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마태복음 18:21-35
1.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에 대해
오늘 말씀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형제가 죄를 범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5-17절 말씀입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예수님이 말씀하신 포인트가 무엇입니까?
형제가 죄를 범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보고 가만히 있는 것은 바른 신앙의 자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형제가 범하며 살고 있는 죄를 마음 아파하며, 그 죄에서 떠나고 그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된 사람들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이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형제가 하나님을 믿지 않는대도 아무런 느낌이 없어서는 안 됩니다. 어린 자녀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할 때, 철없는 아이가 하는 의미 없이 말이라고 그냥 놓아두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있는 성도라면 우리에게는 죄를 싫어하고, 죄를 미워하고, 죄는 그 뿌리까지 없애 버리고자 하는 강한 소원이 있어야 합니다.
왜 성도들에게는 이런 마음이 있어야 합니까?
성도들을 다른 말로 하면 죄를 싫어하고, 죄와 싸우며 살아가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성도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죄와 싸웁니까?
첫 번째는, 우리 안에 있는 죄와 싸웁니다.
우리 마음 안에서 아담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의 마음도 있고,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듭나게 해 주실 때 주신 거룩한 마음도 있습니다. 이 두 마음이 우리 마음을 전쟁터로 삼고 치열하게 싸우고 있습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치열하였으면 사도 바울은 이렇게 탄식하지 않았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후에는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할렐루야! 아멘.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인은 사도 바울처럼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죄와의 싸움에서 승리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죄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하게 됩니까?
하나님이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성령을 통해 주시는 생명의 역사가, 성도들을 죄와 사망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 주시고, 해방시켜 주실 때 승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들이 죄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이긴다는 것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죄와의 싸움을 이깁니다.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죄와의 싸움을 이깁니다.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역사 안에서 죄와의 싸움을 이기게 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또 성도들은 어떤 죄와 싸웁니까?
두 번째는, 형제들의 죄와 싸웁니다.
우리가 형제들의 죄와도 싸워야 한다고 하면 이렇게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마음 안에 있는 죄, 내 죄와 싸우는 것은 이해가 되는데, ‘형제들이 지으며 사는 죄와도 싸워야 한다는 말은 이해가 안 됩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이 지으며 사는 죄는 형제들이 싸우고, 나는 내 안에 있는 죄와 싸우며 사는 것이 아닙니까?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형제들이 지으며 사는 죄에 대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형제들이 죄를 지으며 사는 모습을 보면 어떻게 하라고 합니까? 먼저는 죄를 지으며 살고 있는 그 형제를 개별적으로 찾아가 만나서, 그 죄를 지적해 주고, 죄를 죄로 인식할 수 있도록 해 주어서, 그 죄악 된 삶에서 떠나도록 권면하라고 합니다.
우리가 자주 실패하는 것이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형제의 죄를 발견하게 되면, 그 죄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며, 사랑으로 형제를 권면할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기보다는, 그 형제의 죄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고, 그 사람의 의견을 구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형제를 염려하고, 지켜주고, 보호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오히려 사람들에게 그 형제의 허물을 들추어내는 것이 되고, 그 형제의 은밀한 죄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는 것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는 형제를 도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를 돕는 가장 기본적인 마음은, 애정을 가지고, 안타까워하면서, 죄에서 돌이킬 수 있도록 은밀하게 사랑으로 권면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노력을 한다고 모든 형제가 다 돌이키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그 범죄하고 있는 형제를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해 줄 수 있는 다른 사람, 그 형제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사람을 데리고 가서 함께 형제를 권면해 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해도 듣지 않고 완고하게 나오면 이제 개인적인 노력은 포기하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에 그 형제를 맡겨 보라고 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어떤 곳입니까?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신 공동체, 그리스도의 몸이 된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와 은혜와 사랑이 나타나고 있는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사람들을 성령 안에서 거듭나게 하여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공동체입니다.
교회 공동체는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 나라 대사관과 같은 곳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은혜는 이 교회를 통해 세상에 전달됩니다. 그래서 이 교회 공동체에 순응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있지만, 이 교회 공동체를 거부하고 대적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없습니다.
