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8. 1. 16:36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

(부재 : 강청하는 기도)

누가복음 11:5-8

 

1. 비유의 배경

 

누가복음 11:1-13절은 예수님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신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는 예수님이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려고 하신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기도에 대한 가르침 9중에서 특별히 간청하는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설교의 제목을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로 잡고 그 부제목으로 간청하는 기도로 잡아 보았습니다.

 

먼저 살펴볼 내용은 예수님이 말씀하고 계신 당시 상황과 오늘 우리들의 상황은 많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은 24시간 영업하는 곳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여행자들이 시간에 구애되지 않고 언제든지 음식을 사 먹을 수 있습니다. 또 밤늦은 시간에 찾아온 손님을 위해서도 음식을 시켜서 대접해 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당시에는 달랐습니다.

당시에는 여행자들이 음식을 사서 먹을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습니다. 특히 해가 지고 밤이 깊어지면 음식을 사 먹는 것이 불가능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에게 여행 중에 있는 친구가, 그것도 늦은 밤중에, 허기진 상태로 찾아온 것입니다. 당시 이 사람에게는 그 친구에게 줄 떡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늦은 밤중이지만, 자기가 알고 있는 다른 친구를 찾아가서 사정 이야기를 하고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하게 됩니다.

 

이 사람이 찾아간 친구가 부자일수도 있고, 가난한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그 찾아간 친구가 가난한 사람이라면 온 가족이 거의 한 공간 안에서 생활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환경 속에서 밤중에 친구를 맞이하려면 먼저 일어나서 집안에 불을 켜고, 친구를 맞이하여 집안으로 들어오게 하고, 친구가 요구하는 떡을 찾고 준비해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면 거의 한 장소에서 잠을 자고 있는 모든 식구들이 다 깰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 찾아간 친구가 부유한 사람이라면 아마 그 사람은 대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또 많은 하인들을 거느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밤중에 이런 집에 누가 찾아가면 먼저 그 집 하인들이 일어나서 잠을 자기 위해서 벗어 놓았던 옷을 찾아 입어야 합니다. 그리고 집 안에 불을 밝히고 난후 대문으로 나가서, 누가 무엇 때문에 찾아왔는지 확인한 후에 주인에게 이 일을 알렸을 것입니다.

 

이 때 집 주인이 뭐라고 했습니까?

7절입니다. ‘...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우리가 볼 때 이 말은 아주 냉정해 보이는 말입니다. 그러나 당시 상황 속에서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늦은 밤중에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하는 것은 보통 무례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당시에는 밤을 밝히는 불이나 가로등이 없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집으로 돌아갔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모두 일찍 잠이 들고 또 일찍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모두가 자고 있는 야심한 밤에 친구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 찾아온 친구를 영접하고 그 요구하는 것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잠자리에서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다시 옷을 챙겨 입고 친구를 맞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요구하는 떡을 준비해 주기 위해서는 집안의 불을 켜고 잘 보관해 놓은 음식을 찾아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고난 그 밤에 다시 잠을 자는 것이 쉽겠습니까?

이렇게 하면 쉼을 누리며 곤히 자고 있던 가족들까지 다 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집 주인은 ‘...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지금은 줄 수 없으니 내일 다시 오라는 말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8절 말씀을 보면 그 친구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간청한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떡을 빌려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겠다는 기세로 계속 떡을 꾸어줄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소리가 얼마나 컸든지 온 동내 사람들이 다 깰 것 같은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집 주인은 할 수 없이 그 친구가 요구하는 떡을 주었다고 합니다.

8절에서는 떡을 준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친한 친구였기 때문에 떡을 준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사람이 얼마나 시끄럽게 요구하고 끈질기게 요구하였든지 내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편안한 잠을 잘 수 없을 것 같아서 그 요구대로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의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기도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는 문맥 속에서 정리해 보면 어떻게 됩니까?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한 제자가,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나아가서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를 요청했습니다. 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2-4절의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알고 있는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주기도문을 통해 제자들이 어떤 기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해야할 내용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신 이런 기도를 늘 하며 사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어주신 말씀이 바로 5-8절까지의 말씀 즉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의 말씀입니다. 이것은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통해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런 내용들을 기도해야 한다. 라고 하신 후에,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는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라고 기도하는 방법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사람이 어떻게 그 원하는 것을 얻었습니까? 친구이기 때문이 아니고 끈질기게 간청했기 때문에 얻었습니다. 예수님은 너희도 기도할 때 이렇게 간청하는 기도를 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9-10절 말씀을 보면 기도는 반드시 응답 된다는 믿음을 가지고 해야 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기도할 때 중요한 것은 바로 너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다른 곳에서는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낮게 한다.’라고 하셨고, 믿고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라고도 하셨습니다. 아멘.

