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고린도전서 1:1-3
저와 같이 아침에 운동하시는 어떤 목사님이 늘 전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사람들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죽어서 천국 가는 것이라고 전합니다. 죽어서 천국가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 별의 별 것을 다해 보았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고 늘 전합니다.
정말 그렇지요.
사람이 죽어서 천국 가는 것보다 이 세상에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시는 말이, 그런데 사람들이 죽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 때 많은 사람들이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고백을 하지 못하고 죽더라는 것입니다. 목회자가 ‘예수님이 선생님의 죄를 사해 주신 것을 믿습니까? 예수님이 선생님의 구주가 되신다는 것을 믿습니까?’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라고 수도 없이 물어보아도, 많은 사람들이 ‘예!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는 대답을 하지 못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믿음을 고백하지 못하여서 지옥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상시에 교회 나와서 가르침을 받아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야 죽을 때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라고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목회자가 임종을 앞에 둔 사람들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당신을 죄에서 죽음에서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을 믿습니까?’ 라고 물을 때에, ‘예!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만 하면 천국에 가는 것입니까?
물론 그 고백이 진실한 고백이어서 그렇게 고백한 사람이 구원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을 앞둔 사람이 말로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구원을 받게 되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 고백을 하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믿음이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일 때는 구원을 받아서 천국에 가게 되지만, 그 사람이 가지고 있고 또 고백하는 그 믿음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이 아닐 때에는 구원을 받지 못하고 천국에도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그 목사님은 ‘십자가 강도를 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면서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고백했던 그 강도에게 예수님은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고 하지 않았느냐고 할지 모습니다. 그러면서 이 십자가 강도와 같이 죽음 앞에서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다 구원을 받고 다 천국에 간다고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건 다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향해 십자가상의 강도와 같은 믿음을 고백하였던 사람들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 나아왔다가 병 고침을 받고,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따랐던 그 많은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떠나갔고 예수님을 부인하였던 시대였습니다. 왜요. 당시는 당국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던 시기였기 때문에, 예수님과 함께 다니면 당국자들로부터 불이익을 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부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부인하고 떠나갔던 시기입니다. 이런 불신의 시기에 십자가 강도는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 강도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대단한 믿음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을 믿으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향해 믿음을 고백하도록 권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도 정말 인류를 죄에서 구원해 주실 구세주시라는 것을 믿을 수 있게 보여주는 증거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무시하는 이단으로 지목을 받고 있었고, 그래서 유대당국자들에게 정죄를 받아서 십자가에서 죽어가고 있으셨던 것입니다. 이런 불신의 시대에 십자가 강도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세주라고 믿는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십자가 강도가 가진 믿음은 아주 대단한 믿음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님께 믿음을 고백한다고 다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니고데모를 보면 그는 예수님을 가장 적대시 했던 산헤드린 공회의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서 이렇게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선생인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가르치심, 예수님의 행하시는 기적과 역사와 능력 행하심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이 보내주신다고 약속하신 메시야임을 믿는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고백한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육신의 부모로부터 태어난 것과 같이, 하나님의 역사로 다시 영적으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고백한다고 천국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태어나는 중생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또 마태복음 7장을 보면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즉 예수님을 주로 믿고 고백하는 사람들이라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나아와서 자신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과 역사와 큰 권능을 행하며 살다가왔다고 하면서 그 믿음의 수고를 인정해 주실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예수님께 자신들이 예수님을 위해 행한 그 수고와 헌신을 알아달라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다 나를 떠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믿음을 고백한다고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큰 교회를 세우고, 전도를 많이 하고, 병 고치는 기적을 많이 행했다고 해서 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죽음을 앞둔 사람들이 그 집에 심방 온 목사가 요청하는 대로, ‘나는 예수님을 구주로 믿습니다.’ 라고 고백한다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전하는 것은 자기 마음이지만, 이것은 엉터리 복음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표현을 빌리면 다른 복음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인인 나는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고린도전서 1: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테네는’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에 관한 질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고, 성령에 의지하며,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여러분은 도대체 어떤 사람들입니까? 사도바울은 수많은 편지들을 써서 교회에 보냈고, 이 편지들은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영감해 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함을 받아서 오늘날 교회에서 경전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성경의 모든 기록의 서두를 보면 가장 먼저 바울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먼저 명확하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로마서의 첫 부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고린도후서의 첫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고린도전서의 첫 부분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 형제 소스테네는’
바울은 이렇게 자기 자신을 가장 먼저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된 자신을 어떻게 사람들에게 소개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예수님을 믿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된 나 00는......’ 이라고 소개하겠습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예정하심과 택하심 안에서 부르심을 받아 은혜로 예수님을 구주로 믿게 된 나 00는 .......’이라고 소개하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자신을 소개하는 이 소개의 말 안에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이 다 담겨 있습니다.
