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비유

무익한 종의 비유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7. 17. 11:04


무익한 종의 비유

누가복음 17:7-10

 

이 무익한 종의 비유는 역사 속에서 수난을 많이 당한 비유입니다.

계몽주의가 한창 무르익던 시절에는 이 비유를 성경에서 삭제하려는 시도도 있었습니다. 미국의 제 3대 대통령 토마스 제퍼슨은 나에게 성경을 삭제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이 비유의 말씀을 우선적으로 삭제할 것이라고도 하였습니다.

또 노예제도가 활발하였던 19세기에는 노예소유주일부 성직자들정부 관리들이 이 비유의 말씀을 노예제도를 옹호하는 말씀으로 사용하여 오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말씀을 볼 때 노예제도의 잔인한 모습을 떠올리면서 거부감을 가지고 대하게도 했습니다.

 

그 이후 이 무익한 종의 비유는 기독교 역사 속에서 거의 잊혀 져 왔던 비유였습니다.

왜냐하면 이 비유의 말씀은 좋지 않은 기억을 생각하게 해 줄 뿐 아니라 현대 사람들의 생활과는 좀 동떨어진 내용을 담고 있는 비유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 당시 성행하였던 노예제도에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당시 성행한 사회제도였던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지지하신 것은 아닙니다. 누가복음 4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첫 설교를 보면 예수님은 노예제도를 인정하고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설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비유를 다룰 때에는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가르치고자 하셨던 내용을 살펴보아야지 비유의 소제로 사용하신 노예제도에 너무 집중을 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은 노예제도를 통해 가르침을 주셨다고 그 노예제도까지 지지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런 선행적인 이해를 가지고 누가복음 17:7절 이하에 나오는 무익한 종의 비유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무익한 종의 비유를 통해 주시고자 하신 교훈은, 참 제자는 어떤 사람인가? 참 제자는 어떤 삶을 사는 사람들인가? 하는 제자 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참 제자는 어떤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가 나오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당시 가난한 빈민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나사렛지방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에게 어느 날 천사가 찾아와서 엄청난 소식을 전합니다. 누가복음 1:31절입니다. 보라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의 일반적인 삶을 통해 추측해 보면 아마 마리아는 14-17세 정도 소녀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마리아는 같은 동네에 사는 요셉이라는 청년과 정혼한 관계에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풍습을 보면 대부분 이 나이에 약혼을 했고 약혼을 하고 난 후에 1년 동안은 함께 살지는 않았지만 부부로서 법적인 효력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아가 갑자기 아기를 낳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마리아는 부정한 여인으로 몰려 사람들에게 멸시를 당할 수도 있었고 요셉과의 정혼이 파혼을 당할 수도 있었고, 심지어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던 마리아는 어떤 선택을 했습니다.

1:38절입니다. '마리아가 이르되 주의 여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하매 천사가 떠나가더라.‘ ‘주의 여종이라는 마리아의 이 말은, 나는 하나님의 노예라는 것입니다. 노예가 어떤 사람입니까? 노예는 주인이 필요해서 명령하면 그대로 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시고 나의 노예이니 나의 주인 이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설사 그 일 때문에 가족과 이웃에게 부정한 여인으로 오해를 받게 되더라도, 설사 그 일 때문에 정혼한 요셉에게 버림을 받게 되더라도, 설사 그 일 때문에 율법에 규정한 대로 사람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더라도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요구하심에 따르겠습니다.’ 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마리아에게서 무엇을 발견할 수 있습니까?

이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마리아가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완전히 내어주고 순종으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리아가 보인 놀라운 신앙 귀한 신앙이었습니다.

 

그러면 마리아는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마리아가 만약 가족을 생각하고, 정혼한 요셉을 생각하고, 이웃 사람들을 생각하고, 자기 장래를 생각하였더라면 이런 결정은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만약 여러 요인들을 생각했다면 마리아는 번민하고, 망설이고, 혼란에 빠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는 어떻게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습니까?

