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서신

바울의 감사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8. 10. 24. 17:35

 

 

 

바울의 감사

골로새서 1:3-8

 

지난 주 복습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개척하여 세운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은 1,2,3차 전도여행을 하였어도 골로새 지역을 방문한 일이 없습니다. 7절 말씀을 보면 골로새교회는 바울의 동역 자였던 에바브라가 개척하여 세운 교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런데 바울이 로마 감옥에 있을 때 골로새 교회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들은 소식에 근거하여 편지를 써 보내게 되는데 이 편지가 바로 골로새서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번도 본 일이 없고 또 한 번도 만난 일이 없는 골로새 교인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고 있습니까? 1절입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바울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신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2절을 보면 바울은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사도적인 권위로 하나님이 골로새 교인들에게 은혜와 평강 주시기를 기원하였습니다.

 

이것이 지난주에 살펴본 내용입니다.

오늘은 3-8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봅니다. 이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였다고 합니다.

 

3절입니다.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골로새 교회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가장 먼저 한 일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하였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이 고백은 그리스도의 일군이 된 우리가 어떤 마음과 어떤 태도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살아야 하는 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입만 열었다고 하면 불평불만을 쏟아 냅니다.

방금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나오면서 하는 첫 마디가 불평불만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보면 마치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찾아 밝혀내는 것이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 앞에 서게 되면 불편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주 찾아가면 자주 찾아온다고 불평하고 자주 찾아가지 않으면 자주 찾아오지 않는다고 불평할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친절을 베풀어서 먼저 인사를 하면 쓸데없이 인사한다고 언짢아하고 인사를 하지 않으면 인사를 하지 않는다고 시비 걸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나중에 어떻게 판단하시겠습니까?

예수님은 팔복의 말씀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가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도 긍휼히 여겨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긍휼이 없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허물을 찾아내는 사람들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 하나님께서 긍휼이 없는 판단, 아주 엄격한 판단을 하실 것입니다.

 

골로새 교인들은 믿음을 가진지 오래 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만약 바울이 이런 사람들에게서 허물을 찾아내려고 하면 얼마나 많은 허물을 찾아낼 수 있었겠습니까? 그런데 바울은 그런 골로새 교인들을 보면서 가장 먼저 감사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은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의 허물을 찾아내려고 하지 않고 좋은 점 감사한 점을 찾아내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찾아낸 감사한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저도 교회를 개척하고 이제까지 온 과정을 돌이켜 보면서 이런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전에는 몇몇의 아주 충성하는 성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함께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회와 같은 형편과 처지가 되면 불평도 나오고 불만도 나올 만도 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감사합니까?

 

제가 주일 10시 전후에 3거리 교차로를 내려다보면 언제나 아픈 다리로 힘들게 걸어서 교회로 오시는 우 권사님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이제까지 수많은 주일 동안 우리가 점심을 맛있게 먹을 수 있게 해 주고 있는 사모를 인하여서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가 목사라고 아직 철도 들지 않은 아이들이 교회에 나와서 반주도 하고 예배도 드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또 매 주일이면 어김없이 교회에 나와서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성도들을 인하여, 또 지난주에 아버님을 모시고 우리 교회에 처음 나오셔서 우리와 함께 예배드렸고, 또 오늘도 함께 나오셔서 예배를 드리고 있는 우리가 아직 이름은 알 수 없으신 집사님을 인해서도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오늘까지 지내 오면서 여러 모로 섬겨주신 분들이 있습니다.

이분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까지도 여러 모양으로 우리 교회와 연결되어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생각하며 또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을 보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은 너무나 중요합니다.

이 골로새서를 기록하고 있는 사도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어떻게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충만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충만한 은혜 가운데 우리가 옥중 서신이라고 부르는 에베소서,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를 기록할 수 있었겠습니까? /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도 은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자신에게 주어져 있는 그 모든 삶을, 자신에게 허락해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이 감사하는 삶의 능력을 말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촛불에 감사하면 하나님은 전기 불을 주시고, 전기 불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 하나님은 태양 빛을 주신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이 주시는 충만한 은혜 속에서 살아가려고 하면, 지금 내가 처해 있는 삶을 주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감사하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 속에 하나님은 더 큰 감사의 열매가 맺혀지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아멘.