우리 모두 바울처럼 누구를 만나든지 자기 자신을 아주 명확하게 소개해 줄 수 있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바울은 자신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구원 받은 경험을 세 번 간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는 언제나 자신이 구원 받게 된 간증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때 바울은 친히 자신을 찾아와 만나주신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두 가지 질문을 합니다. 첫 번째 질문이 ‘주여 뉘십니까?’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그 신앙의 대상이 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시가를 묻는 질문입니다. 두 번째 질문은 ‘그러면 이제 내가 무엇을 할까요?’ 라는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 이제 나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합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첫 번째 신앙에 대한 질문과 두 번째 신앙을 가진 사람이 살아야 할 삶에 대한 질문은 사도바울만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해야 하고 그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질문입니다. 즉 우리들도 이 질문을 해야 하고 또 이 질문에 대한 명확한 답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바른 신앙과 바른 신앙의 삶을 살 수가 있습니다. 아멘....
둘째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인인 나는 세상 사람과 무엇이 다른가? 라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여러분이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땅에 속하여 땅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잘되고, 성공하고,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그래서 주어진 삶을 즐기며 살아가는 것이 땅에 속한 사람들의 삶입니다. 그런데 때로는 삶의 보람을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떤 이념이나 가치관을 이루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의 공통점은 다 땅에 속한 일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 세상 사람들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일들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인 나는 이런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릅니까?
세상은 하나님과 등을 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하늘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다릅니다. 비록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우리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그 하나님이 계신 하늘나라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지만 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기준과 하늘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 속에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세상과 다른 점입니다.
부모들에게는 기본적으로 그 자녀들을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좋은 환경 속에서 살게 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부모가 가지고 있는 좋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인 부모에게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자녀들의 마음속에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확고하게 심어주고자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이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운동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인관계가 원만한 자녀로 성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하게 보는 것은 바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심어주는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도 읽게 하고, 기도도 하게하고, 수련회도 보내고, 가정 예배도 드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내 믿음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내가 세상 사람들과 무엇이 다른지를 명확하게 인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셋째로 살펴볼 것은, 그리스도인을 다른 말로는 성도라고 부른다는 것입니다.
2절입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 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여기서 성도라고 하는 말은 그냥 나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이기 때문에 성도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혹은 교회에서 그리스도인을 성도라고 부르는 것은 곧 그 사람이 성인들이나 성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 사람이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서 세례를 받고 교인이 되었기 때문에 성도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인들과 성자들이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사람들에게 중요한 것은 그 존재의 변화입니다. 예수를 믿기 이전에는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은 이후에는 그 가지게 된 믿음 안에서 그 존재가 바뀌고 그 신분이 바뀌었기 때문에 성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구원 과정을 보면 가장 먼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깨닫고, 그 죄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영접하여서 죄 사람을 받게 되면, 하나님으로부터 이제 너는 의로운 사람이라는 칭함을 받게 됩니다. 이것을 칭의라고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의롭다 칭하신 사람들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는데, 이 때 사람들은 그 주신 성령 안에서 그 영혼이 거듭나서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롭게 창조함을 받은 새로운 피조물이 됩니다. 여기에 대해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렇게 사람의 영혼이 새로운 피조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위로부터 남’이라고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남’이라고도 합니다.
이렇게 거듭나게 된 사람들은 ‘두 본성을 가진 사람들’이 됩니다.
모든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죄의 본성’을 가진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본성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믿을 때 성령을 통해 그 영혼이 다시 내어나게 되는데 이 때 두 번째 본성이 새롭게 주어지게 되는데 바울은 이것을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됨’이라고 하고, 요한은 ‘거듭남’이라고 하고, 베드로는 ‘신의 성품에 참여함’이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본성은 지금 노원구 상계동에 살고 있는 나, 또 지금 참빛교회에서 예배드리고 있는 내가 가지고 있는 본성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서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다 이 첫 번째 본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두 번째 본성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영혼이 다시 태어나면서 받게 된 본성입니다. 이것은 부모에게서 받은 본성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거듭날 때 받게 된 하나님의 성향이며 하나님의 성품입니다.
