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의 삶과 받을 상급
고린도후서 5:1-10
사람이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문제들 중에 가장 어려운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도 죽음의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죽음은 이길 장사는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죽음은 극복한 사람도 없고 넘어서 본 사람도 없습니다. 그래서 죽음 앞에서는 누구나 좌절하게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한번 죽는 것은 (사람들에게) 정해 진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또 죽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요즘에는 코로나 19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습니다. 어쩌면 죽음은 우리 앞에 우리 옆에 아주 가까이 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인생은 죽음을 향해 가고 있는 길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이라는 여행을 마치게 되면 직면하게 되는 것이 바로 죽음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전혀 죽음을 인식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과도한 공포 속에서 살기도 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죽음을 새로운 시작으로 보고 희망을 가지고 죽음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아보려고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그러나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왜요. 사람들은 누구나 죽음에 매여 살아야 하는 존재론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은 누가 줄 수 있습니까?
그것은 죽음 너머에 계신 하나님께서만 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사람들이 죽음의 문제를 이해하고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려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져야 함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만 죽음의 문제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말씀하고 있습니까?
고린도후서 5:1절 상반 절 말씀을 보면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이라고 합니다. ‘땅에 있는 장막 집’은 ‘성도들의 육체’를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땅에 있는 장막 집이 무너진다.’는 것은 죽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때가 되면 누구나 다 죽습니다.
그러면 왜 인간은 죽는 존재가 되었습니까? 처음부터 죽는 존재로 창조되었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먼저 이 문제를 살펴봅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땅의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창세기 2:7절 상반 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여기 사용된 ‘흙’이란 단어 ‘아파르’는 ‘마른 흙, 먼지, 티끌’ 등의 의미를 담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인간의 육체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는 ‘흙’ 또는 ‘먼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마른 흙, 진흙, 먼지, 티끌’을 사용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몸은 그 원 재료가 흙에서 왔기 때문에 결국 흙으로 돌아갈 존재입니다.
여기에 대해 창세기 3:19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이렇게 볼 때 죽음이란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흙으로 만들어진 인간의 몸이 다시 흙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임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하나님이 흙으로 만드신 인간의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창세기 2:7절 하반 절입니다. ‘.....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생기’는 ‘바람’과 ‘숨’과 ‘영’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흙으로 만든 사람의 코에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으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숨길’ 즉 ‘성령’을 불어 넣으셨다는 말씀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생령’ 곧 ‘살아 숨 쉬는 존재’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런 인간의 창조를 보면 다른 동물들의 창조와 구분됩니다.
하나님이 다른 동물들을 창조하실 때에는 말씀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공중에 새들이 종류대로 날으라. 바다의 고기들이 종류대로 있으라.’
그런데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는 그 손으로 직접 사람의 모양을 만드시고, 그 만드신 사람의 코에 하나님의 기운을 불어 넣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몸은 흙으로 창조 된 육체적인 존재이지만, 우리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하고 살아가는 영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이렇게 육체와 영혼을 함께 소유한 존재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죽으면 어떻게 됩니까?
사람이 죽으면 우리 육체는 흙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육체에서 분리된 우리의 영은 육체와 분리된 영들이 가는 장소인 낙원이나 음부로 가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대인 백 보좌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 낙원과 음부에 가 있는 영들이 영체 즉 영혼의 몸을 입고 부활하여서, 그 가지고 살아온 믿음의 유무에 따라 천국과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이 천국을 가게 되고, 어떤 사람들이 지옥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 5:1절 하반 절에서 하늘에 있는 천국이 바로 영원한 자기 집임을 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그러면서 바울은 어떤 사람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된다고 합니까?
고린도후서 5:5절입니다. ‘곧 이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에게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라.’ 이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이 우리가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라는 보증수표가 되신다고 합니다.
‘성령을 받지 못한 사람들’은 죽음을 저주라고 생각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아담의 ‘죄 아래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담의 죄에 속해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죽음 이후에 대한 소망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의 보증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주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은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 14:13절입니다. ‘또 내가 들으니 하늘에서 음성이 나서 이르되 기록하라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자들은 복이 있도다. 하시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라 하시더라.’
