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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중심의 신앙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1. 1. 3. 14:58

하나님 중심의 신앙

히브리서 11:1-4

 

1. 믿음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히브리서 11장에는 우리보다 먼저 믿음으로 살았던 수많은 사람들의 삶들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1절 말씀을 보면 이 사람들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 11에 나오는 사람들이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까?

자신들이 믿고 바라는 것에 대한 실상을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라고 합니다. 또 자신들의 눈으로 볼 수 없었던 것들에 대한 증거를 가지고 있었던 믿음이었다고 합니다.

 

믿음에 대한 이런 소개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믿음이란? ‘우리가 믿고 바라고 있는 것의 실상을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며, 우리가 믿고 바라고 있지만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에 대한 증거를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렇게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바라는 것들의 실상으로서의 믿음은 어떤 믿음입니까?

예로부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 바다에 옥황상제용왕이 있다고 믿고 제사를 드렸습니다. 왜요.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바다에서 자신들의 안전한 항해를 옥황상제나 용왕이 지켜 줄 것을 바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들이 제사 드렸던 옥황상제나 용왕이 실제로 있습니까? 없습니까?

옥황상제나 용왕이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어부들이 바다를 지배하고 있는 그런 존재가 있다고 가정하고 믿었던 것이지요.

 

이렇게 볼 때 이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믿음의 실상이 있는 믿음입니까? 실상이 없는 믿음입니까? 믿음의 실상이 없는 믿음입니다. 사람들이 생각으로 상상으로 만들어 낸 가상의 신적인 존재를 이들은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다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은 실상이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어떤 실상이 있는 믿음입니까?

 

첫 번째는,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실상이 있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믿고 섬기는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되시고, 또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도 구별되어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지만 우리 하나님은 영으로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 만물은 시간과 공관의 제한 속에 존재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시는 영생하는 분이십니다. 이렇게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시는 하나님은 실제로 존재하시는 분이십니다.

 

두 번째는, 믿음의 내용에서도 실상이 있는 믿음입니다.

누가복음 7장을 보면 이방인이었던 한 백부장이 그 사랑하는 종이 병들어 죽게 되자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서 그 종의 병을 고쳐 주시기를 청하였습니다. 백부장은 왜 장로들을 예수님께 보냈습니까? 예수님이 그 하인의 병을 고쳐 주실 수 있다는 믿음의 실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백부장의 요청을 듣고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전해들은 백부장은 사람을 보내서, 예수님께서 친히 자기 집에 오는 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하며, 그냥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이 낮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백부장은 어떤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요청을 했겠습니까? 백부장은 예수님께서 말씀으로만 하셔도 자기 하인의 병이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의 실상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실상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에 대한 실상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믿음이란? 믿음의 내용에 대한 실상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백부장이 이런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그 믿음을 이렇게 인정해 주셨습니다. 누가복음 7:9절입니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놀랍게 여겨 돌이키사 따르는 무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하시더라.’ 이것이 실상을 가지고 있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로서의 믿음은 무엇입니까?

이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물질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다 우리 눈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우리 눈으로 볼 수 없는 것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볼 수가 없고, 영적인 존재인 천사들도 볼 수가 없습니다.

 

이 뿐 아닙니다. 물질세계에 속해 있지만 과거와 미래에 속해 있는 것은 우리가 볼 수 없습니다.

우리는 과거에 이루어진 하나님의 창조를 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미래에 도래하게 될 메시야왕국 즉 천년왕국의 모습은 볼 수가 없습니다. 이런 것들은 오직 믿음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고 한 것입니다.

 

우리 보다 앞서 살았던 성도들은 모두 다 이 믿음의 증거를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2절입니다.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그리고 가장 먼저 신앙의 선배들이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증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이 바로 창조신앙입니다.

 

2. 창조를 믿는 신앙

 

히브리서 11:3절입니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우리가 눈으로 봐서 알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믿음으로 알게 된 것이라고 합니다.

 

이 세상을 살았던 그 어떤 사람도 하나님의 창조를 본 사람은 없습니다.

최초의 인간이었던 아담도 하나님이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는 것은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도 있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무엇이 이렇게 창조를 믿게도 하고 믿지 못하게도 하는 것입니까?