우리 자신을 보면 우리 안에는 이 두 가지 본성이 함께 있습니다.
첫째, 내 안에는 부모를 통해 유산으로 물려받은 본성 즉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본성,즉 원죄를 유전으로 물려 받은 본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실존적인 모습입니다. 우리는 이 본성을 가지고 배우고, 학습하고, 경험을 쌓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사랑하며 가정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이 본성은 세상에 속하여 세상의 통치 속에 살아가는 본성입니다.
둘째, 내 안에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로 인해 우리 속사람이 거듭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은 본성,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지고 살아가는 신의 본성이 또 함께 있습니다. 이 본성은 영적인 본성이기에 영이요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며, 하나님 앞에서 기도의 호흡이 필요한 본성입니다. 이 본성은 하나님께 속하여 하나님의 통치 속에 살아가는 새로운 본성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땅에 속하여 땅에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지만 그리스도인은 땅에 속한 존재이면서 또 하늘에 속한 존재로서 이 땅과 하늘 두 가지 차원에서 살아가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된 부모들은 자녀들이 공부를 잘하고, 생활습관이 바르고, 정직하고, 세월을 낭비하지 않고 인생을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지만, 이것과 함께 자녀들이 예수님을 만나서, 믿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을 깨닫고 자신을 구원해 주시고 새롭게 지어주신 하나님을 위해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람이 된 목회자는 교회가 성장하고, 재정이 늘어나고, 성도들의 신앙을 위해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전도하고, 세상 속에서 선한 일을 하는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원합니다. 이와 함께 교회에 출석하는 성도들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해 갈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기를 또 원하기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두 가지 차원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사랑하고 결혼하고 자녀를 낳고 함께 돕고 의지하며 살아갈 뿐 아니라, 가족의 영혼이 잘 되는 일과 하나님의 자녀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가는 일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이 두 차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다윗의 예
다윗은 어릴 때 가정에서 별로 대우를 받지 못하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어린 다윗은 아버지를 도와 아버지의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당시 양을 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광야에는 양을 해치려는 사자와 곰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때 다윗은 오직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을 가지고 양을 치게 됩니다. 이런 힘든 삶이 다윗에게는 복이 되었습니다. 다윗이 가진 그 위대한 신앙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골리앗을 물리치게 되었을 때 한 고백이 이것 아닙니까?
사무엘 상 17:34-36절입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와 곰이 와서 양 때에서 새끼를 물어 가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받지 않은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이 가진 위대한 신앙, 골리앗 장군을 물리쳤던 위대한 신앙은 어디서 형성되었다고요. 바로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 형성되었습니다. 다윗이 믿음으로 골리앗을 물리치자 곧 아버지의 양을 치는데서 벗어날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사울 왕이 그 딸 미갈과 다윗을 결혼시킴으로 왕 사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후 사울 왕은 자신을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왕을 폐하시고, 이 다윗에게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2대 왕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것을 알게 된 사울은 이후 다윗을 죽이려고 10년 동안 군대를 데리고 따라 다닙니다.
그리고 다윗의 아내 미갈을 다른 사람에게 시집보내 버립니다. 이것이 다윗의 불행한 가정생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후 다윗은 몇 명의 아내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나중에 왕이 되었을 때 그 아내 미갈도 다시 데리고 왔습니다. 그러나 이 미갈과 다윗 사이는 최악이었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늘 전쟁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용히 집에서 정을 붙이고 살았던 아내도 없었습니다.
이런 다윗에게 신하들은 왕이 전쟁에서 무슨 일을 당하면 안되니 왕은 왕궁에 계시다가 우리가 전쟁을 다 끝내 놓으면 그 때 와서 승리의 영광만 취하시라고 건의합니다. 그래서 이후 다윗은 왕궁에서 살았습니다.
