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기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12. 25. 14:23

성탄절에 오신 예수님

요한복음 1:14

 

1. 성탄절의 성육신

 

오늘은 교회가 중요한 절기로 지키고 있는 성탄절입니다.

성탄절은 성자 하나님께서 성령의 역사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시어 사람으로 태어나신 날입니다. 우리는 이 사건을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성육신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성육신은 인간의 이성이나 논리적 이해를 넘어서는 사건입니다. 이 성육신은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렇게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성육신 사건이 믿어지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고, 이 성육신 사건이 믿어지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성육신이 믿어집니까? 아니면 믿어지지 않습니까?

 

성육신이 우리에게는 은혜의 사건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죄 사함을 받고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도 다시 회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모든 은혜와 은사는 이 성육신 사건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아멘.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기 위해서는 그 신성과 신적인 속성들을 다 비우셔야 했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형상을 입고 한 명의 사람으로 사셔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이것보다 더 큰 희생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왜 이 큰 희생을 감수하시면서 성육신 하셨습니까?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이 일을 하시도록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라고 합니다. 독생자를 주신 목적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 위해서라고 합니다.

 

율법에는 동해보상의 원칙이 있습니다.

이 원칙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1이라는 손해를 입히면, 내가 입힌 그 손해만큼 1이라는 보상해 주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이 원칙에서 나온 율법이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보상하라는 율법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의 눈을 다치게 했으면 눈으로 보상하고 이를 다치게 했으면 이로 보상하라는 것입니다.

 

원칙에서 보면 아담이 지은 죄를 누가 대속해 줄 수 있습니까?

죄가 전혀 없는 다른 사람이 아담의 죄를 대속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 사람들은 많지만 죄가 없는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 다 죄인이 된 아담에게 속하여 죄인으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죄는 아담이 지었는데 왜 내가 죄인이 되어야 하느냐?’ 는 것입니다. 내 친구가 죄를 지었다고 친구인 내가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 는 것입니다. 벌써 수천 년 전에 죽은 아담과 내가 무슨 상관이 있다고 내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다고 하느냐?’ 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아담이 죄를 지었는데 그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죄인이 되었다는 말이 이해됩니까?

 

이렇게 설명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한에 살던 어떤 사람이 월북하여 북한으로 가면 이제 그 사람은 북한에서 북한 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이 북한에서 낳은 자녀들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이 없이 다 북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담과 하와의 경우도 같습니다.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던 아담과 하와가, 사단 마귀의 유혹을 받아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 사단 마귀의 말을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사단 마귀의 백성이 되었으며, 이들이 낳은 자녀들도 사단마귀의 백성으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온 인류는 아담의 범죄에 함께 속하여 죄인으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었다.’고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인 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려고 예정하신 방법이 무엇입니까?

죄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의 죄를 대신 지시고 죽어주심으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성자 하나님께서 예수라는 사람으로 태어나신 날이 성탄절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탄절은 어떤 날입니까? 성탄절은 창조주 하나님이 죄인 된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 신성을 버리시고, 피조물인 사람의 형상을 입고 오신 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성육신의 놀라운 은혜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이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이 깨달음은 우리의 삶을 혁명적으로 변화시킵니다. 왜 사람들은 뜨뜨 미지근한 신앙을 가지고 살까요? 그것은 성육신의 놀라운 은혜를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2022년도에 맞이한 이 성탄절에 우리 모두에게 이 성육신의 은혜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깨달음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1)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온 성육신

 

성탄절에 이루어진 이 성육신은 하나님의 예정 속에 계획 되어 있던 일입니다.

이 하나님의 계획이 창세기 3:15절에서 처음 알려졌습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이 말씀은 여자의 후손으로 메시야를 보내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사야 선지자 때에는 더 구체적으로 메시야는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사야서 7:14절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렇게 메시야에 대한 약속은 시대가 지나가면서 점점 구체화되어 갔습니다.

창세기 3:15절에서는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으나, 이사야서 7:14절에서는 처녀의 몸에 잉태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여자에게서 태어납니다.

창세기에서는 메시야도 그렇게 여자에게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메시야의 태어남과 모든 사람들의 태어남이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점도 있습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처녀의 몸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아버지가 있어야 태어납니다. 그러나 메시야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메시야는 아버지가 없이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게 되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태어나는 메시야는 어떤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합니까?

