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과 염소의 비유
마태복음 25:31-46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0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그리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다 종말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들은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이 늘 마음에 두고 살아야 할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은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는 장차 있게 될 ‘하늘법정’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하늘 법정’에서 결정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하늘법정에서는 천국 갈 사람들과 지옥 갈 사람들에 대한 최종적인 판결이 이루어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법정에서 어떤 판결을 받아야 되어야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34절 말씀에서 보듯이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는 판결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이 ‘양과 염소의 비유’의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장래의 삶을 좌지우지할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는 오늘 전해지는 이 말씀을 꼭 기억하고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복 있고 지혜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하늘 법정은 언제 쯤 열리게 되는 것입니까?
그 시기를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에서부터 유추하여 살펴보겠습니다.
지금은 교회시대입니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먼저 교회 시대가 있고, 그 후에 7인 7나팔 7대접으로 알려지고 있는 환난의 시대가 온다고 합니다. 이 환난의 시대를 다른 말로는 7년 대환난이라고도 합니다. 그 이유는 이 7년 동안 인류의 역사 속에 볼 수 없었던 어마어마한 환난이 있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7년 환난이 끝날 즈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입니다.
이 때 사단과 그를 따르던 악한 영들은 모두 다 붙잡아서 무저갱에 가두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 성도들은 어떻게 된다고 합니까? 데살로니가 4:16-17절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먼저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의 부활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음에는 그때까지 믿음을 지키면서 살아남아 있는 성도들의 휴거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후 지금 있는 이 세상은 불로 다 태워버리고, 하늘과 땅을 다시 창조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시 창조하신 새 하늘과 새 땅에, 메시야 왕국 즉 천년 왕국이 세워질 것입니다.
이 왕국은 죄와 악이 다 제거된 왕국이며, 해함도 없고 상함도 없는 그런 왕국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왕국에서는 예수님이 왕이 되시고, 부활한 성도들과 휴거한 성도들이 그 백성으로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천년왕국에 대해 노래하고 있는 복음 송이 바로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입니다.
우리 그 가사를 잘 알고 있지요.
사막에 샘이 넘쳐흐르리라. 사막에 꽃이 피어 향내 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꽃 동산되리. 사자들이 어린양과 뛰놀고 어린이들 함께 뒹구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사막에 숲이 우거지리라. 사막에 예쁜 새들 노래하리라. 주님이 다스릴 그 나라가 되면은 사막이 낙원되리라. 독사 굴에 어린이가 손 넣고 장난 쳐도 물지 않는 참 사랑과 기쁨의 그 나라가 이제 속히 오리라.
이 천년 왕국의 끝에 하나님께서 무저갱에 가둬 두었던 사단과 악한 영들을 다시 풀어 놓아줍니다. 그러면 이들은 전에 뱀을 통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것 같이, 천년 왕국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유혹하게 됩니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이 유혹에 빠지게 되고, 유혹에 빠진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그 군대와 사단과 하나님을 떠난 세상 사람들의 군대가 어우러져 영계 육계가 함께 싸우게 되는데, 이 전쟁이 바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전쟁인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이 전쟁 후에 우리가 흰 보좌 심판, 백 보좌 심판이라고 하는 ‘하늘 법정’이 열리게 됩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바로 이 하늘 법정에서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모든 인류는 ‘하늘법정’의 좌우 쪽에 나누어 서게 됩니다.
그러면 재판장이 되시는 하나님이, 예수님과 천군 천사들을 데리시고 이 법정에 입장하실 것입니다. 그러면 재판이 시작됩니다.
먼저 각 사람이 지은 죄에 대한 천사들의 고발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이 법정 좌우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판결문을 읽기 시작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그 우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 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는 선고를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고한 근거를 35-36절에서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본 것’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선고를 듣고 있던 의인들이 의아해 하며 질문을 합니다.
37절입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을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이 사람들은 우리는 예수님을 본적도 없고 예수님을 만나 그런 일을 한 일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0절입니다.
‘너희가 여기 네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예수님은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직접 만나서 이런 일을 했다는 것이 아니고, 그들과 함께 예수님을 믿으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에게 한 일을 마치 예수님에게 하신 일로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 41절 말씀을 보면 그 좌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 된 영원한 불로 들어가라.’는 선고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선고하는 이유에 대해 42-4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릴 때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아보지 아니하였느니라.’
이 때 예수님의 선고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한 말이 무엇입니까?
