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물 비유
마태복음 13:47-50
이제까지 우리는 다양한 비유의 말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 비유의 말씀들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다양한 모습들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이 그물 비유의 말씀은 하나님 나라의 어떤 면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이 말씀은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가 끝이 나고, 장차 도래하는 하나님 나라의 나라에는 어떤 성도들이 들어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 그물 비유의 말씀을 살펴보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약속하고 그 나라에 모두가 다 들어갈 수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물 비유의 말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그물은 고기를 잡는 도구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어부가 그물을 내려서 고기를 잡을 때 고기가 그물에 가득 차기까지는 그물을 걷어 올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그물에 고기가 가득 차게 되면 그물을 물가로 끌어올려서, 그 잡힌 고기 중에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내다 버린다고 합니다. 47-48절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버리느니라.’
세상 끝 날에도 이와 같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49-50절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니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그날이 오면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들을 갈라낼 것이며, 의인들은 천국에 들어가게 되고, 악인들은 영원히 불타는 풀무 속으로 던져 넣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풀무 불은 용광로의 불을 말합니다. 악인들은 이 용광로 같이 뜨거운 불 속에 던져져서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지금 우리는 어떤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의 날을 우리 삶의 종착점에 두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겠습니까?
그 삶의 목적을 이 세상에 두고 사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겠습니까? 아니면 삶의 목적을 장차 도래하게 될 하나님의 나라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지혜로운 삶이겠습니까?
우리는 삶의 목적을 이 세상에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고 있습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신 불신을 가릴 것이 없이, 이 세상 속에서의 성공과 성취에 목을 매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우리가 목적하고 있는 것은 이 세상이 아닙니다.
이 세상 속에서의 성공도 성취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종종 이 세상 속에서 실패도 경험하고 좌절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그것 때문에 너무 아파하지도 말고, 그것 때문에 실의와 좌절에 빠져 절망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장차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습니다. 그 심판의 날에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성도가 되는 것에 삶의 목적을 두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이 세상 속에서는 실패하였더라도, 장차 도래하는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성공 자가 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인류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당하며 사는 심판은 이 세상 마지막 날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 속에서도 심판을 경험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종교적 박해가 자행되고 있는 북한이나 회교권 같은 곳에서는 신앙 때문에 사람들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신앙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심판을 당하고 있습니다.
유듀브에 나와 있는 내용입니다.
회교권에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있다는 이유로 붙잡혔습니다. 그래서 당국자들로부터 ‘예수를 계속 믿겠다고 하면 죽을 것이며, 지금이라도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다.’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때 이 사람은 자신을 심문하는 그 사람에게 ‘나는 예수 믿는 믿음을 택하겠다.’라고 대답하였고 그 결과 교수대 위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이미 자신 외에 여러 명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모든 사람들이 죽음 앞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고 ‘나는 예수를 믿는 것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신앙고백을 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지금도 이런 심판이 세상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 삶에 이런 심판의 날이 찾아온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게 된 것이 자랑스럽다.’라고 하면서 행복한 미소를 띠고 죽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성도 된 우리들의 삶의 숙제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 주시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사람들이 순교자의 예로 많이 드는 사람은 사도 요한의 제자이며, 서머나 교회 감독이었던 폴리갑입니다. 이 폴리갑은 가득 쌓아놓은 장작더미 위에 묶여서 화형당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그 신앙을 바꾸라는 말을 듣게 됩니다. 이렇게 폴리갑의 생애에도 사람들에 의한 심판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때 폴리갑은 어떤 말을 하고 죽었다고 합니까?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겨왔는데 그동안 그분은 한번도 나를 부당하게 대우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어찌 이제까지 섬겨온 나의 왕 그리스도를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면서, 그 앞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증거하기를, '당신들은 나를 잠시 붙었다가 꺼지는 불로 위협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는 당신들이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과 악인들을 위해 예비 된 영원한 불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왜 지체하십니까? 지금은 당신들의 시간입니다.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고 하며 죽었다고 합니다.
순교자 폴리갑은 그 삶의 목적을 어디에 두고 살았다는 것입니까?
폴리갑은 하나님의 나라를 목적으로 삼고, 모든 인류 앞에 놓여 있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참 지혜로운 삶이겠습니까?
