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

열 처녀의 비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2. 7. 10. 14:00

열 처녀의 비유

마태복음 25:1-13

 

오늘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마태복음 25장에는 세 가지 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 세 가지 비유는 열 처녀의 비유, 달란트 비유, 양과 염소의 비유입니다.

 

이 세 가지 비유는 모두 종말비유입니다.

세 가지 비유가 종말 비유라는 것은 그 전후 문맥 속에서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을 우리는 종말장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는 종말시대 일어날 일들에 대한 말씀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25장은 그 때에 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이 종말시대 일어날 일들에 대한 비유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세상이 돌아가는 것을 보면 종말시대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을 보면 종말 시대에는 7, 7나팔, 7대접의 심판들이 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여섯 인의 심판이 있고 난 뒤에, 마지막 일곱인 안에 일곱 나팔심판일곱 대접심판이 들어있는 구조입니다. 그 후에 이 세상 역사는 끝이 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관심을 가지고 봐야 할 것은 바로 인의 심판입니다. 인의 심판을 보면,

 

첫째 인은 흰 말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미혹의 역사가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보십시오. 종교적인 미혹이 극에 달해 있지 않습니까? 가치관의 혼돈 속에 온 세상이 동성애 합법화에 열을 올리고 있지 않습니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우리 생활 전체 속에 미혹의 물결이 출렁이고 있습니다.

 

둘째 인은 붉은 말로 표현되고 있는데, 이는 전쟁이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요즘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함으로 유럽은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가지고 나토로 결집하며 군비를 확충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안보 리스크를 낮추기 위하여 나토라는 배에 올라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서구의 세력의 결집은 반대편에 서 있는 러시아, 중국, 북한 등등의 결집을 가져와서 신냉전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며, 전쟁의 분위기가 점점 높아지고 있습니다. 세계 대전도 멀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셋째 인은 검은 말로 표현되고 있는데 큰 기근이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은 세계가 군사적으로 양분되면서, 경제적으로도 둘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원이 무기화 되면서 경제는 점점 어려워지고, 여기에다가 기상이변으로 인한 자연재해가 더해지면서 식량 위기가 현실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때가 되면 농산물 가격이 얼마까지 오른다고 합니까? 근로자의 하루 임금인 한 데나리온으로 밀 한대와 보리 석대를 구입해야 하는 어려운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넷째 인은 청황색 말로 표현되고 있는데 큰 온역이 있을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코로나 19 바이러스를 통해서 온역 즉 전념 병의 무서움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 인 재앙 때에 인류 1/4이 죽어 음부에 들어갈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인재앙의 시대는 공포와 절망의 시대가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에 무슨 소망이 더 있겠습니까?

 

다섯째 인은 절망적인 세상을 보며 순교자들이 이제 자신들의 억울한 죽음을 신원해 달라고 합니다. 주님은 아직도 순교할 사람들이 더 있으니 잠시 기다리라고 합니다.

 

여섯째 인은 이 땅과 우주에 이상 현상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땅에서는 큰 지진이 나고, 하늘의 해가 검어지고, 달이 핏빛같이 붉어지고, 하늘의 별들이 익지 않은 과일이 떨어지듯 지구로 떨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일곱째 인일곱 나팔 재앙과 또 일곱 대접 재앙이 임함으로 인류역사는 끝이 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열 처녀의 비유는 이 종말시대 일어날 일들 중 하나입니다.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일은 여섯 번째 대접심판이 떨어지고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이 시작되기 직전에 일어날 일입니다. 그리고 난 후 땅에서는 죄악 된 세상에 대한 일곱 번째 대접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하늘에서는 혼인잔치가 있을 것입니다. 아멘.

 

유대인의 결혼 풍습

 

이제부터는 열 처녀의 비유를 통해 그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열 처녀의 비유는 유대인의 결혼 풍습과 깊은 연관성이 있는 비유입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려면 먼저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유대인의 결혼은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먼저는 부모들끼리 혼인 약속을 합니다. 그 다음에는 성장한 당사자들이 약혼식을 합니다. 약혼식을 한 1년 후에 결혼식을 합니다. 우리나라는 약혼을 해도 아직 부부가 아닙니다. 결혼을 해야 부부가 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약혼식을 하게 되면 실재로 부부생활은 하지 않아도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입니다.

