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

겨자 씨 비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11. 14. 15:56

겨자 씨 비유

마태복음 13:31-32

 

여러분은 천국이 어떤 곳이라고 알고 있습니까?

천국은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천국은 물질세계에 속한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물질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갈수 없는 나라입니다. 천국은 영적인 나라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지고 물질세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런 천국에 대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알려주셨습니까?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알려주신 비유의 말씀을 우리는 천국 비유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3장에는 바로 그 천국비유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비유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천국이 어떤 곳인지 명확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

아주 부분적으로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을 뿐입니다. 왜요. 우리가 물질세계에서 통용되는 지식을 가지고 영적세계를 이해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국에 대한 명확하고 딱 떨어지는 지식을 가질 수가 없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물질세계에 속해 있는 태양은 눈으로 보고 관찰하여서 태양에 대해 명확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태양이라고 말하면 누구나 다 압니다. 그러나 영적세계에 속하는 우리 영혼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영혼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영혼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어떻게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영적 세계인 천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천국이 있다는 것은 알지만 구체적으로 천국이 어떤 곳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영적 세계인 천국은 물질세계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이해의 한계를 벗어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물질세계에 대한 이해를 통해 지식을 가지게 되지만, 천국은 물질세계와는 전혀 다른 영적세계에 속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한계를 가지고 있는 우리가 영적인 지식을 어떻게 얻게 됩니까?

오직 하나님이 계시를 주실 때만 알게 됩니다. 영적인 지식은 영으로 계신 성령을 통해 알게 됩니다. 영적인 지식은 영이요 생명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천국이 어떤 곳인가를 알려고 하면, 천국에 대해 말씀해 주고 있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 해 주는 만큼만 천국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성경은 천국에 대해 무엇이라 말씀해 주고 있습니까?

성경의 증거를 보면 천국 하나님 나라는 이중적인 면이 있다고 합니다.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가 하면, 장차 도래하게 될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도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는 교회라는 모습으로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겨자 씨 비유는 바로 이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겨자 씨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아멘.

 

첫째 살펴볼 것은, 겨자 씨 비유가 보여주고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입니다.

 

겨자씨 비유를 보면, 어떤 사람이 자기 밭에 모든 씨보다 작은 겨자 씨 한 알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이 겨자씨가 자라고 자라서 풀보다 훨씬 큰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그 나무에 둥지를 틀고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보여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겨자씨 비유는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는 견해가 일치합니다.

 

그런데 차이점도 있습니다.

먼저 많은 사람들은 이 겨자씨 비유를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즉 교회의 성장과 교회의 확장 사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으로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 속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는 마치 겨자씨와 같이 처음에는 작게 시작되지만 결국에는 큰 나무가 되어서 열방에까지 성장해 나가는데, 이런 교회의 확장 사를 겨자씨 비유가 보여주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사람들은 교회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예수님 한 사람으로 시작된 복음이 12제자를 거처 70명의 전도대로 발전하게 되고, 나중에는 오순절 은혜를 체험한 120명의 성도들을 통해서 3000, 5000명의 사람들이 회개하고 돌아와서 예루살렘 교회는 곧 2-3만 명의 신자를 가진 큰 교회로 성장하게 되어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에서 시작된 초대교회는, 로마의 10대 박해라는 극한 박해를 이겨내고, 결국 AD 313년에는 국가가 인정해 주는 종교로 공인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후 기독교는 계속되는 선교를 통해 유럽을 복음화하고, 아메리카를 복음화 하고, 아시아를 복음화하고, 현재는 아프리카로 까지 나아갔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겨자씨 비유를 교회의 성장과 확장사를 보여주고 있는 말씀으로 이해합니다.

 

2021년 현재 기독교 신앙을 고백하는 사람들의 숫자는 개신교와 카톨릭을 합하여 약 22억 명 정도 된다고 추산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을 볼 때,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이 겨자씨 비유는 이런 기독교 확장 사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 보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조금 다른 각도에서 현실을 보면, 교회의 외형적인 확장이 곧 바로 신앙의 확장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가 냉정한 눈으로 오늘날 교회를 직시해 보면, 오늘날 교회는 초대교회가 가지고 있었던 순수한 신앙을 잃어버린 교회로 보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외형적으로는 성장해 왔지만, 그 내부적으로는 어느 시대보다 더 타락한 교회가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실을 교회의 성장이나 교회의 확장으로 볼 수 있겠습니까? 

