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 뿌리는 비유
누가복음 8:4-8
1. 이 비유의 말씀을 주신 배경
오늘은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우리가 이 비유의 말씀을 바로 이해하려고 하면 두 가지를 먼저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역사적 배경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이 그 예로 들고 계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농사법입니다. 이 두 가지를 알아야 예수님이 이 비유를 통해 하신 말씀을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이 말씀의 역사적 배경이 되고 있는 예수님의 공생애입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공생애 기간으로 나누어 질 수 있습니다.
이 중에 공생애 기간의 시작은, 예수님이 30세 되셨을 때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에게로 내려오시고 또 하늘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시는 소리가 들리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면 시간이 지나갈수록 예수님의 인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높아져 갔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천국복음을 전해 주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당면하고 있는 삶의 고통스러운 문제들을 해결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수만 명의 사람들이 무리지어 따랐습니다.
한국교회도 1970년도에 이와 비슷한 부흥의 역사를 경험하였습니다.
당시 교회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을 뿐 아니라 사람들의 절박한 삶의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까지 주려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가 세상에 전하였던 중요한 메시지가 무엇이었습니까?
예수를 잘 믿으면 ‘네 영혼이 잘되고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영혼이 갈급한 사람들이, 삶의 절박한 문제가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교회로 교회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십자가만 세워 놓으면 교회가 되는 그런 때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바로 종교지도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본래 백성들의 존경을 받아 왔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등장하고 난 후에는 달라졌습니다. 예수님의 인기가 백성들 사이에서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자신들이 누리며 살았던 명예와 명성과 권위는 손상되어 갔습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은 처음부터 예수님에게 호의적이지 않았습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위선적인 신앙을 비판하고, 종교지도자들의 이중성을 비난하게 되자, 이 사람들은 아주 조직적으로 예수님을 대적했고, 일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는 음모까지 꾸미게 되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급변하자 백성들은 이런 종교지도자들의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드러내 놓고 예수님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만약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것이 들어나면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상황이 악화되어 가자 제자들의 걱정이 커져 갔습니까?
제자들이 왜 그 모든 삶을 포기하고 예수님을 따랐습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이 이 땅에 메시야 왕국을 세우실 때 자기들이 그 왕국에서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심해지면서 그런 꿈은 점점 사라져 가고 오히려 염려와 근심과 걱정이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씨 뿌리는 비유’는 이런 상황 속에서 주신 말씀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예수님이 비유로 드신 이스라엘 백성들의 농사법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농사짓는 방법은 우리나라와 많이 다릅니다.
우리나라의 논과 밭이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밭은 뚝도 없고 고랑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그 밭에는 돌도 있고, 나무도 있고, 죽은 나무뿌리까지 그대로 있는 그런 땅입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의 밭은 마치 언덕에 있는 넓은 목장과 같은 그런 밭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밭을 대강 다듬은 다음 그 위에 씨를 뿌렸습니다.
이렇게 뿌린 씨는 농부가 밟고 다니는 길 위에도 떨어지기도 하고, 아직 바위나 자갈돌이 남아 있는 그런 땅 위에도 떨어지기도 하고, 아직 제거 하다가 남은 나무의 뿌리가 남아 있는 그런 곳에 떨어지기도 하고, 더러는 흙이 깊은 좋은 땅위에도 떨어졌습니다.
이런 씨들 중에서 길 위에 떨어진 씨, 돌 밭 위에 떨어진 씨, 나무뿌리가 남아 있는 땅 위에 떨어진 씨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열매를 맺는 씨는 오직 흙이 깊은 좋은 땅 위에 떨어진 씨들입니다. 이 씨들만 결실하여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수확기가 되면 좋은 땅에 떨어진 씨들이 맺은 열매로 밭은 황금물결을 이루게 됩니다.
그러면 농부는 기쁨으로 그 열매를 거두어들입니다. 이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농사법입니다.