 

유대인 신랑들은 약혼식을 한 후 1년 동안 결혼해서 살 집을 준비해야 합니다.

그래서 집이 준비되면, 신랑은 신부를 그 집으로 데려 오기 위해 신부의 집으로 가서 거기서 결혼식을 하고, 신부와 함께 그 준비해 둔 집으로 가서 결혼 생활을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4:1-3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이 말씀은 마치 신랑이 신부를 위하여 살 집을 준비하듯이, 우리의 신랑이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지금 하늘에서 우리가 장차 살게 될 집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천국에 우리가 살 집이 다 마련되면 다시 이 세상에 오셔서, 죄악 된 세상은 심판하고, 성도들과는 혼인예식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지금 우리는 어떤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는 예수님과 약혼을 한 상태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아직 예수님과 결혼식은 하지 않았지만 법적으로는 이미 부부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루를 계산할 때 그 날 저녁 24시부터 그 다음날 24시까지로 계산합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저녁 18시부터 그 다음날 18시까지를 하루로 봅니다. 그 이유는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라고 하셨기에, 유대인들은 저녁부터 새로운 날이 시작되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날짜 계산법에 따라 유대인들은 약혼을 한 날로부터 만 1년이 되는 저녁 6시부터 그 다음날 저녁 6시 사이에 결혼식을 했습니다. 그 날 신랑이 신부의 집에 찾아가는 바로 그 시간이 결혼식을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팔레스타인 지방은 아주 더운 지방입니다. 그래서 낮에는 활동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로 밤에 결혼식을 하였다고 합니다.

 

결혼식에 참여할 수 있는 두 가지 조건

 

유대인들은 결혼식을 하게 되는 7일 전부터 결혼식이 있는 그 날까지 일주일 동안 혼인잔치를 하였습니다. 이 혼인잔치에는 신랑과 신부를 아는 사람이면, 신랑과 신부가 사는 한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참여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결혼식은 달랐습니다.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습니다.

 

그 첫 번째 조건은, 결혼식을 하려고 신부의 집으로 찾아오는 신랑을 맞이하는 그 사람들만 결혼식에 참여할 수 있었습니다.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신랑이 올 때 다른 일을 하다가 신랑을 맞이하지 못하면 결혼식에 참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신랑을 맞이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요. 신랑은 될 수만 있으면 마을 사람들이 모르게 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될 수 있으면 결혼식에 사람들을 적게 데리고 들어가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랑은 주로 밤 깊은 시간에, 사람들이 혼인잔치에서 먹고 마시다가 피곤해서 잠든 그 시간에 주로 왔다고 합니다. 심지어 신랑은 사람들이 신랑인 것을 알아보지 못하도록 변장하고 오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깨어 있지 않은 사람들, 신랑을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의 신랑 되시는 예수님께서도 밤의 도적같이 오신다.’고 합니다.

밤에 도적이 어떻게 옵니까? 내가 몇 시에 너희 집에 물건을 훔치려 가니 그렇게 알고 있으라.’ 라고 통고해 주고 옵니까? 아니지요. 그 집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곤히 자고 있는 그 시간, 그래서 잠자느라 물건을 다 훔쳐가도 알지 못하는 그런 시간에 도둑질하러 옵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그와 같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4장의 말씀을 보면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인자가 어느 때 어느 시에 올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혼인잔치를 위해 준비한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기는 일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일로 인해 피곤해져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밤 깊은 시간에 오는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 나오고 있는 열 처녀는 조금 달랐습니다.

이 처녀들은 밤늦은 시간까지 깨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밤이 깊어 가자 이들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졸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5절 말씀을 보면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잤다.’라고 합니다.

