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

소금과 빛의 비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0. 11. 8. 19:49

소금과 빛의 비유

마태복음 5:13-16

 

들어가는 말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면 반드시 따라 오는 세 가지 변화가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변화는, 성령이 사람들의 죽은 영을 살려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은 십자가 보혈의 은혜로 그 죄를 씻어주시고, 아담 안에서 죽었던 영을 다시 살려 주십니다. 이를 통해 육에 속하여 살던 사람들을 영에 속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런 영적인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하기도 하고,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됨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 두 번째 변화는 이렇게 성령을 통해 거듭난 사람들의 영은 그 사람의 마음에도 영향을 미쳐서, 전에는 죄의 종으로 살아오던 사람들의 마음을, 이제는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십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에 대한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 5장에 나오는 팔복의 말씀입니다.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가난한 마음, 애통하는 마음, 온유한 마음,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 등등은 모두가 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변화시켜주신 마음입니다.

 

그 세 번째 변화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변화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성령의 은혜로 그 마음의 변화가 있게 되면, 반드시 따라오게 되는 변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살아가는 삶의 변화입니다. 이런 삶의 변화를 다루고 있는 말씀이 바로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마태복음 5:13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말씀을 보면 어떤 삶의 변화가 따라온다고 하고 있습니까?

여기서 예수님은 세 가지 삶의 변화가 따라 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첫 번째 삶의 변화는 자기 자신과 관계 된 삶의 변화입니다. 5장의 내용입니다.

그 두 번째 삶의 변화는 하나님과 관계 된 삶의 변화입니다. 6장의 내용입니다.

그 세 번째 삶의 변화는 이웃과 관계 된 삶의 변화입니다. 7장의 내용입니다.

 

이렇게 구분해 볼 때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마태복음 5:13절 이하의 말씀은 나 자신과 관계가 있는 삶의 변화에 대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나 자신과 관계 된 삶의 변화는 어떻게 일어나는 것입니까?

 

아담의 범죄 이후,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배후에는 언제나 사단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보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일지라도 그 배후에서 그 사람을 조정 하고 있는 것은 사단입니다. 그 사람이 인식하든 인식하지 못하든지 모든 사람들이 다 이 세상의 신인 사단이 지배하는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여덟 가지 복 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의 배후에서는 성령 하나님이 역사하고 있습니다.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여덟 가지 마음은 오직 성령이 주셔야 가질 수 있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주시지 아니하면 그 누구도 가질 수 없는 마음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마태복음 5:13절 이하의 말씀은, 바로 그 앞에 기록되어 있는 팔복 즉 여덟 가지 복된 마음을 그 배경으로 깔고 있습니다. 이 여덟 가지 복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살아가게 되는 삶에 대한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마태복음 5:13절 말씀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13절 말씀 속에서 오늘 우리가 첫째 살펴볼 것은, ‘너희는이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이 너희는 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누구입니까?

당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던 제자들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첫째, 예수 믿고 성령 받아 거듭난 사람들이고, 둘째, 성령을 통해 그 마음이 팔복에서 말씀하고 있는 복된 마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입니다. 셋째, 그래서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너희는이라고 번역되어 있는 이 단어는 사실 너희만이라고 번역해야 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말 성경에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번역하고 있지만, 실재로는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라고 바꾸어 읽어야 하는 단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정해서 13절 말씀을 다시 읽어 보면 이 말씀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존재가 변화된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고,’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팔복의 마음을 받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 라고 바꾸어 읽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무엇이 자리하고 있습니까?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 존재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마귀의 자녀가 변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어둠에 속한 사람이 변하여 빛의 자녀가 되는 등등의 존재의 변화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이라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에서 오늘 우리가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세상의라는 단어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고,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이 말씀을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으로 살아가야 할 삶의 현장이 바로 이 세상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소금이 되고 이 세상 속에서 빛이 되어 살아가야 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에서는 개인의 영성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개인의 영성이 그 사람의 신앙을 좌지우지한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13절 말씀은 비록 기독교 신앙이 개인의 변화된 영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고 하더라도 기독교 신앙은 개인의 영성만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는 신앙은 철저히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종교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 속에서 불러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이 세상에 속하여 살고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고 부르심을 받아 이 세상에서 건져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인들이 이 세상을 떠나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말은 아닙니다.

