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명예로운 성도의 삶
히브리서 11장 1-2절
1. 명예가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던 1세기 사회
21세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든 생각과 행동은 서구 자본주의의 영향을 받아서 물질과 연관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직장을 다니고 사업을 하고 노동을 하는 이유도 바로 돈을 벌기 위해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심지어는 오늘날은 사랑 관심 애정의 표현 같은 우리들의 마음의 표현들까지도 돈으로 전달되는 시대입니다. 이렇게 오늘 날에는 모든 가치는 돈으로 평가되고 돈으로 전달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 살펴보게 될 히브리서의 배경이 되는 1세기 지중해 연안 사회는 달랐습니다. 그 당시에 사회를 지배하고 있었던 중심적인 가치는 돈이 아니었습니다.
1세기 사람들은 우리와 달리 돈보다는 명예를 최고의 가치로 여겼습니다.
내가 명예로운 사람이 되는가? 아니면 불명예스러운 사람이 되는가? 라는 것을 그 어떤 가치보다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명예를 잃어버리는 것을 마치 생명을 잃어버리는 것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히브리서가 기록될 1세기에 살았던 사람들은 오늘날 우리가 돈을 벌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듯이 명예로운 사람이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명예를 얻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오늘날의 부(재물)와 같이 조상으로부터 세습되어지는 경우입니다. 명예와 덕망이 있는 집안이라고 칭송을 받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그 당시 사회로부터 명예로운 사람으로 대접을 받았습니다. 또 다른 하나는 자신의 명예로운 행동을 통해서 명예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우리시대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듯이 명예로운 사람이라는 인정을 받기 위해서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그 이유는 명예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고 수치스러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부끄러움이었고 이런 사람들은 그 공동체로부터도 배척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2. 신앙 때문에 불명예스러운 사람이 되었던 그리스도인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대부분이 유대교를 믿고 있다가 그리스도를 믿는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로마에서 인정해주는 합법적인 종교였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로마가 인정해주는 합법적인 종교가 아니었습니다.
히브리서를 받았던 성도들은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였던 유대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사람들입니다. 이 일로 인해 기독교인들은 그 동족 유대인들에게 수치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조상들의 신앙을 버리고 조상들이 전해준 관습을 버린 자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자신이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들이 믿고 있었던 유대교를 믿지 않고 유대인들이 거부했던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동족 유대인들에게서 명예롭지 못한 사람들 취급을 받고 배척을 당했습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수치스런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 로마 사회는 다신교를 숭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이런 로마사회에서 명예로운 사람이 된다는 것은 여러 신들을 잘 섬기고 국가에 충성하는 등 사회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었는데 기독교인은 다신론을 부정하였기에 무신론자로 취급받았으며 또 이런 행동은 반사회적인 존재로 당시 사람들에게 비쳐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기독교인들은 동족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수치스러운 사람으로 여겨졌고 그 결과 로마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어려움으로 인해 어떤 성도들은 기독교를 버리고 로마의 합법적인 종교였던 유대교 신앙으로 돌아가므로 동족 유대인들로부터는 물론 당시 사회로부터도 명예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자 하는 유혹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를 부인하고 유대교로 돌아가면 잠시 잠깐은 명예로운 사람으로 인정받고 편안한 삶을 살 수 있을지 모르나 이런 삶은 잠시 잠깐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만이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가 이르게 될 때 참된 명예를 얻는 삶임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확신을 가지고 흔들리지 말고 신앙에 견고히 서도록 격려하고 있습니다.
1) 믿음의 정의를 통해서 확증함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 모두로부터 불 명예로운 사람으로 여겨지면서 삶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던 성도들에게 먼저 무엇을 통해 격려하고 있습니까?
히브리서 11:1절을 읽어보겠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서 증거를 얻었느니라.’
히브리서 저자는 믿음이란 어떤 것인가라는 믿음에 대한 증거를 통해 성도들을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히브리서 기자가 증거 하는 믿음은 어떤 것입니까?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믿음이란 현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성도들에게 약속으로 주어진 것 그러기에 성도들이 확신하고 바라고 있는 것의 실상이라고 합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바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창세기 3장 15절에 약속된 원시복음으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에 무수히 약속되었던 인류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대로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구원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종말의 날에 다시 오셔서 구원을 완성하실 것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기자가 말씀하고 있는 당시 성도들이 믿고 바라고 있던 실상입니다.
그러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는 무엇입니까?