이사야서 9:6절입니다. 이는 한 아이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하나님께서 처녀의 몸을 통해 한 아기,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주신 메시야는 그 어깨에 정사를 메었다.’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메시야는 세상을 지배하고 통치하는 권위를 가지신 분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메시야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기묘자는 기이한 것, 불 가사이한 것, 이적 등 초자연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비록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으나 예수님의 전 생애는 기묘자로서의 생애라고 합니다.

 

출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모든 사람들은 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성령으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 행하신 이적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행하신 수많은 이적들도 예수님께서 기묘자이신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기적을 행하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이것을 행함은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적을 통해 자신이 기묘자이심을 믿게 하려하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부활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망을 이기시고, 사망권세를 부수시고,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부활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영생의 소망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사망을 향해 이렇게 소리칠 수 있었습니다.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나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승천이 그렇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승천하셔서 지금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중보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묘자이신 예수님을 믿게 되면, 기묘자이신 예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께서 신적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신 것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이사야는 이렇게 신적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그 사람이 바로 메시야라고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보십시오. 예수님은 신적 권세와 능력으로 병든 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셨으며, 심지어 바다와 파도까지 잠잠하게 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내 말을 듣고 내가 메시야인 것을 믿지 못하겠거든, 내가 하는 일 - 즉 신적 권세와 능력의 나타남 - 을 보고 내가 메시야라는 것을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모사는 충고하고, 조언하고, 권면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모사가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을 기도로 주님과 의논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해도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실패는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모사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삶을 살아서 늘 승리하는 인생을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

 

전능한 하나님은 예수님께서는 인간이 아님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전능하신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죽은 자를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시고,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고, 마지막에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 그 전능하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영존하시는 아버지라는 이 말씀은 번역상 오류가 있는 말씀입니다.

아버지라 번역한 이 아브는 아버지라는 뜻과 함께 기르는 자,’ ‘양육자라는 뜻도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영존하시는 양육자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예수님의 사랑과 보호하심을 표현하고 있는 말씀인 것입니다.

 

평강의 왕은 예수님은 우리에게 평강을 주시는 왕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주시는 이 평강은 언제 주어집니까?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주어집니다. 예수님은 성도들에게는 평강의 왕이시지만, 불신자들에게는 심판의 주가 되십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가진 믿음이 너무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예수를 믿는 믿음이 얼마나 귀한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차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되면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귀한 믿음을 끝까지 지키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미가서 5:2절입니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이 말씀은 메시야가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되, 유다족속이 기업으로 받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성경에는 메시야 예언들이 많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정리해 보면, 메시야는 여자의 후손으로, 처녀가 잉태한 아들로, 우리와 같이 육신을 가진 존재로 태어나되, 신적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메시야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시되, 유대지파에 속한 베들레헴에서 태어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예언들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우리가 동방에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의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라고 하면서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이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었을 때, 서기관들은 헤롯왕에게 메시야는 유다 지파의 후손으로 베들레헴에서 태어난다.’고 한 예언을 알려주었습니다.

 

우리가 이런 구약성경의 말씀들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메시야로 오신 이 성육신은 우연히 이루어진 사건이나, 돌발적인 사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육신은 하나님께서 그 선지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말씀해 오신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메시야가 어떤 모습으로, 어떤 특성을 가지고, 누구의 후손으로, 어디서 태어날 것이라는 것까지도 새새하게 미리 말씀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아멘.

 

2) 신약성경에 성취된 성육신

 

구약성경에는 메시야의 성육신이 예언되어 있다면, 신약성경에는 메시야의 성육신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사도요한은 메시야가 예언대로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을 뿐 아니라, 신적 능력과 권세 즉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 충만한 모습으로오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8:9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도바울은 메시아가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부요하신 분이시면서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나신 이유는,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심을 통해 우리들이 하나님의 부요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아이들이 즐겨 타고 노는 시소가 생각납니다.

여러분 시소 잘 아시지요. 시소를 보면 그 가운데 축을 중심으로 언제나 한 쪽은 하늘에 닿아 있고 다른 한 쪽은 땅에 닿아 있습니다. 이것은 하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과 지옥형벌을 받아야 할 사람들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 영광을 가지신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래서 시소는 수평을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셔서 지옥까지 낮아지셨을 때, 우리가 탄 시소는 하늘에 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하늘나라 백성이 누리며 살 수 있는 하늘의 부요와 평안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또 저는 이 말씀을 생각할 때마다 생각나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청년 때 같이 신앙 생활하던 청년 중에 부모도 형제도 없는 고아가 있었습니다. 그 청년은 리어카에 꽃 화분을 실고 팔았습니다. 그런데 그 청년이 전도를 받고 청년부 예배에 나오게 되었는데, 정말 열심히 나왔고 또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이 청년이 의지하고 살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었습니다.