 

그 때 신랑이 그 동무들과 함께 신부의 집에 도착하였고, 신랑의 동무들이 6절 말씀과 같이 큰 소리로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라고 소리쳤습니다. 신랑의 친구들은 이렇게 해서 신랑이 신부의 집에 도착하였다는 것을 알렸던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듣고 졸고 있던 열 처녀, 선잠을 자고 있던 열 처녀가 깨어 일어났습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4:16절 말씀을 보면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도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 날에는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소리를 듣고 졸고 있던 성도들, 또는 선잠을 자고 있던 신부된 교회가 깨어 일어나서 신랑 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아멘.

 

신랑의 친구들이 보라 신랑이로다’. ‘신랑을 맞으러 나오라.’라고 소리 칠 때, 굳게 닫혀 있던 신부의 집 대문이 활짝 열리게 되고, 그 열린 대문 안으로 신랑과 그 함께 온 일행과 신랑을 맞이하려고 깨어 기다린 사람들이 함께 결혼식장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사람들이 결혼식장에 다 들어가게 되면 열렸던 신부의 집 대문은 다시 닫히게 되고 결혼식이 시작되었습니다.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첫 번째 결혼식을 하려고 신부의 집으로 오는 신랑을 깨어서 맞이해야 합니다. 이때를 놓치면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라도 그 결혼식에 참여할 수가 없습니다.

결혼식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두 번째 결혼식이 밤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결혼식을 하는 동안 계속 등불을 밝힐 수 있도록 등과 충분한 기름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습니다.

 

당시 신부의 집 문 앞에는 지키는 사람들이 서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결혼식장에 사람들을 들여보낼 때,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만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결혼식이 약 2시간 동안 진행된다고 하면, 2시간 동안 등불을 꺼뜨리지 않고 켤 수 있는 기름을 준비한 사람만 들여보냈다고 합니다.

 

두 부류로 나눠지는 처녀들

 

그런데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기다렸던 열 처녀, 미련한 처녀슬기 있는 처녀로 나눠지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8-9절에는 이 두 부류의 처녀들의 대화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 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와 너희가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미련한 처녀들은 신랑이 이렇게 늦게 올 줄 모르고 기름을 모자라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래서 신랑이 오기 전에 그 준비한 기름을 거의 다 써버리고 이제 남은 기름으로는 결혼식을 할 동안 등불을 켜고 있을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달랐습니다.

슬기 있는 처녀들은 신랑이 혹 늦게 올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기름을 충분하게 준비했습니다. 그래서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등불을 켤 수 있는 기름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련한 처녀들이 슬기 있는 처녀들에게 그 가지고 있는 기름을 좀 나눠 달라.’고 합니다. 이 때 슬기 있는 처녀들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내가 준비한 기름의 양도 많지 않아서 두 사람의 등을 밝힐 정도는 되지 않으니, 차라리 지금이라도 빨리 기름 파는 가게에 가서 기름을 더 사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결혼식을 위해 열린 신부 집의 문은 한번 닫히면 다시 열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혼식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 대해 마태복음 25:11-1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기름을 사 가지고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미련한 처녀들이 뒤 늦게 기름을 더 사 가지고 와서 우리에게 문을 열어 달라.’고 했습니다.

결혼식이 끝날 때까지 쓸 충분한 기름을 사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간청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합니다. 신랑은 이미 늦었다.’ ‘이미 문은 닫히고 혼인잔치가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너희들은 결혼식에는 참여할 수가 없다.’ 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에도 이와 똑 같은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태복음 24:42절입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라.’ 44절입니다. 이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그러므로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을 기다리며 사는 성도들은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예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늘 깨어 준비하고 예비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늘 깨어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늘 예비하고 있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예비하고 있지 않으면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예수님이 다시 재림하실 것을 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더라도 늘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예비를 하고 준비를 하고 살아가는 하루하루가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유대인의 결혼 풍습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

 