마리아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차이를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내가 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고 하나님이 이 세상의 중심이심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마리아는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 분이시며 그 앞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기 자신은 얼마나 초라한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가졌던 이런 신앙이 사람들과 환경을 보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의 인생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고 순종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누가복음 17장에 나오고 있는 종을 보십시오.

여기 나오고 있는 종도 둘로스 노예입니다. 이 종은 집안일은 물론 집밖에 일도 했던 종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낮 시간에는 밭을 갈고 양을 치는 일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보통 이렇게 힘든 일을 하고 돌아오면 수고했다고 하고 이제 씻고 쉬라고 해야 정상입니다.

 

그런데 이 종의 입장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종은 방금까지 밖에서 힘들게 일하고 왔을지라도, 집안에서는 또 해야 할 다른 일이 있었습니다. 그 일은 그 주인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먹고 마시고 쉴 수 있도록 하는 준비를 하여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종이 이런 일을 했다고 감사를 표할 주인이 없다고 합니다. 그 일은 종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종 즉 노예는 왜 이렇게 해야 했습니까?

그 이유는 노예는 그 삶의 주도권이 자신에게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노예의 삶의 주도권은 그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던 것입니다. 다른 이유가 없습니다. 만약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 사람은 종이 아닙니다. 자신이 자기의 주인인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되려고 하면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린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린 사람들이 예수님의 참 제자이고 삶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태복음 16장에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는 그런 사람들만 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인가? 하나님을 믿고 있지 않은 사람인가? 하는 것은 그 알고 있는 지식이나 그 고백하는 믿음으로서가 아닙니다. 그 삶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는가하는 것을 보면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믿음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이고 그 삶의 주도권을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21세기 대표적인 신학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번영신학은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은혜를 주시고 영생을 주시는 등등 나와 나의 삶을 그 중심에 두고 있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이 세상 속에서 자신을 삶의 중심으로 두고 있는 이런 번영신학을 21세기 대표적인 이단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이런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과 그 뜻을 따라 믿고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 무엇이 유익을 주고 도움을 주느냐 하는 것을 따라 믿는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 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 먹은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삶의 주도권을 가진 것을 거부하고 자기가 하나님인 것처럼 자기 삶의 주도권을 갖고 싶어서 한 일이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이 스스로 자기 인생의 주인이 되고 주권자가 되고자 했습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하나님의 방식이 아닌 자기 방식대로 살고 싶어 했습니다. 사단은 이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하기를 너희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같이 너의 인생의 주도권을 너희가 가지고 살 수 있다. 라고 유혹하였던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에게 있었던 이 마음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도 여기서 예외가 아닙니다. 만약 우리가 아담과 하와였다면 우리도 선악과를 따먹지 않았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에게는 스스로 주도권을 가지려는 성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의 전반에 깔려 있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보다는 내 생각대로 하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분별하기보다는 내 계획 위에 하나님이 복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그렇게 칭송을 받는 여인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녀는 남편 아브라함을 주로 섬기며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동일한 사람인데 사라는 그 남편 아브라함을 주로 섬기며 살았습니까? 그 이유는 하나님이 범죄한 하와에게 주신 말씀 때문입니다.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남편인 아담을 가정의 다스리는 머리로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하와는 남편을 원한다.’는 것입니다. 원한다.는 말은 남편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아니고 에덴에서 범죄 할 때 그랬던 것처럼 자신이 남편의 머리가 되기 위해서 끊임없이 갈망하고 소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이런 본성을 죽이고 그 남편 아브라함을 마치 주 즉 하나님같이 여기고 순종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사라의 위대성이 있습니다. 믿음의 어머니가 될 만한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나의 인생과 나의 구원과 나의 운명의 주도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에는 역설적인 면이 많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지는 것이 이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별히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우리가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 되는 경우를 허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과 2대 왕 다윗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사울 왕과 다윗 왕의 가장 현저한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사울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삶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는 따랐지만 온전한 순종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달랐습니다. 다윗은 철저히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다윗의 삶을 보면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의 뜻을 물은 후에 움직였습니다. 사울 왕을 피해 숨어 다닐 때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움직였습니다. 사울이 죽고 이스라엘의 왕이 될 때에도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인도하심을 따랐습니다.