그러면 ‘주 안에서 죽은 사람들’은 왜 복 있는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에게는 죽은 이후에 천국에서 영생복락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안에서 죽은 성도들이 복 있다고 한 것입니다.
심지어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5:8절 말씀에서 이런 고백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있는 그것이라.’ 사도바울은 죽음 이후에 가게 될 천국에 대한 확고부동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생하며 더 사는 것 보다는 차라리 빨리 죽어 천국에 가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을 더 원한다고 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삶이 남달랐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불행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 확신이 없이 살고 있습니다. 성경의 증거가 ‘명명 백백’ 한데도 사람들은 무엇이라 이야기 합니까? ‘천국이 있는지 없는지는 가 봐야 알지,’ ‘설령 천국이 있다고 해도 내가 하나님을 위해 한 일이 별로 없는데 천국에 갈 수 있을는지는 알 수 없지,’ 라고 하면서 말을 흐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천국은 내가 행한 일이나 내가 이룬 업적으로 가는 곳이 아닙니다. 천국은 오직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으로 가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천국으로 가는 유일한 길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친히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또 예수를 믿음으로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지금 당장 죽어도 나는 천국 간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첫째는, 땅의 일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 천국에 소망을 두고 사모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2절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라.’ 이 말씀은 천국에 우리의 영원한 집이 있다는 것을 믿는 그리스도인은, 마치 고향을 떠난 나그네가 항상 고향을 사모하며 살듯이, 그렇게 항상 천국을 사모하며 살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천국을 사모하는 것은 다릅니다.
C.S 루이스의 『악마의 편지』라는 책에 보면, 사단이 그 부하들에게 자신의 전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내세를 인정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을 믿고 사모하지는 못하게 하라.” 이 사단의 말은 우리가 내세 곧 천국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과 그 천국을 믿고 바라고 사모하며 사는 것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에 있는 본향인 천국을 사모하는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삶이 나그네로 살고 있는 삶이라는 생각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땅에 있는 것들에 매이지 않고, 땅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13절입니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히브리서가 말씀하고 있는 이 사람들은 그 앞에 언급되었던 ‘아브라함, 사라, 이삭, 야곱’을 가리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까?
썩어 없어지게 될 이 땅에 소망을 두며 안주하는 삶을 살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땅에서는 마치 외국인과 나그네 같이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어떤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까?
베드로전서 2:11-12절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거류민과 나그네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이 말씀을 보면
첫 번째로 ‘영혼을 거슬려 싸우는 각종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육신의 본능대로 살아서는 안 됩니다. 성도들이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아가는 삶의 가장 기본은 ‘육신의 정욕’을 죽이고 제어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두 번째로 ‘행실을 선하게 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꼭 알고 있어야 할 것은, 그리스도인의 선의 기준은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선의 기준과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무엇을 선이라고 하고 있습니까?
세상 사람들은 서로를 배려하고 도와주며 살아가는 삶을 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지금 차별금지법을 제정해서 동성애자들을 도와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선은 다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자신을 창조해 주신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 앞에 서서,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이 선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선을 이해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이 세상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선을 이야기하지만, 성경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는 선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하신 요구가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런 요구를 하신다고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들을 바치려고 한 아브라함의 행위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 사건을 인간의 상식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무리한 요구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상식에 맞지 않는 하나님의 요구에 맹종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런 극명한 이해의 차이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에게서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당시 하나님이 사울 왕에게 하신 명령도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요구였습니다.
하나님은 사울 왕에게 무슨 요구를 하셨습니까?
하나님은 아말렉 사람들과 전쟁을 할 때 왕에서부터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들을 다 모아서 불태우고 그 우양들은 다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무리 아말렉 사람들이 악할지라도 그들 가운데에는 아직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 어린아이들이 무슨 잘못을 하며 살았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어린 아이들까지 다 죽이라고 요구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말렉 사람들은 광야에서 약탈을 주업으로 하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약탈해서 모아둔 많은 재물과 수많은 우양을 거느리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재물들과 짐승들을 다 불태워 죽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이긴 사울 왕에게 백성들은 무슨 요구를 합니까?