이 증거라는 말은 당시 로마 법정에서 사용하던 법정용어입니다. 모든 인류는 모두 미래에 하나님의 심판대인 최후의 법정 앞에 서게 될 것인데 이 때 모든 인류는 하나님으로부터 ‘네가 가진 의가 무엇이냐?’ 라는 동일한 질문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이 때 어떤 사람들은 나의 선행이라고 하며 선행을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업적을 들어 보이고 어떤 사람들은 석가모니와 공자를 따른 삶을 보일 것이나 우리가 제출할 의는 비록 보이지 않으나 우리가 믿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보이지 않는 이 증거를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제출하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우리가 제출할 확실한 증거가 될 것입니다.
이 믿음의 정의를 통해서 히브리서 기자가 당시 성도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믿고 바라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영광스러운 구원의 완성과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증거 할 우리의 참된 의가 바로 예수를 믿는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비록 이 믿음 때문에 잠시 잠깐 불명예스러운 사람 취급을 받고 고난의 받고 심지어 극한 박해를 받더라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천국의 영광스러움을 우리에게 주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제시할 우리의 의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너희로 하나님 나라가 임하게 되었을 때 참 명예로운 사람이 되게 하는 실상과 증거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2) 구체적인 삶을 통한 증거
그러면서 구약시대 살았던 믿음의 사람들을 증인으로 내세우면서 믿음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증인으로 내 세우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많습니다만 처음에 나오는 아벨과 에녹과 노아와 아브라함만 살펴보겠습니다.
이 믿음의 선진들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그렇게 호의적이지 못하였습니다.
성경이 최초의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하는 아벨은 그 형 가인의 질투를 받고 어린 나이에 죽게 되었습니다. 그의 삶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결코 명예롭고 복된 삶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음을 보지 않고 하늘나라로 올라간 에녹은 그 당시 사람들의 긴 수명과는 달리 365세의 짧은 생을 살았을 뿐입니다. 단명한 셈이지요.
세상을 심판하는 중에 의인으로 불리면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던 노아의 삶도 당시 세상 사람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조롱당하는 삶이었습니다. 어디 홍수가 난다고 산 위에서 배를 짓느냐고 사람들은 노아의 믿음을 조롱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가 비록 약속의 땅에서 살기는 하였지만 나그네로서 유리방황하는 삶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믿음의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의 관점에서 보면 지혜 있는 삶도 명예로운 삶도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어리석어 보이는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판단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모두 세상적인 관점에서 볼 때는 불명예스러운 사람들로 취급받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통해 만나게 되는 아벨은 그가 하나님께 드린 제사를 통해 그가 가진 믿음을 보였습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할 정도로 모든 삶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있었습니다.
노아는 당대 유일한 의인이요, 완전한 자였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벗이요, 믿음의 조상이라고 불릴 정도로 믿음에 있어서 독보적이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인정하셨을 정도로 믿음이 신실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3) 이 말씀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었던 위로와 교훈
히브리서의 말씀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주었던 위로와 교훈은 무엇입니까?
이 말씀은 신앙 때문에 사람들에게 불명예스러운 사람 취급을 받고 배척과 박해 중에 있었던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큰 위로의 말씀이 되었을 것입니다.
늘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살았던 성도들은 자신들과 같이 믿음으로 제사를 드렸던 아벨을 받으신 하나님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극심한 박해 중에 일찍 죽임을 당한 가족을 둔 사람들은 믿음 때문에 일찍 죽었던 아벨의 삶을 생각하며 믿음으로 짧은 생애를 살았던 에녹의 삶을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또 이들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치면서 믿었던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부르시는 능력의 하나님께서 자신의 가족도 살려 주실 것을 바라보며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신앙 때문에 친족과 집과 가업을 모두 버리고 유리방황하거나 카타콤에 숨어서 외롭게 살아야 했던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야 했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박해를 피해서 외롭게 신앙생활을 해야 했던 당시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하여 홀로 되었던 노아의 삶을 통해 많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히브리서가 증거 하는 신앙의 선진들의 삶은 초대교회 성도들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을 이기고 믿음을 지켜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록 신앙을 가진 자신들이 신앙의 선진들과 같이 세상에서는 명예로운 사람이 되지 못하였지만 하나님 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실 상급을 바라보면서 믿음에 굳게 서서 신앙을 지켜나갔을 것입니다.