44절입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이 사람들도 우리는 예수님을 본 일이 없고, 그런 처지에 있는 예수님을 보고 외면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45절입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 말씀은 자신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 지극히 작아 보이는 한 사람에게 하지 아니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십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라.’
우리 입장에서는 이 비유의 말씀이 좀 낯설어 보입니다.
그러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아주 친근한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당시 목축업을 하며 살아가던 베드인 족의 실제생활상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베드인 족은 주로 목축업을 하며 살았습니다.
이 사람들은 계절마다 초장을 옮겨 다니면서 방목을 했습니다. 방목을 할 때는 낮에는 양과 염소를 구분하지 않고 들에 흩어 놓습니다. 그러다가 저녁이 되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여 각각 다른 우리에 넣습니다.
이렇게 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사나운 염소가 그 뿔로 양을 헤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둘째, 양은 털이 많은 동물이라 밤의 추위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지만, 염소는 추위에 노출되지 않도록 시설을 갖춘 우리에 넣었습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분리하였습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첫째, 지금은 낮이기 때문에 양과 염소가 함께 섞여서 살고 있습니다.
이 때 양은 온순하지만 우둔하고, 염소는 사납고도 공격적입니다.
그래서 양과 염소를 함께 두면 언제나 염소가 양을 공격하지, 양이 염소를 공격하는 일은 없습니다.
함께 섞여서 살고 있는 양과 염소를 통해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을 닮아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과 다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도, 할 수만 있으면 다투지 않고 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비 진리에 속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누가 나에게 조금마한 손해만 입혀도 참지 못하고 공격하고 싸웁니다. 그 뿐 아닙니다.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이 자기와 다른 길 즉 진리의 길을 가고 있는 것 그 자체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해합니다. 그래서 까닭 없이 공격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격적인 성향을 보고서도, 그 사람이 양인지 염소인지 구분해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극한 노조 운동을 하며 아주 공격적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교회에서 무슨 일을 하려고 하면 큰 소리로 자기주장을 하며 싸우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행동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의 있게 행동을 한다고 다 양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 중에는 믿음 안에서 그 본심이 변하여 양과 같이 온유하게 된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 또 좋은 평판을 얻고자 예의바른 행동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 보고 사람을 평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속사람의 변화의 유무를 보고 평가해야 합니다.
베두인들은 가끔씩 양의 우리에 염소를 넣어두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베두인들은 공격적인 염소를 양의 우리에 넣어둘까요? 양들은 게을러서 잘 움직이려고 하지 않는데, 이런 양 우리에 염소 한두 마리를 넣어두면, 게으른 양들이 염소로부터 공격 당하지 않으려고 기민하게 움직인다고 합니다. 베두인들은 양들이 나태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염소를 양의 우리에 넣어두기도 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생활에서도 같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다가 보면 나는 잘못한 일이 없는데 어려움을 당하고, 또 사람들의 비난을 받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게 될 때 우리는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목자가 양들이 움직이도록 하기 위하여 염소를 양의 우리에 넣어두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더 기도하고 더 경건생활에 힘쓰도록 하기 위하여 어려움도 주시고, 또 사람들이 우리를 공격하도록 버려두시기도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 신앙의 유익을 위해 이런 일을 허용 하시는 것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꼭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럴 때에도 양은 염소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양은 염소의 공격을 피해 다니지, 염소와 맞대 놓고 싸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양의 중요한 특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봐야 합니다.
혹시 내 안에 아직도 공격성이 남아 있는가? 다투고자 하는 마음이 남아 있는가? 갈등을 일으키고 분쟁하고 분노하게 하는 마음이 있는가? 이런 마음은 하나님이 주신 마음이 아닙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마음도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양이라면 우리 안에는 예수님을 닮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심판의 날 오른 쪽에 서게 되며, 하나님으로부터 의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아멘.
둘째, 장차 심판의 밤이 오면 양과 염소를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지금 이 세상에서는 누가 양인지 누가 염소인지 구분하지 않습니다.
