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

아버지와 아들 비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12. 14. 10:34

아버지와 아들 비유

누가복음 15:11-24

 

빅터 프랭클은 사람들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다고 합니다.

그 하나는 나와 너와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또 다른 하나는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이것은 사람과 사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비인격적인 관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도 나와 그것과의 관계가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나와 너의 관계입니까? 나와 그것과의 관계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아버지와 아들 비유는 바로 이 관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에서 우리가

첫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과 우리 관계아버지와 아들의 관계(15), 남편과 아내의 관계(고후11), 신랑과 신부의 관계, 혹은 목자와 양의 관계(시편23)로 묘사하고 있으며, 이외에도 다양한 모습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친밀하고, 인격적이고, 애정이 담겨 있는 관계이듯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친밀하고, 인격적이고, 애정이 있는 관계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녀는 그 아버지의 모든 것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것처럼, 우리들도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을 상속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서 8:17절에서는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목자와 양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목자는 양을 보호하고, 인도하고, 양육하듯이,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양육하시는 분이심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목자로서 우리 삶에 함께 해 주시며, 양인 우리들을 위하여 그 생명까지 기꺼이 버리신 선한 목자이십니다.

 

셋째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입니다.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통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랑입니다.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는 그 사랑은 이 세상이 보여줄 수 있는 최상의 사랑이듯이,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신부되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은 최고, 최상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 놀라운 사랑을 우리에게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어떻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신랑이 신부를 사랑하듯이, 목자가 양들을 보호하고 돌보듯이, 부모가 그 자녀를 아끼고 사랑하듯이 그렇게 우리를 사랑하고 돌보고 보호하고 아끼신다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에서 우리가

두 번째 살펴볼 것은, 하나님과 우리 관계의 영원성입니다.

 

여러분에게 제가 한 가지 질문을 해 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에게 자녀가 있는데 성장하고 결혼하여 독립된 가정을 이루어 분가하게 되면 이제는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끝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성장하여 외국으로 이민을 가게 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끝이 나는 것입니까? 아니면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불행한 사고를 당하여 부모보다 먼저 죽게 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끝나버리는 것입니까? 부모는 그 죽은 자녀를 가슴에 묻어두고 평생을 산다고 하지 않습니까?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죽음까지도 끊어버리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자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 자녀가 된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 육신의 부모가 우리를 낳아 주셔서 우리의 부모가 되셨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해 주심으로 우리의 부모가 되신 것입니다.

 

우리 부모가 되신 하나님은 그 자녀가 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의 소유이신 에덴동산의 모든 소유권을 넘겨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과 하와는 에덴동산의 모든 것을 자기 것인 양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잘 섬기며 살았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사단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사는 삶을 버리고 마귀의 유혹을 따라 사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는 죄를 짓는 것이 되었고, 아담과 하와로 하여금 죄의 종으로, 마귀의 종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지은 죄는 곧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파괴하였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교제도 파괴하였습니다. 사람과 이 세상 만물과의 관계도 파괴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파괴된 관계 속에 고통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인생이 되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처럼 이 세상에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세상은 죽음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이 죽음은 노화와 질병과 천재지변과 각종 사고를 통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모든 질병과 고통, 범죄와 아픔들은 다 아담의 범죄에서 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본성대로 선하고, 의롭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는데, 죄가 들어와서 세상의 모든 질서를 파괴하고 외곡 시켰습니다. 화산이 터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각종 전념 병이 퍼지게 된 것들이 다 죄로 인하여 발생하게 되었습니다.

 

이 뿐 만 아닙니다.