이 세상 끝 날에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대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입니다. 또 그 심판대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약속하신 천국에 대한 소망이 주는 기쁨을 가지고, 끝까지 믿음을 지켜나가는 것이 바로 지혜로운 성도들의 삶일 것입니다. 아멘.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심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이 그물 비유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심판이 시작되면 사람들을 구분할 것이라고 합니다. 의인들 가운데서 악인들을 구분해 내어 풀무 불에 던진다고 합니다. 49절입니다.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갈리라.’
이 말씀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은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악인들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진다.’라고 하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아니면 ‘이 세상 사람 중에서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갈라내어 심판하신다.’라고 하면 이해가 쉽습니다. 그런데 이 그물 비유에서는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심판하신다.’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속에서는 아니 의인은 누구이며, 의인 중의 악인은 누구인가? 라는 의문이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은 아주 분명하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인인 사람이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길은 오직 믿음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 한 사람도 예외가 없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의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디에 모여 있습니까?
절에 모여 있습니까? 회교 사원에 모여 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모두 다 교회에 와 있습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함을 받은 사람들의 모여 있는 곳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면 의인 중에 있다고 하는 악인은 누구입니까?
그러면 교회 중에 있다고 하는 악인은 누구냐? 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유추해 보면 교회 안에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의인’도 있고, 교회에 다니고는 있지만 ‘아직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도 함께 있다.’는 말이 됩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의인 중에 있는 악인이라고 하고 있고, 이 사람들이 ‘풀무 불에 던져져서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으려고 교회 나온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때에는 아직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믿음,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갖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아직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며, 아직 믿음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교회 다니는 성도들은 그 누구도 자신을 악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성도들이 다 나는 예수를 믿음으로 의인이 되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 중에서, 실제로는 악인인 사람들을 갈라내어서 풀무 불에 던져 넣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상치 못한 판결을 받았던 이 사람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았다.’라고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심각하게 들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대로 판단해 주시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또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고, 믿음으로 거듭났다는 것을 인정해 주시는 그런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이 심판의 날은 언제쯤 있게 되는 것입니까?
이 일은 교회 시대에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장차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기 직전에 일어날 일입니다.
우리는 천국 비유의 말씀들을 많이 살펴보았습니다.
그중에는 현재적 하나님 나라도 있었고,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도 있었습니다. 현재적 하나님 나라는 아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날’이고,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는 날’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구원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있는 날들입니다.
그러나 미래적 하나님의 나라는 다릅니다.
이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의인 중에서 악인들을 갈라내신다고 합니다. 그날이 되면 의인들은 구원을 받게 되지만, 악인들은 심판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죄가 완전히 제거된 나라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는 죄도 없고 사망도 없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죄인들은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전에 먼저 의인들 가운데서 악인들을 걸러내시는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죄인이라도 회개시켜 천국에 들어가게 하실 만큼 자비하심이 크신 분이시지만,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는 의인 중에서 악인들을 갈라내어 심판의 불에 집어넣으실 정도로 엄위하십니다. 우리는 이 하나님을 올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이 세상 죄를 대신 지시게 되자,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도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하신 분이십니다. 이렇게 십자가는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엄위함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동시에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아들까지 아끼시지 않고 내어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멘.
그물을 끌어올리는 심판의 날
47절입니다.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바다는 이 세상을 말합니다. 물고기는 사람들을 말하고, 그물을 끌어 올리는 것은 이 세상 끝에 있게 될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인류 역사 속에는 이미 하나님의 심판의 그물이 처져 있습니다.
그 그물을 끌어올리는 그날이 바로 인류 역사의 종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죄악 된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그날이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점점 우리 가까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이미 심판의 그물 위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삶의 현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심판의 날을 의식하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날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날이 이미 우리 가까이 이르러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중에는 나이 많으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은 하나님이 주신 생애를 다 살고 죽는 그 순간이 바로 심판의 날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성경은 사람에게 ‘한번 죽는 것을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 있으리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날이 오면 모든 사람들은 그 소유한 믿음의 유무에 따라 육체에서 분리된 그 영혼이 낙원이나 음부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나중에 낙원에 있던 영혼들은 생명의 부활로 부활하여 천국에 들어가고, 음부에 있던 영혼들은 심판의 부활로 부활하여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은 지상에서 살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이 가게 되는 길입니다. 우리 중에 나이 많으신 분들은 이 길을 가게 될 것입니다. 이런 분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금 바른 믿음으로 가지고 믿음 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 나이가 어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살아 있는 동안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것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이 사람들은 이 세상이 불로 심판을 받는 것을 보게 될 가능성이 큽니다. 저희교회가 종말에 대한 설교를 많이 하는 이유는 다 이 사람들을 위해서입니다.