죄를 범하고 있는 그 형제가 교회 공동체의 권면을 받아들여 회개하고 돌이키면 다시 형제로 받아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교회 공동체가 해 주는 권면의 말을 거부하고 듣지 않는다면 그런 사람은 이제 이방인이나 세리 같이 여기라고 합니다.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라는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과 세리는 교회라는 교제의 공동체에서 떠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라는 교제의 공동체와는 무관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교회 공동체의 권면을 듣지 않는 그런 형제와는 더 이상의 성도의 교제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겨 ‘성도의 교제’를 끊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신 이 말씀의 강조점은 어디에 있습니까?
죄를 범하고 있는 형제를 돕기 위해서 너희가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그 형제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게 되면 너희는 그 형제를 다시 얻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죄를 범한 형제를 이방인같이 여기라는 징벌적인 의미에 강조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 형제가 죄를 회개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가 담겨 있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은, 이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범죄 한 형제를 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범죄한 형제까지 사랑할 수 있는 이 마음을,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에게도 주시길 소원합니다.
2.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베드로의 질문
예수님께서 이 가르치심을 주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질문을 합니다.
18:21절입니다.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베드로는 왜 이 질문을 했겠습니까?
베드로에게는 까다로운 형제가 있었습니다. 그 형제는 늘 이렇게 베드로를 비난하고 다녔습니다. ‘베드로야 너는 전에도 변변치 않은 벌이로 아내와 장모를 힘들게 하더니, 이제는 아예 아내도 장모도 돌보지 않고, 예수님을 따나 다니는 것이 바른 믿음이냐?’ 베드로야! ‘너는 하나님을 위해 그렇게 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 일도 아니고, 가장으로서의 책임도 하지 못하고, 네 인생만 허비하는 일인 줄을 모르느냐? 이 어리석은 놈아.’
이 형제는 늘 베드로를 힘들게 하는 형제였습니다.
항상 베드로가 듣기 거북해하는 말, 비판하는 말만 하고 다녔습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없는 곳에서는 있지도 않은 각종 험담과 비난을 쏟아내었습니다. 요즘으로 보면 마치 우리나라 정치인들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정치인 중에 어떤 사람이 인기가 있습니까? 각종 비난과 비방을 쏟아내며 선동하는 사람들이 인기가 있습니다. 이런 모습은 이 시대가 얼마나 타락한 시대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런 형제를 이해해 주려고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그러나 그 형제는 한결같이 베드로를 대적해 왔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죄를 범한 형제를 몇 번은 용서해 주라’라는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당시 사회적인 통념보다 훨씬 더 관대한 기준으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이 베드로의 질문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일곱(7) 번을 일흔(70) 번 하면 사백구십(490) 번이 됩니다. 하루에 사백구십(490) 번까지도 용서해 주는 것이 가능합니까? 490번을 하루 24시간으로 나누면 1시간에 20번 이상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하루 8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 490번을 16시간으로 나누면 1시간에 30번 이상을 용서해 주어야 합니다. 2분에 한 번 이상 용서해 주어야 가능한 횟수입니다.
이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은 그 형제와 하루 꼬박 같이 붙어 살고 있어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 말씀은 하루에 490번까지 용서해 주라는 말씀이 아니고, 계속해서 용서해 주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너희가 믿고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이 용서의 하나님이시듯이 너희들도 용서의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비유
이어 예수님은 우리가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라고 부르는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학자들은 이 비유의 말씀이 실화였다고 합니다. 당시 유대인의 사회에서 있었던 이야기였으며, 예수님도 제자들도 잘 알고 있었던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그 내용은 이렇습니다.
당시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 대왕에게는, 오늘날로 말하면 국세청장급에 해당하는 한 관리가 있었습니다. 이 관리는 수십 년을 헤롯의 신하로 있으면서 세금을 관리해 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헤롯이 왕국의 세금 징수 내역을 감사하다가, 이 관리가 세금을 착복해 먹은 것을 찾아내게 됩니다. 그 금액이 무려 일만 달란트나 되었다고 합니다.