3.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이 받는 교훈
앞에서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아벨, 에녹,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 안에서 보면 하나님의 큰 축복 가운데 살았던 사람들이었지만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힘들고 어렵고 고달픈 생을 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경우에는 신앙 때문에 극한 어려움을 당하는 곳은 몇몇 나라일 뿐 대다수의 나라에서는 종교의 자유가 법적으로 보장되어 있습니다. 우리의 부도덕한 삶 때문이 아니고는 우리가 세상으로부터 불명예스러운 사람으로 오해 받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시대에 하나님은 신앙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 어떤 말씀을 주십니까?
우리는 젊은 나이에 형에 의해 죽을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불운한 삶을 살았던 아벨의 삶을 통해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믿음의 사람이란 먼저 하나님께 바른 예배 생활을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성공한 사람만이 삶에서도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생활을 통해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살아갈 은혜를 공급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은 주일 예배 한 번에 자신의 영적 생활을 의뢰하고 있는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위험합니다. 이 악한 세상에서 믿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는 할 수 있으면 주일저녁과 수요일, 금요기도회는 물론 새벽기도회에 참석하여 날마다 믿음으로 살 수 있는 영적인 힘을 공급받아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신앙은 날로 성장하고 성숙해나갈 수 있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의 성장은 우리가 투자하는 시간에 비례합니다. 제가 바라기는 우리 교회 모든 성도님들이 모두 아벨과 같이 예배 생활에 승리하여 하나님이 인정받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다른 사람들보다 짧은 생애를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던 애녹의 삶을 통해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다. 에녹의 짧은 생은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행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애녹의 짧은 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판단하시는 기준은 우리가 살아온 삶의 길이와는 전혀 상관없이 우리가 소유한 신앙과 인격을 보시고 판단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에녹 같이 하나님과 동행하여 산다면 비록 오래 살지 못하고, 많은 부를 소유하지 못하였고, 뛰어난 명예를 소유하지 못했더라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복된 삶입니다. 비록 우리가 높은 지위와 부와 명예를 소유했다고 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아니라면 그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그것이 바로 신앙인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을까요?
우리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이십니다. 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성육신하여 예수 그리스도로 육신을 입고 세상에 계실 때에는 육신을 입고 제자들과 함께 동행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 오순절에 성령을 보내주셨는데 오순절이후 오늘날까지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성령 하나님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성령 하나님과 동행하려면 날마다 기도하면서 우리 인생을 성령님과 동업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 때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늘 기도하면서 기도하기를 쉬는 것을 심지어 죄로 여겼던 사무엘과 같이 기도에 깨어있는 성도들이 다 되어야겠습니다.
믿음으로 요령도 없이 고지식하게 살았던 노아의 삶을 통해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사람들이 자기 지혜로 스스로의 인생을 개척하고, 자기의 업적을 쌓아나갈 때 노아만 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살았습니다. 하나님이 그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다 준행하였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이 세상을 물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하면서 어마어마한 배를 산 위에 짓게 하셨을 때도 그는 순종하였습니다.
이런 노아의 삶을 믿음이 없는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 눈에는 노아가 정신이 이상한 어리석은 한 사람의 노인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신앙에서 떠난 시대에 홀로 믿음의 삶을 살았던 노아는 많은 사람의 웃음거리였고 조롱거리였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노아를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요,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쩌면 이와 같을지 모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자기의 부와 성공과 명예와 권력을 얻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고, 전도하고, 주의 교회에서 봉사하며, 주님을 섬기는데 모든 시간을 드리고 모든 삶을 드립니다.
이런 우리의 삶은 세상 사람들이 보면 어쩌면 노아의 삶과 같이 어리석은 삶으로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편에서 보면 어리석은 사람들은 우리가 아니고 정함이 없는 재물과 명예 등 세상 것에 취하여 영원한 것을 잃어버리는 이 세상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믿음으로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목적지도 모르는 채 고향을 떠났고, 가나안에 이르러서도 외국인과 나그네로 더 나은 본향인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어떻게 그렇게 살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이 가졌던 신앙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아브라함의 신앙은 자신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의 입장에서 순종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모습은 그의 고향을 떠날 때도 볼 수 있으며, 조카 롯과 헤어져 살게 될 때도 볼 수 있으며, 그 절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그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에 나타납니다. 우리는 이런 아브라함을 통해 신앙은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되는 것만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하는 것임을 배웁니다.