지금은 설교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들이 현실로 와 닫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듣고 또 들어놓으면 그날이 오면 반드시 생각이 날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때 믿음으로 결단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에 이르도록 하려고 지금 이 설교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왜 이렇게 생각합니까?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보면 ‘그 세대 사람들이 살아서 예수님의 재림을 보고,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나무입니다.
죽은 무화과나무가 싹을 내고 잎을 내게 된다는 말은, ‘나라를 잃었던 이스라엘 민족이 다시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약 2,000전에 로마에 망한 이스라엘이 언제 다시 독립했습니까?
1948년 5월 14일에 이스라엘은 독립 국가를 세웠습니다. 이날 태어난 사람의 나이는 지금 75세가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지금 75세가 넘은 사람들이 다 죽기 전에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이 됩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지금 75세가 되지 않아 종말의 날까지 살아 있는 사람들은, 종말 시대 끝에 있게 될 7년 대환난을 겪게 되고, 또 그 환난의 날 끝에 재림하시는 예수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75세가 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천국 비유의 말씀이나 종말 시대에 있을 일을 알려 주고 있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을 잘 알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니 잘 알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암송하고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말씀들 속에 내가 천국 가고 내가 지옥 가는 자세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물 비유의 말씀에서 그물을 당기는 그날은 바로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이일은 언제 있을 것이라고 합니까? 그물 속에 고기가 가득 찰 때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구원받는 사람들의 수가 다 채워졌을 때 있을 일이라고 합니다. 이때가 되면 교회 시대는 끝이 나고 이제 유대인에게 남은 마지막 한 이래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 한 이레가 지나고 나면 인류 역사는 마침표를 찍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은 심판을 받아 완전히 불타버리고 하나님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그 새 하늘과 새 땅 위에 메시야 왕국(천년왕국)을 건설하시게 될 것입니다.
이 심판의 날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작정 안에 있습니다.
그래서 이날은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과거에 이날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여러 명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이 날을 알고 있다고 하며 예언하여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사람들입니다.
왜요. 예수님도 모르고 천사도 모른다고 한 그날을, 오직 하나님만 아신다고 한 그날을 자신은 알고 있다고 하니, 이 말은 자신이 곧 하나님이거나 혹은 자신은 하나님과 동격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이런 이단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심판의 날이 언제쯤인지는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미전도 종족에 대한 복음 증거 상황을 통해서 이날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세계 각 민족의 언어로 성경이 번역되고 있는 것을 통해서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통해서도 이날이 얼마나 우리 가까이 이르러 있는지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의 날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해주신 지진, 기상이변, 기근, 전염병의 창궐, 전쟁 등의 징조들을 통해 심판의 그물이 거의 다 차 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 종말이 임박했다는 견해는 신·불신을 막론하고 모두 다 가지고 있는 견해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지구 멸망의 시간표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그 시계를 보면 지구 종말까지 불과 몇 분 남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이 우리 가까이 임하여 있다고 하면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나쁜 물고기가 되지 말고 좋은 물고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좋은 것은 가치 있는 것을 말합니다. 나쁜 것은 무가치한, 타락한, 쓸모가 없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종말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치 있는 일이란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들은 자녀의 문제에 목을 매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나의 자녀의 잘되고 못됨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성공에 목을 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는 내가 성공한 기업인이 되느냐? 실패한 기업인이 되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정치적인 문제에 목을 매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미래를 내가 보수적인 견해를 가졌느냐? 진보적인 견해를 가졌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이런 것들은 종말시대 가치 있는 일들이 아닙니다.
종말시대 가치 있는 일을 알려면 창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가치 있는 존재로 창조해 주셨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죄를 짓고 타락하면서 가치 없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가라지 비유를 보면 하나님은 그 밭에 좋은 씨를 뿌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악한 자가 와서 이 하나님의 밭에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합니다. 누룩의 비유를 보면 교회가 비 진리를 받아들이고 타락함으로 가치 없는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물 비유에서는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사람들은 모두 다 자신은 진리의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은 의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 치고 ‘나는 비 진리의 길을 걷고 있고, 나는 가치 없는 존재로 살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단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만나보면 곧 바로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들도 자신들은 바른길, 진리의 길을 가고 있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습니다. 만약 자신들이 비 진리의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진리의 길로 돌아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전혀 그런 사실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단 교회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러면 진리와 비 진리는 어떻게 구분되는 것입니까?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으로 진리와 비 진리가 구분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맺으며 살아가고 있는 삶의 열매로 진리와 비 진리가 구분됩니다. 그 삶아가는 삶의 열매를 보면 그 사람이 진리에 속한 사람인지 비 진리에 속한 사람인지,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구약 시대 가장 종교적인 사람들은 바리새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에 대한 성경의 증거가 무엇입니까? ‘바리새인들은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이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인 고백과 의식에서는 가장 신앙적인 사람들로 보였지만, 그들이 추구하며 살았던 것은 세상 재물이었고, 세상에서의 성공이었고, 세상에서 받게 될 영광이었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은 이렇게 그 삶을 통해 자신들은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땅을 바라보고 살았던 사람임을 드러내었습니다.