 

이 청년에게 저녁시간은 황금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직장인들이 퇴근하면서 꽃 화분을 많이 사갔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청년부 예배는 그 저녁 시간에 있었습니다. 이 청년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면 그 황금 같은 저녁시간을 포기해야 했습니다.

 

어느 날 이 청년이 과일을 사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어제 그 황금 같은 저녁 시간에 손해를 보더라도 이제부터는 먼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고 청년부 예배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날 더 많은 화분을 팔 수 있게 해 주셨다고 하면서 감사하였습니다.

 

이 청년이 아주 추운 어느 날 이런 간증을 했습니다.

날씨가 추우면 이 청년은 장사를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있었는데, 어느 날 기도하는 그 눈앞에 두 발이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그때 이 청년은 곧 바로 그 발이 예수님의 발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입고 있는 옷을 보니 여기저기 기워져 있는 누더기 같은 옷이었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너무 놀랐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은 아마 빛나는 세마포 일거라고 늘 생각해 왔는데, 실재 보니 누더기 같은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 그 마음속에 이런 음성이 들리더라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듣는 순간 이 청년은 예수님께서 비천한 자기를 위해서 그렇게 헤어진 옷을 입고 오셨구나 생각하니 너무 가슴 아프고 죄송해서 고개를 들지 못하고 울고 또 울었다고 했습니다.

 

이 청년은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마음속에서는 나는 고아야. 나는 가난한 사람이야. 나는 배우지 못한 사람이야.’ 라고 하는 열등감을 가지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 비천하게 되신 예수님을 만난 그 날 이후에는 그 열등감이 다 사라져 버리고 완전히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 부요를 버리시고 비천한 목수의 아들로 나신 것은, 그의 가난하게 되심을 통해 우리에게 하늘 부요를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빌립보서 2:6-8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구약성경에서는 신성을 버리시고 인성을 취하신 메시야를 증거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빌립보서의 말씀을 보면 메시야는 신성을 버리시고 인성을 취하셨을 뿐 아니라, 이제 인성까지 버리시고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구약의 메시야 개념을 정리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메시야는 두 번 자기를 부인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가 이 성탄절에 하나님 되심을 부인하고 성육신 하신 것이고, 두 번째가 유월절에 사람 되심까지 부인하고 십자가에 자기를 내어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고난 받는 메시야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아멘.

 

3) 성육신으로 갈라지는 신앙

 

메시야의 자기 부인중에 오늘 우리는 신성을 부인하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 성육신이 없었다면 우리의 구원도 있을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성육신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육신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믿음이 갈라집니다.

성육신을 믿는 것이 바른 믿음이고, 성육신을 믿지 않는 것은 잘못된 믿음입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 일서 4:2-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로써 너희가 하나님의 영을 알지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 즉 예수가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않는 영은 -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른 신앙인가 그릇된 신앙인가를 구분해 주는 중요한 잣대가 바로, 이 성탄절에 이루어진 예수님의 성육신입니다. 성자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성육신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바른 믿음이고, 성육신을 부인하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2.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그렇다면 이 성탄절에 성육신 하신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1)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요한복음 1:1절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사도요한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예수님은 태초에 말씀으로 계셨던 하나님이시고, 영원 전부터 계셨던 성자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이십니다.

갈라디아서 4:4절입니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 말씀은 하나님의 때가 차 메시야를 보낼 때 율법 아래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내셨다고 합니다.

 

3)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렇게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33년을 우리와 같은 모습으로 사셨습니다. 사도요한은 여기에 대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바 된 이시니라.”(요한일서 1:1-2) 라 증거하고 있습니다.

 

4)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속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1:20절입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예수님께서는 인류를 그 죄에서 구원해 주는 메시야로써 십자가에서 대속적인 죽으심을 죽으시게 될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5) 예수님은 부활승천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인류의 죄를 지시고 대신 죽으심으로 죄를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시고 또 하늘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들도 예수님과 함께 부활하고 승천할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6) 예수님은 장차 재림하실 하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약속하신 대로 장차 재림하실 것입니다.