 

그러시면서 11-13절 말씀에서는 기도응답의 확실성을 부자관계의 예를 통해 보증해 주셨습니다.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보다 더 확실한 보증의 말씀이 있겠습니까? 우리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의 명예를 걸고 기도응답의 확실성을 보증해 주고 계십니다.

 

그런데 누가복음의 말씀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시고 있으나, 마태복음에서는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 기도에 응답하셔서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가장 좋은 것은 성령 주심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멘.

 

우리 생각에는 물질주시고, 건강주시고, 자녀가 잘 되게 해 주시고 등등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성령 주심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도하는 우리와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건널 수 없는 차이입니다.

 

2. 간청기도를 강조해 온 한국교회

 

이 누가복음 11장의 말씀에 기초해서 그간 한국교회는 기도를 강조해 오고, 간청하는 기도를 강조해 왔습니다. 세계 교회가 기억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특징은 바로 기도하는 교회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는 물론 저녁기도, 수요기도, 금요철야 기도, 기도원에서의 기도, 산기도 등등 정말 다양한 기도에 헌신해 왔습니다.

 

코로나가 확산되기 전까지만 해도 전교인 특별 새벽기도회를 하는 교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새벽 기도가 교회성장의 원동력이었다고 하면서 새벽기도 세미나까지 하는 교회들도 있었습니다. 심지어 어떤 교회는 교회 이름을 아주 새벽교회라고 지었습니다. 이렇게 새벽기도를 강조하는 교회가 전국에 그 수도 없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 19의 확산은, 교회의 예배 생활은 물로 기도생활에도 영향을 미쳐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비대면 예배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또 비대 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영상 기도회에 대해서 듣고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비대면 예배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비대면 은행, 비대면 출근, 비대면 운동, 비대면 사우나 가능합니까?’ 시대의 변화에 따라 우리 예배 생활이 급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또 어떤 변화가 우리 앞에 나타날지 가늠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한국교회는 왜 이렇게 기도에 열심인 교회가 되었습니까?

우리민족은 예로부터 고난이 많았던 민족입니다. 근현대 역사를 보면 우리민족은 일본에 의해 36년간 식민 지배를 받았습니다. 독립한 이후에는 이념 논쟁으로 극심한 사회혼란을 겪었습니다. 또 동족 간에 이루어졌던 6.25 전쟁과 그 전쟁의 폐허를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리고 이후 정부의 주도하에 5개년 경제개발계획을 추진할 때에는 또 저임금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살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가난하고, 굶주리고, 몸은 아프고, 살아가기 힘들어하던 우리 민족에게 희망을 일깨워준 것이 바로 교회였습니다. 교회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세상에 증거 하면서 그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하면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고 전했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의지할 것이 없고, 아무 것도 붙들 것도 없었던 우리 민족은, 교회가 전해준 그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응답해주실 것을 바라고 간청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는 한국교회의 중요한 특징이 되었던 것입니다.

 

사실 되돌아보면 한국교회의 성장에 기도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기도하면 가난을 면하게 되고, 병을 고칠 수 있게 되고, 가정과 자녀들이 하나님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된다고 전했습니다. 그 결과 한국교회 안에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바라고 기도하는 성도들이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열심을 다해 드렸던 기도가 한국교회 성장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는 것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나라는 산업화 세대교회가 하나가 되어 상호작용한 결과 한국교회도 성장하였고 한국사회도 잘 살게 되었습니다. 이 둘은 시너지효과를 발휘하여 당시 세계 최빈국이었던 대한민국을 이제는 선진국 대열에 합류할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달한 사회라도 가난한 사람들이 늘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 사회는 이제 이런 사람들의 복지 문제까지 감당해 나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코로나 19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재난 지원금을 주고, 심지어는 모든 국민에게 어느 정도까지의 기본소득을 챙겨 주자는 대선주자까지 있을 정도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나라의 현실입니다.