이런 구분은 장차 하늘 법정에서 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양은 오른 쪽에 염소는 왼쪽에 구분하게 될 것입니다.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오른 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너희는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하늘나라를 상속받으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시는 이유에 대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섬기고, 대접하고, 예수님이 어려움을 당하실 때 돌보아 주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오른 쪽에 서 있는 이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본 일도 없고 또 예수님을 만나서 섬기고 대접한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언제 그런 일을 하였습니까?’라고 되물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들은 다른 성도들에게 선행을 행하며 살면서도 그것을 예수님과 연결시켜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설명을 들으면서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들이 다른 성도들에게 손을 열어 돕고 구제한 선행들을 예수님은 마치 자신에게 한 일 같이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기독교 문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서구사회에서는 이런 말씀들로 인하여 기부하고 구제하는 일이 생활이 되고 문화가 되어 있습니다. 그 중에 기부에 대해 세계적으로 이름나 있는 사람들을 보면 먼저는 세계적인 투자의 귀재로 알려지고 있는 ‘워런버핏’이 있습니다. 그 다음은 미국 마이크로소프트사를 설립한 ‘빌게이츠’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부는 이런 사람들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통일정부를 이루려고 꿈꾸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프리메이슨’들도 자신들을 소개할 때, 종교의 자유와 ‘기부’ 그리고 형제애를 중요시 하는 단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또 연말이 되면 어김없이 구세군의 자선냄비가 등장하는데, 이 때 선한 사람들만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다. 깽들, 사기꾼들, 악인들도, 이 구제에 많이 참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섬김과 구제의 대상이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제의 대상이 ‘내 형제’ 즉 ‘예수님의 형제’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과 형제가 된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의 형제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40절의 이 말씀은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소자들을 섬기고 돌보는 삶’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 안에 모시고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한 것’은 마치 예수님에게 한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마태복음 25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섬김과 구제는 전철을 타고 가다가 가끔 만나게 되는 그런 사람들을 도와주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섬기고자 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형제라 부르시는 사람들, 즉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에게 한 선행을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왼편에 있는 사람들
예수님께서 왼편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 ‘이 사람들이 예수님을 섬기고 대접하는 일을 안했다.’는 것입니다.
왼편에 서 있는 이 사람들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본 일도 없고, 또 예수님을 만난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 우리가 예수님을 보고도 대접하지 않았습니까?’ 라고 항변하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45절입니다.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기에, 예수님의 형제가 되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에게 한 것에 대해서는 묻지 않으셨습니다. 이 사람들에게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을 예수님께 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신다고 하셨습니다.
여기 사용되고 있는 ‘지극히 작은 자’라는 단어에는 최상급이 쓰여 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은 ‘너무 시시해 보이고, 하찮아 보이고, 보잘 것이 없어 보이는’ 그런 사람에게 하지 아니한 것을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으로 보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세상에서 예수님을 섬기게 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믿고 있는 소자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당면한 문제는 세상에서 이런 삶을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세상은 힘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돈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학벌이 지배하는 사회입니다. 잘난 사람들이 큰 소리 치며 사는 사회입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런 사람이 되어 보려고 공부하고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목적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힘이 없고, 돈이 없고, 학벌이 없고, 잘나지도 못한, 아주 보잘것없는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리며, 그런 사람들을 돕고 섬기는 삶을 사는 것이 쉽겠습니까? 이것은 결코 쉬운 삶이 아닙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살려고 하면 큰 각오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먼저 그 인생의 목표와 인생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성공을 목표로 삼고 살지 않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는 삶의 획기적인 전환을 해야 합니다.
30년 동안 위안부 할머니들을 돕는 일을 했던 ‘윤미향’국회의원을 보십시오.
위안부 할머니들을 도우며 살려면 어떻게 했어야 합니까? 먼저 자신이 이 할머니들의 처지에까지 낮아져서 그 분들과 그 아픈 삶을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누구도 마음에 상처를 받지 않습니다.
그러나 윤미향 의원은 어떻게 했습니까?
할머니들의 어려운 삶의 짐을 함께 진 것이 아니라, 할머니들을 앞에 내세워서 시민운동을 하고 자기정치적인 활동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 위안부 할머니 들은 자신들은 윤미향에게 이용당했다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재주는 자신들이 부리고 그 소득은 윤미향이 취했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일에 헌신하는 삶은 누구나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차원 높은 삶은 그 눈에 세상과 세상이 주는 영광이 보이는 사람들은 살 수 없습니다.
그 눈에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이고, 자신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대신 십자가에서 죽어주신 예수님이 보이는 사람들만 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믿음 안에서 특별한 깨달음을 주시고, 하나님이 특별하게 복된 마음을 주신 소수의 사람들만이 살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좁은 문 좁은 길을 기꺼이 가고자 결단하고 헌신한 사람들만 살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 주 예수님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이 예수님을 만나고 또 예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다고 합니까?
