덮어주는 사랑
고린도전서 13:7
존귀한 존재인 사람
사람에게는 이중적인 존귀함이 있습니다.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과 복음을 통한 구속 안에서의 존귀함이 있습니다.
첫 번째, ‘창조세계에 속한 존귀함’은 오직 사람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사실에서 기원합니다. 창세기 1:27절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 곧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속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면에서, 인격적인 면에서, 성품적인 면에서 하나님을 닮은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존귀한 존재로 창조함을 받았기 때문에, 존중히 여김 받는 것을 기뻐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7:12절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는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자 하는 마음이 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귀하게 여김을 받고 싶으며 너희가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먼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대접하고 존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과 선지자 곧 성경의 근본적인 가르침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과 원만한 인격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면 그 만나는 사람들을 존중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관계를 맺어야 합니다. 만약 상대방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무시하고 업신여기면 그 관계는 깨어지는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면, 상대방이 직업이 무엇이든지, 그 외모가 어떻든지, 그 학벌이 어떻든지 관계없이 존중히 여기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만약 직업을 가지고, 외모를 가지고, 학벌을 가지고 상대방을 판단하고 평가하기 시작하면 그 사람과의 인격적 신뢰의 관계는 금이 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이와 같다고 합니다.
잠언 8:17절입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사무엘 상 2:30절입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하리라.” 이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을 것이며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는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은, 사람들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것에 근거합니다.
사람들이 비록 아담에게 함께 속하여 죄인이 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그 죄를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태어나게 됩니다. 그래서 아담의 죄 안에서 잃어버렸던 존귀함이 다시 회복되게 된 것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에 대해 고린도후서 5:17절에서는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 안에서의 존귀함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여자의 후손으로 보내 주셔서 사람들의 죄를 속해 주실 것이라는 복음에 근거하고 있습니다.(창3:15절입니다.) 이 복음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죄를 처리해 주시는 방법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라는 말씀에 알 수 있듯이 그 흘려주신 보혈로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에서 기원합니다.
오늘은 2014년 마지막 주일입니다.
한 해를 마지막으로 보내는 이 주일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와 허물을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사랑은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신약성경 고린도전서 13:7절 말씀에서는 ‘모든 것을 참으며’라고 하심으로 ‘모든 것을 참아 주는 사랑’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참는다.’라는 말은 헬라어 ‘스테고’로서 ‘참는다.’ ‘감추다’ ‘덮는다.’ ‘비밀로 한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이렇게 볼 때 ‘모든 것을 참는’ 이 사랑은, ‘상대방의 허물’을 ‘상대방의 실수’를 ‘상대방의 약점’을 참아주고 덮어주는 사랑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 구약성경 시편 32:1절 말씀을 보면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 ‘죄가 가려진다.’ 라는 말에 사용되고 있는 단어는 ‘카라’입니다. 이 단어의 의미도 ‘덮다.’ ‘숨기다.’ ‘감추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말씀, 하나님께서 죄를 덮어주신 복에 대해 말씀하고 계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신앙과 삶의 중심은 성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성전의 중심은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를 상징하고 있는 지성소였습니다. 이 지성소 안에는 하나님의 법궤가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이 법궤 안에는 세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습니다. 첫째는 아론의 싹 난 지팡이가 들어 있었고, 둘째는 만나를 담은 항아리가 들어 있었고, 셋째는 십계명 두 돌 판이 들어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 물건들은 다 인간의 타락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상징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원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법궤를 덮고 있는 뚜껑이 있었는데 이 뚜껑이 바로 속죄소입니다.
대 제사장이 7월 대 속죄일에 1년에 한 번씩 짐승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가서 그 백성들의 죄를 속하기 위하여 그 피를 바로 이 법궤 뚜껑 위에 뿌렸습니다. 이렇게 피가 뿌려졌던 법궤의 뚜껑은 인간의 그 모든 죄악을 덮어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성전의 가장 거룩한 장소로 알려지고 있는 지성소의 법궤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은 바로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5대제사는 어떻습니까?
이 제사의식들도 인간의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켰던 7대 절기는 어떻습니까?
