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한 청지기 비유
누가복음 16:1-13
오늘은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알려지고 있는 누가복음 16장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의 비유 중에서 가장 논쟁거리가 되고 있는 비유입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에 나오는 말씀들은 상식적으로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어떤 면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첫째는, 이 비유에 나오는 불의한 청지기를 ‘우리 신앙의 롤 모델로 삼을 수 있느냐?’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르침을 주고 교훈을 줄 때 보통 어떤 사람을 모델로 삼습니까?
평범한 사람들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 보통 사람들에게 모범이 될 만한 그런 사람들을 모델로 삼습니다.
그간 예수님께서도 거의 이와 같이 교훈을 주셨습니다.
예를 들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든가? 강청하는 기도의 비유라든가? 양과 염소의 비유 등등의 말씀들이 다 이와 같은 말씀들입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다릅니다.
여기 등장하고 있는 청지기는 주인의 돈을 횡령하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그 일이 발각되어서 청지기 일을 계속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때 이 청지기는 한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아직 청지기로 있을 때,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의 일부 빚을 탕감해 줌으로, 이전보다 더 악한 방법으로 자신이 청지기 직을 잃게 될 미래를 대비하였던 사람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어떻게 이야기 하셨어야 할 것 같습니까?
‘너희는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 ‘너희는 이런 삶을 살지 말아라.’ 라고 해야 할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 악한 청지기의 처신을 마치 성도들이 본받으며 살아야 할 지혜로운 삶의 모델이나 되는 듯이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비유의 말씀을 이해하기 어려워해 왔습니다.
또 어떤 면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둘째는,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은 그 자체로도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또 서로 연관성도 없어 보이는 말씀들이라는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 9절의 말씀을 보면, 재물에는 불의의 재물도 있고 불의하지 않은 재물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여기서는 불의의 재물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이 재물이 불의의 제물이 되었을까요?
아마 그 이유는 청지기가 자기 재물이 아닌 그 주인의 재물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내 돈을 쓰면 불의의 재물이 될 리가 없잖아요. 내 돈이 아닌 다른 사람의 돈을 훔쳐서 썼으니 불의의 재물이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9절에서는 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어지는 11절 말씀에서는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불의한 재물에도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을 너희에게 맡기겠는냐?‘
남의 재물을 훔치는 것은 죄입니다.
남의 재물을 훔치는 일은 어떤 이유에서든지 정당화 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그런 ‘불의의 재물 얻는 일에 충성하라.’ 또 그렇게 얻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 같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3절의 말씀에서는 이와는 정 반대의 말씀을 하십니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재물을 섬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리해 보면
불의의 재물은 취해서는 안 되는 재물입니다. 그런데 11절 말씀을 보면 ‘너희는 불의의 재물 얻는 일에 충성하라.’고 하고 있습니다. 9절 말씀을 보면 그렇게 얻은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는데 쓰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13절 말씀에서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 ‘하나님을 섬기며 살 것인지 재물을 섬기며 살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앞의 말씀과 뒤의 말씀이 서로 다르고, 또 연관성도 없어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9절 말씀 자체도 이해가 되지 않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 이 말씀에서는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어 놓으면, 그 재물이 다 없어지는 종말의 때에, 그렇게 사귀어 놓은 친구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천국으로 영접해 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입니까?
이 9절 말씀의 내용을 알려고 하면,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귄 구체적인 예를 제시해 주고 있는 5절 이하의 말씀을 읽어 보아야 합니다. 그러면 5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불의한 청지기가 어떻게 친구를 사귀고 있습니까?
어느 날 주인이 청지기를 찾아와서 ‘네게 대한 이상한 소문이 들리고 있는데 그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 내가 샘을 해 봐야겠으니 샘할 준비를 해 놓아라.’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불의한 청지기는 고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왜요. 자기가 주인 몰래 쓴 돈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한 가지 꾀를 생각해 냅니다.
