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고린도전서 10:31-33
들어가는 말
성경에서 아주 많이 사용되고 있는 단어 중 하나가 ‘영광’이라는 단어입니다.
이 ‘영광’이라는 단어 ‘독사’(δόξα)는 구약성경인 70인 역에 400회 이상 사용되었고, 신약성경인 헬라어 성경에 약 166회 정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것이 바로 ‘데오스 독사(θεός δόξα)’ 즉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성경을 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은 성부하나님께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살 때 하나님을 만났는데, 이 때 아브라함이 만난 하나님은 영광의 하나님이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때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믿게 된 하나님과 그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또 이 하나님의 영광은 성자 예수님께도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과 함께 기도하러 산에 올라갔다가 본 것이 바로 예수님의 영광이었습니다. 이 때 제자들이 경험한 예수님의 영광이 얼마나 경이로웠든지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내가 여기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초막 셋을 짓겠습니다.” 라고 했던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은 성도들이 그 삶을 통하여 세상에 보여주며 살아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5:16절입니다.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또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0:31절 말씀에서도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라고 하는 이 바울의 말씀을 통해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바울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먹든지 마시든지 그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생각하며 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먹든지’는 전후 문맥을 살펴보면 ‘우상의 제물’ 과 ‘성만찬’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을 하든지’는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적인 삶과 신앙적인 삶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으로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 초기기독교 역사에는 ‘이수정’이라는 아주 중요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당시 대학자였던 이병규의 아들이었습니다. 1882년 9월 임오군란이 난 후 조선정부에서는 일본의 선진농업기술을 배워오도록 이 이수정을 일본에 보냅니다. 이렇게 해서 일본으로 간 이수정이 만난 사람은 당시 일본의 대표적인 농학자였던 ‘쯔다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쯔다센’이 기독교인이었기 때문에 이수정은 자연스럽게 기독교를 접하게 됩니다.
이 이수정은 어느 날 한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 서구인인 것 같아 보이는 키가 큰 한 사람과 동양인인 것 같은 키가 작은 한 사람이 바구니에 책을 가득 담고 있었습니다. 선진 농업 기술을 배우러 온 이수정은 책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에게 ‘그 바구니에 있는 책이 무슨 책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중 한 사람이 ‘이 책은 당신 나라에 있는 그 모든 책보다도 더 중요한 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수정은 ‘무슨 책인데 그렇게 중요한 책이냐?’ 라고 묻자 그 사람은 ‘성경이다.’ 라고 대답하더라는 것입니다.
이수정은 이 꿈을 하늘의 계시로 받아들이고 성경연구에 몰입하다가 나중에 기독교신자가 됩니다. 이수정은 대 학자의 아들로 태어나서 뛰어난 머리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이었기에 1년이 채 안되어서 성경의 진리를 거의 통달하게 됩니다. 이수정은 ‘하나님의 창조’ ‘예수님의 구속’ ‘성령의 역사’ ‘종말에 대한 이해’ 등등 기독교인이 꼭 알고 있어야 할 거의 모든 지식을 갖추게 됩니다. 그 결과 일본 기독교계에서는 한국에서 온 고관의 자녀가 기독교인으로 개종했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게 됩니다. 그래서 이 이수정은 일본에서 한국기독교를 대표하는 중요한 인물이 됩니다. 이 이수정이 얼마나 열정적인 신앙의 사람이었는가 하면, 이수정이 일본 교회의 집회에서 대표로 기도하는 것을 본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인 ‘우찌무라 간조’가 감복했을 정도입니다.
이런 이수정에게 조선정부로 부터 귀국하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이 때 이수정은 고민을 하게 됩니다. 조선으로 돌아가 선진 농사기법을 지도하며 살까? 아니면 일본에 그냥 남아서 기독교 진리를 전하는 자가 될까? 하는 것을 놓고 고민하게 됩니다. 고민 끝에 이수정은 그 배운 선진농학으로 조선백성들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일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조선백성들이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게 하고자 결심하게 됩니다.