딱히 정을 붙일 수 있는 아내가 없었던 다윗은 어느 날 성벽 위를 거닐다가 성벽 아래 있는 어느 집에서 목욕하는 여인을 보게 됩니다. 달빛 아래에서 그 모습이 너무 예뻐보여서 저 여인이 누구냐고 신하에게 묻습니다. 신하는 왕의 신하 우리아의 아내라고 말하면서 우리아는 아직 신혼 중인데도 왕을 위해 전쟁에 나가 있다고 알려 줍니다.
처음 다윗은 충성된 부하의 아내를 위로해 주려고 왕궁으로 불러 음식도 먹여 주며 위로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밧세바와의 사랑에 빠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밧세바가 자신이 임신한 것을 알려 왔습니다.
그 때 다윗은 정신이 번쩍 들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전장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들여서 신혼 생활도 못하고 전쟁에 나가 있으면 되겠느냐고 하면서 몇일 휴가를 줍니다. 그 목적은 밧세바가 임신한 아기가 우리아의 아기인 것처럼 위장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우리아는 충성된 부하라서 동료들이 생사를 걸고 싸우고 있는데 자신은 집에 가서 쉴 수 없다고 하며 궁권 마당에서 잠을 잤습니다.
다윗은 이 충직한 우리야를 어떻게 해 볼 수가 없어서 우리아를 죽이기로 결심합니다.
다윗은 친서를 써서 요압 장군에게 보내면서 우리아를 전쟁의 선봉으로 세워 싸우게 하고 싸움이 한창 일 때 군사를 뒤로 물려서 우리아가 적들의 손에 죽게 하라고 명령을 합니다. 우리아는 그렇게 죽었고 장례식이 끝난 후에 다윗은 이 밧세바를 자기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어떻게 다윗과 같은 대단한 믿음의 용사가 이런 죄를 지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대답이 무엇입니까? 다윗도 우리와 같이 두 가지 면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는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죄의 종이 된 성향입니다. 다른 하나는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성향입니다.
가정생활이 불운했던 다윗은 아담 안에서 물려받은 그 성향으로 밧세바를 사랑하게 됩니다.
그것은 남편이 있는 부인을, 더구나 충성된 부하의 아내를 사랑하는 잘못된 사랑인지를 잘 알았지만 다윗은 밧세바와의 그 달콤한 사랑에 빠져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점점 깊어져서 넘지 않아야 할 선을 넘고 결국 아이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다윗은 그 일이 영적으로 잘못 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외로운 생활을 달래 주었던 그 육체적 욕구가 득세하여 그 영적인 요구를 외면하고 사랑의 즐거움에 빠져 들어가게 했습니다.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난 병을 상사병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상사병에는 약도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만큼 인간의 육체적인 사랑의 힘은 강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다윗 같이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 타인의 아내를 사랑하고 넘지 못할 선을 넘었겠습니까?
다윗은 결국 사랑 때문에 죄를 범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달콤함이 그것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놓을 수 없게 했습니다. 다윗은 그 죄를 가슴에 안고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때의 심정을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여러분은 종일 신음하며 뼈가 쇠하는 고통을 겪어 보셨습니까? 다윗은 그 고통 속에서도 그 사랑의 끝을 놓지 못했습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하나님이 그 손으로 범죄하고 있는 다윗을 누르시는데, 마치 깨를 복아서 기름을 짜듯이 그렇게 누르시므로, 그 몸에서 진액이 다 빠져 나가서 다윗은 마치 여름 가뭄에 마른 나무들 같이 그렇게 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런 고통을 주시는데도 다윗은 바세바와의 사랑의 끈을 놓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언제 이 죄를 회개하고 돌이키게 됩니까?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 죄를 책망하실 때입니다. 다윗은 믿음으로 그 영이 거듭난 영적인 사람인지라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통해 그 죄를 책망하실 때 곧 바로 죄를 인정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이렇게 회개하는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육체로 범한 죄에 대한 대가는 지불해야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후 다윗은 그 지은 죄에 대한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두 본성이 함께 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본성 중에 무엇을 따랐다는 것입니까? 가정생활이 불우하고 마음을 둘 곳이 없었던 다윗이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밧세바에게 마음이 갔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 사랑은 깊어만 갔습니다. 그래서 결국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만 것입니다. 이것이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한계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 육체에 속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렇게 살아도 별 다른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체에 속한 마음과 또 영에 속한 마음을 함께 가지고 살았던 다윗을 달랐습니다. 범죄하며 살았던 그 삶이 다윗의 영이 얼마나 짓눌렀든지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다.’고 합니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함에도 밧세바를 사랑하는 그 사랑이 다윗을 꼭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그 아픔과 고통들을 견디어 나갔습니다.