백성들은 하나님의 명령은 상식에 맞지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지 말고, 아말렉 왕 아각은 포로로 잡아가서 백성들에게 왕의 위엄을 보이시고, 아말렉 여인들과 아이들은 포로로 끌고 가서 종으로 삼고, 그 우양은 취하여서 그 중에서 실한 양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로 삼자.’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없었던 사울 왕이 볼 때 백성들의 말이 더 합당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사울 왕은 하나님에 의해 세움을 받은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소리를 듣지 않고 백성들의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기준이 다른 사람들입니다.
이것을 알고 있어야 바른 신앙에 설 수 있고 바른 믿음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믿음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 기준이 바르게 정립되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백성들과 같은 잘못된 요구를 우리에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이런 잘못된 요구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하나님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내가 영광 받기 위해 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내가 칭찬받고 내가 높아지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늘 보며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우리가 늘 보며 사는 사람들은 ‘내가 이런 사람이니 나를 좀 알아 달라.’라고 하고, 또 자기 자랑거리를 들추어내기 위해서 몸부림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런 삶을 살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죽은 사람처럼 살기를 결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나를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내가 죽는 그만큼 하나님을 드러내는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안에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들의 본향은 천국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은 여행자의 삶이고 나그네의 삶입니다. 우리 모두는 언젠가 우리의 본향인 천국으로 가게 될 사람들입니다.
친구들과 놀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 부모가 ‘이제 해가 저물고 저녁이 되었으니 집으로 가자.’라고 하면, 아이들은 그 가지고 놀던 것들을 다 버려두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제 그만 살고 너를 위해 마련해 둔 하늘나라로 오라.’라고 하면 우리는 이 땅의 모든 소유물을 다 놓아두고 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잠깐 소유하다가 놓고 가야 하는 세상 것에 너무 집착하며 살지 맙시다.
이 세상일들에 대한 미련도 너무 많이 갖지 맙시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영원한 천국 바라보며, 믿음으로 살았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처럼 이 땅에서는 외국인으로서 나그네로서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둘째는, 무엇을 하며 살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9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자기를 기쁨을 구하는 사람들은 내게 다른 사람에게 없는 그 무언가가 있으면 곧 교만해 지고 우쭐대려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이 없을 때는 곧 열등감을 느끼고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늘 ‘어떻게 하면 주님을 기쁘게 할까?’ 라는 생각만 하며 삽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법은 다양할 것입니다.
첫째로는, 예배를 통해,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 43:7절 말씀을 보면 ‘내 이름으로 불러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라고 하셨고, 또 이사야 43:21절에서는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로는, 복음을 전파하는 삶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복음 전파를 우리는 예수님의 지상명령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서 구원하는 것인데,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시면서 이 복음 전파를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에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하셨고, 마가복음에서는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고, 누가복음에서는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복음 전파는 우리가 세상에게 베푸는 최상의 사랑이며 자선입니다.
사람이 온 천하를 다 얻고도 그 영혼이 멸망되면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명령에 순종하여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자녀를 잃은 부모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채워질 수 없습니다.
그러면 이런 부모의 마음이 언제 채워지게 됩니까? 잃었던 아이를 되찾게 되었을 때입니다. 그 때 비로써 안심하고 만족하게 됩니다.
전도는 잃어버린 자녀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전도는 잃어버린 자녀를 향한 하나님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헌신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마음으로,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나선 아버지의 마음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주신 성품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은 거룩한 삶을 사는 자녀들을 기뻐하십니다. 베드로전서 1:15-16절입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되었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거룩한 삶은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삶입니다.
거룩한 삶은 그 어떤 손해가 날지라도 진실 편에 서고 의로운 편에 서서 사는 삶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성도된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시는 삶은 바로 거룩함에 있습니다.
넷째로는,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삶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베드로 전서 4:10절입니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우리는 주님의 몸 된 교회의 지체로서, 각각 은사 받은 대로 선한 청지기 같이 주의 일에 봉사해야 합니다. 찬양의 은사를 주셨으면 성가대에서, 가르치는 은사를 주셨으면 교사로서, 섬기는 은사를 주셨으면 섬기는 일로 봉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은사는 모두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선한 청지기 같이,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데 이 은사들을 사용해야 합니다.
