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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종하는 믿음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0. 8. 10. 05:33

순종하는 믿음

베드로전서 3:1-6

 

여러분은 오래 전에 전한 말씀이라서 기억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지난 6월 달에 하나님의 약속과 성취라는 제목으로 아브라함 사라의 믿음을 살펴본 일이 있습니다. 혹시 기억나십니까? 기억이 안 나시면 집에 돌아가셔서 우리 교회 블로그를 열어보면 거기에 올려놓았습니다.

우리교회는 교회는 블로그, 재가센터는 카페 아이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디 치기도 번거로울 수 있잖아요. 그러면 인터넷에서 그냥 노원 참빛교회혹은 참빛재가복지센터라고 입력하면 블로그와 카페창이 뜹니다. 참 편리하고 좋은 시대입니다.

 

우리교회는 설교를 문서로 올립니다.

그래서 누구나 와서 볼 수 있고, 또 복사해서 참고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매주 설교영상을 제 개인 카톡으로 보내 주시는 분이 있습니다.

재가 그 보내주는 영상을 볼까요? 안볼까요? 어떻게 40분에서 1시간짜리 영상을 앉아서 보고 있겠습니까? 어떤 것은 한 시간이 넘는 영상도 있습니다. 차라리 교회 홈페이지에 문서로 올려놓고 볼 사람은 보라고 하면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읽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목회자인 제게 전도하는 것도 아닐텐데 왜 개인 카톡으로 설교영상을 보내는지 모르겠습니다. 만약 그런 분이 이 설교 문을 읽게 된다면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심지어 어떤 분은 자기 설교도 아닌 다른 사람의 설교를 보내줍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주 이상한 내용의 설교를 보내주기도 합니다. 그럴 때 제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들겠습니까? 도대체 이 목사님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기에 이런 설교를 들으라고 보내는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6월 달에 한 설교의 복습입니다.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아브라함과 사라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아브라함과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나 약속의 땅 가나안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과 사라가 가지고 있었던 약속을 믿는 이 믿음은 처음부터 온전한 믿음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났지만 하란까지 가서는 더 이상 가지 못하고 주저앉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하란을 떠날 때도 그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이런 아브라함과 사라가 언제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까?

아브라함이 99세 때, 사라가 89세 때입니다. 하나님은 이들이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자, 그 믿음에 응답하셔서 약속하신 자녀 이삭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루아침에 온전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대는 25년이라는 세월이 걸렸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우리가 모두가 다 하나님을 믿고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믿음이 온전해 지는 대는 시간이 걸립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며 참고 인내해 나가는 긴긴 세월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 믿음이 약하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믿음을 잃어버리지만 않고, 끝까지 참고 인내해 나간다면, 우리들도 결국 아브라함과 사라처럼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온전한 믿음을 가진 성도로 성장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 그 날까지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면 됩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로 아브라함과 사라의 순종하는 믿음을 살펴보겠습니다.

 

첫 번째 살펴볼 것은,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날 때 나타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2-3절입니다.

스데반이 이르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에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이르시되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 땅에서 살 때 영광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시는 씨족 사회이고 부족사회였기 때문에 친척들이 다 모여서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모든 재산과 가업을 다 내려놓고, 일가친척들이 살고 있는 갈대아 우르 땅을 믿음으로 떠났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갈 곳이 어디 인지도 알지 못한 채로 고향 땅을 떠난 것은 놀라운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렇게 믿음으로 갈대아 우르 땅을 떠난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하란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오랫동안 머무르게 됩니다. 이 때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창세기 12:1-3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하란에 머물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다시 나타나셔서 이제는 아비 집까지 떠나 내가 너에게 줄 땅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 아버지 데라와 그 형제들은 하란에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카 롯은 달랐습니다. 그는 아버지가 일찍 죽은 후에 자식이 없었던 아브라함에게 마치 자식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떠났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둘째,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지 않고 살았던 그 삶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르렀을 때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물이 풍부하다고 알려지고 있는 애굽으로 내려가게 됩니다. 그런데 애굽에서 어떤 일을 당합니까? 그 아내 사라를 애굽 왕에게 빼앗기는 낭패를 당하게 됩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이 그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은 무엇을 하고 있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약속을 땅을 떠나온 것을 후회하며,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면 약속의 땅으로 바로 돌아갈 것이라고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이 이런 아브라함의 삶에 개입해 주셔서 아브라함은 아내를 찾아 가나안으로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아브라함은 약속의 땅을 떠난 잘못을 마음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에는 일생 동안, 무슨 일이 있어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이후에도 가나안 땅에 기근이 찾아 왔고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만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단 한 번도 가나안 땅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또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셋째, 그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는 사건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신앙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사건은 바로 그 사랑하는 아들 독자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린 사건입니다. 당시 아브라함은 나이 많아 늙었고 그 아들이삭은 청년이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그 아들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요구하셨습니다. 창세기 22:1-2절입니다.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만약 우리가 아브라함이라면 어떻게 했을 것 같습니까?