이 절기들도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전해 준 대로 유월절에 어린 양을 잡아서 그 피를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습니다. 이것은 이 피를 흘리며 죽어간 어린양이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의 천사가 와서 애굽에서 심판을 행할 때 어린 양의 피가 발려 있는 집은 넘어갔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그 집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그 어린 양이 심판을 받았다고 보았습니다. 유월절에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던 피도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때 피를 흘리며 죽어간 어린양은 우리 주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요한복음 서를 보면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 이라고 증거 했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5:7절 하반 절 말씀을 보면 사도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라고 증거 했습니다. 유월절 어린 양은 세례요한과 사도바울이 증거 한 것과 같이 장차 인류의 죄를 덮어주시기 위해 보혈을 흘려주실 예수님을 보여주고 있는 예표였던 것입니다.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은 ‘탕자의 비유’입니다.
둘째 아들이 아버지의 유산을 미리 받아가지고 타국으로 가서 허랑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그 물려받은 유산을 다 허비하게 됩니다. 그래서 고난을 당하는 삶을 살게 되면서 깨달은 것은 지금의 자기보다 그 아버지 집에 있는 품꾼들이 더 행복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인의 심정으로 아버지의 아들이 아닌 품꾼의 하나로 써 주시기를 요청하려고 생각하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아버지는 늘 마을 어귀까지 나와서 그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습니다. 왜요. 그 누구보다 먼저 돌아오는 둘째 아들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그 돌아오는 아들을 먼저 발견하게 되면 아버지에게 유산을 미리 물려 달라고 요구한 못된 아들 그 유산을 다 허비하고 거지꼴로 돌아오는 불효막심한 아들에 대해 사람들은 손가락질 하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 아들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는 것입니다. 또 상황이 악화되면 그런 불효막심한 아들을 동네가 받아주면 다른 자녀들이 그 못된 삶의 영향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그 둘째 아들이 동네로 들어오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내 쫓을 수도 있고 또 감정이 격해진 사람들이 부모에게 불효한 그 둘째 아들을 비난하며 돌로 칠 수도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래도 그 아버지는 말릴 수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버젓이 살아계신데 그 유산을 달라고 하는 것은 큰 죄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아버지는, 만약 그 아들이 자신을 잘못을 깨닫고 또 뉘우치고 돌아오다가 사람들로부터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늘 이른 아침부터 동네 어귀까지 나가서 아들이 돌아오면 그 돌아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맞이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돌아오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였습니다.
성경은 그 아버지가 어떻게 하였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저 멀리 오고 있는 아들을 발견하고 달려가서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그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라고 하였으나 그 아버지는 그 종들에게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비유는 자식의 허물을 덮어주는 부모의 극진한 사랑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이 사랑이 바로 사람들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둘째, 그러면 하나님이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을 어떻게 입을 수 있습니까?
요한복음 4:24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들은 영으로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영은 성령을 말합니다. 진리는 진리 되시는 예수님을 말합니다.
그러면 성령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말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성령으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성령이 사람들 안에 들어오셔야 합니다.
그런데 성령은 거룩한 영이십니다. 그런데 문제는 성령이 들어오셔야 할 사람들은 모두 다 아담 안에서 죄인입니다. 거룩하신 성령은 죄인들과 함께하실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그 마음 안에 임하고 또 성령으로 예배하기 위해서는 먼저 죄가 처리 되어야 합니다. 죄를 처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성령이 오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죄는 어떻게 처리 되는 것입니까?
구원 파에서 전하는 것처럼 우리가 예수 믿을 때 죄가 완전히 처리되고 제거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예수 믿은 이후에는 죄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와 무관한 사람이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죄를 회개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우리의 죄가 완전히 제거되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믿은 후에도 죄는 여전히 우리 안에 있고 육신의 정욕도 여전히 우리 안에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에는 늘 죄와 정욕과 함께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죄가 있는 우리들에게 거룩하신 성령님께서 어떻게 오실 수 있으십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려주신 그 보혈이 피로 우리 죄를 덮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성령이 보실 때에는 우리의 죄가 보이는 것이 아니고,우리 죄를 덮고 있는 예수님의 보혈만 보이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 죄가 예수님의 보혈로 덮여 있는 성도들의 마음에 성령님이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오신 성령으로 드리게 되는 예배가 ‘영으로 드리는 예배, 진리로 드리는 예배’입니다.
이것이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을 덧입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성령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보혈로 그 죄가 덮인 사람들 그래서 그 마음 안에 성령이 오신 사람들이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인류 최초로 하나님의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은 사람은 아담과 하와입니다.