그러면 유대인의 결혼 풍습이 왜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왜 우리는 유대인의 결혼 풍습까지 살펴보아야 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 유대인의 결혼풍습이 우리의 신앙과 우리의 구원과 깊은 연관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우리 주 예수님이 신랑으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과 우리 사이에는 결혼식 즉 혼인잔치가 있게 될 것입니다. 이 혼인잔치를 통해 구원 받음과 구원 받지 못함이 구분됩니다. 성경은 이 중요한 우리 신앙의 문제를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통해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유대인의 결혼풍습을 살펴보는 이유입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는 단 한번 뿐이라고 합니다. 그 단 한 번의 기회를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 문이 한번 닫힌 이후에는 더 이상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가 없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다행한 것은 그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의 말씀은 마지막 대접 심판이 쏟아지기 직전에 이루어질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나누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아직 그 날을 위해 준비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아멘.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 모두는 지혜로운 다섯 처녀와 같이 이 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있도록 깨어 늘 예비하고 준비하고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아직 기회가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너희는 슬기 있는 사람들처럼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가 잘 되어 있는지를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결혼식 일주일 전부터 시작되는 유대인의 혼인잔치에는 그 마을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혼인잔치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은 이제 7일 후면 신랑이 올 줄 다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사람들이 신랑을 맞을 준비를 하고 있지는 않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지 혼인잔치에서 먹고 마시는 일을 즐겼습니다. 신랑을 맞이하려고 준비하고 기다린 사람들은 오직 열 처녀들뿐이었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시대도 같습니다.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앞으로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성도들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알고,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그 날을 바라보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이 가져오실 결혼식에 참여하지 않겠다.’ ‘나는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해 주시려고 가신 천년 왕국의 삶에 천국의 삶에 참여 하지 않겠다.’라는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지구상에는 지금 약 10억 명에 가까운 개신교인들이 있습니다. 로마 카톨릭 성도는 약 12억이라고 합니다. 이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중에 예수님 재림을 기다리며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소망으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모르긴 몰라도 재림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다시 오실 신랑을 기다리지 않는 성도들도 꾀 있을 것입니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많은 사람들이 혼인잔치 중에 먹고 마시는 일을 즐기고 있었듯이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은 신앙을 가졌지만 그 소망을 세상일에 두고 살아가고 있을 것입니다.

 

물론 이런 사람들도 예수님이 재림하신 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세상에 그 소망을 두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재림을 진정으로 기다리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면서도,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지도 않으면서, 자신은 천국혼인잔치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마 대다수의 성도들이 이런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아직 기회가 있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둘째, 아직 준비할 기회가 있을 때 슬기 있는 처녀들처럼 깨어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이단적인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고, 종교다원주의 적인 신앙을 가진 사람들도 있고, 번영 신학을 신봉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야 잘못된 신앙을 가졌기에 제외시켜 두더라도, 정통신앙을 가졌다는 교회 안에도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신앙을 가져야 합니까? 예수님의 재림을 소망하며 그 날을 위해 준비하고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열 처녀가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열 처녀는 혼인잔치에 참여한 사람 중에 아주 소수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얼마나 될까요? 당시 한 마을 사람들 중에 열 명뿐이었는데, 오늘날 10억의 그리스도인들 중에는 과연 얼마나 될까요?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 열 처녀도 둘로 나눠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2-4절입니다. 그 중의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 자라 미련한 자들은 등은 가지되 기름은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이들 중 다섯은 슬기 있는 처녀이고 다섯은 미련한 처녀였다고 합니다.

미련한 처녀에 사용된 모러스라는 단어는 정신적으로 우둔한 사람, 바보스러운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단어의 의미에서 유추해 보면 이 처녀들이 신랑을 맞이할 준비를 완전하게 하지 못했던 것은 미련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도 자기 나름대로는 열심히 준비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미련해서 필요한 기름의 양을 정확하게 산출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정작 신랑이 왔을 때에는 그 등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슬기 있는 처녀에 사용된 프로니모스라는 단어는 지각이 있고 통찰력이 있는 사람, 총명하고 사려 깊고 신중한 사람으로 번역할 수 있는 단어입니다. 이런 의미로 볼 때 이 사람들은 그 지혜로 필요한 기름의 양을 정확하게 계산해서 준비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두 부류의 처녀들이 한 노력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이 두 부류의 처녀들의 다른 점은 준비한 기름의 양이었습니다. 미련한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워가지고 갔습니다. 그러나 슬기 있는 처녀들은 등에 기름을 채웠을 뿐 아니라 혹시 신랑이 늦게 올지 모르니 그 때까지 쓸 수 있는 여분의 기름을 준비해 가지고 갔습니다.