 

7) 예수님은 메시야 왕국을 다스리실 하나님이십니다.

재림하신 예수님은 죄악 된 세상은 심판하시고 성도들을 구원해 주셔서 함께 메시야 왕국을 이루실 것입니다.

 

8) 예수님은 천국에서 영원히 섬기며 살게 될 하나님이십니다.

천년 왕국이라고 알려진 메시야 왕국이 끝나고 나면 백보좌 심판대를 거쳐 불신자들은 지옥에 보내시고 성도들은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인류 역사는 끝이나게 됩니다. 아멘.

 

3. 성탄절에 이루어진 성육신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그러면 우리가 성탄절에 이루어진 성육신 사건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떠나 하늘에만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언제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성탄절의 성육신 사건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오순절에 이루어진 성령 강림사건을 통해서도 보여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중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초연신론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자연법칙을 부여해 놓으시고, 이 자연과 세상을 초월해 계시면서 우주 안에서 일어나는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의 창조주가 되실 뿐만 아니라, 이 세상 역사를 주관하시고 섭리로 다스리는 분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구약에서 예언해 오신대로 때가 차매 직접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셨던 분이시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23절입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런 말씀들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떠나 계신 분이 아니시고, 우리를 떠나 계신 분도 아니시고, 늘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전에는 우리와 같이 육신으로 함께 계셨고, 오늘날에는 보혜사 성령으로 함께 계신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둘째,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관심입니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4:9-10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아멘

 

우리가 이 성탄절에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범죄한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관심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나 같은 죄인, 나 같이 못나고 볼품없는 피조물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이 성탄절에 그 신성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신 것입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사람 되심까지 포기하고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성탄절에 예수님의 낮아지심이, 우리가 높아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가난하게 되심으로, 우리가 부요함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저주 받으심이 우리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고난당하심으로 우리의 회복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를 버리시고 죽으심이, 우리를 살리시는 구원이 되었습니다.

 

성탄절은 이런 하나님의 은혜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임하기 시작한 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탄절을 기뻐하고 또 감사하는 것입니다. 아멘. 예수님은 이 놀라운 은혜를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신성을 버리시고 사람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탄절에 베풀어주신 예수님의 은혜를 놀라워하면서 찬송가 143웬 말인가 날 위하여라는 찬양을 즐겨 부르는 것입니다.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주 돌아 가셨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큰 해 받으셨나.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 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

 

셋째, 사랑의 빚을 진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삶입니다.

그러면 사랑의 큰 빚을 진 우리들은 이 성탄절을 어떻게 보내야 합니까?

 

1) 예수님의 주인이 되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성탄절에 오신 주님을 환영하고 믿음으로 영접했던 사람들과 같이 성탄절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우리의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탄절이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없는 성탄절은 아무리 웅장하게 그 날을 기념해도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예수님이 계신 성탄절은 그 모양이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거기에 참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이 주인이 되고 예수님이 중심이 되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2) 예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 성탄절에 예수님이 베풀어 주신 사랑을 기억하고 찬양으로 영광 돌리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늘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라고 찬양했던 천사들과 같이,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찬양과 감사로 경배 드려야 합니다.

 

3) 예수님의 은혜를 전해주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들은 이 성탄절에 예수님이 베풀어주신 은혜를 세상에 전해주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천사들이 목자들을 만나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 성탄절에 예수님을 믿음으로 얻게 되는 복된 소식을 세상에 전하는 절기를 삼아야 합니다.

 

4) 예수님께 받은 사랑으로 세상을 섬기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성탄절에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성탄절이 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사랑의 섬김을 통해 믿음을 향한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진리를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 지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2022년 이 성탄절에 우리 모두는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마음으로 묵상하면서, 그 큰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선한 각오와 결단을 하게 되시는 복 된 성탄주일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축 복

 

이제는 우리를 위해 성육신 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시고 내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그 크신 사랑하심과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위해 살게 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성탄절을 맞아 그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고, 마음으로 영으로 찬양하며

그 받은 사랑을 나누고 실천하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며

고개 숙여 기도하는 모든 성도님들의 가정과 직장과 일평생의 삶 위에

같은 믿음으로 성탄의 기쁨을 함께 하는 한국교회와 세계 교회 위에

특히 전쟁 중에도 기쁨으로 성탄감사예배를 드리고 있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교회 위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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