모르긴 몰라도 우리는 여러 가지 이유를 대며 하나님께 기도하고 반문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 사람을 잡아 드리는 제사는 가증이 여기신다고 전에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이삭을 마치 짐승처럼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는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 이삭은 약속의 자녀가 아닙니까? 만약 이삭을 번제로 드려서 이삭이 죽으면 하나님이 전에 내가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을 번성케 하시겠다.‘라고 약속하신 그 약속의 말씀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또 하나님이 주신 제 아들이삭을 통해 세상 만민이 하나님의 복을 받게 할 메시야를 보내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이삭을 번제로 드리면 하나님의 이 약속은 무효가 되지 않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 외에도 수 없이 많은 질문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어떻게 했습니까? 아브라함은 조금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그것은 어떻게 압니까?

아브라함은 저녁기도 시간에 하나님이 주시는 이 말씀을 들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다른 생각을 했다면 그 날 밤을 지새우며 하나님께 이 일에 대해 묻지 않았겠습니까? 이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입니까? 이것은 제가 하나님의 뜻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논리에도 맞지 않고 경우에도 맞지 않는 말씀입니다.’ 등등의 기도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날 저녁에 잠을 자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 모든 준비를 해 가지고 하나님이 지시하는 산으로 떠났다고 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다른 생각을 조금이라도 했다면 이렇게 떠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가야 했던 모리아 산3일 동안 가야할 정도로 먼 곳에 있었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조금이라도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면 그 3일 길을 가는 동안 고민 고민 했어야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이 고민했다는 기록은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망설였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런 말씀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순종한다는 확정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한 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하는 믿음이 바로 이 믿음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나는 순종할 것이라는 이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 가게 하는 믿음이며,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하는 최고의 믿음, 최상의 믿음입니다. 아멘.

 

또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지혜롭게 순종하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혜롭게 순종했습니까?

첫째, 아브라함은 그 아내 사라와 이 일을 의논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사라와 이 일을 의논을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사라가 그래요. 하나님의 말씀이니 이삭을 잘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고 오세요?’ 라고 했겠습니까? 아니면 정반대로, 당신 미쳤어요?’ ‘이삭이 어떤 아들인데 이삭을 짐승처럼 번제로 드려요?’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잘못들은 것이에요?’ ‘이삭을 데리고 가려면 나를 먼저 죽이고 나서 데려 가요?’라고 하지는 않았겠습니까? 아마 사라는 이삭을 꽉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또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혜롭게 순종했습니까?

둘째, 아브라함은 이 사실을 그 아들이삭에게도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과 종들과 함께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장소에 이르러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 종들과 나귀는 산 아래 남겨 두고 그 아들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신은 칼과 불을 가지고 단 둘이만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그 때 이삭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번제를 드리려면 반드시 번제로 드릴 제물이 있어야 하는데 아버지가 제물은 챙겨가지 않으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물었습니다. 아버지,.... 불과 나무는 있는데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습니까?” 이 때 아브라함이 무엇이라고 대답했습니까?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그런데 사실 하나님이 준비한 그 어린 양은 누구입니까?