그 방법은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공급해 주시는 힘으로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전서 4:11절입니다.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
다섯째로는, 주신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6-18절입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은 바로 항상 기뻐하는 삶, 쉬지 않고 기도하는 삶, 범사에 감사하는 삶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주신 말씀에 순종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또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셋째는,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의 날이 있음을 믿고 그 날을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고린도후서 5:9-10절입니다.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우리는 초상집에 가는 것보다 잔치 집에 가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로 잔치 집에 가는 것보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더 지혜로운 삶이라고 합니까? 그 이유는 초상집은 죽음과 죽음 이후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도록 해 주기 때문입니다.
요한계시록 20:11-12절입니다.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큰 자나 작은 자나 그 보좌 앞에 서 있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서 하나님의 흰 보좌 앞에서 모든 사람들이 심판받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그 때 두 가지 책이 펼쳐졌는데, 하나는 사람들의 선악간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 ‘행위 책들’입니다. 다른 하나는 구원받은 성도들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생명책’이었습니다.
이 생명책에 자기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사람들은 예수님은 보배로운 피로 그 죄를 사함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천국과 영생을 상속 받습니다. 요한복음 5:24-25절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이 말씀에 나오는 모든 약속의 말씀은 모두 과거 완료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뜻은 약 2024년 전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통해 다 이루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단지 그 예수님을 구주로 믿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받은 심판이 나를 대신해서 받은 심판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심판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백 보좌 앞에서 이루어지는 심판의 기준은, 우리가 죄인이냐, 의인이냐?, 선했느냐, 악했느냐?, 십계명을 지켰느냐, 지키지 못했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어주시고, 3일 후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유무가 그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지옥에 갔다면 왜 갔겠습니까?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지옥에 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천국에 갔다면 왜 천국에 갔겠습니까? 예수님을 자신의 구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유무가 지옥과 천국으로 갈라지는 합니다.
결국 우리 모두는 다 죽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이후에는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 때 예수님을 믿어 생명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사람들은 천국으로 가겠지만,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 자신의 죄 값을 받고 지옥에 가서 영원히 고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또 성경은 그 날에는 ‘각 사람이 행한 대로 상급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계시록 22:22절입니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 우리가 힘쓰고 애써서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한 헌신과 충성에 따라 우리가 받게 될 상급이 달라집니다. 천국에 가서 더 큰 상, 더 귀한 상을 받고자 하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어떤 상을 받게 됩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그 날에 받게 될 다섯 가지 면류관에 대한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 썩지 아니할 면류관입니다.
고린도전서 9:25절입니다.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이 면류관은 절제하는 삶을 산 사람들에게 주신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위해, 복음을 위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자기의 삶을 잘 관리하며 절제한 사람들에게 이 면류관을 주십니다.
둘째, 기쁨의 면류관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2:19절입니다.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하나님은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이 기쁨의 면류관을 주십니다.
셋째, 생명의 면류관입니다.
요한계시록 2:10절입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이 생명의 면류관은 예수님과 그 복음을 위해 고난을 받고 박해를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죽도록 충성한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넷째, 의의 면류관입니다.
디모데후서 4:7-8절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 이 면류관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그 달려갈 길을 끝까지 마친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다섯째,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베드로전서 5:4절입니다.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이 면류관은 힘을 다해 말씀으로 양 무리를 섬긴 사역자들에게 주어집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수고의 땀을 흘리고, 사랑으로 헌신하고, 희생의 눈물을 흘리며 살고 있다면, 우리들도 죽음 이후에 받게 될 상급을 내다보며, 초대교회 성도들과 같이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는 기도를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 그런 기도를 드리게 됩니까?
그 날이 오면 우리가 살아온 믿음의 삶에 대한 보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그 날이 되면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아온 우리들에게 면류관을 상급으로 씌워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날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실 상을 내다보면서 내게 주어진 직분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삶을 통해 충성과 헌신을 다하는 살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충성하고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시려고 예비해 두신 면류관을 받아쓰고, 하나님이 예비해 두신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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