이수정은 이 일을 위해 일본어 성경은 한글로 번역하는 일을 하였으며, 또 미국 등 구미 교회에 한국선교를 요청하는 글을 써서 보내는 일을 하게 됩니다. 당시 미국은 2차 대 각성운동이 일어난 직후라 선교에 대한 열의가 아주 컸던 때입니다. 그래서 각종 선교모임에는 청년들로 넘쳤습니다. 성경은 보면 사도 바울이 ‘와서 우리를 도우라’ 라고 요청하는 마게도냐 인의 환상을 보고 마게도냐 지방으로 선교하러 갔듯이, 이 이수정이 보낸 편지를 접한 많은 청년들이 한국선교를 자원하여 나섰습니다. 이 중에는 한국에 온 최초의 선교사가 된 장로교의 언더우드 목사와 감리교의 아펜젤러 목사도 있었습니다. 이수정의 편지는 선교 열에 불타고 있었던 이 두 사람에게 감동을 주어서 결국 한국에 선교사로 오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한국 선교사를 지원한 언더우드는 한국에 오기 전에 요코하마에 와서 이수정을 만나 2개월 동안 한국어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 서를 들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기독교 선교역사상 선교사가 선교국의 국어로 된 성경을 가지고 입국한 예는 전무했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 목사는 이수정이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선교지인 한국에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이 언더우드의 목사 마음에, 아펜젤러의 목사 마음에 어떤 마음이 있었을까요?
이들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 복음을 위해 살고자 하는 불타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이들로 하여금 이전에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조선에 선교사로 오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수정의 마음속에는 무슨 마음이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다가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 이수정에게도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이수정으로 하여금 조선 사람들의 생활을 부요하게 하는 농학자의 길을 포기하고, 복음으로 조선 사람들의 영혼을 부요하게 하는 길을 선택하게 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이 간절한 마음이 이들로 하여금 그 길은 달랐지만 나름대로 하나님을 위해 살도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사실 우리의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 바로 우리 삶에 그대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전에 우상을 섬기고 우상을 만들어 팔았던 데라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브라함을 영광의 하나님이 친히 찾아오셔서 만나주셨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이후 영광의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75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은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갈 곳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 모르면서 순종하여 떠났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하였습니까? 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네 아들 네 독자 사랑하는 이삭을 내가 네게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드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그 말씀의 부당성을 지적할 수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일이며, 또 그렇게 하면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삭을 통해 약속하였던 “하늘의 별과 같이 수많은 자손들이 있게 될 것” 이라는 약속이 무산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하나님을 위해 살려고 하는 마음이 있었던 아브라함은 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새벽에 모든 준비를 갖추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나아갔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삶은 서로 다르지만 모두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루하루를 살게 되어 있습니다. 아멘.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을 뿐 아니라, 둘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이 있어야 합니다.
남편이 군인이었던 어떤 부인이 있었습니다.
그 남편은 초급 장교라서 신혼 때였지만 ‘훈련이다’ ‘출장이다’ 하면서 집을 비우는 날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믿음이 있는 부인이라서 장교사택 가까이 있는 어떤 교회에 출석하고 있었습니다.
이 부인은 갓난아기를 등에 업고 새벽기도에 참여할 정도로 열성적인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기도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어떤 남자에게 돈 100만원을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부인에게는 100만원이 아니라 단돈 10만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자꾸 그 남자에게 100만원을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집에 와서 이 일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자기는 이제 막 소위로 임관한 남편을 두고 있는 가난한 사람이고, 그 앞에서 기도하고 있는 남자는 그 입고 다니는 옷을 보면 자기보다 부유해 보였습니다. 그냥 보아서는 도리어 자기가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것 같은 처지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자신에게 그 부요해 보이는 남자에게 돈 100만원을 갖다 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그 사람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그날 낮에 교회로 가서 그 교회 사모님을 만나서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사모님은 그 분은 개척교회를 하다가 그만둔 목사님이신데 급히 써야할 돈이 있는데 그 돈을 구할 방도가 없어서 새벽에 작정기도를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부인은 교회 사모님으로부터 그 말을 듣고 남편도 모르게 그 날 부로 은행에 가서 대출을 받아서 100만원을 그 목사님에게 전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부인은 어떻게 이렇게 할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었던 이 부인은 자신에게 믿음을 주시고 또 날마다 충만한 은혜로 채워주시는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이 마음이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처음 보는 남자에게, 그것도 자기 수중에 없는 돈 100만원을 주라고 하실 때에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서 까지 주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 부인의 마음속에 하나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무리 이 부인에게 ‘네가 그 남자에게 100만원을 주라’고 해도 이 부인은 무슨 이유를 대고 또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령 자신의 수중에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돈 100만원을 가지고 있어도 주려고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구체적인 방법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려고 할 때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10:32-33절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먼저는 거치는 자가 되지 않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거치는 자가 되지 않는 삶은 어떤 삶입니까?