자기가 관리하고 있는 주인의 장부를 가지고 와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불러 들렸습니다. 그리고는 그 주인에게 100을 빚진 사람에게는 그 빚을 50이라고 쓰게 하고 50을 탕감해 주고, 80을 빚진 사람에게는 그 빚을 40이라고 쓰게 하고 40을 탕감해 주면서, 지금 탕감을 받고 남은 빚만 갚으면 나머지 빚은 없었던 것으로 해 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빚을 진 사람들은 이 청지기의 말을 듣고 절반의 빚을 탕감을 받기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그 돈을 마련해 와서 절반의 빚을 갚았습니다. 이 청지기는 이렇게 해서 마련한 돈으로 자신이 그간 횡령하여 쓴 주인의 돈을 채워 넣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자신이 횡령하였던 일을 감추려고 했습니다.
또 이 청지기는 빚을 깎아주는 이 행위를 통해서 그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어 두었습니다.
이렇게 이 사람들을 친구로 사귀어 놓으면, 이 사람들이 빚을 탕감해 준 그 일을 고마워하며, 나중에 청지기 직을 그만 둔 자신을 영접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이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한 재물로 친구를 사귀었던 방법이었고, 미래를 대비하였던 방법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불의한 청지기가 이렇게 해서 사귄 친구들은 어떤 친구들이겠습니까? 내게 이익만 된다면 청지기의 불의한 방법까지 용납해 주었던 불의한 사람들이 아니겠습니까? 만약 이 사람들이 거룩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청지기의 제안을 거절하며 ‘말은 고맙지만 나는 사양하겠습니다.’라고 정중하게 거절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탕감 받은 이 사람들이, 청지기의 기대대로 나중에 이 청지기를 영접해 줄 것이라는 보장이 있습니까?
100번 양보해서 그 빚을 탕감 받게 된 사람들이 청지기를 영접해 준다고 할지라도, 아직 9절 말씀이 완전히 이해된 것은 아닙니다. 9절 말씀의 하반 절에는 ‘그렇게 사귄 친구들이 너희를 영주할 처소로 영접하리라.’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영주할 처소’는 ‘영원한 처소’ 즉 ‘천국’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불의한 청지기가, 불의의 재물로 사귄, 불의한 친구들이 어떻게 이 불의한 청지기를 영원한 처소로, 천국으로 인도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이 9절 말씀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불의한 청지기도 불의한 자이고, 그 사귄 친구들도 불의한 자들인데, 어떻게 이 불의한 사람들이 이 청지기를 천국으로 인도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여러분은 이 말씀이 이해가 되십니까?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또 어떤 면들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셋째,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 사용되고 있는 ‘불의의 재물’ 즉 맘몬입니다.
돈은 그 자체로는 의롭지도 않고 불의하지도 않습니다.
돈은 가치중립적인 재물입니다. 그러나 이 돈이 맘몬이 될 때는 달라집니다. 이 돈이 섬김의 대상이 될 때는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4절 말씀을 보면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재물이 바로 맘몬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재물이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냥 가치중립적인 재물로 있지만, 어떤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이 섬김의 대상이고 경배의 대상이시듯이, 재물이 또한 그렇게 섬김의 대상이 되고 경배의 대상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물이 곧 맘몬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에게 재물이 맘몬이 됩니까?
재물이 자신의 삶의 희로애락을 결정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재물이 맘몬이 됩니다. 재물에 목을 매고 오직 재물만 바라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재물이 맘몬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재물이 경배의 대상이 되고, 재물이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재물을 그 삶의 주인으로, 재물을 맘몬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유추해 보면, 누가복음 16:9절에서 나오고 있는 불의한 청지기는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자신이 맘몬으로 섬기며 살고 있었던 재물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살았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말씀을 듣고 비웃거늘’ 이 말씀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지금 누구 앞에서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 앞에서, 바리새인들을 대상으로 이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이 비유의 말씀을 하신 대상이 바로 바리새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바로 불의한 청지기와 같이 재물을 맘몬으로 섬기며 살았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 비유에 등장하고 있는 주인이나 청지기 중에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어야 합니다. 왜요. 예수님께서 지금 바리새인들 대상으로 이 비유의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비유의 말씀의 대상이 누군지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바르게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이제까지 이 말씀을 어떻게 이해해 왔습니까?