 

우리 한국교회의 모습만 조금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땅에 복음이 전파 된 것은, 비공식적으로는 신라시대 때부터라는 학설도 있고, 임진외란 때나 혹은 사도세자를 통해서 전파되었다는 다양한 학설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로마 카톨릭이 한국에 들어온 것은 18세기 후반(1779)으로 봅니다. 개신교가 한국에 들어온 것은 19세기 후반(1884)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이 땅에 복음이 전파된 이후에 기독교는 수많은 종교적인 박해를 겪으면서도 성장해 와서, 오늘날에는 6만 교회, 13만 사역자, 950만 성도를 가진 교회가 되었습니다. 한국교회는 이제 한국사회 속에서 신자 숫자가 가장 많은 종교가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외형적인 성장과는 달리, 성도 개개인의 신앙의 수준은 떨어져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종교선호도를 보면 기독교가 최하위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재 우리 교회의 현실입니다.

 

이런 한국교회의 모습은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종말 시대 교회 상과 일치합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종말 시대교회는 그 외형적인 규모는 성장하게 될 것이나 내적으로는 아주 타락한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진리를 떠나 배교하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재로는 죽어 있는 교회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종말 시대를 이야기 하고 있는 마태복음 24:37-38절 말씀을 보면 그 때는 노아의 때와 같은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노아 시대에는 최소 2억 명 이상의 사람들이 이 땅위에 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 중에 믿음을 가진 사람들도 숫자도 아주 많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신자들 중에서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은 노아의 8식구 밖에 없었습니다. 이런 시대가 종말 시대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종말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마태복음 25:1절 이하에 나오는 열 처녀의 비유 말씀을 보면, 종말 시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깨어 있는 삶을 살지 못하고, 다 졸며 다 잠자고 있는 그런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종말시대의 특징은 깨어 있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심지어 누가복음 18:8절 말씀을 보면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라고 까지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종말 시대에는 하나님께 내가 기도하면 응답해 주신다는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찾기가 아주 힘든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종말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그 약속하신 말씀대로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아멘. 이런 믿음이 바른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입니다.

 

또 종말 시대 교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바로 요한계시록 3:14-17절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는 육적으로는 부유하고 부족함이 없는 교회였으나 영적으로는 가난하고 가련한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습니까?

이런교회를 보고 교회가 성장했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런 교회가 희망을 가진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열심을 내어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고 합니다. 이 길 밖에 다른 길은 없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내 중심의 믿음이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믿음으로 돌이키고 돌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다시 본문으로 돌아갑니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이 겨자씨 비유를 보면서 예수님께서는 작은 겨자씨가 떨어져서 결국에는 큰 나무로 자라듯이, 종말시대 교회가 그렇게 성장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을 해 주시기 위해 이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해 주셨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보십니까? 저는 이 말씀을 그렇지 보지 않습니다. 저는 우리가 앞에서 조금 살펴본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종말시대의 교회가 외형적으로는 성장하게 될 것이나 그 내면적으로는 타락한 교회가 될 것을 내다보시면서 이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주셨다고 봅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외적인 모습보다 내면적인 모습을 더 중요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적으로는 신앙이 좋은 사람들 같이 보였으나, 사실 내적으로는 돈을 사랑하고 있었던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신랄하게 비판하신 일도 있으십니다. 그런가 하면 외적으로는 하나님을 떠난 사람 같이 보였던 세리죄인들이 그 마음으로 회개하고 나오는 것을 보고 기쁘게 맞아주셨던 분이십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은 사람들의 외형적인 모습보다 내면적인 모습을 더 중시하셨음을 알게 됩니다. 사람들의 외형적인 모습보다 사람들의 내적 모습을 더 중요시 하셨던 예수님께서는, 종말시대 교회의 내적 타락을 간과하시고, 외적인 성장을 보여주기 위해서 이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남은 시간 동안,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새롭게 해석해 보려고 합니다.

두 번 째 살펴볼 것은, 겨자 씨 비유에 대한 새로운 해석입니다.

 

한 말씀 한 말씀 꼼꼼히 살펴가면서 해석해 보겠습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겨자씨에 대한 이해입니다.

