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곡과 가라지 비유
마태복음 13:36-43
1. 하나님의 나라
마태복음 13장은 ‘천국비유’의 장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보거나, 경험할 수 없는 천국을 보다 쉽게,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비유를 들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이런 비유들을 모아서 기록해 놓은 것이 바로 마태복음 13장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곳인가? 를 알려고 하면 마태복음 13장을 펼쳐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 ‘천국’은 우리에게 너무나 중요합니다.
그곳은 우리 영혼의 고향과 같은 곳이고, 또 장차 우리들이 돌아가게 될 집과 같은 곳입니다. 제가 군대생활을 할 때 함께 근무하던 군인들 중에는 고아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돌아갈 집이 없고, 돌아갈 가족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일정한 시간을 근무하게 되면 ‘휴가’를 보내 줍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휴가가 주어져도 돌아갈 집도 없고 가족도 없습니다. 그래서 ‘휴가 때 어떻게 할꺼냐?’ 라고 물어보았더니 그 대답이 이러했습니다. ‘내가 평소에 가 보고 싶었던 곳을 찾아가서 구경도 하고 쉬다가 오겠다.’라고 했습니다.
여러분도 여행을 해 보아서 잘 알겠지만, 여행은 아는 사람과 함께 가야 재미가 있습니다.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을 가서, 혼자 이곳저곳 돌아다녀야 하는 그 여행이 재미가 있겠습니까? 하루 이틀은 군대라는 억매인 생활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환경 속에서 이것저것 먹고 싶은 것을 사 먹어보는 재미가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15일씩, 때로는 그보다 더 길게 주어지는 휴가 기간 동안, 낮선 곳을 혼자 쓸쓸히 돌아다녀야 하는 그 여행이 얼마나 재미있겠습니까?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휴가 기간이 아직 많이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 부대로 복귀하여, 부대에서 밥을 먹고 부대에서 잠을 자면서 휴가를 보내는 것을 본 일도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삶의 목적지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고, 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우리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결국 돌아가게 될 그 하나님의 나라에 가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그 어떤 대가도 치룰 각오를 하고 사는 것이 우리들의 삶이 아닙니까?
그런데 돌아 갈 하늘나라에 대한 소망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습니까?
이 사람들은 마치 돌아갈 집이 없는 고아, 돌아갈 고향이 없는 고아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지금 여기에 재물을 모으고, 땅을 사고, 건물을 짓고, 그래서 마치 천년만년 죽지 않고 살 것처럼 살아갑니다.
하지만 우리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인생은 그리 길지 않습니다.
100세를 넘기며 사는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면 내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인간의 평균 수명에서 자기 나이를 빼보면 내게 남아 있는 날이 얼마인지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 남아 있는 기간이 지나가면 내게 주어진 인생은 끝이 나는 것입니다. 더 살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더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욕심내며 살지 맙시다. 10년 20년 후면 끝나게 되는 인생에 뭐 그리 많은 재물이 필요하겠습니까?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합니까? 우리 모두는 인생의 말년에 내가 재물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사람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우리 이전에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그 돌아가야 할 곳이 어딘지 알지 못한 채 죽어갔습니다. 그리고 오늘날도 또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죽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주어진 인생을 다 살고 막상 죽게 되면 그 황당함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증거하고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성 밖에 버려져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성은 어디입니까? 이 성은 장차 하늘에서 내려오게 되는 새 예루살렘 성입니다. 이 성이 바로 천국입니다. 그러면 성 밖은 어디입니까? 이 성 밖은 영원토록 불타는 형벌의 장소인 지옥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서 장차 죽어 돌아갈 곳을 확정해놓지 못하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다 그 성 밖 즉 지옥에 떨어져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이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이 세상입니까? 하나님의 나라입니까? 새 예루살렘 성입니까? 아니면 그 성 밖입니까? 천국입니까? 아니면 지옥입니까?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입니다. 아멘.
우리가 소망하며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는 이중적인 면이 있습니다.
먼저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이 세상 속에 있는 나라이며, 죄와 고통 속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 다음은 미래적인 하나님 나라가 있습니다. 이 나라는 하늘에 있는 나라이며, 죄와 고통과 악이 완전히 제거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하나님은 그 나라를, 하나님의 나라를, 타락한 이 세상 속에서 시작하고 계십니다.