죄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이 된 인간 사이의 교제를 파괴시켰습니다. 하지만 창조를 통해 맺어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부자관계는 파괴하지 못했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이후에도 여전히 하나님은 아버지이시고 사람들은 그 자녀로 살고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을 보면, 둘째 아들의 죄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교제는 단절시켰지만, 이 교제의 단절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부자관계는 손상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집을 떠나간 둘째 아들을 잊지 못하고 매일 새벽마다 마을 어귀까지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면 가장 먼저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람이 죄를 지으면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던 자신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의인으로서 하나님과 부자 관계 속에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지 않았던 세리와 죄인들과 목자들은 하나님과의 부자관계가 깨어진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구원에서 제외된 사람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이는 회당모임이나 성전제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금하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유대인들의 생각을 무시하는 듯한 행동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 15:1-2절입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이 그 말씀을 들으러 나아올 때 영접해 주시고 음식도 같이 먹으셨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면서 수군거렸습니다.

이렇게 수군거리는 유대인들에게 주신 비유의 말씀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잃은 양을 찾은 목자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의 비유’, 그리고 잃은 아들을 찾은 아버지의 비유입니다.

 

첫 번째 살펴볼 비유는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목자의 비유입니다.

 

4절입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당시 목자들은 양을 잃게 되면 그 잃은 양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래서 잃었던 양을 찾게 되면 그 양을 어깨에 메고 돌아와서 그 양을 찾게 된 이야기를 벗들과 나누면서 즐거워하는 시간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 볼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비유입니다.

 

8절입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 까지 부지런히 찾지 않겠느냐?”

 

이 말씀의 상황은 이렇습니다.

남편이 수고롭게 일해서 얻은 수입을 그 아내에게 주었습니다. 아내는 남편이 준 그 돈을 받고 기뻐하다가 발을 잘못 디뎌서 넘어졌습니다. 일어나서 남편에게 받은 돈을 세어보니 한 드라크마가 부족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그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 등불을 켜고 그 집안을 샅샅이 쓸고 찾았습니다. 그러다가 그 잃었던 돈을 다시 찾게 되었으며, 그 기쁨을 이웃과 벗들과 함께 나누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왜 이 두 비유의 말씀을 하셨습니까?

양을 잃어버려서 목자와 양 사이에 교제가 끊어졌어도 그 양은 여전히 목자의 양이듯이, 드라크마를 잃어버려서 그 여인의 손에 없을지라도 그 드라크마는 여전히 여인의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리와 죄인들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도 잠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져 있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만나 교제하는 것은, 마치 잃은 양을 찾아 나선 목자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던 여인의 경우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나 교제하다가 세리나 죄인 중에 한 사람이라도 회개하고 돌아오게 되면, 잃은 양을 찾은 목자와 같은 기쁨이, 잃어버렸던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과 같은 기쁨이 예수님에게도 있게 되고 하늘에서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범하여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이스라엘의 목자로서 이 하나님의 마음을 그렇게 알지 못하느냐? 너희가 만약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너희 동족 중에서 직업상 하나님을 섬길 수 없는 목자와 세리 그리고 병자들을 마치 하나님에 의해서 버려진 사람,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너희가 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았더라면 이방인을 개나 돼지 같이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사람들도 잠시 하나님과 교제가 끊어진 사람들이지 하나님과 부자관계가 깨어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 비유가 바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 비유의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의 재산 중에서 내게 주실 분깃을 지금 먼저 내게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본래 부모의 재산 상속은 언제 이루어집니까?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가 다 되었을 때나 혹은 돌아가신 후에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아직 젊고 건강한 상태이신데 그 아버지에게 나아가서 장차 자신에게 나누어 줄 재산을 미리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이 말은 나는 더 이상 아버지와 함께 살지 싶지 않고 독립해서 살겠다.’는 뜻입니다.

 

아버지는 둘째 아들이 하도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에 그 재산 중에서 둘째 아들에게 줄 유업을 미리 나누어줍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은 그 아버지께 받은 재산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하며 산 것이 아닙니다. 그 모든 재산을 다 팔아서 그 돈을 가지고 먼 나라로 갔습니다. 이것은 이제 아버지와는 완전히 관계를 끊고 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먼 나라에 가서 방탕한 생활을 하며 살다가 보니 몇 년이 되지 못해서 아버지가 물려주신 재산을 다 써 버렸습니다. 그래서 빈털터리가 되었습니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사람은 살아 있는 동안 먹지 않고서는 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둘째 아들은 할 수 없이 돼지 치는 농장에 품꾼으로 취직을 하게 됩니다. 그런데 품삯으로 받는 임금이 너무 적어서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돼지 먹이로 주는 쥐엄 열매라도 얻어 먹어서 배를 채워 보려고 했으나 그것도 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둘째 아들은 고생고생하며 살았습니다.

