가 없어하며 전화를 하며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아쉬워합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헤어져 살면서 가끔씩 만나는 것을 싫어하여서, 우리 이제 헤어져 살지 말고 결혼해서 함께 살자.’고 하면서 결혼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가득한 마음을 가지고, 늘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라고 고백하며 몸 바쳐 헌신하게 됩니다.

 

또 사랑하는 사람에게 해 준 선물을 아까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도 같습니다. 하나님께 몸 드리고, 마음 드리고, 시간 드리고, 물질 드리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다 드리고도, 더 드리지 못하는 것을 아쉬워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두 번째 살펴보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천국을 소유하게 될 사람들이 가진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적인 것을 마음에 가득 채우고 있는 어른들의 마음과 같지 않고, 예수님과 하나님과 그 주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소망을 그 마음에 가득 채우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셋째로,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어린이와 같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가정마다 자녀를 한명 두 명 두기 때문에 아이들이 가정의 우상입니다.

어리석은 부모들은 부부사이보다 아이들을 더 생각합니다. 부부사이가 잘 되고 원활하면 아이들의 교육은 저절로 됩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부모들은 아이들을 우상 같이 떠받드는 것이 잘하는 것인 줄 압니다. 그러면서 그것이 아이들을 망치고 있다는 것도 모릅니다.

 

이런 부모 밑에서 성장한 아이들은 다른 사람을 대접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배우지 못합니다.

심지어 부모가 자기를 더 귀하게 여기는 것을 보고, 부모님을 공경해야 함도 배우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는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마음은 있어도 생각하지 못하는, 이런 어리석은 부모들이 참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성경시대에는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여자와 어린아이는 사람의 숫자에도 넣지 않을 정도로 아주 낮은 신분이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랍비들은 여자와 어린아이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했을 정도입니다. 왜 이런 말을 했습니까? 여자는 남자의 갈비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남자와 합하여 둘이 하나가 되라.’라고 하는 성경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런 여자에게 영혼이 있으면 두 영혼이 하나가 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여자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릴 때 아직 자아 정체성이 완성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혼이 없이 지내다가 성인이 될 때 영혼이 들어온다고 보았습니다. 이런 사회적 인식 속에서 아이들도 나는 아직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18:1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누가 크냐? 라는 문제를 놓고 다투다가 결론이 나지 않자 예수님께 나아가서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라고 묻게 됩니다.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서 그 가운데 세우시고 4절에서 누구든지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큰 자.’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불러 세운 그 어린 아이가 나는 아직 별 것 아니다.’라는 생각을 갖고 있듯이, 이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천국백성들의 중요한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세상 앞에 자신을 세우고 살기에 세상보다 뛰어난 자기 자랑거리를 자랑하며 자기를 높입니다. 그러나 천국백성들은 다릅니다. 천국백성들은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살기에 자기에게는 자랑할 것이 전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며 내 놓을 수 있는 것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천국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나는 별 것 아니다.’ 라는 자기 이해를 가지게 됩니다.

 

천국백성들은 이 세상 속에서의 자랑거리들까지도 다 버려야 할 것으로 봅니다.

성경은 보면 바울은 자신이 가지고 있었던 이런 자랑거리들을 마치 배설물 같이 보고 버렸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자신을 천국백성이라고 하면서 세상 것들을 가지고 자랑하는 사람들은 사실 천국백성이 아닙니다.

 

이런 견해는 교회 목회자도 가져야 하고, 교회 중직 자들도 가져야 하고, 이제 막 예수를 믿게 된 사람들도 가져야 하는 자기이해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있는 믿음이 바른 믿음입니다. 교회를 개척해서 큰 교회를 이룬 사람이라고 여기서 벗어나면 안 됩니다. 내가 주를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은 천국 백성 된 모든 사람들이 그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 앞에서 가지고 살아야 할 바른 자기 인식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사람들을 볼 때도 같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8:5-6절입니다. 또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며 곧 나를 영접함이니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 중 하나를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이 그 목에 달려서 깊은 바다에 빠뜨려 지는 것이 나으리라.’

 

자신을 하나님 앞에 세우고 나는 별것 아닙니다.’라고 고백하며 살고 있는 목회자나 교회 중직 자나 성도들을 하나님은 천국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고 눈동자 같이지켜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사람으로 보고 영접하는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 자신을 영접하고 있는 것 같이 보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을 실족하게 하는 자는 연자 맷돌을 목에 묶어서 스스로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이 더 났다.’고 합니다. 연자 맷돌은 보통 사람이 돌리는 맷돌이 아니라, 소나 나귀가 끌고 돌리는 어마어마하게 큰 맷돌을 말합니다.

 

여기 실족케 한다.’는 말은 걸려 넘어지게 하거나’ ‘비틀거리게 하거나’ ‘죄를 짓게 하거나’ ‘충격을 받고 분개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 앞에 늘 자신을 세워 놓고 하나님 나는 하나님과 그 나라에 별 가치 없는 사람입니다.’라는 고백을 하며 살고 있는 겸손한 목회자나 중직 자나 성도들을 비틀거리게 하거나’ ‘충격을 받고 분개하게 하거나’ ‘걸려 넘어지게 하는 자는 스스로 연자 맷돌을 매고 깊은 바다에 빠지는 것보다 더 크고 고통스러운 일을 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뒤이어 나오는 7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실족시키는 일이 세상에 많이 있는데, 그 중에 나를 믿는 겸손한 목회자, 중직 자, 성도들을 실족시키고 지옥 가는 것 보다, 차라리 실족하게 하는 원인을 제공하는 나의 신체를 잘라내는 아픔과 고통을 당하고 그런 죄를 짓지 않는 것이 훨씬 낫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하나님 앞에서는 누가 크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 설교를 잘하느냐? 누가 더 중요한 직분을 맡았느냐? 누가 더 열심이 있는 성도냐? 누가 성경을 더 많이 알고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누가 하나님 앞에서 더 많이 깨어져서 자기를 더 가치 없는 존재로 여기느냐?

그래서 자기를 부인하고 얼마나 더 겸손하며 얼마나 더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을 사느냐?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겸손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삶을 사는 그런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은 모습이 나타나며, 성령이 주시는 거룩한 은사의 역사들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은 누가 크냐를 놓고 다투고 있었던 제자들을 향해,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천국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이 된 사람들의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어린 아이와 같이 되어서, 예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를 마음에 품고 살며, 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살게 됩니까? 자신을 늘 하나님 앞에 세우고, 하나님 앞에 자신이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을 그 존귀한 백성으로 인정해 주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보시면서, 그 삶을 지켜주시고 신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신앙, 어린아이와 같은 겸손한 삶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사는 신앙이 되고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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