 

성경말씀을 보면 겨자씨가 자라 나무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에서 자라고 있는 식물들을 모아 놓은 식물 연감을 보면, 겨자씨가 자라나서 나무가 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겨자씨는 1년생 혹은 다 년생 향신료인 겨자라는 풀이라고 합니다. 제가 그 겨자 풀의 사진을 보니 마치 우리나라의 유채꽃과 같이 노란 색의 십자 모양의 꽃을 피우고 있는 풀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겨자씨가 풀로 성장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겨자씨가 자라서 큰 나무가 되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읽으면서도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전혀 인식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겨자씨가 풀인지 나무인지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당시 예수님으로부터 이 비유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유대인들은 다릅니다.

유대인들은 겨자씨는 나무가 아니라 풀이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풀로 자라야 할 겨자씨가 나무로 자랐다고 하실 때, 제자들은 곧 바로 이 말씀은 교회의 비정상적인 모습을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과는 민족적인 차이, 문화적인 차이, 생활적인 차이가 있는 우리들로서는, 이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유대인들과 같이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내 입장에서 성경을 보고 이해하게 됩니다. 그래서 간혹 성경말씀을 잘못 이해하게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이 주의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은 먼저 성경이 기록될 그 당시 상황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시대 사람들은 이 겨자씨를 풀로 이해했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나무에 새들이 깃들인 것에 대한 이해입니다.

 

마태복음 13:1절 말씀을 보면, 천국비유의 말씀들을 예수님은 해변에서 하셨습니다.

그런데 해변에서 여러 비유의 말씀을 하시면서, 19절에서는 새들악한 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빼앗아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요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바로 겨자씨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겨자씨 비유에서 말씀하고 있는 새들은 어떤 사람들이라는 것입니까? 바로 앞에 씨 뿌리는 비유에서 새들을 악한 자라고 하였다면, 이어하신 겨자씨 비유의 말씀에서 하신 새들 역시 악한 자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선행적인 이해를 가지고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해석해 보겠습니다.

 

성경의 증거에 의하면 사람들은 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고 합니다. 그러면 이런 풀과 같은 사람들이 모여 이룬 교회는 무엇이어야 합니까? 교회는 풀들의 군집 풀들의 모임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입장에서 볼 때 예수님이 종말교회 대해 말씀하시려면 이렇게 해야 합니다.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라서 겨자 풀의 군락을 이루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으면 종말교회에 대한 완벽한 말씀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겨자 풀들로 구성되어야 할 교회가 큰 겨자 나무가 되어 있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해 주신 겨자 나무의 이미지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이해하려면 다니엘서를 보아야 합니다. 다니엘서 4장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꿈에 한 환상을 보았는데 땅의 중앙에 큰 나무가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 나무는 느부갓네살 왕이 다스리는 바벨론 왕국의 번영과 번성을 상징하였습니다.

 

그렇다면 교회가 큰 나무가 되어 있다고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종말교회의 번영과 번성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역사 속에 나타나게 될 종말교회의 번영과 번성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통해 세상의 번영과 번성과 결탁하여 거대한 나무가 된 교회에 대해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큰 나무가 된 교회에 새들이 깃들었다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풀로 구성되어 할 교회가 큰 나무가 되자, 교회는 새들 즉 악한 자들이 둥지를 틀고 활동하는 곳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로마 카톨릭교회를 통해 이런 모습을 잘 보고 있지 않습니까?

로마 카톨릭에 소속된 신도들은 잘 모르고 있지만, 오늘날 로마카톨릭은 종교적인 집단이라기보다는 이미 정치적인 집단이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정치적인 영향력이 얼마나 크면 지난번 문제인 대통령도 남북관계의 어려운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해서 교황을 찾아가서 방북해 줄 것을 요청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현재 로마 카톨릭의 모습입니다.

 

이렇게 정치적인 집단이 된 로마카톨릭은 더 이상 교회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 외형적인 모습은 교회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이미 사단의 거점이 되어 있습니다. 각종 이단적인 교리들이 로마카톨릭교회에서 나오고 있지 않습니까? 세계 종교통합을 이루기 위한 종교다원주의 사상을 전파하는 곳이 로마 카톨릭입니다. 이 종교다원주의는 이제 한 단계 발전하여 직제 일치를 통해 개신교와 통합을 시도하는 단계에까지 와 있습니다.

