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자유
로마서 8:1-4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로마서 8:1절에서 아주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사람들의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일까요?
죄가 가져다 준 정죄와 형벌이 모든 불행의 원인일 것입니다. 그런데 언제 이런 정죄와 형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까? 1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예수님 안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죄로 인한 정죄를 받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이어지는 2절의 말씀을 보면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아담 안에 있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법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있고, 둘째는 ‘사망을 가져다주는 죄의 법’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를 믿는 성도들을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을 통해 ‘죄와 사망을 가져다주는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셨다고 합니다.
모든 인류는 범죄한 아담의 모양과 형상을 닮은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이런 인류에게 가장 기쁜 소식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아담에게서 물려받은 죄와 죄의 정죄에서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절 말씀에서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죄를 이기고, 죄의 정죄에서 자유케 된 위대한 승리의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이보다 더 기쁜 소식은 없고, 이보다 더 위대한 선언도 없습니다.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바울은 어디에 근거를 두고 이 놀라운 선언을 하고 있습니까?
첫 번째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라는 이 표현은 신약 성경 속에 약 168회 정도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표현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바울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과 교회 밖을 구분할 때 무엇이 그 기준이 되고 있습니까?
교회 안과 밖을 구분되게 해 주는 칸막이벽이 그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칸막이벽 안쪽을 교회 안이라고 하고, 칸막이벽 바깥쪽을 교회 밖이라고 구분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지금 무엇을 기준으로 삼아 사람들을 구분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를 기준으로 삼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과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과 밖에 있는 것을 구분하는 기준은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우리가 가진 믿음은 신앙고백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한 신앙고백이 그 믿음의 기준점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믿지 않아서 그 자신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라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 신앙고백이 그 사람의 믿음을 보장해 주는 기준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가 그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이 행하시는 기적들을 보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는 밤에 예수님을 찾아와서 ‘나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보내 주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로 오신 분이심을 믿는다.’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런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네가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이 말씀은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믿고 신앙고백을 했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 나아와 신앙을 고백하고 믿음으로 그 병까지 고침을 받았던 수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성경은 이 사람들도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이 사람들 중 대부분이 나중에는 예수님을 떠나가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버렸다고 합니다.
마태복음 11:20-24절 /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하신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네게 행한 모든 권능을 소돔에서 행하였더라면 그 성이 오늘까지 있었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하시니라.’
또 마태복음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권세와 능력까지 받아서 귀신을 쫒아내고 많은 권능을 행사하며 사역해 왔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믿음 안에서 능력을 행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7:22절 이하입니다.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이 말씀도 충격적이지만 더 충격적인 말씀이 바로 히브리서 6: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들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았던 사람들이라도’ 이 사람들이 그 믿음에서 떠나 타락을 하게 되면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니라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 가진 믿음을 끝까지 잘 지켜 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그 가진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대표가 바로 문선명이고 박태선이 아닙니까?
이 사람들이 믿음이 없었습니까? 능력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이 사람들은 남다른 은사를 받아 가지고 사역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이 나중에 이단의 괴수가 되었습니까? 그 믿음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 믿음을 떠나 타락했던 것입니다.
이뿐 아닙니다.
심지어 예수님이 특별히 구별하여 세웠던 12제자라고 해서 다 그리스도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룟 유다는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까?
세 번째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사람들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첫째는, 예수님의 구속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의 구속이란? 예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해 행하신 일로서,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와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 행하신 구원 사역 전체를 말합니다. 바꾸어 말씀드리면 예수님의 성육신에서부터 시작되어 무덤에 장사되시기까지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과, 예수님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심에서 시작하여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심까지 그리스도의 높아지신 전 과정이 바로 구속사역의 과정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 예수님의 구속사역의 전 과정을 믿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둘째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들입니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칭함을 받고, 성령을 받고, 그 받은 성령 안에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기 위해서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남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이 니고데모에게, ‘네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니고데모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듭남이 있어야 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셋째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성화되어 가는 삶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되면, 자신이 거듭나 변화 된 사람이라는 것을 그 살아가는 변화된 삶을 통해 보여주며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거듭난 사람들은 반드시 성화 되어나가는 삶 즉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따라와야 합니다. 이런 삶의 증거가 있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정리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 세 가지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영혼이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셋째는 그 거듭난 영혼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살 뿐 아니라, 그 신앙과 삶이 점점 자라고 성숙해 나가는 삶의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되면, 받아 누리며 살게 되는 혜택이 무엇입니까?
성령 안에서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로마서 7:21-23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바울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죄의 종으로 죄에 사로잡혀 살았다고 합니다.
우리 역시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 죄의 종으로 죄에 사로잡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게 된 이후에 어떤 변화를 경험하였습니까? 로마서 7:25절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믿음을 가지게 된 이후에 그 육신은 전처럼 죄의 종으로 살고 있으나, 그 마음은 하나님의 법을 따라 살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러분들은 믿음 안에 선 분들이니까 이 두 말씀의 차이를 알고 계시지요.