보통은 이 비유의 말씀에 나오는 주인을 예수님으로 보고 청지기는 예수 믿는 성도들로 보고 해석해 왔습니다. 그래서 이런 해석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불의한 청지기가 영악스러울 정도로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지혜로움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서, 이 세상의 아들들은 이렇게 지혜롭게 자신의 미래를 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데, 하물며 빛의 아들들인 너희는 이 사람들보다 더 지혜롭게 미래를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 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비유로 이해해 왔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도 저렇게 지혜롭게 처신하며 살고 있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아들이 된 너희, 빛의 아들이 된 너희가 그 사람들보다 더 못한 삶을 살아서야 되겠느냐? 라는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이런 관점으로 해석하게 되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과 같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말씀들이 종종 있습니다. 이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이해가 되지 않는 대로 그냥 놓아둡니까? 아니면 어떻게든 해결 방법을 찾아보려고 합니까? 저는 말씀을 가르치는 직분을 받은 목회자로서 어떻게든지 해결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합니다.
이 때 우리는 어떤 해결방법을 찾아볼 수 있습니까?
여러 가지 해결방법 중에서 제가 가장 먼저 시도해 보는 방법은 바로 헬라어 성경 본문을 다시 해석해 보는 것입니다.
헬라어 성경을 보면 9절 말씀에는 두 개의 전치사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라는 의미를 가진 ek 라는 전치사이고, 다른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라는 의미를 가진 eis 라는 전치사입니다. 이 단어들은 헬라어에서 아주 기본이 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이 ek 라는 전치사는 '재물' 앞에 쓰여 있고, 이 eis 라는 전치사는 '처소' 앞에 쓰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헬라어 성경에서는 ‘불의한 재물 밖으로’와 ‘영원한 처소 안으로’가 상호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이해가 되지요.
물론 이 ek 라는 전치사는 '~을 가지고'라는 도구적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ek 라는 전치사가 신약성경에서 916회나 사용되고 있는데 단 한 번도 도구적인 의미로 번역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유독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서만 도구적인 의미로 해석하여서 ‘불의한 재물로’ 라고 우리말 성경에서는 번역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실예를 살펴보았습니다.
신약성경 속에 있는 이 헬라어 에크가, 구약성경에서는 히브리어 야차라는 단어로 쓰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야차라는 단어를 찾아보니 그 의미가 ‘나오다.’ ‘이끌어 내다.’ ‘탈출시키다.’ ‘안에서 밖으로 끄집어내다.’ 로 번역되고 있습니다.
그 예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출애굽 할 때 사용되었던 단어가 바로 야차입니다.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끄집어 내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족보를 기록하면서 ‘누가 누구를 낳고’ 라고 할 때 또 야차가 사용되고 있는데 여기서도 ‘아비로부터 아들이 나왔다.’ 즉 ‘아버지 안에서 아들이 밖으로 나왔다’라는 것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구약의 야차도, 신약의 에크와 같이 ‘안에서 밖으로’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었습니다.
좀 복잡하게 설명을 했지만 정리해 보면,
신약성경의 에크와 구약성경의 야차는 모두 ‘안에서 밖으로’ 라는 의미로 쓰였다는 것입니다. 이 단어가 단 한번도 ‘--을 가지로’ 라는 도구적인 의미로 쓰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직 누가복음 16:9절 말씀에서만 도구적인 의미로 번역 하여서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친구를 사귀어라'라고 번역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성경 번역자들이 왜 이 말씀만 이렇게 번역했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6:9절에 나오는 이 에크라는 전치사만 유독 도구적으로 번역한 것은 잘못된 번역으로 보입니다. 차라리 이 에크를 ‘안에서 밖으로’라고 번역하여서 불의한 재물에서 '나와서' 친구를 사귀어라. 그러면 그 친구가 너를 영원한 집 '안으로' 영접해 줄 것이다. 라고 번역하는 것이 훨씬 더 나아 보입니다. 그러면 9절 말씀은 ‘불의한 청지기에게 돈을 경배의 대상으로 섬기며 사는 맘몬주의에서 빠져 나와서 친구를 사귀라’라고 하는 말씀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사귄 친구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기에 이 불의한 청지기를 영원한 집 즉 천국으로 영접해 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우리가 짐작해 볼 때 이 사람들은, 이전에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과 소망 때문에 불의한 재물을 섬기며 사는 삶을 포기하고 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를 인생의 목적으로 삼게 된 사람들이기 때문에 재물에 대한 욕망과 욕심에서 벗어나온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이제 이 세상과 세상 재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과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사람들은 세상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며 살았던 구도자의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입니다.