 

3. 강청하는 기도의 시대가 끝이 난 한국교회

 

오늘날 우리나라는 이전 시대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을 정도로 잘 살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한국 사회는 이전 시대와는 너무나 다른 사회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배고픈 문제를 가지고 교회에 올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회복지 제도의 발달로 이제는 상대빈곤은 있을지 몰라도 먹지 못해 굶주리는 절대빈곤한 사람은 거의 없게 되었습니다.

 

이뿐 아닙니다. 이제는 질병의 문제를 가지고 교회를 찾아 올 필요도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의료 기술이 얼마나 발달했는지 이제는 웬만한 병은 다 고칠 수 있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세계 각 나라에서 병 치료를 목적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오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 된 우리나라의 노인복지는 어떻습니까?

노후를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노령 연금이 주어지고, 노인성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위한 노인장기요양보험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코로나 19의 급속한 확산을 막고 초기에 K 방역이 성공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잘 정비된 국민 건강보험이 자리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주거문제, 일자리 문제 특히 청년 일자리 문제를 잘 해결하면 어느 나라 못지않게 살기 좋은 나라가 될 것입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는 능력과 안목을 갖춘 지도자가 다음 우리나라 대통령이 되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지금 우리나라를 이끌어 가고 있는 민주화 세대는 주로 다른 학생들이 공부 할 때 대모만 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선동하고 편 가르기 하는 데는 능숙하나 당면한 일자리 문제, 주거문제 등등의 현안들을 해결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날 우리나라의 정책을 결정하는 위치에 올라 있어서 많은 부작용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나라 장래를 위해서 이런 상황이 빨리 개선되어 가길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날은 사람들이 더 이상 세속적인 필요들을 얻기 위해 교회를 찾을 필요가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더하여 세속적인 필요들을 채우고자 교회를 찾아왔던 많은 사람들까지 이제는 그 구하는 필요를 채워줄 수 있다고 생각되는 다른 것을 찾아 교회를 떠나갔습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성장은 멈추게 되었고 교인 수는 급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때 1,200만 명까지 된다고 하던 한국교회는 이제 약 850만 명 정도까지 줄어들었습니다.

 

이런 환경의 변화는 기도에 열심이던 교회시대를 저물게 하고, 기도하지 않고 사는 교회 시대가 열리게 하였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오늘날에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루 30분 이상 기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고 합니다. 30분 이하로 기도하는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며, 심지어 하루 5분도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도 꽤 많은 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입니다.

 

그 결과 오늘날은 문을 닫는 교회가 속출하게 되었고, 몇몇 입지 조건이 좋은 기도원을 제외하고는 기도원 운영도 어렵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은 대형교회들에서도 새벽기도 하는 성도들의 숫자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이전시대에는 수요예배, 금요 철야 기도회에는 교인의 약 1/3정도는 참석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교인의 1/10이 참석하는 교회도 그렇게 많지 않게 되었습니다. 제법 큰 교회들도 거의 모든 성도들이 주일 낮에만 참석하는 선데이 크리스천이 되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 안에서는 간청 기도 하는 시대는 끝이 난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교회에 와서 울면서 기도하는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간 한국교회가 올바른 간청기도를 해 왔다면 무엇인가 남아 있는 것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현실을 보면 간청기도의 열매로 남아 있는 것이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기도에 헌신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전부는 아닐지라도 예수님을 꼭 닮았다는 사람들이 더러는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기도에 헌신했던 그 많은 사람들 중에 전부는 아닐지라도 세속적인 이기심을 버리고 교회 공동체를 위해 살아가는 신실한 성도들이 조금은 남아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다수의 교회에서 자기중심적인 아집에 사로 잡혀 공동체를 분열시키고 대립하고 싸우도록 선동하는 사람들은 보여도, 내면의 변화와 성숙을 이룬 경건한 사람들은 잘 보이지 않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 아닙니까?