그러면 이 두 말씀의 같은 점은 무엇입니까?
서로 다른 두 마음 갈등하는 두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21-23절 말씀은 죄의 종된 상태에서 갈등하며 절망하는 모습입니다.
25절의 말씀은 두 가지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지만 믿음을 주시고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8:1절에서는 이런 사람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2절에서는 그 이유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아멘.
이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이 아닙니까?
여러분은 지은 죄로 인해 절망하며 지금 예배자로 섭니까? 아니면 그런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격하며 감사하며 지금 예배자로 서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은 25절 말씀과 같이 이렇게 두 가지 상반된 모습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럴지라도 그리스도인들의 삶에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합니다. 로마서 8:1절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로마서 8:2절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죄를 드러내고 사망을 선언하는 율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는 그 용서 받고 사함받은 죄로 인해 받게 되는 정죄함은 없다고 합니다.
3절 말씀을 보면 이런 일은 율법이 하지 못하던 일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사람의 모양으로 보내주셔서 사람들의 죄를 속해 주시는 대속의 피를 흘려주심으로 된 일이라고 합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절 말씀을 보면 그래서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고 합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정리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을 통해 거듭난 사람이며, 그래서 죄와 사망의 율법에서 해방 받은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기 이전에는 아담에게 속하여 죄의 종으로 죄를 먹고 마시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의롭다 함을 받고, 하나님이 부어주신 성령 안에서 우리 영혼이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아담에게 물려받은 죄악 된 마음도 있고, 성령 하나님이 주신 거듭난 거룩한 마음도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두 서로 다른 마음이 갈등하고 있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마음을 갈등을 어떻게 이겨 나갑니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성령이 우리를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실 때입니다. 우리가 이 성령을 의지하고 살게 될 때입니다. 이 때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영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한 말씀이 4절입니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입니까?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며 살지만, 그 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섬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 받았다고 곧 바로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고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잘못할 수 있고 죄를 지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던 모세도 다윗도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사랑이 필요하고 긍휼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약점을 잡기 시작하면 죄인으로 정죄 받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자기 의로움에 사로 잡혀서 정죄하는 일을 합니다. 그래서 교회마다 분쟁이 일어나고 문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우리와 가까운 시찰회 안에서도 일어났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교회는 서로서로를 향한 사랑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서로서로를 사랑으로 품어주는 긍휼이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아멘.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 특징이 무엇입니까?
자기도 죄인이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들추어내는 일을 아주 잘 합니다. 그리고 그 찾아낸 죄를 법이라는 이름으로 정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인들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닮아 죄는 미워하고 싫어합니다. 그럼에도 그리스도인들은 우리 구주 예수님을 닮아 죄인들은 사랑하고 긍휼히 여깁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중요한 특징은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분쟁하는 교회에서 보게 되는 모습을 어떤 모습입니까?
교회 안에서 성도들이 믿음이라는 명목으로 그런 일들을 하고 있지만, 그 분쟁하는 일들 속에서 우리가 보게 되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살아야 하는 긍휼과 사랑이 없는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도 이런 교회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소아시아에 있었던 에베소 교회입니다. 이 에베소 교회에 예수님이 요구하신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사랑과 긍휼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만약 너희가 이 사랑을 회복하지 않고,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에베소교회를 더 이상 하나님의 교회로 인정해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중간 정리를 해 보면,
이렇게 볼 때 율법을 계명으로 알고 지키는 사람들은 아직 복음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또 율법을 지키며 살아야 하는 법 조항으로 알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아직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직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마음의 법으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가 하면 율법을 사랑의 법으로 알고 지키며 사는 사람들은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에 의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율법은 마음의 법으로, 사랑의 법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매주 교회를 다니고, 매 주일 예배드리고, 교회에서 직분 받은 사람, 혹은 모태신앙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들은 복음을 믿는 사람들이며, 믿음 안에서 거듭난 사람들이며,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로마서 8:1절 말씀을 다른 역본이나 킹 제임스 버전(KJV)으로 보면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자’ 라는 말씀이 더 있습니다. 이 말씀을 넣어서 문장을 매끄럽게 다듬어 보면 이렇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자기를 부인하며 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가 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해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오직 이런 사람들만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살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거듭나지 못하여서, 아직 육체에 속해 있는 사람들은 이런 삶을 살 수 없습니다.
물론 육체에 속한 사람일지라도 그 마음으로 그 생각으로는 이렇게 살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는 그 원하는 대로 살 수 있는 능력은 없습니다.