 

둘째, 그러면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의 어떤 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였습니까?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로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한 제목이 4절 이하에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로는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을 감사했다고 합니다.

 

4절입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오늘날 믿음의 문제는 참으로 민감한 문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음이라고 하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을 아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당신 종교가 무엇이냐? 라고 물으면, 어떤 사람들은 석가모니를 알고 있다고 불교라고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 기독교라고 합니다. 이 말은 나는 부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예수님에 대해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사람이 정말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알고 있는 것과 예수님을 믿는 것은 다릅니다.

믿음을 가지려면 가장 먼저는 지식적인 이해가 있어야 합니다. 지식적인 이해도 없이 가지게 되는 믿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적인 이해가 곧 믿음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지식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을 나의 죄를 사해 주시는 주님으로 이해했으면, 그 이해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고 받아 들여야 합니다. 여기에 대해 요한복음 1:12절에서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라고 합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님을 알고 그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우리 믿음은 완성이 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 사함을 받고 예수님을 내 마음에 구주로 영접하여 들이게 되면 그 때부터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서 사시게 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예수님이 내 마음 안에 사시게 된 사람들에게서는 반드시 그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변화는 그 마음 안에 모시고 사는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예수님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울컥하고 예수님을 생각만 해도 마음이 감동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이 바로 믿음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스스로 자원하여서 예수님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믿고 그 주시는 은혜를 누리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우리는 비로써 믿음이 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믿음은 반드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야고보서를 보면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즉 행함이 없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라고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구약성경에 나오는 아브라함과 기생 라합을 예로 들면서 이 두 사람도 그 행함으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믿음을 증명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적으로 영혼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행함으로 증명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골로새 교인들,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골로새 교인들이,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서로 서로를 보면서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 이런 믿음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올려 드리며 사는 성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믿음 주심을 감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 모두에게 더 큰 믿음을 주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두 번째로는 골로새 성도들이 행하며 살았던 사랑의 행위를 듣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4절입니다.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사랑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랑이 있습니다.

첫 번째 사랑은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 되어서 이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래서 사랑을 해도 내가 중심이 되어서 사랑하며 삽니다. 이것이 이 세상의 사랑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결혼을 할 때에는 내가 상대방을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을 합니다. 상대방도 나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을 보면 내가 중심이 되어서 하는 사랑입니다.

남자는 남자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여성을 사랑하고 여자는 여자대로 자기가 좋아하는 남성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둘이 서로 다른 사랑 즉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사랑으로 상대를 사랑하고 결혼을 하였기 때문에 결혼을 하고 나면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다투고 싸우게 됩니다.

 

왜요. 그 사랑은 내가 기준이 되고 내가 중심이 되어서 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기는 사랑하지만, 남편은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아내를 사랑하고, 또 아내도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남편을 사랑합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 사랑이 일치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싸우고, 서로 사랑한다고 하면서 미워하고, 나중에는 사랑하기 때문에 헤어진다고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사랑하면서 싸우고 다투고 심지어 헤어지기까지 하는 것입니까?

사랑의 기준이 내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내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상대방에게도 요구합니다. 이렇게 서로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사랑을 상대방에게 요구하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사랑하면서도 일치를 이룰 수 없게 됩니다. 이것이 사람들이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랑의 한계입니다.

 

사람들이 하며 사는 사랑은 다 이렇게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사랑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으로 자기 가정을 사랑합니다. 사람들은 이런 사랑으로 내가 다니는 기업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고, 국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그런 사랑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고 매도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세월호 사건입니다.

어린 학생들이 어른들의 탐욕 때문에 피해를 본 사건이 바로 세월 호 사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죽은 아이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다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은 세월 호에 탔던 아이들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노란 리본도 달고 다니고, 그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움막을 지어 놓고 농성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 그렇게 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이는 사람들은 매도하고 적대시합니다. 그래서 대모하고 야단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랑은 이 세상의 어그러진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는 적개심을 가진 사랑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사람들이 지금 우리나라를 좌지우지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어떻게 보실까요? 이런 사랑을 인정해 주실까요?

아닙니다. 이런 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고 세속적인 사랑이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사랑이고 내가 기준이 되어 하고 있는 편협 된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랑을 인정해주시지 않으십니다.