예수님이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 라고 하신 이 말씀 속에는 기독교가 철저히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종교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기독교 역사를 보면 개인의 영성에 신앙의 본질이 있다고 보고, 이 세상을 떠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살거나 혹은 사람들이 살지 않는 사막에서 운둔하는 생활을 하면서, 개인의 거룩한 영성을 추구하며 산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하시딤’, ‘에세네파에 속한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입니다.

기독교회에서는 세상과 구별되어 있는 수도원에서 수도사로 생활하며 영성을 추구한 사람들이 바로 이런 사람들입니다. 또 일부 개신교에서는 기도원 운동을 통해 개인의 영성을 추구하며 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개인적으로 기도에 헌신하는 생활을 통해 영성을 추구하며 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기독교 신앙에서 개인의 영성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이 영성은 사람이 없는 곳에 운둔하여 추구하는 그런 고립적인 영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영성은 철저히 이 세상 속에서의 영성,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드러나고 나타나야 하는 영성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인들의 영성은 세상 속에서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고 합니다. 13절에서는 소금으로 나타나야 하고, 14절에서는 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어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소금이 되어 가고, 세상의 빛이 되어가야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분명하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라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소금이 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은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모래가 노력하고 수고한다고 소금이 되지 못하고,’ ‘어둠이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하여도 빛이 되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소금은 처음부터 소금이고 빛은 처음부터 빛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바로 알지 못하면, 우리는 소금이 아닌 것을 소금이라고 하고 빛이 아닌 것을 빛이라고 하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또는 소금이 아닌 사람에게 소금처럼 살라고 요구하고, 빛이 아닌 사람에게 빛처럼 살라고 요구하면서 기독교를 윤리 도덕적인 종교로 변질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다른 종교들은 다 사람이 만든 종교이기 때문에, 미신과 같이 하등한 종교를 제외하고 나면 다 윤리와 도덕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제정하신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는 변화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죄인이 의인으로 변하고, 어둠의 자식들이 빛의 자녀로 변화되는 것이 바로 기독교신앙의 핵심입니다. 그래서 이런 기독교 신앙을 사람들은 다른 말로 변화의 종교라고 하기도 합니다. 먼저는 믿음 안에서 그 존재가 변하고, 이렇게 변화된 존재에서 변화된 삶이 나오는 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입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언제나 먼저는 변화를 가져 오게 하는 믿음에 관한 말씀을 하고, 그 후에 믿음 안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새로운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먼저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그 존재의 변화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존재가 변화된 사람이 살아가야 할 변화된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마태복음 5장의 말씀도 보면, 먼저는 팔복의 마음을 가진 성도로의 변화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그 다음에는 마음의 변화를 이룬 사람들이 살아가야 할 구체적인 삶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런 말씀의 순서로 볼 때 예수님의 산상설교의 강조점이 어디 있는 것입니까?

그 살아가는 삶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세상 속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된 그 존재의 변화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리고 존재의 변화를 이룬 사람들을 향해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기초적인 이해 위에서

오늘 우리가 세 번째 살펴볼 것은, 소금과 빛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믿음 안에서 그 존재가 변화된 성도들을 소금과 빛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13절을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니라.’

14-16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이 소금과 빛의 비유의 말씀을 살펴볼 때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이 너희는 소금이다. 너희는 빛이다.’ 라고 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곧 소금이고 우리가 곧 빛이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소금의 특성을 연구 하고 빛의 특성을 연구하여 그것을 신앙생활에 적용하고 신앙생활에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은 바람직한 해석의 방법이 아닙니다. 이런 선행적인 이해 속에서 소금과 빛에 대한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소금에 대해 살펴봅니다.