 

히브리서는 믿음의 유무가 이런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도 믿게 되지만,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를 믿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창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창조는 사람이 이 세상 속에 존재하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있습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믿음의 눈을 뜨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눈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도 믿고,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들도 믿고, 또 하나님의 창조도 믿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3절 말씀에서는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알게 되었다.’라고 한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아무리 많은 지식을 습득해서 가지고 있고, 아무리 그 가진 지혜가 특출하다고 하여도, 영으로 계신 하나님,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또 믿을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을 계시다는 것을 믿지 못하니 하나님의 창조 또한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볼 때 믿음의 눈을 가진 사람들과 믿음의 눈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완전히 다른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믿음의 눈이 있는 사람들은 경이로운 풍경이나 자연현상들을 보게 될 때 곧 바로 그런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런 자연현상을 부여해 주신 하나님을 바라보며, 자연 속에 나타난 그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찬양하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저 광대하고도 끝이 없는 우주를 볼 때에도 그 창조하신 우주보다 더 크신 하나님의 권능과 위대하심과 영화로우심을 바라보게 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현미경으로 볼 수 있는 물질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인 분자와 원자들의 결합과 활동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지혜와 완전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경외심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이 없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과 놀라운 자연의 힘 앞에 서게 될 때 그저 자연의 경이로움을 감탄하고 탄복할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아름다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이로운 자연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을 찬양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창조가 믿음의 사람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을 구분해 주는 시금석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며 사는 믿음을 구분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우리에게는 첫째 창세전부터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둘째 창조신앙 즉 그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셋째 성육신 신앙 즉 성자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넷째 십자가 신앙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대신 죽어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다섯째 부활신앙 즉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부활의 소망을 주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여섯째 재림신앙 즉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우리구원을 완성해 주실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일곱째 천국 신앙 즉 예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이 장차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을 믿는 믿음이 있습니다.

 

이 일곱 가지 신앙은 모두 다 앞에 있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우리가 창조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 이전부터 계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부활신앙을 가졌다는 것은 그 이전에 있는 십자가 신앙, 성육신 신앙, 창조신앙을 전제하고 있습니다. 창조신앙, 성육신 신앙, 십자가 신앙이 없는 사람이 나는 부활신앙을 가졌다.’라고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소리입니다. 부활신앙은 반드시 십자가 신앙을 전제하고 있는 신앙입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의 가장 기초는 바로 창조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고백하는 신앙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참 신앙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장인 히브리서 11장에서는 가장 먼저 창조신앙을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느냐? 믿음이 없느냐? 의 차이에 따라서 모든 것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사람들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사물들을 보는 관점이 달라집니다. 그리고 그 가지고 사는 가치관이 달라지고, 그 살아가는 삶의 목적과 의미까지 다 달라지게 합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장벽들이 있습니다.

그 중에 가장 큰 장벽은 바로 영적인 세계에 대한 이해의 차이일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모두 다 아담 안에서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알 수가 없습니다. 알 수가 없으니 믿을 수가 있겠습니까? 믿지 않으니 예배할 수는 더더욱 없겠지요.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것도 모른 채로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오직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고 이 세상에 있는 물질과 욕구와 욕망들을 추구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그 영이 거듭난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거듭난 그 영을 통해서 영이신 하나님을 믿고 알고 섬기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세계에 대한 믿음과 이해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장차 그 영혼이 들어가서 살게 될 하나님을 나라를 믿고 바라고 소망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이렇게 믿음은 사람들을 서로 다른 세계 속에서 살게 합니다.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이 다 같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속에는 그 영이 살아 있는 사람들과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록 그 살아가는 외형적인 모습은 서로 비슷하나 그 속사람 즉 그 마음과 그 중심은 완전히 다른 사람들인 것입니다.

 

다시 3절 말씀으로 돌아가면, 이 세상 속에는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과 하나님의 창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창조를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산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이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창조를 믿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이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믿음에 대한 첫 번째 증거입니다.

 

3.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신앙

 

그러면 히브리서 11장이 전해주고 있는 믿음에 대한 두 번째 증거는 무엇입니까?

4절입니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사람들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까?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그 하나님을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믿음 안에서 그 영이 거듭나서, 그 마음 중심에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그래서 그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자기를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진 절대적인 기준은 자기의 경험과 이해와 관점입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사는 삶이 온전한 삶이 될 수 있겠습니까? 온전한 삶이 될 수 없습니다.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의 왜곡된 삶을 우리는 지금 우리나라의 잘못된 정치 지도자들을 통해 신물 나게 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자기를 그 삶의 중심에 두지 않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만이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창조를 믿고, 하나님을 섬기고 예배하는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물론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도 자기중심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에게 어떤 말씀을 주셨습니까?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들은 내 제자가 되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자기가 자기에게 우상이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서 능력이 나타나면 이런 사람들은 이단의 교주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목회에서 목회적인 능력이 나타나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 왕국을 세워나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신앙을 자기 유익을 취하는 도구로 삼게 되는 것입니다.

 

종말의 때 이 세상에 오게 될 것이라는 적그리스도가 어떤 사람이라고 합니까?