그렇게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 이 세상 속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 안에서는, 여러 가지 갈등이 있고, 충돌이 있고, 아픔이 있고, 고뇌와 고통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속하여 살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왔다고 해서, 그 즉시 천국의 은혜와 천국의 복을 누리면서 살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 땅에 존재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는 성도들이 사단의 공격을 받아 상처를 입기도 하고, 여러 가지 삶의 아픔을 당하기도 하면서 한 걸음씩 한 걸음씩 미래적 하나님 나라로 나아갑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의 삶 속에 각종 고통이 있고, 아픔이 있는 것은 아주 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몸담고 있는 교회 생활 속에도 고통과 아픔이 있는 것이 아주 정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삶이나, 우리의 교회 생활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에서 하는 생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우리 교회의 모습이 우리 보기에 좀 부족해 보여도, 우리는 그런 교회를 용납하고 수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교회가 세워져 있는 곳이 바로 죄악 된 이 세상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 기도하고 더 경건에 힘쓰는 삶을 살아가면서, 장차 죄와 악이 완전히 제거된 하나님의 나라의 도래를 열망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를 열망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2. 가라지 비유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가라지의 비유’는 이렇게 부족함이 있고, 허물이 있는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의 상태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가라지의 비유를 보면 하나님의 밭인 교회에 가라지가 심겨 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 생활은 가라지와 함께 살아가는 생활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생활 속에서는 가라지 때문에 겪게 되는 아픔과 갈등과 분쟁과 분열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가라지의 비유’는 오늘날 교회가 처해 있는 현실을 보여주고 있는 비유의 말씀입니다.
24-25절입니다. ‘예수께서 그들 앞에 또 비유를 들어 이르시되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 사람들이 잘 때에 그 원수가 와서 곡식 가운데 가라지를 덧뿌리고 갔더니’ 이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밭에 교회에 하나님은 좋은 씨를 부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잘 때 원수가 와서 좋은 씨가 뿌려진 그 밭에 가리지를 덧뿌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39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가라지를 뿌린 원수가 마귀라고 합니다.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마귀가 하나님의 밭에, 하나님의 영토에, 하나님의 땅에, 가리지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마귀는 어떻게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덧뿌릴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단 한 가지 설명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마귀가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덧뿌리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만약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허용하시지 않으셨으면 마귀는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덧뿌릴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먼저 알고 있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마귀로 하여금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뿌리도록 허용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우리 가정 안에, 우리 교회 안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마귀들 역사들을 보게 될 때, 그런 일들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고, 그런 일들 때문에 시험에 들지 않고, 그런 일들까지도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이 주관하고 계신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이런 믿음이 장성한 믿음입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가정은 구약시대에 존재했던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이런 가정 속에서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요셉은 그 형제들에게 미움을 받아 애굽에 노예로 팔려가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가장 안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요셉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요셉은 그 형들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그런 형들을 통해서 하나님이 이루어 가시고자 계획하신 일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런 믿음으로 요셉이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였나니’라는 신앙고백이었습니다. 요셉이 가지고 살았던 이 믿음이 오늘 우리 모두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 중에 다윗도 있습니다.
다윗은 노년에 그 아들 압살롬의 반역을 피해 예루살렘 성을 버리고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그 때 도망가는 다윗을 따라오면서 돌을 던지고 저주하였던 ‘시므리’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다윗이 이 시므리를 보면서 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그가 저주하는 것은 여호와께서 그에게 다윗을 저주하라 하심이니 네가 어찌 그리하였느냐 할 자가 누구겠느냐?’ 다윗도 시므리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렇게 믿음의 고백을 한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고백은 신앙이 성숙한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우리 모두의 믿음이 이렇게 성숙한 믿음에 이를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사람 중에 다니엘도 있습니다.