하나님께서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죄와 죄가 가지고 온 수치를 가려주시기 위하여 짐승을 죽이고,그 가죽을 벗겨서 옷을 지어 입혀 주셨습니다. 이 옷은 바로 아담과 하와의 죄와 수치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지어 주신 가죽옷으로 죄의 수치를 가릴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은 또 다른 사람은 아벨입니다.
창세기 4장을 보면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펴온 바에 의하면 아벨은 하나님께서 전해 주신 구원의 복음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살았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가인은 복음을 믿는 믿음도 죄인의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도 알지 못했던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아벨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에 대해 히브리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당시 가인의 불신앙에 대해 요한1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가인 같이 하지 말라 그는 악한 자에게 속하여 그 아우를 죽였으니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통해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신다는 것을 아벨은 믿었고 가인은 믿지 못하였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입니다.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은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십니다. 그러면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지 않은 사람들에게 임하는 능력은 역사는 무엇입니까? 이것은 바로 악한 영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그 예를 가까이서 볼 수 있습니다.
문선명을 보십시오. 한 때는 한국교회에 해성 같이 나타난 능력의 종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문성명이 한강 백사장에서 집회를 할 때 얼마나 많은 목회자들과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자 모여 들었습니까? 박태선 장로를 보십시오. 얼마나 능력 있는 장로라고 하며 사람들이 그를 따르고 추종했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 못하였는데 능력이 임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그 능력의 출처가 어디라는 것입니까? 죄인들에게 역사하는 악한 영이 그 출처이며 그래서 결국 이 사람들은 이단의 괴수가 된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 신앙의 좋은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조건 능력을 구하고 무조건 은사를 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 나타나는 은사만을 강조하고 있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런 교회로 몰려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성장하는 교회는 좋은 시설을 갖추어 놓고 있는 대형교회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사와 역사가 나타나고 있다고 하는 이런 교회들입니다.
이런 교회들의 특징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는 별 관심을 가지지 않습니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삶에 대해서는 별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오직 그 나타나는 기적과 역사 신비한 경험과 은사에 집중합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일어나면 그 출처가 어디인지 전혀 따지지도 않고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우리 교회만 인정해 주시고 보여주시는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전에 기도하다가 환상을 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계시를 받았다고 하면서 1992년 10월 28일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라고 주장 하였던 다미선교회에 속한 사람들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말을 믿고 모든 것을 다 바쳐 헌신하며 따랐던 사람들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있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신앙의 열정과 확신과 헌신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던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이런 사람들에게 뒤지지 않는 열정과 헌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신사도운동을 추종하는 사람들입니다.
역사는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아무리 열정과 헌신이 있어도 진리에 기초하지 않는 신앙 성령 하나님의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의 역사에 기초를 두고 있지 않은 신앙은 잘못된 방향으로 이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진리에 굳게 서 있지 못한 사람들 그래서 그 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입지도 못한 사람들이 자신의 삶 속에서 어떤 신비한 경험을 하거나 또 어떤 신비한 일이 나타나게 되면 그것을 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은 진리의 말씀 위에 바로 서 있지 못하기 때문에 말씀은 등한시 하고 오직 체험에 목을 매는 체험 중심의 신앙을 가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경험하게 되는 모든 체험들을 다 하나님의 역사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중에 마태복음 7장 나오는 사람들과 같이,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라고 당당하게 예수님께 나아가서 말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은 것들이 경험한 것들이 이룬 것들이 다 하나님께 받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과 전혀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진리 위에 신앙을 세운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이 흘려주신 십자가의 보혈로 그 죄를 덮음 받았던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이런 사람들을 알지 못하고 이런 사람들도 사실은 예수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영적 부모가 되시는 하나님과 하나님이 소유하고 계신 모든 것을 누리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고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를 입은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다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님이 흘려주신 보혈로 그 죄를 덮음 받은 사람이라는 말일 뿐 아니라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의롭다 인정함을 받고 성령을 통해 거듭나게 되고 위로부터 하나님이 주시는 각종 은사와 선물들을 다 받아 누리며 사는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마음을 함께 소유하고 살아가는 거룩한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는 이미 하나님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요한복음 7장을 보면 예수님이 명절 끝 날에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이 생수의 강을 이미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도들은 사실 복음으로 만족하는 사람들 복음 안에서 만족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주심 안에서 이미 하나님의 모든 부요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어떤 사람들과 같이 은사에 목을 매거나 목말라 하지도 말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 안에서 우리 영의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부요함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은 사람들의 삶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두부류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그 죄를 덮어주는 사랑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과 그 죄를 그대로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죄를 덮어주는 사랑을 입어야 합니다.