당시 일만 달란트는 굉장히 큰돈이었습니다.
당시 화폐 단위를 보면, 은 한 달란트는 로마인의 화폐 단위로는 6,000데나리온이었고, 유대인의 화폐 단위로는 6,000드라크마였습니다. 그리고 한 데나리온. 한 드라크마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전이나 오늘날이나 노동자의 하루 품삯은 숙련 정도에 따라서 천차만별입니다.
오늘날 가장 낮은 일용직 노동자의 하루 품삯을 한 10만 원으로 계산해 보면 한 달란트는 무려 6억 원이나 됩니다. 그런데 이 관리가 착복한 돈이 일만 달란트였으니 6억 원 곱하기 1만을 하면 약 6조 원이나 되는 아주 큰 돈이었습니다. 이 돈은 이 관리가 평생을 갚아도 갚을 수 없는 돈입니다. 이 관리는 이렇게 천문학적인 돈을 착복한 것이 드러나서 이제 꼼짝없이 엄벌을 받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헤롯 왕은 이 일 때문에 노발대발하였습니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 신하의 모든 재산을 압류하고, 또 그 돈을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어 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공교롭게 그 해가 유대인의 희년이 있는 해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희년이 되면 모든 빚을 탕감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매매한 토지도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희년이 되면 사람들이 그 조상들로부터 물려받은 기업을 회복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유대인의 토지법이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는 희년 법이 있었기 때문에, 부자는 언제나 부자로 살고 가난한 자는 언제나 가난한 자로 사는 오늘날과 같은 가난의 악순환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무리 빚을 많이 졌어도, 이 희년이 되면 다 탕감을 받고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경제정의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50년마다 자기 기업의 땅을 회복하게 되니, 아버지가 가난하다고 아들까지 가난해지지는 않았습니다. 그 누구라도 성실하게 노력하기만 하면 새롭게 다시 시작할 수 있었던 사회가 바로 유대인의 사회였습니다.
유대인의 희년 법은 50년마다 그 토지를 원주인에게 돌려주는 법입니다.
이 법은 토지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고백하는 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각 지파에게 주신 기업을 서로서로 인정하고, 희년이 올 때마다 토지를 그 원 소유주에게 돌려주었습니다. 이 희년 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섬기며 사는 신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증명해 주는 법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의 법은 다릅니다.
이 세상의 법은 개인의 소유를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소유한 재물로 더 많은 재물을 모을 수 있도록 법으로 보장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자들이 계속해서 더 많은 부를 축적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상의 법입니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주된 목적은 재물을 모으며 사는데 있습니다.
왜요. 이 세상은 재물이 곧 힘이고, 권력이고, 신인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세상을 향해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희년 법을 통해 경제적인 정의 실현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이런 희년 법을 믿음이 없는 부자들이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이 희년 법은 믿음이 없는 부자들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법입니다. 부자들에게 이 희년 법은 저주와 같은 말씀이고 제도였습니다. 그래서 부자들 중에는 희년이 되었어도 그 소유물을 원주인에게 돌려주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게 자신의 의식주 문제를 해결하며 풍요한 삶을 살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모으고, 자기를 위해 더 많은 부를 축적해 나가길 원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욕심과 이기심이 만들어낸 이 세상의 제도들이 하나님 축복의 통로를 막는 나쁜 장벽이 되었습니다. 이런 나쁜 제도 속에서 부자가 된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어느 사회든지 부자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부자들은 재물을 더 늘려서 더욱더 큰 부자가 되려고 하지, 그 가진 재물로 가난한 사람들을 돕고,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일에 쓰려고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자들에게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이런 부자가 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부유하거나 삶의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그 지갑을 열어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면 이 행위는 사람들이 나쁜 제도를 통해 막아놓은 장벽을 허물고 선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이 행위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신 일을 하나님 대신해 주는 행위가 됩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선행을 마치 하나님께 꾸어준 빚으로 생각하시고 반드시 하나님이 대신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다 부자가 되시되 이렇게 멋진 부자들이 되셨으면 합니다. 아멘.