시각 장애인이 길을 걸어갈 때 가장 조심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가는 길 앞에 놓여 있는 장애물입니다. 그래서 시각장애인은 그 가는 길 앞에 장애물이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에 가장 신경을 많이 씁니다. 만약 장애물이 있는 대도 모르고 그냥 걸어가면 그 장애물에 발이 걸려서 넘어지게 되고 또 때로는 크게 다치게 됩니다.
성경에서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말은 이런 뜻입니다. 나의 말이나 행동이나 삶 때문에 다른 사람이 걸려서 넘어지고 죄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첫 번째 거치는 자가 된 존재는 바로 사단이었습니다.
사단은 하나님께서 그 형상대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가 거치 넘어지고 죄에 빠지게 되도록 했던 자입니다. 사단은 아담과 하와 앞에 함정을 파 놓고 올무를 놓아서 그들로 하여금 함정에 빠지고 올무에 걸려 죄를 범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앞에 놓여 있는 걸림돌은 제거해 주시고, 넘어진 사람들은 일으켜 세워주시고, 절망 가운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죄로 인해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죄 사함으로 얻게 되는 참 소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는 사단과 같이 사람들 앞에 함정을 파고, 사람들 앞에 올무를 놓아서 그 사람들을 넘어지게 하고, 또 죄를 짓게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하나님의 교회의 일원이든지 관계없이 너희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 다는 것 때문에 괜히 우리를 대적하고 적대시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는 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대적하는 사람들이나, 심지어 색 안경을 끼고 우리를 보는 사람들에게도 너희는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사람들에게까지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그런 사람들이 비록 지금은 우리를 대적하고 있고 또 우리를 어렵게 하고 있지만 그런 그 사람이 언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또 언제 구원받고 우리와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될지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사람들이 앞으로 믿음을 가지게 되는데 우리가 거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하나님 앞으로 기쁘게 나아 올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우리가 감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쉽겠습니까?
이런 일은 말로 하기는 쉽지만 실재 실천하며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이런 일을 하려면 우리는 속을 다 내 놓아야 합니다. 속도 없는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속도 없는 사람처럼 되어야 합니까?
나 자신을 위해서는 그렇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구원하시고자 하는 우리 이웃의 구원을 위해서 우리는 속도 없는 사람처럼 처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요. 무죄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죄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십자가를 기쁘게 져 주셨듯이, 우리들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속도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인 것입니다.
예수님이 사신 삶이 바로 이런 삶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우리에게 살기를 요구하시는 삶이 바로 이런 삶입니다. “너희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왜 이런 요구를 하셨습니까? 마치 속도 없는 사람처럼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제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다음은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33절입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우리는 어떤 사람들을 만나기 싫어합니까?