 

두 번째 사랑은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게 된 사람들이 배우게 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그 기초가 이 세상의 사랑과 완전히 다릅니다.

이 사랑은 그 기초를 나 같이 아무 소망이 없는 사람, 아무 가치도 없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그 아들까지 희생하시면서 보여주신 놀라운 사랑에 두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놀라운 사랑을 깨닫고 덧입고 경험한 사람들이 하며 살게 되는 사랑이 바로 하나님이 주신 사랑입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된 나를 그 죄와 죄책과 죄의 형벌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 되시어서 죄가 전혀 없는 사람으로 성육신 하시고, 우리가 당하며 사는 그 모든 고난을 다 당하며 사시다가,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내 대신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셔서 대속의 피를 흘려주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내 대신 죽음을 맛보시고, 내 대신 무덤에 장사 되시고, 내 대신 음부에 내려가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에 죽음으로 우리 죄를 처리하신 후에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사 그 본래 계시던 하늘 보좌로 승천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에게 죽음을 이긴 부활의 소망을 주시고, 죄악 된 세상을 살아가면서도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게 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이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이 기이한 사랑을 통해, 우리는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지를 알고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놀라운 사랑을 몸소 경험하였던 사도 요한은 이렇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그의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므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고 그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줄을 아느니라.‘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 ’우리가 이 계명을 주께 받았나니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또한 그 형제를 사랑할지니라.‘

 

그러면 우리가 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게 되는 일을 언제 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나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고, 상대방도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있을 때, 그 두 사람이 가진 사랑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이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가 서로를 사랑하게 될 때, 비로써 두 사람은 같은 한 사랑으로 서로를 사랑하며 살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골로새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가지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성도들인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 성도들을 한 번도 만나 본 일이 없습니다.

그런데 골로새 교회 성도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사는 사랑에 대해 들었다고 합니다. 너희가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며 사는 것을 에바브로디도가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고 합니다. 너희가 가진 믿음이 이렇게 사랑으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듣고, 나는 비록 로마 감옥에 갇혀 있지만 나도 너희가 가진 그 사랑으로 너희를 사랑하며 그런 사랑을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며 사는 사랑은 대부분 오염된 사랑, 자기중심적인 사랑입니다.

이런 우리들은 예수님을 통해 참된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그 사랑으로 자신을 사랑하며 가족을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너희는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신 후에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 즉 내가 너희를 사랑한 그 사랑을 가지고, -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해 주십니다. 이렇게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인정해 주십니다. 아멘

 

세 번째로는 골로새 성도들이 자신을 위하여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듣고 감사했다고 합니다.

 

5절입니다.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우리는 왜 삶이 어려워도 믿음으로 살고 또 원수까지 사랑하며 살려고 합니까?

그 이유는 하늘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하늘 소망을 바울은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내가 상대방에게 은혜 베풀어주었는데도 그 돌아오는 반응은 배신 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낌없이 도와주고 사랑해 주었는데 그 돌아오는 반응은 배반일 수가 있습니다. 성경은 그렇더라도 실망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이 세상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 아니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의 일에도 참여하고 그 소득과 결과를 누리며 살지만, 우리가 궁극적인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하늘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천국에서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배신을 당하고 상처를 받아도 하늘 소망을 가지고 끝까지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하늘 소망은 단순히 희망 사항이 아닙니다. 성경이 증거하고 있는 확실한 소망입니다. 장차 틀림없이 이루어질 소망입니다. 하나님은 이 소망을 약속하셨고 우리 주 예수님은 이 소망을 우리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 반드시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 현실 속에는 한계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질적인 한계, 건강의 한계, 지혜의 한계, 능력의 한계 등등이 있습니다. 이런 현실의 한계를 우리는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이런 한계들을 우리는 소망으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가면 육신은 쇠하고 병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우리 육신의 장막이 무너지는 날이 올지라도 우리 영은 영원히 살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균형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늙어가는 것은 꼭 슬픈 일만은 아닙니다. 늙어가는 만큼 우리가 소망하는 하늘나라로 가까이 가고 있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땅에 소망을 가지고 사느냐? 하나님 앞에 설 소망을 가지고 사느냐? 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는 건강과 소유와 성공이 중요하지만, 하늘에서는 이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일은 하늘 소망이 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늙어가는 것은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하늘에 쌓아둔 소망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 가지고 있는 하늘 소망 때문에 나는 감사하고 있다고 하고 있습니다. 이런 바울의 감사가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감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네 번째로는 골로새 성도들이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들은 일로 인해 감사했다고 합니다.