 

그러면 로마카톨릭은 왜 이런 일들이 하고 있습니까?

악한 자인 사단이 로마카톨릭 교회에 둥치를 틀고, 로마 카톨릭을 통해 세계 종교통합을 이루려고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장차 이렇게 통합된 종교를 배경으로 해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적그리스도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될 것입니다. 사단이 이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고 있는 기구가 바로 로마 카톨릭입니다. 그리고 그 전초적인 활동무대가 되고 있는 것이 바로 WCC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WCC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개신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는 그 태생이 풀입니다. 그 이유는 풀인 사람들이 모여 이룬 곳이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초대형 교회, 메가 처치들이 세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교회는 더 이상 풀이 아니고 예수님의 말씀처럼 번영과 번성을 이루고 있는 거대한 나무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풀이어야 할 교회가, 풀이 전혀 될 수 없는 나무가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오늘날 메가 처치들의 현실입니다.

 

여러분 메가 처지들을 보십시오.

먼저 사람들이 엄청납니다. 헌금이 천문학적입니다. 그 교회의 규모는 어떻습니까? 큰 교회는 교회 주변의 땅을 거의 모두 다 소유하고 있습니다. 이런 대형교회가 있는 지역의 상인들은 교회와 등지고는 장사를 하지 못합니다. 교회의 영향력이 절대적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들에서는 비자금 또한 엄청나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러면 작은 교회는 더 낫습니까?

오늘날 작은 교회들이 꿈꾸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언젠가는 나도 우리교회도 메가 처지를 이룰 것이라는 꿈을 꾸고 있지 않습니까?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의 가장 큰 소원도, 학교를 졸업을 하고 메가 처치와 같은 큰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합니다. 저도 그랬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모두가 다 큰 교회를 세우고 싶어 합니까?

그 이유는 큰 교회를 이루면 하나님도 인정해 주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어머 어마한 규모의 메가 처치들이 여기 저기 많이 세워져 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기에 나무가 더 튼튼하고 좋아 보입니까? 이 더 튼튼하고 좋아 보입니까?

이런 질문을 하고 있는 제가 잘못이겠지요. 누가 보아도 나무가 더 튼튼하고 좋아 보일 것입니다.

 

여러분이 대형교회작은 교회를 비교하여 볼 때 어떤 교회가 좋은 교회 같아 보입니까?

모든 시설을 다 갖추고 아주 세련되고 예술적인 감각을 사용하여 예배드리고 있는 초현대식 교회와, 반주자도 없이 예배를 드리는 개척교회 중에 어디에 하나님이 계실 것 같아 보입니까?

 

오늘날 사람들은 큰 교회를 보면서 그런 교회가 교회의 표준인 것처럼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큰 교회는 교회의 본래적인 모습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큰 교회는 오히려 세상과 너무 닮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면이 세상과 닮아 있습니까?

큰 교회들은 그 움직이는 방식이 이 세상을 움직이는 방식과 똑 같습니다. 세상의 권력과 부와 학벌과 능력의 논리가 큰 교회 속에 들어와서, 오늘날은 큰 교회 안에서도 이런 세상의 논리가 통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큰 교회에서는 헌금이 곧 교회의 힘이 되고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는 돈으로 못할 것이 없는 듯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어떤 교회는 교회 자체에 방송국을 소유하고 수많은 외곽 단체와 기관들을 소유하고 있습니다. 거의 대기업의 모습을 유사하게 닮아 있습니다.

 

이런 큰 교회들은 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 교회 안에서도 세상과 똑같은 방식의 성공과 가치기준이 작동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교회에서는 세상과 똑같이 성공이 곧 그 신앙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가진 능력이 힘이 신앙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의 규모가 곧 바로 그 교회의 신앙을 보여주는 기준으로 둔갑하였습니다. 그 교회가 가지고 있는 힘이 믿음으로 둔갑한 시대가 되었습니다. 개개인이 한 영적인 체험이나 신령한 체험이 곧 바로 신앙으로 인정을 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증거는 이와 다릅니다.