 

왜 그렇게 기도에 헌신했던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이 되었을까요?

세계교회가 기도에 헌신하는 모범적인 교회라고 칭송했던 한국교회가 맺고 있는 열매는 왜 이렇게 초라한 것입니까? 그것은 당시 그렇게 열심을 가지고 기도했던 간청기도에 뭔가 잘못된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올바른 기도를 했다면 이런 열매가 나타날 수는 없는 것입니다.

 

4. 잘못 이해한 간청기도

 

그렇다면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기에 기도하는 사람들이라면 반드시 맺게 되는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성숙은 없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전 시대 성도들이 했던 간청기도는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 알려 주신 기도를 한 것이 아니고, 세속적인 열매들만 요구하고 바라며 한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내용이 잘못 되어 있었기 때문에 기도생활이 가져다주는 개인의 영적 성장과 공동체의 영적 성숙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결과들을 보면서도 아직도 잘못된 간청기도를 강조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런 교회들은 이 누가복음 11장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우리가 끈질기게 기도하면 하나님은 거절하시 않으십니다. 마치 어린이이 같은 마음으로 매달려 기도하면 하나님의 마음을 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간청하는 기도를 하는 사람들에게 지금도 응답하셔서 하늘의 비밀을 알려 주십니다. 그러니 포기하지 말고, 낙심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하십시오.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소리 내어 부르짖으며 간청기도 하십시오. 그 얻고자하는 목표에 초점을 맞추고, 집중하고, 반복하며, 힘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십시오. 이런 부르짖음과 간청하는 간구가 없이는 하나님께 아무 것도 얻을 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세속적인 그 무엇을 얻기 위한 목적으로 하는 간청기도는, 성도들의 영적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런 기도는 이방인들이 주로 하는 기도입니다. 이방인에게 기도는 내가 원하는 것을 신에게 빌고 구하는 것입니다. 이방인들은 신에게 나의 필요를 구하고 얻어 내는 것이 기도의 주된 목적입니다.

 

그런데 이런 세속적인 기도 관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간청기도로 포장하여 하나님께 구하였고, 이렇게 간청했던 기도는 그 영혼을 성숙시켜 주지 못하였고 결국에는 그 영혼을 파멸시키는 사단의 도구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기도에 열심인 사람들 중에서 이단의 괴수가 된 사람들이 많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기독교의 기도는 이런 것이 아닙니다.

기도교의 기도는 프로슈코마이인데, 이것은 값없이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향해 충성을 맹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 앞에서 나를 고쳐 바로 살겠습니다.’ 라고 하는 자기 부정자기 결단의 행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기도관입니다.

 

다시 말하면 기도란?

하나님을 향해서는 피조물이 하나님의 영광, 긍휼하심, 자비, 은혜, 사랑 등등을 찬양하면서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드리는 행위입니다. 또 기도란? 자기 자신을 향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비추어 보아서 외곡 되고 굴곡 되어 있는 자아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신을 새롭게 하고 개혁하고 변화시켜서 새로운 사람이 되고자 하는 부르짖음입니다.

 

우리는 먼저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가져야 합니다.

기도에 대한 올바른 이해 속에서 하는 기도를 통해 우리의 영성이 성장하고 우리의 인격이 성숙하게 됩니다. 이런 성장과 성숙의 열매가 있는 기도가 바로 올바른 기도생활입니다. 아멘.

 

5. 간청기도 이전에 주기도문을 먼저 가르쳐 주신 이유와 목적.

 

누가복은 11:5절 이하에 나오는 간청기도를 바르게 이해하려면, 그 앞에 기록되어 있는 주기도문을 먼저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 11:5절 이하에 나오는 간청기도는 그 기초를 주기도문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간 한국교회는 이 말씀들을 서로 다른 말씀으로 이해해왔습니다.

누가복음 11:1-4절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의 말씀으로, 11:5절 이하의 말씀은 간청하는 기도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두 말씀은 기도라는 가르침의 서로 다른 면에 교훈을 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먼저 1절입니다.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이 말씀은 예수님의 기도하시는 모습을 늘 보아 온 제자들의 마음속에 나도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기도를 마치신 예수님께 나아가서, 요한이 그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었다고 하는데, 예수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세요.’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요청을 듣고, 우리가 주기도문이라고 알고 있는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2-4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주기도문을 보면 제자들이 기도할 때 어떤 내용을 기도하라고 하십니까?