그러면 죄를 덮어주시는 이 사랑 어떻게 입을 수 있습니까?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으려고 하면 회개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회개에는 두 가지 회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불신자의 회개이고, 다른 하나는 신자의 회개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불신자의 회개를 통해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던 그 원죄를 덮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성령이 오셔서 역사하시는데 죽은 영혼이 살아나게 되고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마귀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정죄를 받던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 되는 이런 신분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신자의 회개는 예수 믿고 구원 받은 사람들이 하는 회개입니다.
사람들이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지만 육신을 가지고 살고 있기 때문에 그 살아가는 삶 속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육신을 가지고 사는 우리의 한계입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그 삶 속에 회개가 필요한 것입니다.
신자들도 회개하는 삶을 통해 그 지은 죄를 사함 받게 됩니다.
그래서 신자들도 그 죄를 덮어주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죄를 덮어주시는 사랑 안에서 신앙의 성장과 성숙과 성화를 이루어 나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나는 날마다 죽는다.’ 라고 한 말은 바로 신자의 회개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회개하고 나가면 우리 하나님은 우리 죄를 덮어주실 뿐 아니라 우리가 죄를 지은 사람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어주시고 기억조차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1서 1:9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우리가 우리 죄를 깨닫고 자백하고 회개하며 나아가면 하나님은 회개하는 우리 죄를 사해 주시며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실 것이라고 하십니다.
시편 103:12절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이사야서 44:22절입니다. ‘내가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 같이, 네 죄를 안개 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회개하는 사람의 죄를 이 동쪽 끝에서 저 서쪽 끝으로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영원히 옮겨 버리신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회개하는 사람들의 그 많은 죄를 마치 빽빽한 구름이 사라지는 것 같이 사라지게 해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죄를 회개하며 나오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용서는 무조건적인 용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를 회개하면 그 지은 죄에 대해서는 더 이상 말하시지도 물으시지도 않고,용서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① 다윗이 나단 선지자로부터 그 죄를 지적 받고 회개했을 때 그 즉시 하나님께서는 용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② 요한복음 8장을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잡혀 온 여자 그래서 그 행한 일을 처절한 심정으로 뉘우치고 있던 그 여인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여자여 너를 정죄하는 자가 있으냐’ ‘없나이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나님의 용서는 언제나 이렇게 회개가 전제된 용서였습니다.
그리고 회개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조건도 붙이지 않고 무조건적인 용서를 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덮어주는 사랑입니다. 불신자들만 회개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우리들도 늘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회개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놀라운 사랑이 임하는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입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입니다.
마태복음 18:21절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질문하기를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고 회개하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 용서해 주면 됩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베드로의 이 질문을 듣고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 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들이 그 죄를 회개하고 나오면 너희는 아무 조건도 달지 말고 무조건 적으로 용서해 주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해 주시는 것과 똑 같은 용서를 해 주며 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덮어 주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았던 사람들에 대해 살펴보겠습니다.
이런 살핌을 통하여 우리들의 삶 속에서도 가족과 이웃의 죄와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고자 하는 각오와 결심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1. 셈과 야벳입니다.
창세기 9:20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홍수 심판 후에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벌거벗은 몸으로 장막 안에서 자고 있었다고 합니다.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 죄악을 심판하실 때 의인으로 남겨 둔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주시면서 배를 만들어 심판을 준비하라고 하실 때 온전히 순종하였던 사람이 아니었습니까? 당대 믿음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오직 노아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았던 완전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노아가 그 노년의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포도주를 마시다가 취했던 것입니다.