2.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시고자 하신 말씀
보통 이 씨 뿌리는 비유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네 가지의 마음 밭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면서 길가와 같은, 돌밭과 같은,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되지 말고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합니다. 그래야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는 성도가 될 수 있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가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마태복음 13:19절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려진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 가에 뿌려진 자’라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당시 종교지도자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시는 말씀이나 그 행하시는 일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대적이 되어서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고 결국 죽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마태복음 13:20-21절 ‘돌밭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으로 말미암아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날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이런 사람 중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중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병 고침을 받고 각종 은혜를 받았던 사람들이 아닙니까? 그런데 상황이 바뀌어서 예수님의 인기가 떨어지고, 예수님을 따라 다니면 불이익을 당할 것 같아 지자 이 사람들은 어떻게 했습니까? 다 돌아서서 제갈 길로 갔습니다. 마태복음 11:20-24절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있을진저 고라신아 화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물론 우리는 가시 떨기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마태복음 13:22절 ‘가시떨기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 떨기 밭이란 가시 떨기가 자랄 정도로 흙이 깊고 좋은 땅입니다. 그런데 가시 즉 세상 염려와 재물의 유혹이 가로 막아서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 중에는 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 영생을 얻는 방법을 물으려고 나왔던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든지 예수님께서도 사랑하셔서 ‘나를 따라 오라’ 즉 ‘내 제자가 되라’고 요구하셨을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재물을 포기하지 못하여 예수님의 제자가 되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마치 옥토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마태복음 13:23절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어떤 것은 백 배, 어떤 것은 육십 배, 어떤 것은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이 사람들에 대해 마태복음에서는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 마가복음에서는 ‘말씀을 듣고 받은 자’, 누가복음에서는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저는 여러분이 다 옥토와 같은 마음 밭을 가진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의 풍성한 신앙의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가르침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는 아주 유익한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이 이것이었겠느냐?’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신 이 비유의 말씀의 의미를 알려고 하면, 그 당시 제자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앞으로 진행되어 나갈 공생애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시 제자들이 처해 있던 상황과 앞으로 전개되는 공생애 기간은 어떻게 진행되어 나갔습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예수님과 종교지도자들 사이가 점점 더 적대적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은 이런 상황을 인식하고 자기 안위를 위하여 예수님을 멀리하고 있었습니다.
부자 청년 같은 사람은 재물에 대한 욕심을 포기하지 못하여서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해서 예수님을 떠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주변에는 12제자와 몇 안 되는 사람들과 소수의 여성들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의 변화 속에서 주신 말씀이 바로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농부가 자기 밭에 씨를 뿌릴 때는 가을에 거둘 풍성한 수확을 기대하고 뿌리듯이, 너희도 천국복음을 전하는 일군으로 살아갈 때는 장차 이루어질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희망적인 미래를 바라보면서 사역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그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어야 한다. 라고 하십니다.
농부가 그 밭에 씨를 뿌릴 때 무엇을 바라보고 뿌립니까?
농부는 오직 그 밭에 떨어진 씨가 맺게 될 풍성한 수확을 내다보면서 씨를 뿌립니다.
이것은 예수님도 같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예수님께서는 어떤 마음으로 천국 복음을 전해 오셨습니까? 예수님은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을 통해 맺어지게 될 풍성한 열매를 기대하며 천국복음을 전해 오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고 있습니까?
제자들은 길가와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돌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 가시떨기 밭과 같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바라보고 또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점점 멀리하고 또 떠나가는 모습을 보고 낙심과 좌절에 빠져 있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예수님이 하시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농부가 그 밭에 씨를 뿌리면서 ‘지금 내가 뿌리는 이 씨는 길가에 떨어져 새들이 먹어버릴꺼야! 이 씨는 여름 가뭄으로 말라 죽을꺼야! 이 씨는 가시떨기가 자라 결국 열매를 맺지 못할꺼야!’ 라는 생각을 하며 씨를 뿌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농부가 뿌린 씨 중에 길가에 떨어진 씨는 싹을 내지 못하고 새들의 먹이가 될 것입니다.
흙이 깊지 않은 돌밭에 떨어진 씨는 강한 여름 볕에 말라 죽을 것입니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는 처음에는 잘 자라다가 나중에 가시가 자라나면서 햇빛을 막아서 제대로 결실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 뿌린 씨의 일부일 뿐입니다.