그리하면 이 사람들이, 네가 이 세상에서 살 때는 너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할 것이며, 네가 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에는 영주할 처소 곧 천국으로 너를 인도해 줄 것이라는 말씀이 됩니다. 아멘.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더 올바른 해석 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이렇게 해석하면 예수님이 지금 9절에서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까? 예수님은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불의한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 삶에서 빠져 나오라.’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고 너희는 불의한 방법으로 친구를 사귀지 말라.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 방식의 삶은 올바른 일이 아니며 나쁜 짓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이런 나쁜 방식으로 미래를 준비하고 노후를 준비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렇게 불의한 방법으로 사귄 친구들은 결코 너를 천국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 보면 누가복음 16장의 이 말씀은 교회가 이제까지 해석해 왔던 해석과는 정반대의 해석이 나오게 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을 지도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겉모습으로는 하나님을 경외하였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매 주 하루씩은 그 소득을 구별하여 구제하는 일에 사용하였고, 매 주마다 두 번씩 금식을 하였고, 매일 하루 세 번씩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를 했던 사람들입니다.
또 바리새인들은 그 모습과 행동에서도 자신을 경건하게 보이기 위해서, 옷 술을 길게 한다든지, 걸음걸이를 품위 있게 걷는 다든지, 집 안으로 들어올 때는 꼭 손을 씻고, 또 집 안에서는 결례의식을 행하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또 그 입으로는 하나님과 그 주신 율법을 읽고, 말하고, 암송하고, 가르쳤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리새인들의 실상에 대해 예수님은 14절에서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던 사람들’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바리새인들의 이중성이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그 겉모습은 누구보다 더 신앙적인 사람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들의 속마음은 그 누구보다 더 돈을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께서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바리새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까? ‘비웃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을까요?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드러내시고, 자신들의 잘못된 삶을 질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에게 적대감을 가지게 되었고 이 적대감은 예수님을 향해 반발하는 모습으로, 혹은 예수님을 업신여기며 비웃는 반응으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반발하고 거부하는 반응을 보이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주신 말씀이 바로 13절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바리새인들에게 지금 너희가 하나님을 섬기든지 재물을 섬기든지 결단해야 한다고 요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전에 영생을 얻기 위해 예수님께 나왔던 부자 청년에게도 이런 결단을 요구하신 일이 있으십니다. 마태복음 19:21-22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돌아서지 않았고 부자청년은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생각과 예수님이 가졌던 생각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재물은 곧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신명기 역사관에 근거해서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이 가진 신앙에 보고 축복해 주신 결과물이라고 보았습니다.(참고 신명기 28장) 그래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과 재물의 복을 받는 것은 하나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들에게 재물의 복을 주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런 관점을 가졌기에 재물이 많은 것은 곧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재물을 많이 벌게 되는 것 또한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재물 관을 가지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은 재물을 모으는 과정이나 재물을 모으는 방법은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재물을 모으게 되면 그것을 하나님이 주신 축복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이었기 때문에 어떤 사람이 재물의 복의 복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 사람의 신앙을 인정해 주신 표징이라고까지 가르쳤습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며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오늘날에는 어떤 사람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늘날에는 번영신학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이 사람들도 재물은 곧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표징이며, 재물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신앙을 보고 축복해 주신 결과라고 보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을 가진 목회자들은, 내가 지금 큰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것은 나의 신앙을 보고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결과라고 이야기 합니다. 이런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가르칠 때에도 당신들이 건강하고, 사업이 잘되고, 하는 일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들의 신앙을 보고 그렇게 축복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가르칩니다. 바꾸어 말하면 세상에서의 성공이 곧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앙을 보증해 주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런 번영신학에서는 재물을 얻는 방법은 전혀 문제를 삼지 않았습니다.