구약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사람들을 찾아오신 사건들을 많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데오파니’라고 합니다. ‘데오파니’ 라는 말은 신이 인간의 모습으로 현현하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의 신약적인 표현은 ‘성육신’입니다. 그 차이점은 ‘데오파니’는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을 뜻한다면, ‘성육신’은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뜻합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창세기에 나타난 ‘데오파니’에 대해 소논문을 쓴 일이 있습니다.
그 때보니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부터 현현하셨습니다. 그 중 하나를 살펴보면 창세기 18:1절 이하의 말씀으로, 아브라함이 99세 되는 때 장막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의 눈에 여행자 세 사람이 보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유대인의 구제 전통에 따라 나그네를 대접하려고 그 사람들에게로 뛰어 가서 ‘내 주여 내가 주께 은혜를 입었사오면 원하건대 종을 떠나 지나가지 마시고 제가 발을 씻어드리고 또 제가 섬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 때 그 사람들은 ‘네 말대로 그리하라.’라고 하였습니다. 더 정확하게 번역하면 ‘당신의 말씀대로 그리하십시오.’ 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18:16절 말씀을 보면, 이 세 사람 중에 먼저 두 사람이 소돔 성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19: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소돔 성으로 간 이 두 사람은 ‘천사’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한 사람은 아브라함과 소돔성에 관한 대화를 하게 됩니다. 성경은 이 때 남아 있던 이 사람의 신분을 ‘여호와 하나님’이셨다고 전합니다. 이렇게 볼 때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이 세 사람 중 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두 사람은 천사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시대 하나님의 현현이 이렇게 이루어졌다면 신약시대인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첫째, 오늘날에도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수 있으십니다.
히브리서 13:1-2절입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이 말씀은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 라고 한 것입니다.
둘째,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지 않으셔도,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성도에게 한 것이 예수님께 한 것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들에게 한 것도 예수님에게 한 것이나 똑 같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이런 선행들을 ‘예수님께 빚을 지게 하는 행동’이라고 보았습니다.
우리가 믿는 성도들을 돕고, 보잘 것이 없는 사람들을 돕는 것은, 마치 예수님을 직접 돕고 섬기고 구제하는 것이나 같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돕고 구제하는 삶을 힘써 살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셋째, 그러나 양은 언제나 양이고 염소는 언제나 염소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34절 말씀을 보면 임금이 그 오른 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라고 하시면서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게 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마를 때 마실 것을 주는 등등’ 선한 삶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이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 받도록 예정하시고 작정하셨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그런 복을 받아 누리며 살도록 작정되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선행을 행하며 살아가는 그 자신의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양과 염소의 구분은, ‘하나님의 편’에서 볼 때는 하나님의 작정하심과 예정하심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편’에서 볼 때는 이 하나님의 작정과 예정은 보지 못합니다. 다만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들만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보면서 ‘저 사람 양이구나!’ ‘저 사람은 염소구나!’ 라고 구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예정’을 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말을 이해하지 못해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어떻게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살기도 전에, 하나님이 복을 주실 사람들과 하나님이 버린 사람들이 구분되어 있다면, 인간이 선을 행하며 살아가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의 헌신들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라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항변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고 또 타당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항변은 사람을 그 판단의 중심에 두고,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어 생각하게 될 때 하게 되는 항변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고백하고 있는 신앙은 사람 중심의 신앙이 아니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창세전에 구원해 주시기로 정하시고 예정하신 사람들을, 때가 되매 불러주셔서 예수님을 믿게 하심으로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적인 신앙입니다.
이 신앙을 다르게 설명하면 양들은 처음부터 양이었고, 염소들은 처음부터 염소였다는 것입니다.
염소가 아무리 선한 일을 많이 해도 양이 될 수 없고, 양이 아무리 많은 잘못을 범해도 염소가 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양과 염소의 완전한 구분은 ‘하늘 법정’이 열리게 되는 그 날 우리 하나님께서 하실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내가 양인지 염소인지 분명하게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이 ‘양과 염소 비유’의 말씀은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미래적인 상황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때가 되면 지금 우리가 나누고 있는 말씀과 같이 하늘의 법정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예외 없이 양과 염소로 구분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우리는 믿음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내가 염소가 아니고 양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염소가 아니고 양이라는 것을 보여주며 사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마태복음 24:42. 44절 말씀에서는 종말 시대를 준비하며 ‘깨어 있는 삶, 예비하고 준비하고 사는 삶’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우리는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하여 깨어 있는 삶, 준비하고 예비하며 사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장차 하늘 법정이 열리게 되는 그 날을 믿음으로 은혜로 맞이할 수 있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복 있는 삶이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