더 많은 씨가 옥토에 떨어져서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됩니다. 농부는 이 풍성한 수확을 바라보고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너희는 길가, 돌밭, 가시떨기와 같은 사람들을 보고 부정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옥토와 같은 사람들을 바라보고 긍정적인 미래를 꿈꾸는 그런 사역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긍정적인 면을 보고 긍정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우리의 생각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긍정적인 말을 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아가는 반면,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늘 부정적인 말을 하고 부정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긍정적인 생각의 중요성을 일본의 유명한 의학자인 ‘시게오’ 박사는 「뇌의 혁명」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인간 안에는 두 가지 에너지 즉 플러스 에너지와 마이너스 에너지가 있다. 그런데 플러스 에너지는 긍정적인 생각을 할 때 생성되고, 마이너스 에너지는 부정적인 생각을 할 때 생성된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에너지가 힘이 되어서 우리가 생각한대로 우리 삶 속에 이루어지게 하는 힘이 된다.’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아침에 ‘오늘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라고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그 즉시 우리 몸 안에서는 부정적인 에너지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부정적인 에너지가 힘이 되어서 이후 나의 생각과, 나의 말과, 나의 삶을 부정적으로 몰아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나쁜 일을 당하고도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과 같이, ‘오늘은 좋은 일이 내게 있으려고 이런 일이 나에게 오나 보다’라고 긍정적으로 바꾸어 생각하면, 바로 그 즉시 우리 몸 안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성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긍정적인 에너지가 힘이 되어서 나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을 무엇이 지배하고 있습니까?
부정적인 생각입니까? 긍정적인 생각입니까? 만약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부정적인 에너지가 생성되어서 부정적인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긍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면 긍정적인 에너지가 생성되어서 긍정적인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 말씀도 우리에게 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마음을 잘 다스리며 살아라.’ “생명의 근원이 너희 마음과 생각에 달려 있다.”
성경은 우리의 성공과 실패도 마음의 자세에 달려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도, 질병에서 고침을 받는 것도, 우리가 마음에 믿고 생각하고 기도한대로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늘 의식적으로 긍정적인 생각을 하려고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가 가지고 사는 마음 자세는 이렇게 중요합니다.
미국에서 성공을 어느 한 재미 교포가 그 성공의 비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실패한 사람이나 부정적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만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의 영향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될 수 있으면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고 늘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면 자꾸 부정적인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나를 부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고, 내가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 자꾸 긍정적인 아이디어와 착상이 떠올라서 나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끌고 가더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고 난 후에 나는 늘 긍정적인 생각을 하면서 살려고 했는데 이것이 성공의 비결이었다고 하였습니다.
부정적인 사람을 긍정적인 사람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먼저 그 생각을 바꾸는 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꿀 수 있습니까?
우리의 삶에 감사할 수 없는 조건이 95%이고, 감사할 수 있는 조건이 5%일 때, 그 감사할 수 있는 조건 5%에 주목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일단 감사한 그 5%에 주목하면 신비하고 놀라운 일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납니다. 우리의 사고는 어느 한 곳에 집중하면 다른 것은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한 그 5%에 집중하면, 그 감사한 5%가 결국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긍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 줍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하고 계신 말씀도 이것일 것입니다.
당시 95% 이상 되는 사람들은 나쁜 마음 밭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당시 좋은 마음 밭을 가진 사람은 5% 도 안되었습니다. 제자들의 눈에는 이 95% 이상 되는 사람들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 눈을 돌이켜서 5%도 안 되는 좋은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희도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설교자들이 강단에서 설교할 때 어떤 사람들을 보고 설교할까요?
졸고 있는 사람, 잘 듣지 않는 사람, 장난치는 사람, 핸드폰 하고 있는 사람을 보지 않습니다. 말씀을 잘 듣고 아멘으로 화답하며 믿음으로 살아 보려고 집중하는 사람을 보고 설교합니다. 설교를 할 때 이런 사람들이 그 눈에 보이면 그날 설교는 잘 됩니다. 그런데 자꾸 조는 사람, 장난치는 사람이 눈에 보이면 그날은 설교가 힘들어 집니다.