누가복음 4:18-19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런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씀을 가지고 좌파 행방 신학자들은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서라면 폭력도 정당하다고 주장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가 바로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해방을 주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신 이유도 사람들에게 자유를 주고, 해방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해방신학자들은 예수님 안에서 자신들도 해방의 명령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해방을 주기 위해서는 군대를 조직하고, 쿠데타를 일으키는 폭력도 불사하고, 권력자들과 부자들과 싸워야 한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18절 말씀만 보고, 19절 말씀은 보지 않은 것입니다. 19절에서 말씀하고 있는 이 ‘주의 은혜의 해’는 바로 ‘희년’을 말합니다. 이 ‘희년’은 폭력으로 쟁취하는 희년이 아니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자원하여 행하는 희년이고 스스로 원해서 행하는 희년’인 것입니다.
이 희년의 사전적인 의미는 ‘무르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무르다’라는 이 단어는 또 ‘구속’이라는 단어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속하셨다는 말은, 원래 하나님의 소유였던 우리들을 한 때 마귀에게 빼앗겼다가 다시 찾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그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다시 찾으셨다는 것입니다. 이때 지불한 값이 바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그 보혈의 피로 값을 치루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구속’이고, 또 우리의 ‘희년’인 것입니다.
그런데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었습니다. 이두매 사람으로서 유대인의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래서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통성을 인정받기 위해, 제사장의 딸 ‘미리암네’를 그 아내로 맞아들였습니다. 헤롯은 유대인의 왕이라는 그 왕위를 인정받기 위해서 정략결혼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또 이 헤롯은 유대인들에게 환심을 사기 위해서, 초라하게 지어진 스룹바벨 성전, 오랜 세월이 흘러가면서 곳곳이 무너진 그 스룹바벨 성전을 아주 호화롭게 재건축하고 있었습니다. 이 성전 공사는 많은 인력과 재물이 들었기 때문에 수십 년에 걸쳐서 계속 진행해 오고있는 중이었습니다.
헤롯은 왜 많은 재물을 드려서 성전 재건축을 해 오고 있습니까?
헤롯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에게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을 받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은 성전 벽을 헬라의 신전들과 같이 흰 대리석으로 꾸미고, 그 바깥을 금으로 써서, 헬라의 어느 이방 신전 못지않게 아름답게 꾸미고 있었습니다.
이런 헤롯에게 한 신하가 지혜로운 조언을 해 왔습니다.
왕이여! 왕의 관리가 왕에게 큰 재산적인 손해를 끼친 것은 용납할 수 없는 행위이고, 그 사람의 죄를 추궁하면 왕의 진노는 어느 정도 풀리시겠지만, 그러나 그 허비된 재물을 찾는 것을 어차피 불가능하니, 그럴 바에야 왕은 실리를 취하시는 것이 더 낮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면서. 금년은 유대인의 희년이고, 유대인들은 희년이 되면 모든 것을 탕감해 주는 법이 있는데, 이것은 유대인들도 지켜 행하기 어려워하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왕이 이 희년에 일만 달란트를 착복한 그 관리의 모든 부채를 다 탕감해 주게 되면, 왕의 그 행동이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율법을 존중하는 사람으로 인식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면 왕의 지위가 이전보다 더욱 확고해지지 않겠습니까? 라는 조언하였습니다.
신하의 이 지혜로운 말을 듣고 헤롯 왕은, 일만 달란트를 받지 못하게 되는 것이 너무나도 아까웠지만, 유대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그해 희년에 일만 달란트를 착복한 종의 죄를 사면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모든 것이 다 잘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곳에서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헤롯 왕으로부터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많은 돈을 사면받은 이 관리가 집으로 돌아가다가 자기에게 100데나리온 빚을 진 부하를 만나게 됩니다. 이 관리는 그 부하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갚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부하는 엎드려 간구하면서 ‘나에게 조금만 더 기회를 주소서. 내가 꼭 갚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관리는 허락하지 않고 그 부하에게 만약 그 돈을 지금 당장 갚지 않으면 평생 감옥에서 살아야 할 것이라고 하면서 그 부하를 감옥에 가두었던 것입니다.