13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성도들을 소금에 비유한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것은 소금이 가지고 있는 맛 즉 짠맛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말씀을 해석할 때에는 소금이 가지고 있는 맛에 포인트를 맞추어 해석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소금의 짠맛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서 맛을 내는 유일한 물질이 소금입니다. 다른 것 즉 고추, 마늘, 설탕, 후추, 참기름, 등등은 다 향신료이지 맛을 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음식을 만들 때 이런 향신료만 넣어서는 음식의 맛이 나지 않습니다. 음식의 맛은 오직 소금을 통해 나는 것입니다. 음식의 맛을 내려면 반드시 소금이 들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하시고 계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지만, 맛을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오직 예수님을 그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며, 하나님이 주신 팔복의 마음을 가지고 살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음식의 맛을 내는 유일한 물질이 소금이듯이, 오직 이 세상 속에서 맛을 내며 살아가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 너희들이라는 것입니다.

 

물론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선을 행하고 의를 행하며 사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마치 향신료와 같아서 그 나름대로의 향은 낼 수 있으나 맛을 낼 수 없습니다. 오직 맛을 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은혜로 선물로 하나님이 주신 복된 마음인 팔복의 마음을 받아 가지고 사는 너희들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오직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만 세상의 소금이라는 이 말씀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느냐? 아니면 내가 내 마음의 주인으로 있느냐 하는 것에 강조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있으면 소금으로 살 수 있고,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이 안계시면 소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빛에 대해 살펴봅니다.

14절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그러면 너희만 세상의 빛이라라는 말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 우리가 이 어둔 세상을 밝히는 빛이라는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우리는 빛이 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죄와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라는 이 말씀의 참 의미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9:5절입니다. 내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는 세상의 빛이로라.’ 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유추해 보면 이 세상의 진정한 빛이신 분은 오직 예수님뿐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은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까?

이 말씀은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 안에 빛 되신 예수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것을, 그 하며 사는 말을 통해,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드러내는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않듯이,’ ‘사람들이 등불을 켜서 등경 위에 두듯이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자신이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숨길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숨겨지지 않고 드러나게 되는 성도들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합니까? 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그 마음 안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자신 안에 계신 참 빛이 되신 예수님을 드러내며 살게 되는데, 그 드러나는 모습이 그 살아가는 착한 삶의 행실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비유의 차이점

 

14절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는 이 말씀은 비교적 잘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만 세상(혹은 우주)의 빛이라.’라고 번역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13절에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라는 말씀은 다릅니다. 이 말씀은 너희만 땅의 소금이니...’ 라고 번역해야 합니다.

 

그러면 땅의 소금이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땅 즉 흙으로 창조하셨습니다. 우리 육신의 재료는 땅의 흙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죽으면 흙에서 온 이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볼 때 땅의 소금이라는 이 말씀은 땅의 흙으로 창조된 우리 육신 안에, 마치 소금과 같으신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만이, 맛을 잃고 살아가는 이 세상에 참 맛을 전해주는 유일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땅의 소금이라는 이 말씀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에 맛을 주시는 예수님을 소유하고 살고 있느냐? 소유하지 않고 살고 있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러면 소금이 맛을 잃었다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이것을 우리가 살아가는 행위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행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가 소금 되시는 예수님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계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이 아닌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맛을 잃음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맛을 잃어버리면 어떻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아무 쓸 데 없어진다.’고 합니다. 이 말은 더 이상 쓸모가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 의해 밖에 버려지게 되고, 그 본래 있던 땅으로 돌아가서 사람들에게 밟힐 뿐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라는 말씀은 어떻습니까?