고생하면서 살다가 보니 과거 아버지 집에서 살던 때가 생각났습니다. 자기 아버지 집에서는 품꾼도 풍족하게 살았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런데 자기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이렇게 살다가는 꼭 굶어 죽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래서 둘째 아들은 결단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굶어 죽느니 차라리 내 아버지 집으로 돌아가서 아버지께 용서를 구하고, 불효자식이나 다름없는 나를 아들로 받아들이기 어려우시면 아버지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아버지 집에서 일하는 품꾼의 하나로 거두어 달라.‘고 사정해 봐야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그곳 생활을 정리하고 아버지 집을 향해 길을 떠났습니다.

돈이 없는 이 둘째 아들이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편안했겠습니까? 아니지요. 차비가 없으니 그 먼 길을 걷고 또 걸어서 가야 했습니다. 음식을 사 먹을 돈이 없으니 구걸하여 먹으면서 가야 했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가는 시간도 오래 걸렸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둘째 아들의 처참한 모습을 쉽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둘째 아들은 그 아버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습니까?

내가 아버지께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나와 아버지의 부자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아들 됨을 요구하지 못하고, 아버지 집의 품꾼의 하나로 써 주기를 구하여야겠다.’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이 만난 아버지는 어떠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까지 나와서 자신을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그러면 왜 아버지는 매일 그 먼 곳까지 나와서 집을 떠난 둘째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당시 사회는 부족 혹은 씨족 단위로 모여 살았던 사회였습니다. 만약 그 아버지가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먼저 발견하지 못하고 동네 다른 사람이 발견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 사람들은 이 둘째 아들이 자기 아버지에게 한 일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거지꼴로 돌아온 그 둘째 아들의 죄를 책망하고 잘못을 책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그 꼴을 하고 무슨 염치로 고향을 찾아 왔느냐고 하면서 둘째 아들이 마을에 들어오지 못하게 내 쫓았을 수도 있습니다.

 

왜요.

그런 불효자식이 마을에 있다는 것은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나쁜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 아버지라도 부족 어르신들의 의견을 존중해야 하기 때문에, 그 둘째 아들을 다시 아들로 받아들일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는 만약 둘째 아들이 다시 돌아오게 되면, 부족의 다른 사람들이 발견하기 전에 자신이 먼저 발견하여서, 그 둘째 아들에게 자기아들이 되는 지위를 회복시켜 주고, 둘째 아들이 회복된 지위를 가지고 부족 사람들을 만나게 하고자 했습니다. 그래야 그 아들이 고향에서 다시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는 매일 같이 그 먼 거리까지 나와서 혹시나 돌아올지 모르는 둘째 아들을 매일 같이 기다리고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둘째 아들이 거지꼴을 하고 돌아오는 모습이 멀리서 보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한편으로는 집을 나갔던 그 둘째 아들을 다른 부족 사람들보다 먼저 보게 된 것이 너무 반가웠고, 다른 한편으로는 거지꼴이 되어 돌아오는 그 아들을 보며 측은지심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분도, 나이도, 채면도, 다 무시하고 아들에게로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둘째 아들은 전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아버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이 둘째 아들은 한편으로는 아버지 얼굴을 다시 보게 된 반가움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가 자기를 받아주지 않고 쫓아내실까봐 겁도 났습니다. 그래서 아버지를 보자마자 땅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고 21절 말씀을 보면,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 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부터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 나로 아버지 집에서 종으로 라도 살 수만 있게 해 주세요.”라고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 둘째 아들이 그 말을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거지꼴로 돌아온 그 둘째 아들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서, 그 집의 종들에게 집에서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 주라.’고 했습니다.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라.’고 했습니다. 발에 신을 신겨 주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난 후에 다시 그 종들에게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서 우리가 먹고 즐기자.’ 라고 했습니다. 왜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나 같고,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은 것이나 같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둘째 아들은 이런 아버지를 보며 무엇을 깨달았을까요?