이런 노아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의인은 없구나.’ ‘완전한 사람도 없구나.’ ‘모두 다 죄인이고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하구나.’ 하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서로 서로를 볼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람들을 보면 좀 나아 보이는 사람도 있고 좀 못해 보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모든 사람들이 다 50보 100보입니다. 다 나름대로 약점이 있고 다 나름대로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성도들을 볼 때에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아야 하지만 또 성도들이 목회자를 볼 때에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분쟁하고 있는 교회들을 통해서 긍휼이 없는 마음으로 긍휼이 없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살아가는 삶이 그 자신들에게도 힘든 삶이 되고 있고 또 그런 교회 공동체와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이 사람들로부터 얼마나 모독을 받게 하는지를 잘 보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시험에 들지 않으려면 서로 서로의 실수와 허물과 약점을 덮어주는 교회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도들은 목회자의 허물을 덮어주고 목회자는 성도들의 허물을 덮어주는 교회 그래서 긍휼과 사랑과 용서와 불쌍히 여김이 서로 사이에 있는 은혜가 있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창세기 9장의 내용을 보면 술에 취해 있는 노아의 모습을 가장 먼저 본 사람은 함의 아들 가나안이었을 것으로 추론되고 있습니다. 가나안에게 노아는 할아버지입니다. 이 가나안에 그 아버지 함에게 그가 본 사실을 알려 주면서 이 일을 떠벌리고 다녔던 것 같습니다.
함은 아들 가나안과 함께 아버지 노아의 장막에 들어가서 사실을 확인하고 또 그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그런데 셈과 야벳은 이 사실을 전해 듣고 23절 말씀을 보면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고 전합니다. 우리는 이 두 사람의 행동 속에서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 주려고 하는 사랑의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가 술이 깨어서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그 아들인 가나안을 저주합니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리고 셈과 야벳을 축복합니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들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가나안이 저주를 받은 것은 그 할아버지 노아의 허물을 덮지 않고 폭로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덮어 주는 사랑이 없는 가나안 때문에 함의 가문에 속한 모든 사람들을 저주하셨습니다. 그런가하면 셈과 야벳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덮어 주는 사랑은 신의 성품입니다.
그러나 드러내어 정죄하는 것은 마귀의 성품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신의 성품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덮어주는 일을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셈과 야벳이 하나님의 복을 받은 것은 그 가진 믿음과 믿음이 가져다 준 거룩한 삶과 깊은 연관성이 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법적인 아버지 요셉입니다.
요셉은 어느 날 자기와 정혼을 한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때 요셉이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이런 일은 아직 10대였을 것으로 추론되는 요셉에게는 아주충격적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요셉은 어떻게 했다고 합니까?
성경은 무엇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여기서 요셉이 그 정혼한 마리아를 향해 보여주고 있는 사랑이 어떤 사랑입니다.
마리아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고 덮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요셉은 이미 임신을 하고 있는 마리아에게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심사숙고 한 후에 내린 결론이 가만히 끊고자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요셉이 마리아의 허물에 대해서 말하지 않고 가만히 끊고 침묵함으로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을 결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남편인 요셉이 그 아내인 마리아를 향해 보여주었던 덮어주는 사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볼 때 죄를 드러내고 지적하는 사람이 훨씬 더 의로워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죄를 덮어주는 사람들을 더 의롭게 보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판단하심을 아는 우리들이 살아야 할 삶은 다른 사람들의 죄를 덮어주는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믿음 안에서 잘해 왔습니다.
금년도 이제 오늘로 마지막 주일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① 이 마지막 주일에 먼저는 하나님께서 덮어주시는 사랑으로 우리를 허물 많았던 2014년의 모든 삶을 덮어 주시길 바랍니다. 이런 은혜를 덧입기 위하여 우리는 이 한 주간 동안 지나온 한 해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회개하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회개하는 사람들의 죄를 아무 조건도 없이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덧입으며 사는 복된 삶이되시길 바랍니다.
② 그리고 다음으로는 우리들도 이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사랑을 마음속에 품고 가족을 향해 성도들과 이웃을 향해 서로의 약점과 서로의 부족한 점을 덮어주고 용납해 주는 삶을 실천하며 살아감으로 우리가 하나님께 속하여 살아가는 거룩한 성도임을 보여주며 살아가겠다는 삶의 결단들이 있어지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내년에는 더욱 더 서로를 사랑하고 더욱 더 서로의 약점을 덮어주는 성도와 교회가 되고 그래서 우리 개개인 모두가 사랑과 은혜가 풍성한 그런 삶을 살고 또 우리가 함께 그런 교회를 만들어가는 우리 모두가 되었으면 합니다. 이런 삶의 결단이 있어지는 2014년 마지막 주일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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