이런 모습은 예수님의 모습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은 자신에게 임한 고난의 잔을 옮겨 달라고 기도하고 난 후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하고 자신의 입장을 포기하셨습니다.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 안에서 자기 자신을 포기한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믿는다고 말은 하면서도 자기 자아를 포기하지 못한 사람들입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은 그 신앙이 다르고, 신앙생활을 하는 관점이 다르고, 그들이 드리는 기도가 다르고, 신앙생활의 모습이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평가하실 때 우리의 교회의 크기나 우리가 이루어놓은 업적을 가지고 평가하지 않습니다. 이런 것들보다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뜻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얼마나 전적으로 순종하였느냐? 아니면 자기의 뜻대로 자기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살아왔느냐에 따라서 평가하십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참빛교회 성도여러분!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능력이나 헌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의 능력보다는 우리들의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는 확장되어 나간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지금도 일하시기 때문이며 이렇게 순종하는 행위는 하나님의 약속대로 기적을 불러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의 작은 소원 중 하나는 우리 참빛교회 모든 성도님들과 우리 교회가 하나님께 순종함과 복종함에서 아브라함 같이 칭찬받는 그런 성도, 그런 교회가 되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4. 신앙의 선진들의 삶을 통해 내리는 결론
아벨, 에녹, 노아, 그리고 아브라함의 삶을 보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천년만년 살 것처럼 모든 노력을 기울여 세상적인 명예와 성공만을 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물질만능주의를 추구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평가하는 시대를 살지만 우리의 기준은 돈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답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 나라가 아니라 우리의 본향이 되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의 기준은 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되어야 합니다. 비록 우리가 모든 것을 돈으로 판단하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삼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육신적으로는 비록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참된 나라는 하나님 나라라는 것을 고백하며 살아갑니다. 우리는 비록 육신적인 가족과 친척을 가지고 있지만 우리의 참된 가족은 성령 안에서 이루어진 영적인 가족이라는 높은 이상을 가지고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우리는 비록 이 세상 사람들과 동일하게 이 땅에 발붙이고 살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영광스러운 하늘 보좌와 영광스러운 미래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살아가는 성도들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이 믿음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이 한 주간도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위해 살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간증
제가 알고 있는 어떤 분의 실화를 소개할까 합니다.
기독교인 사업가였던 K씨는 자기가 이제까지 사업을 해오면서 거래처를 유지하기 위해 사회에서 통용되어 오던 관습대로 거래처 담당직원에게 거래 금액의 10%의 커미션을 주어왔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 안아서 이것이 정직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커미션을 주는 대신에 물건 값을 깎아 주겠다고 정중히 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15% 정도 물건 가격을 내려 주었답니다. 상대방도 이런 취지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한다고 하면서 격려했음에도 불구하고 다음 달부터 거래처들이 하나 둘 끊어지는 일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그 중에는 기독교 신자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가 불의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믿음을 지키며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부정이 만연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순결하고 깨끗하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노아의 경우와 같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정직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 것이며 도와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과 동행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진정 필요한 것은 인간적인 방법이나 요령이나 꾀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입니다. 시편을 보면 이렇게 말씀에 순종하여 산 것이 자기의 소유라고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시119:56).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성도님들이 노아와 같이 온 힘을 다해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며 또 하나님 말씀을 지키는 것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할 정도의 신앙이 되었으면 하는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기를 결정한다면 우리의 신앙의 길에는 이렇게 어려움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돈이 세상의 모든 가치를 주장하고 있기는 하나 이 세상을 섭리하시고 통치하시는 분은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신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현재의 삶에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성도님들이 있더라도 염려하지 마십시오. 그 아들을 주시기까지 하신 하나님이 우리들이 잘못되도록 버려두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믿음에서 떨어져 멸망하도록 결코 놓아두실 수 없으십니다.
우리가 비록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게 되더라도 낙망하지 말고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께 기도로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아벨같이, 에녹같이, 노아같이, 아브라함 같이 믿음의 삶, 승리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비록 신앙의 선진들의 믿음의 삶과 같이 이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의 믿음의 삶이 요령 없는 삶 어리석은 삶과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믿음으로 사는 우리들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명예로운 삶일 수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앞에 이 두 길이 놓여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길을 택하시겠습니까? 돈이 모든 가치를 결정하는 이 세상의 기준에 따라 살아가시겠습니까? 아니면 믿음의 선진들과 같이 날마다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리며 늘 기도하는 가운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며 하나님과 그 말씀을 따라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서의 순례자의 삶을 살아가시겠습니까?
지금 이 시간 결정하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의 신앙적인 결단을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삶이 우리 모두가 살아가는 앞으로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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