첫째, 하나님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그 중에서 먼저는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구별되게 하는데 열정을 바치고 사활을 걸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너희의 가장 큰 바람이 되고, 가장 큰 소원이 되게 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정말 이런 삶을 살지 않았습니까?

바울은 나는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았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다릅니다. 사단은 하나님의 이름을 천박하게 하려고 합니다. 타락한 사람들은 이런 사단의 역사에 동참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불신자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 운동을 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도 신사도운동을 한다는 사람들 중에도 있습니다. 인터넷을 통해 신사도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이 인도하는 예배를 보면 이 사람들은 예배 중에 시시덕거리고 농담도 하고 말 같지도 않은 이상한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피조물인 자기들이 하나님이 되고, 성령은 마치 자신들이 부리는 종이나 되는 것처럼 행동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상사가 자기 수하에 있는 사람들에게 지시하듯이 그렇게 자기 손으로 성령에게 이리가라 저리 가라고 지시하기도 하고, 또 성령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라고 명령하기도 합니다. 이 사람들은 이런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무참하게 짓밟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들이 하나님의 이름의 거룩 성을 무참히 짓밟고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듯합니다. 이것은 그 집회에 참석하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우리가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런 사람들을 볼 때, 한편으로는 골리앗이 하나님과 그 백성을 모독하는 말을 듣고 격분했던 다윗과 같은 의분이 우리의 마음속에서도 일어나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의 말 속에, 행동 속에, 삶 속에, 하나님이 이름이 거룩하게 구별되도록 하는 삶을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 앞서 살았던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의 고백을 보십시오.

시편 96:8절입니다. 여호와 만군의 하나님이여 주와 같이 능력 있는 이가 누구리이까? 여호와여 주의 성실하심이 주를 둘렀나이다.’ 라고 하면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성실하심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요한 계시록 4:8절 말씀을 보면, 구원받은 성도들이 천국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다고 합니까?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이르기를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여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 하고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찬양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이 바로 이런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 다음으로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기도를 하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측면이 있습니다. 장차 임하게 되는 하나님 나라는 왕국의 개념이지만, 현재 이 땅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통치의 개념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땅에서 왕국의 개념을 가지고 자기들의 왕국을 이루어 가고 있는 사람들은 다 이단들입니다. 박태선 왕국을 보십시오. 문선명 왕국을 보십시오, 유병언 왕국을 보십시오. 박옥수 왕국을 보십시오. 그런데 안타깝게도 정통 교단에 속했다고 하는 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렇게 자기 왕국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모르고 있는지 몰라도 이 땅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꿈꾸는 것은 신앙을 가장한 탐욕입니다.

 

사도행전 1: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랐던 하나님의 나라는 왕국이었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너희는 장차 임할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가실 일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최우선적인 관심을 두고 살아야 할 일은, 성령을 통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통치를 너희가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을 통해서 온 세상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도록 하는 증인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추구하며 살아야 할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통치가 나 자신과, 나의 가정에, 나의 직장에, 내가 다니는 교회에, 그리고 내가 속한 국가 속에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아멘.

 

기독교는 개인주의 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는 종교입니다.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주는 종교가 아닙니다. 공동체의 행복과 번영을 구하는 종교입니다.

 

그 다음에 또 어떤 기도를 하라고 합니까?

둘째,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에게 죄 지은 사람들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용서해 주시기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넷째,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은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지 않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주기도문을 약간 살펴본 이유는, 예수님이 5절 이하에서 말씀하고 있는 간청하는 기도의 내용이 예수님이 주기도문에서 가르쳐주신 이 네 가지 기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 기도제목들을 빼놓고, 다른 기도제목을 가지고 간청하는 기도를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후에 간청하는 기도를 가르쳐 주신 이유입니다.

 

6.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이후에 주신 간청하는 기도

 

그런데 한국교회의 문제가 무엇이었습니까?