이런 바리새인들이었기에 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큰 길거리 어귀에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옷 술을 길게 늘어뜨린 옷을 입고 다녔다고 합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기도를 하였다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이 이런 삶을 살았던 목적은 세상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세상 사람들로부터 영광을 받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런 삶의 열매들을 보면서 바리새인들은 땅에 속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하늘을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기도를 해도 골방에 들어가서 은밀하게 보시는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구제를 해도 내가 이렇게 많은 구제를 하고 있다고 나팔을 불지 않습니다. 금식을 해도 금식하는 자로 보이지 않기 위하여 수염을 깎고 몸 단정을 하며 금식하였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작품
우리에게는 두 길이 있습니다.
나는 그 두 길 중에 어떤 길을 가고 있는가? 하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에베소서 2:10절입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은 우리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새로 지으심을 받은 하나님의 세공품들이라고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들은 하나님이 만들어 가시는 작품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은 육신에 속해 살고 있는 우리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고, 죄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가고 계시고, 아담 안에서 죽을 옛사람의 속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시고, 죄로 인해 타락한 우리들을 성령 안에서 회복된 사람으로 만들어 가시는 일을 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하나님께서 새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고 있는 사람들, 하나님께서 걸 작품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무엇을 통해 우리들은 그 작품으로 만들어져 가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만들어 가고 계신다고 합니다. 히브리서 4:12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과 뜻을 판단하시나니.’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의 영과 혼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시므로 우리 마음과 생각과 삶을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계신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17:17절입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하나님은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심을 통해 우리 속사람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빚어 가고 계신다고 하십니다.
시편 19:7-8절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하나님은 그 말씀을 통해 우리 영혼을 소성시켜 주시고, 우리 마음을 지혜롭게 해 주시고, 정직하게 해 주시며, 우리들의 속사람을 거룩하고 순결한 하나님의 자녀로 만들어 가신다고 하십니다.
은사를 추구하고 있는 은사주의로는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추구하게 하는 번영신학으로는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 속 사람을 새롭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오직 거룩하신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 속사람을 새롭게 해 주십니다. 오직 진리의 말씀 만이 우리를 새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실 수 있으십니다. 이렇게 속 사람의 변화를 이루어가는 사람들이 바로 선인들입니다.
이 시대가 임박한 종말의 시대라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종말이 임박한 시대가 되면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소수가 되고, 또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으로부터 핍박과 박해와 조롱을 당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시대를 보면 이미 이런 일이 세상 속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날 동성애가 합법화되어 있는 외국에서는 교사들이 동성애는 보호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에 다니는 학생들이 이런 선생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게 되고, 이 일 때문에 법의 재판을 받아서 유죄 판결을 받기도 하는 시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입니다.
앞으로 우리나라도 이렇게 될 날이 멀지 않았습니다.
앞으로는 진리를 가르치고,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은 소수가 되고, 거짓된 가르침인 오염된 누룩과 같은 교훈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중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제 진리가 음지로 숨어들게 되고 거짓이 양지로 나오게 될 것입니다. 이런 가치관의 역전이 바로 말세의 주도적인 현상이 될 것입니다.
그러다가 언제 참과 거짓이 확연하게 드러나고 구분된다고 합니까?
그물 비유는 하나님께서 심판의 그물을 들어 올릴 때 참과 거짓이 확실하게 구분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그때까지 진리 따라 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때까지 우리는 우리가 가진 신앙을 굳게 지켜나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신앙을 지켜나가기 위해서 어떤 어려움이 우리 삶 속에 찾아올지라도, 장차 하나님이 심판의 그물을 들어 올리시게 될 그날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참고 인내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아멘.