예수님은 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하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보는 대상을 바꾸면 우리의 생각이 바뀌고 우리 생각이 바뀌면 우리의 마음이 바뀌고 우리의 마음이 바뀌면 우리 삶이 바뀐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보는 것에 주의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말씀을 기억하고 오늘부터 내가 보는 대상을 바꾸어서 그 생각과 마음과 삶이 바뀌는 변화가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부정적인 사람이 긍정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한계를 잘 알고 계시는 예수님께서는 이 씨 뿌리는 비유의 말씀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두 번째 하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둘째, 현실만 보지 말고 현실을 넘어서는 믿음의 눈으로 보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의 눈을 가졌느냐?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했느냐? 에 따라서 그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믿음 없는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40년 동안 광야에서 생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애굽에서 하나님이 행하셨던 10가지 재앙을 경험하고 애굽에서 해방되어 나왔습니다. 홍해에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광야에서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먹고 마셨습니다. 이 때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감사와 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먹을 양식이 떨어지고, 마실 물이 없게 되자 곧 바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불신하였습니다. 이것이 현실만 바라보고 믿음의 눈을 갖지 못한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있었던 모세와 여호수아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도 똑 같은 현실 속에서 살았지만 그 현실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도우심 믿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게 해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니, 그 중간에 만나게 되는 문제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문제들은 하나님이 다 해결해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삶의 위기를 만나게 되었을 때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놀라운 믿음의 고백들을 하게 된 것입니다.
모세(홍해 앞에서) / 출애굽기 14:13-14절 /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여호수아 갈렙(가나안을 정탐한 후에) / 민수기 14:7-8절 /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우리는 이런 모습을 우리 주 예수님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을 보면 예수님은 남편을 다섯이나 둔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시면서 장차 이루어질 사마리아 선교와 그 결실까지를 바라보고 계셨습니다. “너희는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하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은 지금 사마리아 지방에서 한 여인에게 첫 복음의 씨를 뿌리고 계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예수님은 장차 이 사마리아 지역에서 이루게 될 풍성한 결실을 믿음으로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정말 예수님이 믿음으로 내다 본 대로 되지 않았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박해가 일어나서 성도들이 흩어질 때 빌립집사가 이 사마리아 성에 이르러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통해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해주는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었고 그 결과 ‘그 성에 큰 기쁨이 있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믿는 하나님을 성경은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무엇을 시작할 때 이미 미래에 이루어질 일들까지 다 보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시작과 끝이 다 우리 하나님께 달려 있습니다.
예수님이 베드로를 부르실 때 지금 너의 이름은 시몬이지만 장차 게바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의 시작은 시몬 즉 갈대와 같은 믿음으로 시작하지만, 너의 마지막은 게바 즉 반석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벌써 베드로를 처음 부르실 때, 베드로가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어떻게 변화될 것을 다 내다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아멘
이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이름을 아브라함 즉 열국의 아비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래의 이름을 사라 즉 열국의 어미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사기꾼이라는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 즉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사람으로 바꾸어주셨습니다. 큰 자 라는 사울의 이름을 작은 자 바울로 바꾸어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도 믿음으로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그 이루어질 결과까지 내다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구원의 믿음도 예수 믿고 의롭다함 받을 그때부터 구원의 완성까지를 함께 내다보아야 합니다.
아픈 몸을 고치기 위해 믿음으로 나아갈 때 우리는 건강하게 된 나의 모습을 내다보는 믿음을 가지고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현실에 매여서 살고 미래까지를 잘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가 알파와 오메가 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진 후에는 달라져야 합니다. 신앙을 가진 우리들은 자신만 바라보고, 오늘만 바라보며 살아가는 근시안 적인 삶을 넘어서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장차 이루어질 희망적 미래에 대한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있어야만 합니다. 지금 우리는 이 땅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지만 장차 하늘나라에 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며 살 때를 내다보고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믿음입니다.