한국교회는 그간 이 네 가지 기도 제목을 가지고 간청하는 기도를 한 것이 아닙니다. 한국교회는 재물을 얻기 위해서, 권력을 얻기 위해서, 명예를 얻기 위해서, 성공하기 위해서, 등등 나의 이기적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간청하는 기도에 열정을 바쳐 왔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 기도해온 한국교회는 그간 기도하는 교회라고 소문이 나 있었지만, 기도생활의 결과로 맺게 되는 거룩한 열매는 거의 없는 그런 교회가 된 것입니다.

 

간청 기도는 증언 부언의 기도가 아닙니다.

간청하는 기도는 말을 많이 하는 기도도 아닙니다. 간청하는 기도는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구하는 기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고 있는 기도제목들은 이미 하나님이 다 아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6:8절입니다. 구하기 전에 있어야 할 것은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그러니 너희가 할 일은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6:33절입니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니라.’

 

너희는 간청하는 기도를 할 때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즉 하나님의 이름, 하나님의 나라, 공동체의 일용할 양식, 공동체의 죄 사함, 공동체가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청기도 하는 자세에 대해서는, 마치 자기를 찾아온 굶주린 친구에게 먹일 떡을 구해 주기 위하여 다른 친구를 찾아가서 간청하는 그런 심정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간청기도를 할 때에는 반드시 구하는 이는 받고, 찾는 이가 찾게 되고,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이 아버지가 그 자식에게 좋은 것을 주려고 하는 것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더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확신하며 기도하라고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간청하는 기도, 철면피와 같이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처럼 기도하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너희의 좁은 생각으로 이것저것 여건을 따져서, 자기 나름대로 합당하다고 생각하는 대로 걸러서 기도하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그대로 믿고 마치 그 얼굴에 철판을 깔고 있는 사람처럼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한 사람 중에 모세가 있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믿지 못해하고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불신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백성들을 광야에서 다 죽게 하고 내가 모세 너를 통해서 새로운 백성들을 만들어서 약속의 땅을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간 광야에서 행한 일들을 보면 하나님이 이렇게 하셔도 할 말이 없었을 백성들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하나님께 어떻게 기도 했습니까?

모세는 그 얼굴에 철판을 깔고 하나님이 이 백성들의 죄를 사해 주시든지 그렇지 않으며 내 생명을 취해 가시든지 양자택일 하시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어떻게 했습니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떡을 줄 수 있는 다른 친구를 늦은 밤에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습니까? 그 일이 친구에게 얼마나 번거로운 일인 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굶주린 친구들을 위해서 얼굴에 철판을 깔고 떡을 빌려 달라고 간청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이렇게 얼굴에 철판을 깔고 늦은 밤에 찾아가서 떡 세 덩이를 빌려달라고 한 이 사람같이, 너희도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이 네 가지기도 제목을 가지고 마치 그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처럼 하나님께 간청하는 기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기도를 할 때 어떤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고 하셨습니까?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반드시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또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가장 좋은 것인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열정적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1장에서 기도에 대해 가르쳐 주시고 계신 예수님의 가르침인 것입니다. 이런 믿음을 기도를 우리 모두 하며 살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왜 우리는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의 말씀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누가복음 11장의 문맥이 그렇게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큰 문맥인 성경도 동일한 증거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어디를 봐도 자신의 결핍이나 자신의 필요를 간청하면 들어주실 것이라는 말씀은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어지는 누가복음 12장 말씀을 보면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와서 그 형에게 명령하여 아버지 유산을 자신과 나눌 수 있게 해 달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이 사람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세상 재물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부요한 자가 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기도하느냐 하는 것은 너무 중요합니다.

우리가 열정으로 기도하고, 소리 높여 기도하고, 오래 기도하고, 오랜 세월 동안 기도생활을 하고, 얼굴에 철판을 깐 사람처럼 간청하는 기도를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고 계시는 것은, 우리가 열정적인 기도를 하고, 강청하는 기도를 하되, 예수님이 주기도문을 통해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는데, 우리 자신을 바치고, 우리의 시간을 바치고, 우리 인생을 바치며 기도하는 성도들이 되길 바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주기도문을 깊이 생각하고 묵상함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들이 하며 살기를 바라시는 기도가 무엇인지를 바로 알고,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기도를 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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