 

이 미미한 차이가 엄청난 결과의 차이를 가져왔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에게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려면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준비가 완벽하냐? 완벽하지 않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결과가 완전히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준비를 해야 합니까?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의 말씀을 보면, 등과 기름 두 가지를 준비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등은 무엇이고 기름은 무엇입니까? 등과 기름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 왔습니다.

 

첫째, 등입니다.

시편 119:105절의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라는 말씀을 보면 등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기름입니다.

기름은 모든 주석들에서 성령으로 또는 성령의 기름부음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셋째, 그러면 등불을 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등불을 켜기 위해서는 먼저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소유한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은 말씀을 통해 역사하시는 성령 충만한 성도가 되어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슬기 있는 성도는 성령 충만함으로 성령의 인도를 받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아담의 죄 아래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 중 일부 사람들은 슬기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요?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증거를 받아,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이 이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예수 믿고 성령을 받아서 그 존재가 변한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 믿고 심령이 변화되었다는 것을 그 살아가는 선한 삶을 통해서 보여주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5:15-16절 말씀이 바로 여기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렇게 볼 때 등불을 켠 삶을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믿고, 성령을 받아, 그 존재가 거듭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전에는 아담 안에서 미련한 사람들이었는데, 이제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슬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슬기로 신랑으로 오실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등은 준비하였으되 기름은 준비하지 못한 미련한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도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듣고 믿었지만, 아담 안에서 미련한 자신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슬기 있는 사람으로 변화시키지는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지고는 있었지만 여전히 미련한 사람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재림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를 완전하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이 된 이 모습 이대로는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수 없습니다.

아담의 후손이 된 그대로는 거룩한 영이신 성령 하나님을 마음에 모실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죄 사함을 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성령을 받아, 아담 안에서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는 중생을 경험해야 합니다.

 

열 처녀 가운데에는 미련한 처녀도 있고 슬기 있는 처녀도 있었듯이, 예수 믿는 사람들 중에는 중생을 경험한 사람들도 있고 중생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겉모습만 보면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과 중생한 사람들은 똑 같이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로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상을 보면 슬기 있는 처녀와 미련한 처녀로 구분되듯이,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으로 구분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사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현존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님의 재림을 사모하고 기다린다고 해도,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할 자격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들은 믿음 안에서 미련한 우리가 슬기 있는 우리로 변화된 사람들입니까? 아니면 믿음은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미련한 자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까? 믿음이 가져다주는 우리자신의 변화의 유무가, 열 처녀의 비유에서 보듯이 완전히 다른 결과를 가져오게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5:48절 말씀에서 이렇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여기 사용되고 있는 온전하라.’는 단어는 사실 완전하라.’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완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완전하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완전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즉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성도가 되고, 기름 즉 성령을 통해 중생하고 거듭나서 그 존재가 변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난 사람들만 완전하신 하나님을 따라 살아 갈 수 있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경험한 후에, 완전하신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평생 살아갔듯이, 동일하게 예수님을 만나고 구원을 경험한 우리들도 예수님을 본받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슬기 있는 처녀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마태복음 5:16절의 말씀과 같이 그 켠 등불의 빛을 사람 앞에 비추는 삶을 살다가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고, 천국 결혼잔치에 참여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이런 복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는 열 처녀의 비유에 나오는 슬기 있는 처녀와 같이, 등과 기름을 준비하고 등불을 환하게 켜서 밝히는 삶을 살아가다가, 재림의 주로 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깨어 있는 성도의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신앙생활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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