그는 사단 마귀가 주는 능력을 받아 가지고 올 뿐 아니라, 이 세상 종교를 등에 업고 등장하게 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등장하는 적그리스도는 자신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는 메시야로 왔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경배하고 섬길 것을 요구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런 유혹에 넘어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늘 깨어 있는 신앙을 가져야 할 뿐 아니라, 깨어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깊은 교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내가 중심이 되고 내 관점 내 이해 내 판단이 중심이 되면 우리는 유혹을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고 하나님과 그 나라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야합니다. 그러면 세상 적인 것으로 유혹하는 마귀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우리가 자기중심적인 잘못된 이해와 관점을 이야기를 할 때 자주 인용하게 되는 것이 바로 시각장애인들의 코끼리 경험입니다. 여러 명의 시각 장애인이 함께 길을 가다가 코끼리를 만나게 됩니다. 함께 가는 사람이 그들에게 당신들 앞에 지금 코끼리라는 동물이 서 있다.’ 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는지 만져보게 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손으로 코끼리의 다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라는 동물은 마치 기둥과 같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은 그 꼬리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뱀과 같이 생겼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 코끼리 코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굶고 긴 관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은 그 귀를 만지면서 코끼리는 마치 큰 부채와 같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자기가 중심이 되면 이런 오류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오류들을 또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와 아론을 통해 베풀어 주신 10가지 재앙을 친히 목도하고,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기 위해서 믿음으로 애굽을 떠났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 앞을 가로 막았던 장애물이 바로 홍해였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어찌할지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그들 뒤에서는 이들을 다시 애굽으로 잡아 가려고 애굽 왕 바로가 보낸 전차 부대가 쫓아오고 있었습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했습니까?

순식간에 불신앙에 빠져서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였습니다. 출애굽기 14:11-12절입니다.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그런데 이 때 모세는 어떻게 했습니까?

출애굽기 14:13-14절입니다.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왜 이렇게 서로 다른 것입니까?

이 차이는 그 삶의 중심에 누구를 두고 있느냐? 에 달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그 주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모세와, 자기 자신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자기 생각과 판단대로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이렇게 달랐던 것입니다.

 

그러면 이 홍해의 기적을 경험하고는 달라졌습니까?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그 마음 중심에 두고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의 기적을 경험한 이후에도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이후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삶이 어려워지기만 하면 곧 바로 하나님과 모세를 믿지 못하고, 물이 없어서 못살겠다.’ ‘물이 써서 못 먹겠다.’ ‘고기를 먹지 못해서 못 살겠다.’ ‘배고파서 못살겠다.’ ‘음식이 맛이 없어서 못살겠다.’ ‘차라리 이 광야에서 고생하며 살지 말고 애굽으로 돌아가자.’ 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런 불신앙적인 삶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나를 중심에 두고 사는 삶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을 내 삶의 중심에 두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모세와 같이 믿음으로 반응하며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아멘.

 

우리가 섬기며 살고 있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참새 한 마리가 살고 죽는 다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머리카락의 숫자까지 다 세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그 모든 일들을 주권적인 역사로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이 세상 모든 것들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오늘날에는 인본주의적인 관점이 온 세상을 뒤덮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설 곳이 없어진 것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주 소수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사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고 사는 사람들은 세상의 미움을 받고 놀림거리가 되기 십상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도 지진이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성경을 보면 앞으로는 점점 더 큰 지진이 점점 더 자주 발생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이 지진이 바로 말세가 가까이 이르렀다는 것을 보여주는 종말의 징조가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지진은 어디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까?

환태평양 불의 고리라고 알려지고 있는 곳에서 대부분의 큰 지진들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일본이 들어 있습니다. 일본은 이 지진대에 속해 있으면서도 네 개의 지각 판이 만나는 곳에 있기 때문에 지진이 많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곳에 위치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일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이겠습니까?

종말이 가까울수록 일본에서는 지금까지 보다 더 강력한 지진이 일어난 가능성이 많다는 것을 알고 준비하고 대처해 나가는 것이 지혜로운 처신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있는 선교사가 일본 사람들에게 이런 내용을 알려 주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선교사가 사랑으로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 준다는 것을 알고 고맙게 생각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자기를 그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선교사의 이런 말을 악담과 저주로 받아들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인류역사를 심판으로 끝내고 마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하시는 방법이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는 전쟁을 통해서, 또는 처처에서 일어나게 되는 기근과 지진과 온역으로 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온역은 전염병을 말합니다. 코로나 19 바이러스와 같은 온역이 없어지도록 금식하고 기도해야 합니까? 요한계시록은 이 온역을 통해 인류 1/4이 죽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목숨을 내어 놓고 금식하며 기도해도 이런 일들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정해 놓으신 것을 막을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화산 옆에 가서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하나님 이 화산이 터지지 않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하면 되겠습니까? 아무리 믿음으로 목숨을 걸고 기도해도 앞으로는 더 많은 지진이 일어나고 더 많은 화산이 터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와 같이 종말 시대를 살았던 노아는 참 힘든 삶을 살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아는 재산을 늘리는 일에 몰두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며 크고 아름다운 건물을 짓고 있는 사람들에게, 수 없이 넓은 땅에 농사를 지어 풍성한 열매를 거두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수를 셀 수 없는 많은 가죽을 방목하며 부자가 될 미래를 계획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무슨 메시지를 전해 주었습니까?