이 두 사람을 보면 삶의 주도권을 자기가 갖고자 했던 사울 왕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왕이 되었고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위탁하고 살았던 다윗 왕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왕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도 같습니다. 우리의 삶의 주도권을 누가 갖고 있느냐 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승패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입니다.

 

그러면 나의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가지고 있는지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지를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간단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내가 이기면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기기면 하나님이 나의 삶의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순종하여 따르면 하나님이 주도권을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않고 내 뜻대로 하면 내가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무익한 종의 비유는 그 노예의 삶의 주도권을 주인이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계신 첫 번째 말씀은 너희가 나의 참 제자가 되려고 하면 너희도 너희 삶의 주도권을 나에게 맡겨야 한다.’ 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은 첫 번째 조건은 하나님께 나의 삶의 주도권을 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보다 앞서 믿음으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다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내려놓고 그 삶의 선택권과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자신들은 철저히 종의 위치에서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우리가 이런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에 대해 존 맥아더 목사님내가 한 것은 다 실패였고, 예수님이 하신 것은 다 성공이었습니다.” 라는 말로 잘 정리해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꼭 기억하고 나의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살아가는 참 신앙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참 제자는 어떤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둘째, 내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고도, 자신이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나오는 종을 보십시오.

이 종은 온 종일 밭에 나가서 일을 하고 이제 막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고하고 돌아와서는 이제 쉬었습니까? 아닙니다. 밖에서 주어진 일을 마치고 돌아올 그 주인을 위해 이 종은 이제 집안에서 또 할 일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 일을 통해 그 주인이 먹고 마시고 쉴 때까지 섬기다가 그 후에야 자신도 먹고 쉴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주인에게 수고했다고 칭찬을 들은 것도 아닙니다. 그 일은 종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님이 결론적으로 하고 계신 말씀이 10절에 나와 있습니다.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첫째는 자기에게 주어진 의무를 다하는 것 이것이 종 된 사람들에게 꼭 필요하다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둘째는 이 때 가져야 할 마음 자세는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인식이라고 합니다. 종이 된 사람은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자랑하지도 말고 그 한 일 때문에 교만하지도 말고 내가 해야 할 일을 마땅히 한 것뿐이라고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한 일을 인정해 주고 또 알아주기를 바라지 말고 이 일은 내가 종으로서 주인에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이며 내가 해 드리는 일보다 더 이상을 해 드려야 되는데 나의 능력이 제한되어 있어서 이것 밖에 하지 못하고 있다. 라고 하는 자기 부족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주인이 국무총리인 집에 종이 있다고 칩시다. 그래서 그 주인은 출근을 해서 국사를 돌볼 때 이 종은 그 주인의 밭에 나가서 열심히 일을 합니다. 이 종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주인이 하는 일에 비하면 자신이 하는 일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주인을 대신해서 자신이 맡은 그 작은 일을 하루 종일 성실하게 합니다.

그리고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서는 곧 국사를 다 보고 집으로 돌아올 그 주인을 위해서 집안 청소도 하고 음식을 준비하는 일을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인이 돌아오면 씻을 물부터 받아 주고, 그 주인이 음식을 먹고 평안하게 쉴 수 있으시도록 섬길 것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서야 비로써 자신도 음식을 먹고 쉬게 됩니다.

 

만약 이 종이 달리 생각해서 내가 주인을 위해 얼마나 헌신적인가?