오늘만 바라보고 사는 믿음과 성취될 결과까지 바라보고 사는 믿음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어린 아이들은 아직 미숙한 점이 많습니다.
그래서 내일을 바라보고 미래를 바라볼 줄 모릅니다. 지금 현재 내게 무엇이 기쁘고 무엇이 즐거운지에 주된 관심을 가집니다. 그래서 쓸데없는 오락이나 하면서 아까운 시간을 낭비합니다.
이런 자녀들을 보고 있는 부모는 속이 상합니다.
아직 철이 없어서 그렇거니 생각하면서 참아보지만 때때로 참을 수가 없어서 잔소리를 합니다. 때로는 화를 내고 강압해 보기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부모는 그 역시 현재만 바라보며 사는 부모입니다.
미래를 바라보고 사는 부모, 하나님이 자녀들에게 해 주실 일들을 믿음으로 바라보고 사는 부모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록 그 자녀가 지금은 잘못 살고 있어도, 하나님이 은혜로 변화시켜 주실 것을 내다보면서, 그 자녀를 믿음으로 축복하고 격려하는 긍정적인 말을 해 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런 자녀를 부를 때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게 될 내 아들아! 내 딸아!’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서 중요한 일을 행하게 될 내 아들아! 내 딸아!’ 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알파와 오메가 되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부모는 장차 하나님이 그 자녀에게 행하실 일을 기대하면서 이런 믿음의 고백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왜 긍정적인 미래를 바라보며 사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는 ‘피그말리온 효과’라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의 뜻은 ‘우리가 믿고 있는 대로 우리에게 이루어진다.’는 말입니다. 나는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으면 그 믿은 대로 성공하게 되고, 나는 실패할 것이라고 믿으면 그 믿은 대로 실패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피그말리온 효과’라고 합니다.
또 의학용어로 사용되는 ‘플라세보 효과’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것도 비슷합니다. 현대의학이 얼마나 발달해 있습니까? 이제는 소형 컴퓨터를 우리 혈관 속에 넣어서 이것을 통해 각종 수술을 받게 될 날도 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의학기술이 발달하게 되더라도 병을 치료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환자의 의지입니다. 환자가 ‘나는 병에서 놓여날 수 있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반드시 건강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병의 치료와 회복에 중요하다는 것을 의사들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플라세보 효과’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이 성경 말씀 속에도 있습니다.
병을 고침 받으려고 나온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능히 이 일을 할 줄 믿느냐” “네 내가 믿습니다.” 라고하면 “네 믿음대로 되라” “네가 믿고 말한 대로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병 고침에서 내가 건강하게 될 수 있다는 이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까?
우리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기적과 역사를 경험하려고 하면 반드시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믿음이 만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우리의 믿음이 만날 때 기적이 일어나고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언제나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
또 이 비유의 말씀을 통해 예수님이 하고 계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셋째, 바라보는 대상을 바꾸고 믿음의 눈을 가졌으면 이제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먼저는 우리가 ‘나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 보자.’ 라는 긍정적인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께서도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나를 위해 좋은 것을 예비해 두셨을 것이다.’ 라고 하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고 있는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믿음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반드시 극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99%의 장점보다 1%의 단점에 주목하는 고약한 심리현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 자녀를 칭찬으로 격려하여서 바로 살도록 하기 보다는, 그 단점을 비판하고 꾸중하여서 바로 잡으려고 합니다. 그러나 연구에 의하면 사람을 변화시키는 대는 비판보다 칭찬이 더 효과적이라고 합니다.
미국 중서부의 한 대학에 뛰어난 작가로 촉망받는 학생들의 그룹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워낙 탁월한 문학적 재능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장래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일부는 문학 비판 클럽을 조직하고 서로의 작품에 대해 신랄한 비판을 가하면서 문학적 발전을 도모했습니다. 비판만이 성장의 자양분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학교에 또 다른 문학 모임이 있었습니다. 이 모임은 서로의 작품에 대해 아주 작은 부분에서도 긍정적인 의미를 찾아내어 격려하고 칭찬하는 방식으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그 대학의 교무 당국이 졸업생들의 경력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문학 비판 모임 출신자 중에는 제대로 성장한 작가가 한 명도 없었는데, 서로 격려하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문학 토론 클럽 출신들 중에는 높은 명성을 유지하고 있는 걸출한 작가들이 많이 활동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 이야기가 시사해 주고 있는 바가 무엇입니까?