 

하나님이 앞으로 홍수를 일으켜서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전해 주었습니다.

이 심판의 말씀을 전하며 살았던 노아의 삶이 쉬웠겠습니까? 어려웠겠습니까?

 

노아가 당시 사람들에게 전해 주었던 말들은, 미래에 대한 꿈을 가지고 공부하고 있었던 젊은 사람들에게는 거의 저주와 같은 소리로 들렸을 수 있습니다. 노아가 전해 주었던 말들은 다른 사람들의 꿈과 희망을 짓밟아 뭉개 버리는 몰상식한 언행으로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노아는 그렇게 당시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소리, 그래서 사람들이 분노의 감정을 폭발하게 하는 그런 소리를 전해주며 살아가야 되는 사명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노아는 어떻게 심판의 날을 준비하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삶을 살 수 있었을까요? 노아는 그 삶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고 사는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노아는 사람들의 반응이 어떠하든지 관계없이 하나님이 주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람을 중심에 둔 신앙과 하나님을 중심에 둔 신앙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그 신앙과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는 삶을 삽니다. 그런데 자기를 그 신앙과 삶의 중심에 두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보다 자기 입장을 내 세우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들을 인정해 주실까요?

하나님은 자기중심적인 사람들은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그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인정해 주신다는 구체적인 예가 성경이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우리가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나의 신앙과 나의 삶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언제나 우리 하나님께서 나의 신앙과 나의 삶의 중심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비록 내 입장에서는 이해가 되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왜요. 우리 삶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살아야 하는 종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히브리서 11:4절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신앙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사느냐? 아니며 나를 나의 삶의 기준으로 삼고 사느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삶의 중심에 두고 그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고 있느냐? 아니면 나를 나의 삶의 중심에 두고 내 꿈과 목적과 성공을 이루어 가는 삶을 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벨은 어떤 삶을 살았다고 합니까?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아벨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믿고 섬기며 예배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는 잘못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능력과 헌신과 업적을 보고 우리를 평가하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성경의 증거는 다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능력과 헌신과 업적을 보고 우리를 평가하시는 분이 아니시고, 우리 마음 우리 중심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모시고 살았느냐? 아니면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았느냐? 하는 것을 보고 평가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말씀들을 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7:21-23절입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을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쫒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고린도전서 13장입니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하고......, 내게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믿음이 있고......, 내게 있는 모든 것을 내어주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디모데 후서 2:5절입니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교회를 개척하고 부흥을 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앙은 하나님을 그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살아가는 신앙입니다. 하나님이 엘리 제사장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에 의해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처음에 그는 무슨 말을 하고 무슨 기도를 하든지 하나님이 다 이루어주셨을 정도로 인정을 받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사실 이 엘리 제사장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이 엘리 제사장의 나중의 삶이 어떠했습니다.

나중에는 하나님보다 그 아들들에게 마음이 가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런 엘리 제사장을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책망하셨습니까? 사무엘 상 2:29절입니다. 네 아들들을 나보다 더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들을 살지게 하느냐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주신 말씀이 30절입니다. 이제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하리라.” 행한 대로 갚아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엘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제사장과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나중에는 하나님보다 그 자식들을 그 마음 중심에 두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집안은 멸망을 당한 것입니다. 이런 불경건한 삶에 대해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나보다 아비나 어미나 형제나 자매나 자식이나 전토나 그 무엇이든지 더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신앙은 어떤 신앙입니까?

하나님을 그 마음 중심에 두고 사는 신앙입니다. 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첫 번째 계명이 바로 나 외에 다른 신을 내게 두지 말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주신 이 십계명의 말씀처럼, 오직 하나님과 그 주신 말씀만을 마음에 두고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며 사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신앙으로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바로 아벨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4절 말씀은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하는 신앙도 바로 이런 신앙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또 다시 허락해 주시는 2021년도를 살아갈 때 우리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마음의 중심에 모시고, 그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굳게 붙들고, 믿음으로 주어진 하루하루를 순종하며 살아가는 한 주간이 되고, 한 달이 되고, 한 해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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