주인은 손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내가 밖의 일은 물론 집안의 일도 완벽하게 처리하고 있지 않은가? 사실 주인이 이 집에서 하는 일은 별로 없고, 내가 이 집안의 일을 다 맡아서 하고 있다. 라고 하면서 그 자신이 수고한 일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은 그 주인에게는 아주 거북한 종이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 주인이 마음대로 부릴 수도 없는 종이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외로 교회 안에는 이런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신이 종이라는 것을 잊고 있는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종의 태도가 아닙니다. 종은 자신이 하고 있는 그 모든 일은 내가 해야 할 마땅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하는 것입니다. 종은 자기 같이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종으로 불러주신 그 주인을 향해 감사하고 기뻐하며 그 주인을 섬기는 일에 보람을 가지고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에서 예로 든 종은 그 주인이 그 나라에서 얼마나 중요한 분이시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어느 날 그 주인이 담당하고 있는 나라의 일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주인이 어려워하고 힘들어 하는 것을 종은 보게 됩니다. 이 종은 그 주인을 위해서라면 자기의 목숨까지 드릴 수 있다는 마음을 가지고 섬겨 왔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주인이 어려움 속에 있게 되어도 그런 주인을 전혀 도울 수 없는 무능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이 종은 나는 나의 주인에게 종으로 있는 사람이지만 나의 주인에게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을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종은 내가 비록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주인을 섬기고 있지만 자신이 한 그 일을 가지고 자랑하지도 않습니다. 그 이유는 그 주인에게 별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자신을 너무 잘 알기 때문입니다. 10절이 바로 그런 의미인 것입니다. 나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를 종삼아 주신 하나님과 우리 관계가 어떻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리는 피조물입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능력이 제한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크고 영화로우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작고 허물이 많은 사람입니다.

 

이런 내가 나에게 있는 힘과 지혜를 다해 하나님을 섬긴 들 그것이 하나님께 얼마나 도움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하나님의 크고 영화로우심과 자신의 작고 무능함에 대해 아는 사람들은 자신을 내 세울 수가 없습니다. 저처럼 목회를 하면서도 외적으로 그 나타나는 결과가 별로 없는 사람들만 하나님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세계에서 제일 큰 교회를 이룬 사람일지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동일하게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고백을 해야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주인으로 섬기며 사는 종 된 사람들이 가져야 할 바른 자세라는 것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사도바울만큼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들을 찾아보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도바울이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사람들과 너희를 비교하여서 자랑하는데 그렇게 하면 나에게도 자랑할 것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를 하나님 앞에 세우고 살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하는 것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은 나는 자랑하려고 하면 나의 약한 것들을 자랑한다.’ 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렇게 약하고, 죄악 되고, 자격 없는. 나를 은혜로 구원해 주시고, 일군으로 불러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에 의해 이방인의 사도로 세움을 받은 후에는 그 삶이 어떠했습니까?

바울은 이때에도 자신의 무익함을 뼈저리게 인식하고 살았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세운 교회가 믿음에서 흔들리는 것을 보면서도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서 마음만 아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였던 사람입니다. 자신이 전도하여 믿음을 가진 성도가 믿음에서 떠나가려는 것을 보며,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바른 믿음위에 설 수 있도록 해 주시기를 기도하고 매달렸습니다. 이 때 바울이 깨달은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의 무능함 무익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래서 바울은 나는 나의 무익함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 라고 하고 있지 않습니까?

 

참된 종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돌려 드린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자기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하면서도,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해서 우쭐대지 않고, 늘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고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또 참된 종은 어떤 사람입니까?

셋째, 하나님의 은혜 주심을 감사하며,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삶을 살기로 결단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문맥을 살펴보면 이 무익한 종의 비유의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응답으로 주신 것입니다.