로마서 7:18-20절 말씀이 이런 사람들의 삶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내 속 곧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 선을 행하는 것은 없노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바 악을 행하는 도다.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래서 이런 사람들을 계속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공부하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리 날라리 같은 학생들일지라도 가끔씩은 ‘나도 공부해야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공부는 어떤 학생들이 합니까? 오직 자기가 지금 하고 있는 공부에 자기 자신의 미래가 달려 있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아니면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공부하지 않고는 미래가 없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는 학생들입니다. 이런 학생들만 꾸준히 공부합니다. 죽을 힘을 다해 공부합니다. 그 어떤 어려움이라도 다 이겨내고 공부합니다.
이런 학생들은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스스로 공부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학생들은 공부해야 겠다는 생각은 가끔씩 하지만 실재로 공부하지는 않습니다.
이런 학생들은 ‘공부를 해야 한다.’는 절박함도 없습니다. 유혹과 편안함을 참고 이겨내며 공부할 끈기도 없습니다. 그저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뿐입니다. 생각만 하지 몸은 따라주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참으로 공부하는 학생들은 어떤 학생들입니까? 끝까지 공부해 내는 학생들입니다.
바로 이런 내용들이 이어지고 있는 8:4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육신에 속해 있는 사람들’, 그래서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주로 육신의 일을 생각하며’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육신을 따라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그 영이 거듭나서’ 영을 따라 사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주로 영의 일을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만 끝까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믿음으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씀을 보면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라고 합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굴복할 수도 없다.’고 합니다. ‘육신에 속해있는 자는 하나님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말씀들을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는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믿음으로 부르는 사는 찬송가가 아마 288장일 것입니다. 그 가사가 어떻게 되어 있습니까?
‘예수를 나의 구주삼고 성령과 피로써 거듭나니 이 세상에서 내 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온전히 주께 맡긴 내영 사랑의 음성을 듣는 중에 천사들 왕래 하는 것과 하늘의 영광보리로다.
주 안에 기쁨 누리므로 마음의 풍랑이 잔잔하니 세상과 나는 간곳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렇게 볼 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느 한 순간에는 육체를 따라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는 성령을 따라 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그 자신의 전 삶을 성령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자신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그때까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이렇게 볼 때 히브리서 6:4절 이하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한 번 빛을 받고 하늘의 은사를 맛보고 성령에 참여한바 되고 하나님의 선한 말씀과 내세의 능력을 맛보고도 타락한 자들은 다시 새롭게 하여 회개하게 할 수 없나니.....’ 이 사람들은 믿음을 가졌으나 나중에 타락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은사를 많이 경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육신의 속한 사람이기 때문에 결국 육신에 속한 사람의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 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참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마태복음 7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 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끝까지)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이렇게 볼 때 이 사람들도 육신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그 맺으며 살게 되는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믿음을 고백하였다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고 합니다. 영혼이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5장에 나오는 초대교회 집사였던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어떤 사람입니까?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베드로가 이르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이르되 이것뿐이라 하더라, 베드로가 이르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하니....’ 이 사람들도 땅을 팔 때와 땅 판 돈을 교회에 바칠 때가 달랐습니다. 이것은 육신에 속한 사람들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했습니까?
어느 한 순간에는 육체를 따라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는 성령을 따라 사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바로 앞에서 살펴본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어느 한 순간에는 믿음으로 살다가 어느 한 순간에는 육체를 따라 살았던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 사는 사람들은 어떻게 일관성 있는 믿음, 변함없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까? 그 이유를 2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여기 ‘해방시켜 주었다.’는 이 말씀은 사실 ‘해방해 오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령의 은혜 안에서 성도들이 점점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성화되어 나가는 상태 속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도들은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그 사람이 변화고 그 삶이 변해 가는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볼 수 있듯이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되는 즉시 완전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통해 깎이고 다듬어져 나가면서 완전해 져 갑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우리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고 성화를 이루어 나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다른 보혜사로 오신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성화되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또 ‘해방시켜 주었다.’는 이 말씀은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역사하지 못하게 해 주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믿음으로 성령의 통제를 받으며 일관성 있는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놀라운 은혜를 누구에게 주신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서 성령님의 통제를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십니다.
그러면 이런 은혜를 입고 살아가는 우리가 이제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이상 육신을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성령을 의지하여 사는 삶, 성령과 동행하여 사는 삶, 성령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런 우리의 삶의 모델이 구약성경에 잘 나와 있습니다.
창세기 5:21절을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는 삼백 육십 오세를 살았더라.’
히브리서 11:5절입니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
구약성경을 보면 이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에녹의 삶은 우리가 성령님과 동행하며 사는 삶의 모형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인도함을 받으며 살게 될 때 비로써 그 삶은 점점 성화되어 나가고, 그 삶 속에서는 성령이 맺게 해 주시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자아가 왕으로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그 마음에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참 자유는, 이렇게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고 성령님의 인도하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고백하며 살게 되는 것이 바로 로마서 8: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시는 이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는 그리스도인 됨을 날마다 고백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가는 복 된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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