여기서도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그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은 같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은 이 빛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말과 삶을 통해 드러나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소금의 강조점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에게 있고, 빛의 강조점은 우리 안에 계신 예수님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밖으로 드러난 것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빛은 저절로 어둠을 향해 비치게 됩니다. 이와 같이 사람이 특별히 의식하고 행동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그 안에 모시고 사는 빛이신 예수님은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질 수 없듯이’ ‘등경 위에 켜 둔 등불이 숨겨 질 수 없듯이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것은 숨겨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르게 설명하면 이 말씀은 내가 가진 신앙을 아무도 모르게 비밀로 간직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거나 혹은 교회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랑하는 마음이 저절로 나타나고 드러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누가 봐도 저 사람은 누구누구를 사랑하고 있어, 또 저 집사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전에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내어 쫓으실 때 요한복음 2:17절 말씀을 보면 제자들이 그 사건을 보고 예수님이 성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알게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성경 말씀에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히 나를 삼키리라 한 것을 기억하더라.’ 이렇게 그 마음에 가진 사랑이나 믿음은 저절로 드러나고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에 주인으로 모신 사람들은, 그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예수님을 숨길 수 없습니다.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에게서는 저절로 그 마음 안에 계신 예수님이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 드러나고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평상시에는 자기가 자기의 주인으로 살다가 급한 일이 생기면 그 때서야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자기가 자기의 주인인 사람들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라는 이 말씀에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마음 안에 세상의 참 빛이 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면, 그 마음 안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의 빛이 우리의 말을 통해, 우리의 삶을 통해 세상으로 비쳐 나가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너희만 땅의 소금이다.’ ‘너희만 세상의 빛이다.’라는 이 말씀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마음 안에 소금처럼 맛을 내시게 하시는 예수님, 세상의 유일한 빛이 되신 예수님이 계시냐? 안 계시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교회에서는 무엇을 강조합니까?

저도 그 중 한 부류이지만, 교회에서는 주일 성수를 강조하고, 십일조 생활을 강조하고, 기도생활을 강조하고, 교회 봉사와 선행과 구제 등등을 강조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왜 세상으로부터 지탄받고 있는 단체가 되어 가고 있습니까?

그것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가장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나의 주인이 되지 말고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교회의 주인이 되지 말고 예수님이 교회의 주인이 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개인이 사는 길이고 또 이것이 한국교회가 사는 유일한 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것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드러납니까?

그 살아가는 삶의 착한 행실로 드러난다고 합니다. 그러면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할 삶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소금과 빛의 비유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내용입니다.

 

삶에 대한 서로 다른 관점이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자꾸 내가 가진 믿음을 나타내 보이려고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고, 내가 하나님께 받은 은사가 얼마나 크고, 또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기도하고 있고, 또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나타내 보여줌으로 자기가 가지고 사는 믿음을 인정받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관심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관점은 사람이 예수님을 그 마음의 주님으로 모시고 사느냐? 자신이 그 마음의 주인으로 사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삼은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우리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행위보다는,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신 사람이 되어 소금처럼 맛을 내는 삶, 빛처럼 어둔 이 세상을 비추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느냐? 살지 않느냐? 하는 것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는 말이나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나타나는 착한 행실과 행위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16절에서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럴지라도 기독교는 행위를 강조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믿음에서 나오는 삶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때를 보면, 주일을 잘 지키고, 예배에 힘쓰고, 기도도 열심히 하고, 구제도 하고 등등을 강조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잘못 강조하면 자칫 기독교가 윤리적인 종교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각별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기독교의 중심적인 가르침은 먼저는 존재의 변화에 있습니다.

다음은 마음의 변화에 있습니다. 그 다음에야 비로써 변화된 존재, 변화된 마음에서 나오는 변화된 삶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변화 된 삶을 통해 드러나는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소금의 맛을 가진 성도가 되고, 세상의 빛이 되는 성도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을 우리 마음에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 마음에 모시고 사는 성도들만 세상 속에서 소금으로 빛으로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성도들은 비록 두 발로 이 땅을 밟고 살지만 이 땅의 백성으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늘나라에 속한 백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우리가 이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면 믿음을 강조하면서도 실상은 땅에 속한 사람, 하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전하고 듣는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내 마음의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성도가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을 통해 나타나게 되는 착한 행실을 보고, 이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 기독교는 땅을 목적으로 하며 사는 종교가 아니라 하늘을 목적으로 하며 사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땅의 영광을 추구하는 종교가 아니라 하늘의 기업을 바라보고 사는 종교입니다. 기독교는 이 세상에서 윤리 도덕을 실천하며 사는 종교가 아니라, 참 생명을 소유하고 그 생명을 세상에 전해 주며 사는 종교입니다.

 

이런 믿음, 이런 삶이 이 말씀을 함께 전하고 듣는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이 되고, 매일 매일 살아가는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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