5절입니다.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제자들이 생각할 때 자신들의 믿음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6절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어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말씀은 너희에게 씨앗 중에 가장 작은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그 믿음이 생명력이 있는 믿음이라면 놀라운 역사와 기적을 가져올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무익한 종의 비유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됩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큰 믿음을 가지려면,

첫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너희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드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둘째, 너희에게 주어진 책임을 다한 후에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신 말씀이 바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아왔다가 나병을 고침 받은 10명의 나병환자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로 지나가시다가 한 마음에 들어가셨을 때, 나병환자 10명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예수 선생님 우리를 불쌍히 여겨 달라.’고 소리 질러 요청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들을 보고 불쌍히 여기셔서 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그들의 요청에 대한 응답의 말씀이라고 믿고 가다가 그 병에서 깨끗하게 치료함을 받게 됩니다.

 

이들이 나병에서 회복된 자신의 몸을 보고, 또 서로의 몸을 보면서 얼마나 놀랐겠습니다.

고칠 수 없는 나병이 깨끗하게 치료를 받게 된 그 감격을 누가 알 수 있겠습니까? 이런 감격은 오직 이 10명의 사람들만이 알 수 있는 감격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두 부류로 나누어졌습니다.

첫째 부류는 예수님이 하신 말씀대로 제사장에게 그 몸을 보이고 건강하다는 판정을 받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입니다. 둘째 부류는 자기 몸이 치료 받은 것을 확인한 그 순간,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을 찾아 감사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던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이 이 두 부류로 나눠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를 입고 나병이 치료 받은 것을 기뻐하며 만족했던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에게도 자신들의 병을 고쳐주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고, 감사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기억하시고 병을 치료해 주셨다는 기쁨과 감격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끝이었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실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무익한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의 은혜로 나병을 치료 받은 것을 기뻐하는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그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예수님께로 돌아와서 감사하고, 그런 은혜를 허락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구체적인 행동을 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은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할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유익한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말씀하신 겨자씨만 한 살아 있는 믿음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감사하며 내가 그 하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 고민하다가 자신에게 그 크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위해 할 일을 발견하고 믿음으로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바로 겨자씨만한 살아 있는 믿음을 심는 삶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겨자씨만한 믿음을 심으면 하나님은 그 생명 있는 믿음이 자라고 성장하여 결실하고 열매를 맺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도로상에서 그를 찾아와서 만나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 두 가지 질문을 하게 됩니다. 첫째, 지금 자신을 찾아와서 큰 은혜를 베풀어 주고 계신 분이 누구신지 물었습니다. 둘째, 이 큰 은혜를 입은 나는 이제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느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 바울의 질문 속에는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참 제자의 요건 세 가지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질문은 첫째, 그 삶의 주도권을 하나님께 다 내어 맡기고서 한 질문입니다. 둘째, 하나님이 맡겨 주신 일이라면 내가 능력과 힘을 다해 충성을 다하겠다는 질문입니다. 셋째, 그 베풀어주신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는 삶을 살고 싶다는, 겨자씨만한 작은 믿음이지만 살아 있는 믿음을 보여주고 있는 질문이었던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았고 또 살아가고 계신 분들을 알고 있습니다.

그간 우리 교회가 모셔서 함께 은혜를 나누었던 여러 분들이 계십니다. 그 모든 분들이 다 겨자씨만한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을 심고 계신 분들이었습니다. 어떤 분은 캐나다에게 가르치는 사역으로, 복음의 불모지 제주도에서 영혼을 구원하는 사역으로, 러시아에서 평생 소수민족을 선교하시는 선교사역으로, 캄보디아에서 아이들을 돌보는 사역으로 작은 겨자씨를 심고 계신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이 무엇입니까?

너희에게 겨자 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라면 이 뽕나무더라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이 믿음 이 은혜가 우리교회와 우리 교회 성도들의 마음속에, 지금 함께 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이런 저런 모습으로 우리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성도들의 마음속에, 그리고 우리 교회를 방문하고 다시 선교지로 떠났던 선교사님들의 사역과 삶 속에, 그리고 같은 주를 섬기고 있는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사역 속에 있어지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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