다니엘서 2장을 보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그 꿈에 기이한 한 신상계시를 보고 그 의미를 몰라 번민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왕에게 신상계시를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려 준 사람이 바로 다니엘입니다. 다니엘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느부갓네살 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해 주신 것’이 바로 그 신상계시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이 다니엘은 느부갓네살 왕에게 인류역사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전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도 오늘이라는 현실만을 바라보며 살지 않고, 인류 역사의 흐름을 바라보고 그 역사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열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이런 믿음의 눈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황당한 일들과, 교회들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악행들까지라도, 모두 다 하나님의 허용하심 아래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믿을 수 있으시길 바랍니다. 아멘. 우리가 이런 관점을 가질 때 비로써 악한 마귀가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뿌린 것 또한 우리 하나님의 허락 하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고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실재로 이런 일들이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과거 이스라엘 사람들 중에는 자기와 원수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에게 복수하려는 마음으로 그 사람의 밭에 몰래 들어가서 실재로 가라지를 뿌리는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이 얼마나 많았으면 한 때에는 이런 일들을 금지하는 법령까지 만들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또 다른 한 경우는, 어떤 사람이 밭을 팔려고 내 놓았는데 두 사람이 그 밭을 서로 사려고 경쟁을 하다가 다른 사람이 그 밭을 사게 되면, 그 밭을 사지 못한 사람이 악심을 품고 가서 몰래 그 밭에 가라지 씨를 뿌려 놓기도 했다고 합니다. 왜 이렇게 했습니까? 이 가라지는 우리나라의 아가시아 나무와 같이 생존력과 번식력이 아주 왕성해서, 농부가 그 밭에 뿌려진 가라지 뿌리를 완전히 제거하는 데는 수년이 걸릴 정도로 아주 힘들고 어려운 일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일들은 사람이 얼마나 악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예수님의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그러면 마귀가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뿌린 목적이 무엇일까요?
마귀는 하나님의 밭에 해를 입일 목적으로 가라지를 뿌렸다는 것입니다. 마귀가 뿌린 가라지는 이미 그 밭에 뿌려져 있는 밀과 너무나도 유사하게 생겨서 그 겉모습만 보고서는 어느 것이 밀인지 어느 것이 가라지인지 잘 구별이 안 된다고 합니다.
우리들의 경우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도들의 겉모습만 보아서는 누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인지 누가 마귀가 뿌린 가라지인지 구별이 잘 안됩니다.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이 가라지는 그냥 잡초입니다.
우리는 이 가라지를 피라고 합니다. 이 피는 모와는 거의 같이 생겨서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잡초인 피는 곡식인 모보다 먼저 자랍니다. 그래서 종종 농부는 피를 골라서 뽑아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가라지 비유의 말씀을 읽을 때 ‘농부가 잡초를 뽑아 주듯이 그렇게 가라지를 뽑아주면 되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마태복음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가라지는 그냥 잡초가 아닙니다.
이 가라지는 ‘지자니온’이라고 하는 식물인데, 이 ‘지자니온’은 일종의 독초입니다. 그래서 다른 말로는 ‘독 보리’라고 하기도 합니다.
이 ‘독 보리’는 밀과 너무나도 유사해서 성장 중일 때에는 농부도 구분해 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고 만약 농부가 ‘밀’과 이 ‘독 보리’를 함께 수확하여서, 그 독 보리의 낱알이 섞여 있는 밀을 사람이 먹게 되면, 현기증과 구토를 일으키기도 하고, 심하면 사망할 수도 있는 독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농부는 밀을 수확하기 전에 먼저 이 독 보리를 제거해야 합니다.
이 ‘독 보리’가 어느 정도 자란 후에는 밀과 확연히 구분된다고 합니다.
26-29절입니다. ‘싹이 나고 결실할 때에 가라지도 보이거늘 집 주인의 종들이 와서 말하되 주여 밭에 좋은 씨를 뿌리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런데 가라지가 어디서 생겼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종들이 말하되 그러면 우리가 가서 이것을 뽑기를 원하시나이까?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밀과 독 보리’가 구분된다고 해도 이 ‘독 보리’를 제거하는 것은 쉽지 않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 ‘독 보리’는 그 뿌리가 강하고 멀리 펴져 있어서, 이 독 보리를 뽑아내려고 하면 밀이 함께 뽑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독 보리가 그 밭에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독 보리를 뽑아 낼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이 독 보리는 추수 때까지 그냥 내 버려둔다고 합니다.
추수 때가 되면 밀은 알곡이 가득 달리기 때문에 자라면 자랄수록 고개를 숙이게 되지만, 독 보리는 그 상부에 몇 개의 독이 있는 낱알만 달리기 때문에 끝까지 곧게 서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독 보리의 3단계 성장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단계는 밭에 부려진 독보리가 일과 전혀 구별이 안 되는 단계입니다.
둘째 단계는 ‘독 보리’가 발견되고 구분되는 단계입니다. 이때는 독 보리의 뿌리가 밀의 뿌리와 엉켜 있기 때문에 제거할 수 없는 단계입니다.