성경은 언제나 열매를 말씀합니다. 그 나타나는 열매로 그들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사람들을 평가하실 때 열매로 평가하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7:15-20절입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또 예수님은 아주 분명하게 세상에서는 섬김을 받는 자가 큰 자이지만 교회에서는 섬기는 자가 큰 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메가 처치들은 이 세상의 기준을 따라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원리들을 버렸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하나의 기업과 같이 만들었습니다.

기업이 그 수입으로 거대한 기업을 운영하듯이 그렇게 교회도 헌금 수입으로 거대한 조직을 운영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이런 오늘날의 교회는 이미 나무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큰 나무가 되어 있는 교회로 새들이 모여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작은 교회의 성도들이 큰 교회로 날아가서 수평이동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날 숫자적으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는 큰 교회들 밖에 없습니다.

 

저희 노회에 그 이름을 동네 작은 교회라고 지은 교회가 있습니다.

이 교회 목사님은 교인 숫자를 20 가정으로 상한선을 정해 놓고 교회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전도를 하다가 20 가정이 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40 가정이 되기 전에 그 교회를 둘로 나눕니다. 이 때 교회의 규모만 20 가정 정도 되게 둘로 나누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독자적인 교회로 운영될 수 있도록 교회를 완전히 분리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이유를 들어보니, 교회의 생명력은 조직에 있지 않고 성도들의 교제에 있다고 보고, 성도의 교제가 가장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규모를 20가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교인이 20가정 정도이면 어느 집에 숟가락이 몇 개 인지까지 다 알 수 있을 정도로 친밀한 교제를 할 수 있는 단위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20 가정이 넘어서면 교회를 둘로 나누었던 것입니다.

 

처음부터 이렇게 하기로 정해 놓고 동의하는 사람들과 교회를 시작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집에서 성경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장소를 얻어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인이 20가정을 넘어서게 되어서 둘로 나누려고 계획할 때 교인들의 반대가 심했다고 합니다. 그런 성도들을 이해시키고 교회를 둘로 나누는데 몇 년이 걸렸다고 합니다.

 

왜 그랬습니까?

그 교회에 모인 성도들은 교회가 어느 정도 크면 둘로 나눈다는 것을 알고 참여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를 나누어야 할 때가 되면 교회는 술렁인다고 합니다. 이제까지 한 집 식구처럼 친밀하게 교제하던 교인들이 서로 다른 교회로 헤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동네 작은 교회 운동입니다.

이 교회는 성도의 교제가 살아 있는 교회를 꿈꾸고 만들어진 교회입니다. 저는 이 교회이야기를 들으면서 선선한 충격을 받았습니다. 저는 이 작은 교회운동을 보면서 교회가 나무가 되지 않고 1년생 풀로 남아 있고자 하는 강한 의지를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저도 목회를 시작할 때,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잃어버린 교회 공동체를 회복해 보고자, 공동체 목회를 비전으로 삼고, 교회 영문 이름도 참빛 장로교회가 아니라 참빛 공동체 교회 chambit community church라고 써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작은 교회 운동을 접하면서 제 비전이 너무 안일해 보이기까지 했습니다.

 

교회가 나무가 되면, 나무가 된 교회가 좋게 보여서, 작은 교회의 새들이 큰 교회로 몰려갑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런 새들을 악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성도들이 큰 나무 같은 교회로 수평이동을 해 가는 원인이 자기를 위해서 이동해 가는 것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과 그 뜻을 따라 교회를 옮기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위해서 교회를 옮기는 사람들을 악하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정 반대의 경우도 있습니다.

큰 교회에서 작은 교회로의 이동입니다. 우리교회에는 이런 분들이 가끔씩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분들은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다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교회는 오늘날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사실 저도 처음에는 아주 큰 교회에 다녔습니다.

그러다가 동네 교회로 옮기게 되었고, 또 동네의 작은 장애인 교회로 옮겨 가서, 평신도로서 청년부와 주일학교를 맡아서 사역하였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은 어떤 교회로 모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재물을 얻고,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된다고 말하는 교회로 모입니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하고, 행복한 삶을 살고, 그 병도 고침 받게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건강하게 잘 살게 된다고 하는 교회로 모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교회의 본연의 모습, 예수님을 따라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라고 가르치고 전하면 그런 교회에 나올 사람들이 있겠습니까? 인근에 있는 다른 교회에서는 자기들의 교회로 오기만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세상에서도 복을 누리며 산다고 하면 그런 교회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교회가 약속하고 있는 이런 것들은 사실 다 이 세상에 속한 것입니다.