번영신학을 따르는 사람들은 그 사람이 그 돈을 버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법을 따랐느냐? 혹은 그 번 돈을 쓰는 과정 속에 하나님의 법을 따르고 있느냐? 하는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재물을 많이 얻고, 그 얻은 재물의 십일조를 더 많이 드리게 되는 것을 곧 바로 축복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번영신학에서는 어떤 사람이 집이나 땅을 사 놓았는데 그곳이 개발되면서 값이 오르면 그것을 곧 바로 하나님의 축복해 주심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런 사람들은 물질의 소유를 가지고 하나님의 축복을 말하고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을 말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번영신학의 영향이 한국교회 안에 널리 퍼져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성도가 집을 샀는데 그 산 집의 값이 두 배, 세 배로 오르게 되면 하나님이 성도님에게 큰 복을 주셨다고 쉽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그 집을 사고 그 땅을 사도 똑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누가 이 사람의 무엇을 보고 복을 준 결과입니까?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치관이 오늘날 기독교 안에 팽배해 있습니다. 우연히 사 놓은 집의 값이 오르는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렇다고 이것이 그 사람의 신앙을 보증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다른 신을 섬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재물을 신으로 섬기며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 사 놓은 집 가격이 올랐다고 하나님이 축복해 주셨다고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재물을 맘몬으로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렇게 가르쳤던 사람들이 바로 돈을 좋아했던 바리새인들이었고, 또 이렇게 배워서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의 교훈을 따라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 비유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멘.
지금까지의 해석을 이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의 말씀에 적용해 보면,
주인 즉 바리새인이 그 청지기가 자신의 재물을 허비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됩니다. 그래서 청지기를 찾아가서 그 들리고 있는 소문이 사실이면 너는 더 이상 청지기 직무를 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지기는 청지기 직무를 더 이상 계속 할 수 없게 될 날을 생각하면서, 주인에게 빚진 사람들을 불러서 빚의 절반만 받고 나머지 절반은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 청지기는 이렇게 해서 받은 돈으로 자신이 횡령한 금액을 채워 놓았을 뿐 아니라, 이 일을 통해 사귄 친구들을 통해 미래를 보장 받으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주인인 바리새인들이 이 옳지 않은 일을 영악스럽고 지혜 있게 처리한 청지기를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8절입니다. ‘주인이 (즉 바리새인이 이) 옳지 않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즉 더 예리하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예리함)이니라.’
바리새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를 칭찬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이 바로 이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그런 재물에 목을 매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로 돈을 사랑했던 사람들, 재물을 맘몬으로 섬기며 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은 외곡된 신명시 역사관에 근거하여서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재물을 얻게 되는 것을 하나님이 축복해 주신 결과라고 보았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이었기에 이들은 횡령한 돈을 지혜롭게 채워 넣고, 또 그 일을 통해 자신의 미래까지 준비해 나갔던 이 불의한 청지기의 지혜를 칭찬하였던 것입니다.