셋째 단계는 추수 때가 되면 밀과 독 보리는 그 외형적인 모양이 확실하게 구분되어서 쉽게 제거할 수 있게 되는 단계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밀을 수확하기 이전에 먼저 고개를 들고 서 있는 독 보리를 찾아 그 이삭을 잘라서 한 곳에 쌓아 두었다가 불로 태운다고 합니다. 그 다음에 곡식을 추수하여 곡간에 넣게 된다고 합니다. 29-30절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주인이 이르되 가만 두라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노라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 추수 때에 내가 추수꾼들에게 말하기를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내 곡간에 넣으라 하리라.’
3. 가라지 비유에 대한 설명
예수님께서 이 비유의 말씀을 끝내시고 집에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이 나아와 가라지 비유에 대해 설명해 주시기를 요청합니다. 36절입니다. ‘이에 예수께서 무리를 떠나 집에 들어가시니 제자들이 나아와 이르되 밭의 가라지의 비유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소서’
그래서 예수님께서 가라지 비유의 말씀을 설명해 주셨습니다.
37절에서,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인자 곧 예수님’이시라고 하십니다. 38절에서, 예수님이 ‘씨를 뿌린 밭은 세상’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뿌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하면서, 39절에서, ‘이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라고 합니다. 그리고 ‘추수 때는 세상 끝 날’이라고 합니다. 세상 끝 날에 추수 꾼인 천사를 통한 추수가 있게 될 것인데, ‘농부가 먼저 가라지를 거두어서 불사르듯이 세상 끝에도 그러할 것’이라고 합니다. 43절 그러나 그 때에 ‘의인들은 자기 아버지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하시고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가리지 비유를 보면, 하나님 나라의 시작에서 결말까지를 다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중심적으로 말씀하고 계신 내용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라 현재 이 세상 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하나님나라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는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입니까?
교회 안에는 천국의 아들들도 있지만 악한 자의 아들들도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 지상에 존재하는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지상에 존재하는 교회는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심으로 복음을 믿고 나아오는 하나님의 아들들로 이 땅에 교회를 세우셨지만, 마귀는 예수님이 세우신 이 교회를 파괴하고 허물려는 목적을 가지고 악한 마귀의 자녀들을 교회 안에 넣어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사를 보면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교회 안에 함께 있었던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전에 교회 안에서 기적과 이적의 큰 역사를 이루었다는 문선명과 박태선 장로의 결말을 잘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오순절 운동의 큰 획을 그은 사람이었던 피터 와그너의 최후의 결말을 지금 잘 보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의 차세대 지도자라고 주목받고 있던 사람들이 어느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도 잘 보고 있습니다. 한국천주교회에서 가장 존경 받고 있는 김수환 추기경이 평생 추구한 것이 종교다원주의 신앙이었음도 잘 보고 있습니다.
21세기 지구상에 있는 교회들 중에서 한국교회는 아직까지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고수하고 있는 교회입니다. 건전한 신학과 신앙을 고수하고 있다고 하는 한국교회가 이 모양 이 꼴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나라 교회들의 실상이 어떠한지는 확인해 보지 않아도 짐작해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홍수 심판을 앞두고 있었던 노아의 시대 교회가 어떠했겠습니까?
하나님 보실 때에는 사실 교회도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다 홍수심판을 받아 멸망하고 노아의 가족 여덟 명만 살아남은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불 심판을 앞에 두고 있는 오늘날 교회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볼 때에는 교회가 너무나도 많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그렇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종말시대 교회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함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가 잘 구분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마귀의 자녀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농사일을 전담하는 농부들도 처음에는 밀과 독 보리를 구분할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마귀의 자녀인지 목양에 전념하는 목회자들도 구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에는 마귀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가 함께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의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언제 구분이 된다고 합니까?
외형적으로 어느 정도 성장하게 되면 밀과 독 보리가 구분되어 보인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독 보리를 교회에서 제거해 내기에는 너무 늦었다고 합니다. 왜요. 그 독 보리의 뿌리가 밀의 뿌리보다 더 왕성하게 뻗어나가서, 이미 주변에 있는 밀의 뿌리들을 감싸고 있기 때문에 그 독 보리를 제거하려고 하면 주변에 있는 밀들이 같이 뽑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들이 독 보리를 제거하려고 할 때, 그 주인은 독 보리를 뽑다가 밀이 함께 뽑힐 것을 염려하여서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또한 오늘 우리 교회의 현실이 아닙니까?