이런 것을 얻는 것이 그 목적이라면 굳이 교회에 나올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을 얻기 위해서는 교회로 오기보다 세상 속으로 가면 더 확실하게 얻을 수 있습니다. 세상으로 가서 애쓰고 수고하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에 있는 이런 것들을 얻으려고 모인 곳이 아닙니다.

교회가 이런 모습이 되었다는 것은, 교회는 이어야 하는데 오늘날 교회는 나무가 되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교회가 나무가 되는 순간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는 1년생 식물입니다.

교회는 이렇게 1년생 식물들이 모인 곳입니다. 우리 모두는 사실 잠깐 이 세상 속에서 살다가 없어지는 풀들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는 나그네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행인이나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은 영적인 순례자들입니다. 천성을 향하여 하루하루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참 모습입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바로 풀로 살아가는 교회의 참 모습입니다.

 

성경은 종말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이 어떠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베드로전서 2:11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우리는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해야 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들은 어떻습니까?

사람들에게 교회에 오면 이런 것, 저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약속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사람들은 그런 약속을 하고 있는 교회, 그런 약속이 이루어질 것만 같아 보이는 나무가 된 교회로 날아간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7:29-31절입니다.

이 말씀은 말세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삶의 자세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는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외형은 지나감이니라.’

 

이런 말씀들은 우리 교회가 어떤 교회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교회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 즐거워하지 말고 취하지도 말라고 합니다. 이 세상은 곧 지나가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교회는 풀입니다.

우리는 1년생 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의 정체성은 유지될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과 같이 번영과 번성을 추구하는 나무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교회가 나무가 되면 새들 즉 악한 자들이 모인 교회가 된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교회는 그 정체성을 잃어버린 교회가 될 것입니다.

 

오늘날 대형교회의 분쟁을 보면 마치 막장 드라마를 보는 것 같지 않습니까?

한 쪽에서는 비싼 돈을 주고 용역을 동원하여서 교회를 지키고, 다른 쪽에서는 또 다른 용역을 동원하여 교회를 차지하려고 싸우고 있습니다. 심지어 포크레인과 중장비까지 동원되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는 장로와 목사가 서로 싸우고, 교회 밖에서는 노회와 교회가 또 대립 각을 세우고 다툽니다. 마치 이념이 서로 다른 남북한이 대치하고 싸우듯이 교회가 그렇게 나누어져서 싸우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1년생 초목이 되지 못하고 나무가 된 교회의 모습입니다.

1년생 풀이 되었다면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할까요? 내가 포기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나무가 되어 있으니 포기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교회가 나무가 되면 교회의 고유한 특성인 성도의 교제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가 사라지면 교회는 나무가 되고, 나무가 된 교회에는 악한 새들이 모여서 교회는 제도화 되고, 사람이 권력을 쥐고 좌지우지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주도권 다툼이 일어나서 서로 싸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무가 된 교회에서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은 사라지고, 각종 위원회가 교회를 다스리게 될 것입니다. 성도의 교통은 사라지고 교회는 철저히 조직화 되어 갈 것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은혜로 움직이지 않고 방대한 예산의 힘으로 움직이는 교회가 될 것입니다.

 

우리교회는 아직 메가 처치에 들어가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실상이 어떤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밖에서는 보는 것은 약과일 정도로 그런 교회 안에서는 이 세상의 원리가 교회의 원리가 되고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이 겨자씨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신 종말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교회가 되면 교회는 희망이 없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교회란 어떤 곳입니까?

성경은 교회에 대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올바른 교회는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서 있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오늘 예수님의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통해, 잘못 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 나무가 되어 있는 교회의 모습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한 주간 겨자씨 비유의 말씀을 묵상하면서, 교회의 참 모습은 어떤 모습이 되어야 할지를 고민하며 지내시는 한 주간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앞으로 세워 나갈 우리교회의 모습은 어떤 모습의 교회가 되어야 할지에 대해 고민해 보는 시간들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오늘 이 시대 속에 존재하고 있는 교회의 하나가 아니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런 교회의 모습으로 세워져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우리 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성경적인 교회로 세워져 나갈 수 있게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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