이 8절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종교지도자가 된 너희들이 이런 말을 해서야 되겠느냐? 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오히려 이렇게 불법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돌이키게 해야지, 어떻게 그런 사람들을 지혜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할 수 있느냐?’ 라고 책망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오늘 우리 삶에 적용해 보면, 오늘날 종교지도자들은 성도들에게 세상에서 돈 버는 법,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 행복하게 사는 법 등등을 설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설교를 들은 성도들은 또 한 주간 동안 세상 속에서 살아가면서 각종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하여서 돈을 벌며 살게 됩니다. 그래서 돈을 많이 벌어 부자가 되면 목회자들은 그것을 보고 집사님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았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집사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특별한 물질적인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현실이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너희가 참 목자라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 사람이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지, 그리고 그 사람이 어떤 방법으로 돈을 벌었는지, 혹시 그 성도가 돈을 맘몬으로 섬기고 있지는 않은지에 대해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하라고 사명을 받은 사람들이 바로 너희 목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명을 받은 너희들이 성도들이 돈을 좀 벌었다고 무조건 그것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서야 되겠느냐?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9절 말씀을 통해서 너희가 빛의 아들이라면 그렇게 물질을 신으로 섬기는 곳에서, 불의한 맘몬을 숭배하는 곳에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친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맘몬이 없어질 때 그 친구로 사귄 사람들이 너를 영원한 거주지 안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왜 불의한 맘몬에게서 빠져 나와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빛의 아들들은 맘몬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맘몬 때문에 염려하고 걱정하고 근심하는 사람들은 빛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맘몬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결코 우리와 함께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이 동반자가 될 수 없고, 우리가 좁을 길을 걸어가는 순례의 길에 동반자가 될 수 없고, 우리와 함께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신앙의 동반자가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돈 때문에 울고불고 속상해 하는 사람들, 돈 때문에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우리의 진정한 친구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과 맘몬을 동시에 섬기려고 하는 교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그런 사람들에게서 빠져 나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서 세상을 포기한 사람들을 보면,
이런 사람들은 비록 그 삶이 가난하여도, 때로 굶주리게 되어도, 물질이 내 삶의 전부라고 보지 않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속상해 하거나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돈을 얻기 위하여 범죄 하지 않으며, 돈을 벌기 위해서 양심을 속이지 않고, 오히려 진리의 좁은 길을 가는 것에 최우선순위를 두고,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라면 세상의 향락과 기쁨과 재물까지라도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성경을 보면 13절의 말씀이 비로써 이해가 됩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종교지도자들인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불의한 맘몬 숭배에서 빠져 나오라고 하신 것입니다. 빛의 아들들이 살아야 할 삶은 그런 삶이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책망해야 할 종교지도자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너희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지혜롭다고 칭찬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는 없다고 하십니다.
진정한 빛의 아들들은 맘몬 숭배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며, 하늘의 시민권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3:19-2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이들은 맘몬에 빠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우리는 하늘 백성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하늘 백성인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아야 할 삶은 윤택하고 배부른 삶이 아니고, 진리를 따라 사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다가 가난해 지면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부유해 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우리의 이런 삶을 보고 융통성이 없다고 비난할지라도, 그러나 우리 하나님께는 잘하였도다. 라는 칭찬을 받고 박수를 받게 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은 땅에 속한 방식대로 삽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사람들을 하늘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자신들도 땅에 속한 사람들처럼 살면서,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지혜를 칭찬해 주고 있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은 결코 사람들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영혼을 하늘나라로 인도할 수 있는 사람들은 맘몬을 숭배하는 곳에서 빠져 나온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24절입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그런데 마태복음 19:16-22절 말씀을 보면, 한 부자청년이 이 맘몬 때문에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디모데전서 6:10-11절에서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며 믿음이 선한 싸움을 싸우라...’라고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보서 4:12-13절은 맘몬에서 벗어나 있는 바울의 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우리 영혼은 너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를 얻고도 목숨을 잃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라고 하고, 또 ‘한 영혼이 이 우주 전체보다 더 귀하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다 얻고 지옥을 가는 것보다, 이 세상 다 잃어도 천국 가는 것이 훨씬 가치 있는 일’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우리들에게도 이 동일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불의한 맘몬에서 빠져 나와 친구를 사귀라. 그러면 맘몬이 사라질 때 그들이 너를 영원한 거주지 안으로 받아들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세상의 부유함도 약속하고 있는 번영신학을 나의 신앙의 길동무로 삼을 것인가? 아니면 세상과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살았던 참 성도들을 나의 신앙의 길동무로 삼을 것인가?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길을 가고자 합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