오늘날 교회 담임 목회자에게 심각한 문제가 있어도 그 목회자를 쉽게 뽑아낼 수 있습니까? 그 목사님을 보고 모인 성도들이 거의 대부분인데 그 목사님을 그 교회에서 뽑아내면 그 교회는 거기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정말인지 거짓말인지 모르지만 전에 여의도순복음 교회에서 조용기 목사님과 그 가족의 문제를 제기하였을 때, 조용기 목사님이 자꾸 당회에서 나와 내 가족을 걸고넘어지면 ‘나는 순복음중앙교회를 나가서 다시 교회를 개척하겠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당회가 곧 바로 입을 다물고 오히려 조영기 목사님을 문제 삼던 장로들의 직위를 박탈했다는 말까지 있었습니다.
어디 목회자들뿐입니까?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킨 장로, 안수 집사가 있을지라도 그 사람들을 교회에서 쉽게 쫓아 낼 수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이미 그 뿌리가 교인들 사이에 꽉 박혀 있기 때문에 이 사람들 치리하려고 하면 오히려 목회자가 성도들에 의해 그 교회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장로와 목회자가 서로 대립하고 분쟁하는 교회가 되어서, 성도들은 흩어지고 교회는 둘로 갈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교회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그대로 두라’고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디 교회뿐이겠습니까?
원수 마귀가 교회에서만 역사하고 말까요? 믿음의 가정들에서는 역사하지 않을까요? 믿음으로 양육 받아야 하는 가정에서 자녀들이 믿음으로 양육 받지 못하는 일이 왜 일어날까요? 왜 자녀들은 올바른 삶을 살지 않고 부모의 기대와 어긋나가는 것입니까? 마귀가 그 뒤에서 가라지를 뿌리고 방해공작을 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마귀가 믿음으로 시작한 교회연합운동에서는 역사하지 않을까요?
목회자를 양성하는 신학교육과정에서는 역사하지 않을까요? 우리 교단 안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제까지 건실한 목회자로 알려지고 있던 어떤 사람들이 신학교 이사장이 되고 총장이 되어 권력을 잡더니 사람이 갑자기 180도 돌변했습니다. 그 차지한 총장의 자리를 내 놓지 않으려고 각종 무리수를 두어갔습니다. 그 일 때문에 학생들이 대모를 하고, 총회에서 총대들이 새로운 해결책을 결의해도, 사학 법을 근거로 내세우며 학교에 대한 모든 문제는 이사장에게 그 권한이 있다고 하며 버티는 것입니다. 교단 법에 어긋난다고 하면서 총장에서 물러나라고 해도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하면서 버티다가, 다른 문제가 터져서 어쩔 수 없이 물러난 일도 있습니다. 이런 우리 현실을 보면 예수님께서 ‘곡식이 열매를 다 맺은 후에 이루어질 추수 때까지 그대로 두라.’라고 하신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추수 때에 밀과 가라지가 어떻게 구분된다고 합니까?
그 맺게 되는 열매를 보고 구분된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충실한 밀을 열매로 맺고, 악한 자의 자녀들은 독 보리를 열매로 맺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열매를 보면 그것이 밀인지 독 보리인지 누구나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밀은 충실한 열매를 맺으면 그 무개 때문에 점점 고개를 숙이지만, 독 보리는 몇 개의 낱알만 맺기 때문에 고개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가라지 비유의 말씀 속에서 알곡과 독 보리를 구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됩니다.
이 구분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왕성한 활동을 하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통해 얼마나 큰 은사와 역사가 나타나느냐? 하는 것으로 구분되는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루어 온 업적이 얼마나 크냐? 하는 것으로도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구분된다고 합니까?
그 맺게 되는 열매를 통해 구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이 현재적 하나님의 나라에서 맺어가야 하는 열매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성령의 열매입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 성령의 열매는 인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처음 예수를 믿게 되면 그 때에는 인격적인 성장이 아직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때는 누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누가 악한 자의 자녀인지 잘 구분이 되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보니까? 농사를 전담하고 있는 농부들도 처음에는 밀과 독 보리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유사하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 자신들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지 마귀의 자녀인지 구분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문선명과 백태선이 자신들을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역사가 나타날 때 자신들을 하나님의 특별한 자녀라고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러나 신앙이 성장을 해 나가면서 점차 밀과 독 보리는 구분됩니다.