 

5절입니다. ‘...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골로새 교인들이 믿음으로 사는 일 서로 사랑하며 소망 가운데 살아가는 일이 어떻게 있게 되었습니까? 그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진리의 말씀이 골로새 교인들로 하여금 믿음을 가지고 살게 하고 하늘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고 서로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바로 복음의 진리의 말씀을 듣는 일인 것입니다.

 

많은 성도들이 바라는 것이 이것일 것입니다.

성도들은 체험을 통해 자기 확신을 가지고 싶어 합니다. 체험을 통해서 자신이 바른 믿음을 가졌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 하고,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체험에 목말라 하는 신앙에는 위험이 따릅니다.

그 위험은 신앙적인 체험은 있는데 나 자신은 전혀 변화가 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아담 안에서 죄악으로 가득 채워져 있는 내가 어느 날 신비한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죄악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렇게 되는 것은 체험이 없는 것보다 못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체험을 통해 나는 내가 무엇인가 된 줄 알게 되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신앙적인 체험에 자기 자신이 속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신앙적인 체험이 그 자신의 변화로 나아가지 않으면 희망이 없습니다.

만약 종교적 체험으로 그 사람이 안 변하면 그런 사람은 회칠한 무덤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런 사람들 중에 바리새인이 있었습니다. 또 경건한 삶을 살고 도덕적 헌신을 하고 있는데도 그 사람이 안 변하면 이런 사람들은 니고데모와 부자 청년과 같은 사람이 됩니다. 이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물론 종교적인 체험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체험을 통해 그 사람이 믿음 가졌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하고 기적을 보고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복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체험을 하고서도 예수님을 믿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행한 고을들이 회개하지 아니하므로 그 때에 책망하시되 화 있을 진저 고라신아 화 있을 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그들이 벌써 베옷을 일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오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에까지 낮아지리라.‘

 

기독교는 종교적인 체험이 결국 믿음으로 하늘 소망으로 사랑으로 그 사람의 변화로 귀결되어야 합니다. 영적 체험을 통해 내가 바뀌어야 합니다. 문선명 박태선 그리고 각종 이단의 교주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종교적인 체험은 있는데 내가 변하지 않은 것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체험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변화됩니까?

복음의 진리의 말씀이 역사하면 그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그래서 말씀이 중요한 것입니다. 말씀의 이런 역할에 대해 6절에서 열매를 맺게 하고 자라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게 자라는 도다.’

 

그래서 그 맺게 되는 열매가 그 삶 속에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으로 나타나더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사람들은 은혜를 받습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에 열심이어야 합니다.

 

교회가 사람들을 프로그램으로 혹은 여러 가지 다양한 방법으로 모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은 사람들이 변화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전달하는 것이 목회자의 의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듣고 깨달아서 열매를 맺어나가는 것은 성도들의 몫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것이 결국에는 나의 변화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나의 변화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옵니다. 고라신과 벳세다와 가버나움 사람들이 그 많은 기적을 체험하고도 왜 변화가 되지 않습니까? 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곳에 곧 변화의 역사가 따라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우리 영혼의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바울은 왜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감사했습니까?

그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그의 동역 자 에바브로디도가 전해준 진리의 말씀을 듣고 변화된 것을 보고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진리의 말씀이 골로새 사람들에게 이르매 변화가 일어나서 하나님 밖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고 오직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던 사람들이 하늘 소망을 가진 사람들이 되고, 자기를 사랑하던 이기적인 사람들이 서로를 사랑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 변화 되어가는 열매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런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이렇게 열매를 맺는 신앙의 삶을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일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은혜 받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우리들도 골로새 교회 성도들과 같이 믿음으로 소망을 가지고 사랑하며 사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런 복 있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되고 우리 교회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바울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0) 2019.03.03
참 명예로운 성도의 삶  (0) 2018.11.11
덮어주는 사랑  (0) 2018.10.13
당신은 작정과 예정을 믿는가?  (0) 2018.07.26
동기가 선한 사람  (0) 2018.0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