하나님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그 죄를 책망하실 때, 그 거듭난 속사람이 그 목소리를 내었고 그래서 다윗은 곧 바로 그 지은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회개하고 나오는 다윗의 죄를 하나님께서는 용서해 주셨습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해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울 왕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는다고 왕위를 폐하시고 멸망시키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더 큰 죄를 범한 다윗의 죄는 용서해 주시고 구원해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 차이가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믿음 안에서 이렇게 봅니다. 사울 왕은 겸손하고 또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믿음 안에서 그 영이 거듭난 일이 없었던 육체에 속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며 살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불순종의 죄를 책망하실 때에도 그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그는 사무엘 선지자에게 무엇을 요청합니까? ‘백성들이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나와 함께 가 주세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사울왕은 세상에 속하여 땅만 바라보고 산 육체에 속한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다윗 왕도 역시 겸손하였고 효심이 깊은 사람이었지만 그는 믿음 안에서 그 영이 거듭난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죄를 책망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영적인 하나님의 요구가 있을 때 곧 바로 응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 죄를 책망하실 때에 곧 바로 회개하고 용서를 구할 수가 있었습니다.
로마서 8장에서는 이 두 서로 다른 삶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이 말씀과 같이 육신을 따라 살았던 사울 왕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죄에 대한 지적을 받았을 때 육신의 일을 생각하고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이 내가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도록 나와 함께 가 주세요.’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영을 따라 살았던 다윗 왕은 달았습니다. 나단 선지자로부터 그 죄를 지적 받았을 때 영의 일을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곧 바로 자기가 지은 죄들을 자복하고 회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날마다 눈물로 그 침상을 띄울 정도로 그 지은 죄를 뉘우치고 아파했습니다.
다윗만 이렇습니까? 아닙니다. 우리들도 모두 다 이 두 가지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엇을 따라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육체의 소욕을 따라 죄를 지으며 살 수도 있고 또 성령의 소욕을 따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살 수도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서 8장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라 살면 사망이지만 그 영을 따라 살면 생명과 평안이 있다고 합니다. 육신을 따라 살던 다윗에게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사망에서 생명으로 멸망에서 구원으로 인도해 주셨습니다. 사도바울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죽음도 박해도 기근도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어 낼 수 없다.’라고 합니다.
믿음의 기초
우리들의 믿음의 기초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 삶입니까? 아니면 사울처럼 내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입니까?
성경 저자들은 그 믿음의 기초를 어디에 두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 믿음의 기초를 예수님 안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2:20절 말씀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요한은 그 믿음을 기초를 하나님의 사랑 안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요한 1서 4:9-10절 이하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베드로는 그 믿음의 기초를 신의 성품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베드로후서 1:4절입니다. ‘.....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야고보는 그 믿음의 기초를 경건한 삶의 열매에 두고 있다고 합니다.
야고보서 1:27절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라.’
말씀을 맺습니다.
성경은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부활 장을 보면 ‘영에 속한 사람들이 부활하며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고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요한복음 3장에서는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어느 목사님이 한 말처럼 죽는 순간에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하면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천국은 그 영이 거듭난 사람이 되어야 갑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가진 우리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남으로 그 존재가 변하고 그 신분이 변화되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의 변화가 없이는 그 누구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넘치지 않습니다.
이렇게 거듭난 성도들에게는 두 가지 성향이 함께 있습니다.
하나는 아담 안에서 부모를 통해 물려받은 죄 있는 육체의 성향이 있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의 거듭난 영적인 성향이 있습니다. 이 두 성향 중 어느 것을 따라 살아가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는 다윗처럼 죄를 지을 수도 있고 성령을 따라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말씀보고 기도하고 경건생활에 힘써야 하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육체를 따라 살아가는 삶들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영향력을 미치면 다윗 같은 영적 거장도 육체의 성향 앞에 넘어졌겠습니까?
그러므로 이런 말씀을 경계로 삼아서 우리는 늘 깨어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기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깨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거룩한 삶 경건한 삶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날마다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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