그러다가 추수하기 직전이 되면 밀과 독 보리는 드러나게 됩니다. 이때가 되면 인격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룬 사람들과 인격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로 구분됩니다.
이 인격적인 성장이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을 구분해 주는 가장 정확한 기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은 그 인격과 성향으로 구분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도바울과 같이 ‘내가 예수님을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라고 하였던 사도바울과 같은 마음에 품고, 예수님을 본받고 사도바울을 본받으며 살아가려고 하는 사람이라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루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날 신사도운동을 하는 사람들과 같이, 하나님의 직통계시를 주장하고, 성령의 나타나는 기적과 이적과 역사를 강조하고, 또 어떤 사람들과 같이 자신은 천국과 지옥을 수도 없이 갔다가 왔다고 하고, 하나님이 자신에게만 주신 비밀한 말씀이 있다고 하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사람들, 그러면서 인격적인 성장과 성숙은 전혀 이루어 가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다 마귀의 자녀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이런 일들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고 사람들을 미혹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본문에서는 추수 때가 되면 밀과 가라지가 확실하게 구분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일단 곡식이 자라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하면 이때부터 그 열매는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그래서 추수 때까지 그 알이 충실한 알곡으로 자라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 신앙이 처음에는 아주 서서히 자라게 될 것이지만 열매를 맺게 되는 추수 때가 임박하면 그 신앙이 하루하루 달라져 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신앙생활을 한지 오래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가 맺어가는 그 열매로 우리 신앙이 참 신앙임을 보여주어야 할 때가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신앙이 어제나 오늘이나 같아서는 안 됩니다. 어제 우리가 가졌던 신앙과 오늘 우리가 가진 신앙이 달라져야 합니다. 작년에 내가 가진 신앙과 금년에 내가 가진 신앙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밀이고, 충실한 알곡을 열매로 맺게 될 사람들입니다.
저는 우리 모두 다 그 가진 신앙이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어 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변화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을 확인하며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와 같은 사람인 사도바울이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산 것 같이, 너희도 나를 본받는 삶을 살라.’라는 말을 한 것은, 그 생애 마지막 순간에, 그 신앙과 인격이 급속한 성장을 이루어 나가고 있는 감격 속에, 이런 고백을 하였을 것으로 저는 생각합니다.
우리의 대적이며 우리의 영적 생활의 철전지 원수인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에게서 이런 성장과 성숙을 막아보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 동원하여 막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의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통해 이런 방해 공작을 하려고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통한 방해 공작보다 우리에게 더 큰 아픔을 주고 더 큰 좌절을 주게 되는 것이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우리의 약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약점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전에 믿음에 열심이 있던 수제자 베드로를 넘어뜨린 것 같이, 우리들의 삶의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결정타를 날리려고 계획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기회가 오면 망설임 없이 결정타를 날릴 것입니다. 그래서 혹 우리가 넘어지고 쓰러지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베드로처럼 다시 일어나 믿음으로 걸어가야 합니다. 아멘.
그래서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그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이라고 합니다.
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걸어가야 하는 고난의 길이라고 합니다. 세상적인 모든 기대와 바램을 버리고 홀로 걸어가야 하는 외로운 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걸어가는 그 길 끝에는 우리 주 예수님이 계시면서 우리를 반겨 맞아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시는 길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내 앞에 놓여 있는 이 길을 하루하루 믿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성도들입니다. 아멘.
복음 송 1696장에는 ‘우리가 걷는 이 길은’ 이라는 복음 송이 있습니다. 함께 불러보겠습니다.
1.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보기에 좁고 험하며 찾는 이 매우 적어서 외로웁지만
이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셔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시리
세상 사람들 우리들을 보며 어리석다고 조롱하지만
이 길을 가는 자마다 영원히 주와 살리라
2. 우리는 함께 이 길을 선택한 형제자매요 영원한 주의 나라의 백성이기에
서로도우며 서로 손을 잡아주며 이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세상 사람들 우리들을 보며 어리석다고 조롱하지만
이 길을 가는 자마다 영원히 주와 살리라 이 길을 가는 자마다 영원히 주와 살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가라지 비유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현재적인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서 누가 하나님의 자녀이고, 누구 악한 자의 자녀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성령님이 주시는 은혜 안에서, 거룩한 열매를 맺어 나가는 삶을 통해, 우리가 예수님을 본받으며 살아가는 참 신앙의 사람이라는 것을, 하나님 앞에, 스스로에게,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