자기는 아버지께 죄를 지음으로 아버지와의 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 아버지 집의 종의 한 사람으로 써 달라고 사정하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버지는 달랐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과의 부자 관계가 깨어졌다고 생각하지 않고, 잠시 부자의 교제가 끊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집을 떠난 아들이 돌아오므로 그 끊어진 교제를 다시 회복하게 된 것을 인하여 기뻐하고 계셨다는 것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죄인 된 사람들을 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일 것입니다. 죄인 된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한결 같으신 사랑일 것입니다. 아멘.

 

어떤 부모에게 집나간 자식이 있었습니다.

그 부모는 그 자식이 언제 다시 집에 돌아올지를 몰라서 밤낮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 부모 생각에는 집 나간 그 자녀가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왔다가 잠겨 있는 그 현관문 때문에 집에 들어오지 못하고 다시 돌아 갈까봐서 그렇게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처음에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 같이 강도도 많고, 악한 사람들이 많은 세상에 살면서, 집의 문을 잠그지 않고 몇 년째 살고 있다는 그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사람이 직장에서 집에 돌아와 보니, 집에서는 중학교에 다니는 딸과 엄마가 죽여라 살려라 하면서 싸우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에게 딸과 싸우는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아내가 처음에는 기가 차다면서 대답도 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하는 말이 이러했습니다. 딸의 가장 친한 친구가 그 이웃에 살고 있는데, 그 집은 마당에 수영장이 있을 정도로 대저택을 소유한 부자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부모는 딸이 해 달라고 것을 다 해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들 부부는 가난해서 딸에게 해 주는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딸이 그 친구의 집에 자주 놀러갔는데, 그 친구 부모가 딸에게 너 참 착하구나! 만약 네 부모가 허락하시면 네가 커서 독립할 때까지 내 딸과 함께 우리 집에 와서 살아도 된다.’ 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고 딸은 고민 고민 하다가 그 이야기를 엄마에게 하며 엄마 나는 그 집에 가서 살고 싶은데 그러면 안되.’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그런 딸을 붙들고 네 부모는 우리이고, 친구 부모는 남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었다고 합니다. 엄마가 아무리 설명을 해 주어도 딸은 그래도 나는 나에게 아무 것도 해 주지 못하는 이 집에 더 살기 싫다.’고 하며, 나는 나에게 잘 해 줄 수 있는 그 집에 가서 살고 싶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싸웠다는 것입니다. 싸우면서도 자식에게 잘 해 주지 못하는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러다가 마침 방학이 되어서 그 아빠는 딸을 친구 집으로 보내주면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고 합니다. 너와 아빠의 관계는 부녀 관계인데, 이 부녀관계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끊어지지 않는 관계라고 하면서, 아빠는 언제라도 네가 집에 돌아올 수 있도록, 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날까지 현관문을 열어 둘 것.’이라고 하면서 언제라도 네가 집에 오고 싶은 마음이 들면 와도 좋다.’라고 하며 딸을 보냈다는 것입니다.

 

나중에 그 이 한 말이 이러했습니다.