우리가 진리를 따라 살려면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예수 지신 십자가와 같이 우리들도 우리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예레미야 애가 3장 말씀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가 살았던 삶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의 분노의 매로 말미암아 고난당하는 자는 나로다. 나를 이끌어 어둠 안에서 걸어가게 하시고 빛 안에서 걸어가지 못하게 하셨으며 종일토록 손을 들어 자주자주 나를 치시는도다. 나의 살과 가죽을 쇠하게 하시며 나의 뼈들을 꺾으셨고 고통과 수고를 쌓아 나를 에우셨으며 나를 어둠 속에 살게 하시기를 죽은 지 오랜 자 같이 하셨도다...’
그러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화살을 당겨 나를 과녁으로 삼으심이여 화살통의 화살들로 내 허리를 맞추셨도다. 나는 내 모든 백성에게 조롱거리 곧 종일토록 그들의 노래 거리가 되었도다.’라는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당하는 고통이 얼마나 심했든지 ‘내 고초와 재난 곳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라고 하며 하나님께 호소하고 있습니다.
예레미야가 이렇게 진리를 따라 살려고 몸부림치며 좁은 길 좁은 문을 걸어갈 때, 진리의 가치 아는 사람들은 진리를 따르는 예레미야를 인정해 주고 협력해 주고 기도해 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들은 오히려 그런 예레미야를 멸시하고 대적했습니다. 그럴지라도 진리를 따르려고 몸부림치며, 좁은 길 좁은 문을 따라 살아가게 되면,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성령 하나님께서 역사해 주시고, 결국에는 이런 사람들을 좋은 물고기로 구분해 주실 것입니다. 아멘.
이 은혜는 고난을 각오하며 진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의 경험과 감격은 성령이 주시는 은혜이고 감격이며, 이것이 바로 참 신앙인이 경험하게 되는 경험이고 신앙의 감격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렇게 성령이 주시는 감격이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진리를 따르려고 하면 우리의 삶 속에서는 고난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세상 속에서 당하게 되는 고난이 우리에게는 큰 아픔이 되고, 세상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를 받으며 살게 되겠지만, 진리를 따르는 삶의 고귀함을 아는 사람들이 우리를 도와주려고 하고 협력하고 협조해 주려고 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받으며 사는 이런 은혜가 우리가 받으며 사는 은혜의 전부라면 우리는 낙심하고 넘어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진리를 따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고, 하나님의 성품을 알게 해 주실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과 성품을 함께 소유하고 살아가는 성도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중에 우리 자신을 하나님을 닮은 사람으로 변화시켜 주시는 이런 본질적인 변화보다 더 큰 은혜가 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저는 이 은혜가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주시는 은혜중에 가장 큰 은혜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비록 악마의 제복을 입고 있어도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은 어떤 곳입니까? 죄의 누룩이 가득 퍼져 있는 곳입니다. 비진리가 성행하고 있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과 같이 공부하고, 일하고, 돈을 벌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겉모습만 보면 누가 진리를 따르는 사람인지 알 수 없고 잘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 속 사람은 다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성품이 있고, 우리는 하나님이 품고 계신 마음을 함께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역사 종말의 날이 오면 하나님은 무엇을 보고 우리를 구분해 내시겠습니까?
우리가 이룬 업적을 보고 구분해 내시겠습니까? 우리가 세워 놓은 건물 보고 구분해 내시겠습니까? 우리가 모아둔 재산을 보고 구분해 내시겠습니까?
이런 것들은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보고 평가하는 방법입니다.
영으로 계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이런 외형적인 성과나 성취를 보고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을 보고 우리를 평가하시고, 하나님은 믿음 안에서 변화된 우리의 속사람을 보고,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우리를 의인으로 구분해 주시고, 우리를 좋은 고기로 분별해 내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이 그 물을 들어 올리시는 그 마지막 날에 우리 모두는 하나님에 의해 좋은 물고기로 구분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그물 비유는 이 세상 심판의 날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날에는 지금 이 시대와 가치 평가가 많이 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사람들 중에서 악인을 구분해 내실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의인 중에 있는 악인들이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외형적인 모습을 보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 내면적인 변화와 그 맺으며 살아온 거룩한 삶의 열매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들을 의인 중에 있는 악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모두는 진리를 따르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넓은 길이 아니라 믿음 안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고 협착한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충만한 은혜 안에서, 그 내면의 변화를 이루어 가면서, 거룩한 삶의 열매를 맺어나가는 알곡이 된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보면 우리는 좋은 물고기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심판하시는 그날 하나님이 의인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복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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