비판은 성장의 근원을 파괴하는 독소로 변질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장만을 위한 비판은 매우 위험하며, 철저한 애정과 사려 깊은 배려로 무장되지 않은 비판은 매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격려와 칭찬을 통해 받게 되는 성장의 동력은 자연스럽게 그 사람의 단점을 극복하게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비판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들에게 경종을 울려주는 좋은 예화가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인들입니다.
우리는 칭찬과 격려를 넘어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특별한 힘의 공급원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받는 위로가 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경험하게 되는 은혜의 경험을 통해 받는 힘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이 위로와 힘이 우리에게 역사하여서 우리로 하여금 하늘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믿음으로 살아가도록 해 줍니다. 그래서 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삶에 어떤 어려움이 찾아와도 별로 걱정하지 않습니다. ‘고난은 위장된 축복이야?’ 라고 하는 여유도 보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갈렙과 같이 그 앞에 어려움이 다가올 때 “그들은 내 밥이다”라고 고백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욥과 같이 ‘고난은 내 믿음을 한 단계 성장 시키려고 하는 하나님의 은혜다.’라고 하게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같이 ‘이 시험은 하나님께서 내 믿음을 테스트하시는 것이다.’라고 담담하게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자신도 그 믿고 고백한 믿음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 친구에게, 또 그 만나는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쳐서 그 사람들도 믿음으로 살게 해 주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이런 믿음을 주는 힘의 원천 힘의 공급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약속의 말씀입니다. 또 우리가 늘 애쓰고 힘써 하고 있는 기도생활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며 살게 하는 중요한 은혜의 방편입니다.
그러나 다른 점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자체로 은혜의 방편이 되지만 기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기도는 그 자체로는 은혜의 방편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둔 기도라야 은혜의 방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도는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그 자체로 은혜의 방편이 되지 못합니까? 그 이유는 이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를 두지 않는 이방종교의 기도 또 귀신에게 하는 미신적인 기도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는 기도, 은사, 역사는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은 그것이 아무리 능력이 있고 역사가 있어도 하나님의 역사로도 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고 말씀을 벗어나서 은사와 역사를 행하는 사람들은, 나중에 결국 기독교 신앙을 부인하고 떠나게 됩니다. 우리는 이런 것을 많이 보지 않았습니까? 전도관의 박태선 장로가 그러하지 않았습니까? 통일교의 문선명 교주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현존하고 있는 수많은 이단들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은혜의 유일한 수단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습니다.
우리 주보에도 이것을 표시했습니다. “오직 성경만을 신앙과 생활의 유일한 원리요 규범이요 질서로 믿는 건강한 교회입니다.” 이것이 우리교회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에 기반을 둔 기도, 말씀에 기반을 둔 예배, 말씀에 기반을 둔 은사, 섬김, 봉사, 사랑, 교제 등만을 우리 교회는 진정한 은혜로 봅니다.
이것은 신앙생활에도, 기도에도, 헌금에도, 사업에도, 교회성장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를들어보겠습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드릴 때 말라기서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내게 베풀어주실 긍정적인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믿음으로 십일조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이렇게 말씀에 근거를 둔 믿음의 삶 속에 성경에서 약속하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잡는 이런 믿음 없이 십일조만 드린다고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겠습니다.
예수님이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첫째, 긍정적인 면을 보는 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둘째, 믿음으로 보는 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리고 믿고 확신한대로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그 삶 속에 30배 60배 100배의 수확을거두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감으로, 하나님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주인공들이 될 뿐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과 동료들과 이웃들도 우리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우리가 누리며 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살게 하는 일에 쓰임 받는 일군으로 살아가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