처음에 친구 집에 가서 살면서 친구부모가 너무 잘해주니까 내가 여기 와 살길 잘했다.’라는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친구와 그 부모님이 내게 아무리 잘해 주어도 그 분들이 자기 부모가 아니라는 마음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지내던 어느 날 갑자기 자기에게 별로 해 주는 것이 없었던 엄마와 아빠가 보고 싶어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엄마 아빠를 보려고 집에 가려고 하니 염치가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몇 번이나 집에까지 왔다가 그냥 돌아가고, 또 집에 왔다가 그냥 돌아가기를 반복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은 현관문을 살짝 밀어보니 문이 잠겨 있지 않고 스르르 열리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며시 집에 들어가 보니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딸은 현관문도 잠그지 않고 나간 부모를 생각하자 막 화가 났다고 합니다.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엄마 아빠는 이렇게 문을 다 열어놓고 다닐 수 있느냐고 하면서 화를 참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화가 난 채로 집에서 엄마 아빠를 기다리다가 전에 아빠가 해 주셨던 말 네가 언제라도 집에 오고 싶을 때 올 수 있도록 항상 문을 열어 놓을 것이라고 했던 아버지의 말이 생각나더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비록 자기 부모는 가난했지만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사랑이 깨달아지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혼자 엉엉 소리 높여 울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친구 집으로 돌아가서 친구와 그 부모님을 만나서 방학 때 친구와 잘 보낼 수 있도록 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방학이 끝나기 전에 자기 집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가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집을 떠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이 아버지와 같이, 우리 하나님께서는 범죄 하여 하나님을 떠난 인류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믿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에 소상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성경을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사랑의 편지라고도 부르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내리셔야 했던 사망의 판결을 내리지 않으시고, 오히려 내가 친히 여자의 후손으로 인간이 되어 세상에 가서, 너희의 죄를 대신 다 담당하고 너희를 죄에서 구원해 줄 것이라는 약속을 주셨겠습니까?

 

여러분은 성경을 자세히 읽어 보십시오.

성경 어디를 봐도 아담 안에서 범죄한 너희의 죄가 너무 크니 너희가 최소한 이 정도 노력을 해야 내가 구원해 준다.’ 라고 하신 곳이 있습니까? 그런 말씀은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냥 죄인이 된 인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복음의 약속을 해주시고, 그 약속을 믿기만 하면 구원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거짓말 하실 수 없으신 하나님이 주신 약속입니다. 죄와 불의에서 완전히 떠나 계신 하나님이 해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구약시대 모든 사람들이 이 약속을 믿고 하나님께 나아갔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며 살 수 있는 그 모든 은혜와 권세와 특권들을 누리면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신약시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복음의 약속을 믿고 나아가기만 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가 누리며 살 수 있는 그 모든 은혜와 권세와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 주십니다. 아멘.

 

이런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사랑이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람이 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그 마음속의 두려움도, 걱정도, 근심도 다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사도요한은 이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는다.”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이 사랑 안에서 사도바울은 이 세상의 그 무엇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 모두는 이 사랑 안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랑 안에서 하나님과 깨어진 교제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날마다 예배를 통해 하나님과 회복된 교제를 확인하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함을 통해 회복된 교제를 확인하고, 기도를 통해서 또 하나님과 회복된 영적인 교제를 확인하며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은 우리가 누리며 살고 있는 이 은혜의 증인입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가족들과 자녀들과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려는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아멘.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의 말씀에서 우리가

세 번째 살펴볼 것은, 깨어진 부자관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가 깨어진 원인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의 범죄사건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깨어진 교제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약속하신 메시야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 자기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를 기다렸듯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뉘우치고 그 죄를 회개하고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이 하나님의 기다림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기회가 있을 때 돌아가야 합니다.

IT업계의 최고의 경영자 중 한 사람이었던 스티븐 잡스는 태어나자마자 그 부모에 의해 버려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매우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었습니다. 잡스는 어린 자기를 버린 부모에게서 받은 마음의 상처가 아주 컸습니다. 이런 잡스가 나중에 어느 정도 성공한 기업가가 되어 있을 때 그 아버지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잡스는 그 아버지를 평생 만나주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어릴 때 버림받은 그 마음의 상처가 너무 커서 아버지와의 교제가 회복되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잡스는 평생 동안 그 부자관계를 부정하고 아버지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남남처럼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스티브 잡스가 모르는 것이 있습니다.