만나기만 하면 자꾸 트집을 잡고 비난하고 갈등을 일으키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피하고 싶어집니다. 그러면 우리가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입니까? 나를 인정해 주고 대접해 주고 나의 인격과 삶과 가치관을 존중에 주는 그런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꾸 만나고 싶어집니다. 만날 때 기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내 중심이 되어서 상대방으로 하여금 나를 따라 오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오히려 내가 상대방의 입장에 서서 상대방을 이해해주면서 상대방을 중심으로 관계를 맺어나가야 합니다. 그래서 빌립보서 2장을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어떻게 아담의 죄 아래서 고통하고 있는 우리들을 위해서 그 신성을 버리시고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성육신 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대신 고난당하시는 생애를 사시고 결국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는 대속의 제물이 되어 죽으셨는지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런 삶을 사셨습니까?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께 유익이 되고 또 예수님께 기쁨이 되어서 그렇게 하셨습니까?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이유는 우리의 입장에 서서 우리에게 유익을 주고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도 예수님처럼 “각각 자기의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서” 상대방에게 유익을 주고 기쁨을 주는 삶을 살려고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게 될 때 하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구체적인 삶의 방법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그 다음은 자신의 유익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교회사를 보면 기독교 신앙은 아주 초기부터 아시아에 전해졌었습니다.
인도인의 전설에 의하면 바울이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는 동안에, 도마는 인도에서 복음을 전했고, 바돌로매는 중국에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복음은 아시아에 전해졌습니다.
이 때 전도자들이 어떤 각오로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기록이 남아 있습니다. 그 기록을 보면 ‘전도자들은 모두 수염을 길렀는데 그 이유는 아시아 사람들에게 수염을 기르는 풍습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남여 종들을 두지 않았는데 이것은 기독교가 사람의 귀천을 없이하는 종교임을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또 개인적인 재물을 전혀 획득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기독교인들은 자신들은 가지고 있는 것을 모조리 남에게 나누어주는 자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식적으로 신앙을 전하지 않기 위해서 늘 몸소 계율을 굳게 지키고 하루 일곱 번 예배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꼭 성만찬을 행하였고 단식도 많이 행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살았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전도자들은 왜 이런 삶을 살았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잘 믿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유익을 주기 위해서 자신은 최대한 절제하는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바울이 고린도서를 기록할 당시에는 도축장에서 가축을 잡게 되면 먼저 그 중 일부를 신전에 드린 후에 그 고기를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래서 그 고기를 사 먹고 사는 일반대중들은 그 고기가 신전에 드려진 고기인지 드려지지 않았던 고기인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원하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신전에 드려진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상의 제물이 된 고기에 대해 당시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두 가지 서로 다른 견해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 큰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로서 비록 그 고기가 우상의 제물로 드려졌다고 하더라도 우상은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먹어도 괜찮다는 견해였습니다. 다른 하나는 믿음이 연약한 초신 자들이 가지고 있는 견해로서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고기를 먹으면 그것은 마치 그 우상 숭배에 참여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고기를 먹는데 양심의 거리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는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지만 믿음이 약한 다른 형제가 그 우상의 제물로 드려진 고기 먹기를 꺼린다면 나는 그 형제를 실족시키지 않기 위해서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바울은 왜 이런 결단을 했습니까?
그것은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서 그 사람에게 유익을 주려는 사랑에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은 고린도전서에서 문제시하고 있는 성만찬의 문제나, 결혼의 문제, 성령의 은사 사용하는 문제 등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모든 신앙과 삶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우선에 두었던 것은 바로 자기 믿음이나 자기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자기와 함께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사람의 유익이었습니다.
이런 바울이었기에 바울은 “유대인을 만나면 자신도 유대인인 것 같이 행동하였고, 이방인을 만나면 자신도 이방인인 것 같이 행동”하였다고 했습니다. 또 바울은 자신은 믿음이 강해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믿음이 있었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믿음이 연약한 자가 믿음에서 실족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한다고도 하였습니다. 또 동일한 이유에서 사도 바울은 순회전도자로서 교회의 전폭적인 재정 지원을 받을 수 있었지만 전도자가 교회로부터 재정적인 지원을 받는 것을 이상한 눈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에 자신은 스스로 일하면서 자비량 선교를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은 왜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다른 사람에게 신앙적인 유익을 주기 위해서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었던 권리를 포기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담임 목회자나 장로들이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만약 교회의 담임목사나 장로들이 교회와 성도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해서 바울과 같이 자기 권리를 포기하는 삶을 살았더라면 교회가 사회로부터 비난의 대상이 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은 교회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비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의 이기적이고 자기 권리를 포기하지 않으려고 하는 삶을 비난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우리들이 볼 때에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조그마한 다툼을 그렇게 큰 문제로 보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교회 안에서 있게 되는 다툼을 아주 큰 문제로 보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다툼들을 보면서 어떤 사람들은 교회나 자기들이나 똑 같다고 보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자기들보다 더 못하다고 보기도 합니다.