광경을 지켜보던 어떤 사람이 이 일을 헤롯 왕에게 일러바쳤습니다.
‘왕이여 왕은 희년이 되어서 일만 달란트라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었는데, 그 탕감을 받은 그 관리는 자기 부하가 빚진 100데나리온의 적은 돈도 탕감하여 주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는 것을 제가 직접 보았습니다.’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헤롯 왕은 노발대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관리를 다시 불러오라고 하고서는 이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32-34절입니다.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이 관리는 헤롯으로부터 한 달란트라는 큰돈을 탕감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모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은혜에 대한 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리가 그 탕감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이라면, 은혜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기 부하를 그렇게 엄하게 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헤롯 왕의 이야기를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면서 35절에서 결론적으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3. 말씀을 통해 주시는 메시지
여기 나오는 1만 달란트는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이것보다 훨씬 더 큰 것이지요. 이것은 다만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이 큰 은혜를 받은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우리에게 100데나리온의 빚을 진 사람에게 긍휼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100데나리온은 우리가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진 일들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살아야 할 마땅한 삶이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35절의 말씀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를 범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지 않으시겠다는 말씀 같아 보입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주기도문에도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이 주기도문의 고백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삶을 산 것 같이, 우리의 죄도 용서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만이,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범하며 사는 죄를 용서하는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속죄 재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이셨습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이 예수님께서 그 속죄의 은혜를 입은 성도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고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던 것 같이, 우리들도 원수를 사랑하고, 그 원수가 예수를 믿고, 죄 사함을 받아서,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도록 기도해 주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런 삶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살았던 스데반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은 자신이 믿고 있었던 신앙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돌에 맞아 순교하면서 먼저는 자신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고 또 다음에는 자신을 죽이는 사람들의 죄 용서를 위해 기도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이런 삶을 통해서,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용서의 복음 안에서 자신도 죄인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기고, 용서해 주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람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그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은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이 지은 죄를 마음으로 용서해 주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죄를 용서받은 사람이고,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마음으로 용서하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사람은 아직도 그 죄를 용서받지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35절에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그래서 주기도문에서는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무엇이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까?
첫째, 죄의 용서를 경험하고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죄를 용서해 주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대로 내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용서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용서의 복음을 경험한 사람들이 바로 용서의 은혜를 아는 사람들이고, 용서의 능력을 아는 사람들이고, 용서의 사랑을 아는 사람들이고, 용서의 회복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사실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란? 자신이 용서받은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속에서는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도 화를 내시고 분노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의 신실한 일군으로 살았던 사도 바울도 베드로가 외식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고 분을 내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사도 바울은 바나바가 그 조카 마가 요한의 잘못된 삶을 두둔하는 모습을 볼 때 화를 내고 다투다가 전도팀이 쪼개지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세상에는 이런 거룩한 분노도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화를 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어서 화는 내었더라도, 그 화를 저녁까지 마음에 품고 있지 말라고 합니다. 그 화 때문에 죄를 짓지 말라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 있게 될 때라도 용서의 복음을 기억해 내고 마음으로 용서하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 됨이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화를 내어도 죄를 짓지 않고, 화를 내어도 그 화를 마음에 품고 살지 않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루 490번이라도 자기 자신을 용서하고, 이웃을 용서해 주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아멘.
또 무엇이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까?
둘째, 마음의 변화, 속사람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은 것을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 구원을 위해 살아갈 수 있고, 자신의 죄가 용서 받았다는 것을 아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는 삶을 살 수가 있고, 자신이 하나님 나라 백성된 것을 아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 나라 가치관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음으로 용서가 안 되는 것을 용서해 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셨을 때, 마치 동에서 서가 먼 것 같이 그렇게 우리의 죄를 멀리 보내셨듯이, 마치 안개의 사라짐 같이 우리의 죄를 다 사라지게 하셨듯이, 마치 아사셀 양이 광야로 가서 사라짐같이 우리의 죄가 어디론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해 주셨듯이, 우리 마음 안에서도 미움이 사라지고, 적개심이 사라지고, 악감정도 사라지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런 변화가 그 마음 안에서 일어난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런 마음의 변화에서 변화된 삶이 따라 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의 삶에도 이런 변화들이 있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또 무엇이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까?