비록 어릴 때 자신이 부모에 의해 버려짐으로 부모와 자식 간의 교제는 끊어졌었어도, 이것이 부모와 자식이라는 부자관계까지 파괴해 버린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삶에 무슨 일이 있어도 부모는 언제나 부모이고 자녀는 언제나 자녀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영원한 관계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서도 같습니다.

죄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교제는 깨어지게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와 그 자녀 된 사람 사이의 부자관계는 깨어지게 하지 못했습니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우리를 창조하신 아버지시고, 사람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전해 주어야 할 복된 소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자신은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런 사람들을 자녀로 보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복음 안에서 깨어진 교제의 관계가 회복되기만 하면,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며 살 수 있는 은혜와 특권들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은 하나님과 교제가 깨어진 채로 수 천 년을 지내왔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하나님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지금이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는데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보내 주신 메시야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가 주어지며 다시 하나님과 부자의 교제를 회복할 수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원의 날은 영원한 것이 아닙니다.

그 기한이 정해져 있습니다. 그 기한이 우리 개인적으로는 죽음이 오기 전에 이 깨어진 교제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방인인 교회는 이방인의 수가 충만히 차기까지 깨어진 교제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구원받는 이방인들의 수가 다 차면 구원의 문은 닫힌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릅니다. 이방인의 때가 끝이 나고 유대인을 향해 정해 두신 마지막 한 이래가 지나가기 전에 하나님과의 깨어진 교제의 관계를 회복해야 합니다. 그러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날이 점점 더 가까워오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 날이 되기 이전까지는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우리의 형제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우리는 더 이상 형제 관계 속에 있지 않게 됩니다. 아무리 친한 형제라도 예수를 주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마귀의 자녀로 영원한 형벌을 받으며 살게 됩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그 날이 오기 이전에 사람들이 하나님과 깨어진 교제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 날이 이르면 교제의 단절은 곧 바로 관계의 단절로 넘어가서, 더 이상 교제의 회복도 관계의 회복도 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날이 임박하게 다가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세계 10대 선진국에 들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못살았으나 이제는 잘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굶는 사람도 없고 너무 편하고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겠느냐? 라고 합니다. 지금 생활이 곧 천국생활이 아니겠느냐고 합니다. 그러면서 도무지 하나님을 믿고 그 주시는 은혜를 받아 누리는 삶을 살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볼 때 하나님이 정해 두신 종말의 날이 코앞에 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우리 마음이 어떠합니까? 사랑하는 형제여, 친구여, 사람들이여 그 날이 오면 어찌하려는가? 라는 근심과 탄식을 하게 됩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는 사람들과 하나님 사이에 단절된 교제를 회복시켜 주는 복음을 전해 주었느냐? 그리고 만약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지 않으면 홀연히 임하게 될 멸망의 날에 대해 경고해 주었느냐? 라고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날에 세상 사람들의 죄에 대해 무죄한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면 어떻게 무죄할 수 있습니까? 에스겔은 사람들이 듣든지 듣지 않든지 파수군의 심정으로 그 일을 감당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모든 사람에게 복음과 경고의 말을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복음과 함께 그 멸망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주어서, 그 날에 멸망당하는 사람들의 피에 대해 깨끗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은 희망이 있습니다.

아직은 은혜 받을 때이며, 아직은 구원의 날입니다. 이 은혜의 날과 구원의 날이 끝날 때까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맡겨주신 사명, 전도인의 사명을 잘 감당해 나가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비유가 우리에게 주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아버지 하나님의 애타는 마음, 아버지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마음과 사랑을 아는 자들이라면 하나님과의 교제의 단절이 장차 하나님과의 관계의 단절을 가져오기 전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고, 구원의 소식을 전해 주는 성도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전도자의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경의 비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곡과 가라지 비유  (0) 2022.09.04
열 처녀의 비유  (1) 2022.07.10
겨자 씨 비유  (0) 2021.11.14
벗을 위해 떡을 구한 친구 비유  (0) 2021.08.01
불의한 청지기 비유  (0) 2021.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