우리가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서 어떤 기도를 해야 하겠습니까?
교회를 담임하고 있는 목사와 장로들이나 성도들은 세상이 교회를 보는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라도, 자기 권리를 주장하며 다투지 말고, 자기 권리를 포기할 수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런 겸손한 믿음들이 교회를 통해 나타날 때 세상 사람들이 한국교회를 보는 인식이 지금과는 확연하게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사람은 모두가 다 이기적인 동물이라는 것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우리가 다 이기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이기적인 우리들에게 이타적인 삶을 살라고 요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의 기쁨을 구하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주는 삶을 살라고 합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이기심을 버리고 자기의 권리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라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절재하고 근신하며 살아가는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런 우리의 절제하고 근신하여 사는 삶을 통해서, 천하보다 더 귀한 사람들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천하보다 더 귀한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될 때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셋째,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될 때 회복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33절에서는 이런 요구를 하신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
우리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통해 세상 사람들이 마음이 열리게 될 때, 복음이 그런 사람에게 전해 질 수 있고, 복음 안에서 영혼이 구원을 받는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 또한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우리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열리고 복음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예수 믿고 구원 받게 되는 구원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교회라고 해서 교회성장이 우리 교회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각종 선을 행하며 사는 목적이 사람들에게 좋은 교회라는 평판을 듣는 것이 되어서도 안 됩니다. 우리의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언제나 영혼 구원을 향하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선한 마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사는 것은 다 우리 이웃 사람들의 영혼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습니까?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우리에게는 원수일지 모르나, 우리 하나님께는 원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원수가 된 그 사람도 하나님께서 그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하신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원수 된 사람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 주셨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고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대속의 제물로 십자가에서 죽어주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계속 전도자를 보내셔서 이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증거 하시면서 ‘예수를 믿기만 해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을 수 있다.’라고 증거 해 오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어떻게 예수님이 사랑하셔서 대신 죽어주신 그 사람을 우리에게 원수라고 하면서 미워하고 싫어하고 배척할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제시해 주신 구원의 길로 나아가는 것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들이 예수님의 은혜로 값없이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우리는 우리에게 원수가 된 그런 사람들도 복음을 믿고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오히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사랑해 주고 기도해 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들에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인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서 보듯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언제나 구원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을 기록해서 우리들에게 주신 이유도 바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독생 성자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신 이유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십자가에서 생명을 버리신 이유도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이 구원에 이르면 사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얻은 자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대기업의 총수가 되고, 세상의 최고의 상이라고 하는 노벨상을 받고, 세상을 호령하는 최고의 권력을 가진 자리에 올라가도 이 구원을 받지 못한 사람은 사실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사람이 됩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에서는 이 구원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고자 하는 우리의 마음도 이 구원에 맞추어져야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 앞에 거치는 올무를 놓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삶을 살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며 사는 삶의 목적도 다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요리문답교본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냐?’ 고 묻고 있습니다.
그 대답은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0:31절 말씀을 근거로 해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며 또 영원토록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삶’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사람의 제1되는 목적이고 사람이 이 땅에 존재하게 된 목적이고 사람이 살아가면서 가장 집중해야 할 삶의 방향이라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삶 이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 나가기 위해서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가장 중심적인 삶은 바로 복음 안에서 세상을 구원하는 사역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 10:31절 말씀이 우리들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내용입니다.
고린도전서의 이 말씀을 함께 살펴본 우리 모두는 고린도전서의 이 말씀과 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삶이 우리들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날들이 될 수 있도록, 매일 매일 기도하고 계획하고 실천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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