셋째, 행함으로 역사하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야고보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니라.”
이 말씀은 어떤 사람이 나는 믿음으로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다른 사람의 죄를 용서해 주지 않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런 사람이 가지고 있다고 하는 그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행함으로 나타나는 믿음이 산 믿음이고 참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말씀하기를 “네가 보거니와 믿음은 그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이렇게 볼 때 야고보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삶으로 행위로 들어난 믿음의 중요성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또 무엇이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줍니까?
넷째, 영적인 세계를 보는 눈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 안에서 그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그 영이 살아난 사람, 믿음으로 그 영적인 눈을 뜨게 된 사람이라면, 육체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만 보지 않고, 그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영의 역사까지 함께 보며 살아갑니다. 악한 영이 그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지, 하나님이 영이 그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지를 보며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이런 삶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정사와 권세와 이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움”이라고 합니다. 이것을 알고 있는 우리들은 악을 행하고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화를 내기 이전에, 그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악한 마귀에게 화를 내고 분노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예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우리 하나님이 범죄 한 아담과 하와에게 죄를 묻고 진노하시기 이전에, 먼저 사단의 도구가 되어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뱀에게 진노하시고 그 죄를 물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렇게 하였으니 네가 모든 가축과 들의 모든 짐승보다 더욱 저주를 받아 배로 다니고 살아 있는 동안 흙을 먹을지니라.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또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고난받고 죽으실 것이라고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하며 강하게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 보다 먼저 베드로의 배후에서 역사하였던 사단을 향해 “사단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라고 책망하셨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영적 세계를 환히 다 보고 계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사단의 희생 제물이 된 아담과 하와를 용서하실 수 있으셨고, 영적인 세계를 환히 다 보고 계시는 예수님이셨기에, 사단의 역사에 놀아난 제자 베드로를 용서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우리가 용서하는 삶을 살 수 있는 영적이고 신앙적인 근거가 어디에 있다는 것입니까? 우리가 범죄한 사람들만 보지 않고, 그 범죄한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는 악한 영들의 역사까지 보게 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하신 것처럼 먼저 사람에게 분노하지 않고, 그 사람의 배후에서 역사하고 있는 사단에게 분노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단에게 분노하는 마음 속에는 악령들의 희생 제물이 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성을 가진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영성을 가진 성도가 될 때 비로써 범죄한 사람들을 마음으로 용서해 주는 삶을 살 수 있고,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 같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용서하는 삶은 이 세상에는 없는 삶입니다.
이 세상은 내가 하나를 당했으면, 둘로 되갚아주고자 하는 곳입니다.
오늘날은 용서하는 삶이 점점 더 낮 설어져 가는 시대입니다.
용서하는 삶은 고사하고 자기와 견해가 조금이라도 다르면, 곧바로 원수가 되는 것이 이 시대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용서가 없으면 관계의 회복도 없습니다.
용서하고 용서받는 사이 속에서 관계의 회복은 이루어져 갑니다.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고 하면 거기에는 가장 먼저 용서 하는 삶이 전재 되어 있어야 합니다.
용서를 통한 대표적인 회복의 현장은 바로 십자가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첫 번째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죄인들을 용서해 주시기를 구하신 예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거룩하신 하나님과 죄인된 우리 사이의 깨어진 관계의 회복은 용서하는 삶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깨어진 관계 회복은 용서하는 삶에서 출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에게는 어떤 용서가 필요합니까?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는 먼저 나 자신을 있는 모습 그대로 용납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아픔을 주고 상처를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인도 하심과 주권적인 역사 하심까지도 용납해야 합니다.
이렇게 열린 마음, 열린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용서의 복음이 가져다주는 은혜와 능력과 자유함과 평안을 누리며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스데반과 같이 용서하는 삶의 거룩한 열매를 맺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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