아브라함의 아들이삭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아들아 하나님이 너를 번제로 드리라고 하셨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그 아들이삭에게 이 말을 했다면 이삭은 어떤 반응을 보였겠습니까?

 

우리는 이삭이 아니니까 어떻게 반응했을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산에 정상에 올라가서 돌로 번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나무를 쌓아 놓고, 불을 붙일 준비를 한 후에 아브라함은 그 아들이삭을 묶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번 제단 위에 눕히려고 했습니다.

 

이 때 청년인 이삭이 아버지 왜 이래요 라고 반발하면 노인인 아브라함은 그 아들이삭을 번제를 드릴 수 없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하나님 청년인 아들이 반발하니 저는 힘이 모자라서 그를 번제로 드릴 수가 없네요.’ 라고 핑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 아버지는 자기를 사랑하되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시는 분이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아버지께서 자기를 번제 제물로 삼아 하나님께 드리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아버지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 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니면 아버지가 자기에게 그렇게 하실 분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삭은 하나님의 요구하심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자기를 번제로 드려야 하는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아픈 마음을 더 아프게 하지 않기 위해서 그는 아버지에게 반항하지 않고 아버지 손에 자신 목숨을 맡겼습니다. 이 사건 속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도 대단했지만, 그 아들이삭의 믿음도 대단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아멘.

 

또 아브라함은 어떻게 지혜롭게 순종했습니까?

셋째,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장소에 그 종들을 데리고 가지 않은 것입니다.

 

만약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는 곳에 종들을 데리고 갔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고 할 때 그 종들이 주인님 왜 이러세요. 하나님께서 사람을 제물로 드리는 것을 금하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 자기들끼리 우리 주인님이 연세가 많아지셔서 정신이 이상해지신 것 같으니 우리가 막자.’ 라고 하면서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 못하도록 막지 않았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번제 단 위에 누워 있는 그 아들이삭을 향해 칼을 빼 들었습니다. 그러자 다급해 지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급히 여호와의 사자를 보내셔서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라고 그를 부르시면서,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일을 통해 그 순종하는 믿음이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아들이삭을 실재 번제로 드리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마음으로는 이미 그 아들이삭을 번제로 드린 것이나 같습니다.

 

로마서의 말씀을 보면 사람이 마음에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였던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사실 이미 그 마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마음에 있는 이 믿음에서 순종하는 삶이 나왔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순종하는 믿음은 이외에도 많이 있습니다.

나중에 또 아브라함의 시험이라는 제목으로 더 살펴볼 시간이 있을 것입니다.

 

두 번째 살펴볼 것은, 사라의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면 사라의 순종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그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으로 섬기며 산 삶 속에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를 인격적인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들에게 주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들은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 그 인격이 부활한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남편들에게는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에베소서 5:25절입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자녀들에게는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골로새서 3:20절입니다.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부모들에게는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골로새서 3:21절입니다.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종들에게는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골로새서 3:22절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아내들에게는 무슨 말씀을 주셨습니까?

에베소서 5:22-23절입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런데 아내들이 그 남편에게 복종하기가 쉽습니까?

그 남편이 세상에서는 대통령이라도 그 남편이 세상에서는 기업체의 사장이라도 그런 남편을 뒤에서 조종하는 사람은 바로 그 아내입니다. 교회에서도 담임목사님이 모든 것을 다 하는 것 같지만 사실 그 배후에 있는 사모님들이 목사님을 쥐락펴락하는 것입니다.

 

결혼 생활을 해 본 분들은 다 알고 있는 일이지만 남편이 한 말을 하면 아내는 두 세 마디를 해야 직성이 풀리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내들의 이런 성향을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런 아내들에게 너희는 너희가 가지고 있는 성향대로 남편이 한 말을 하면 두 세 마디를 해라라고 하셨으면 얼마나 순종하기 쉬웠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라고 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그 반대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

 

하나님의 이 요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아내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남편에게 복종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본성을 죽이고 그 타고난 성향을 죽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들이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전서 3:6절의 말씀을 보면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그 남편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사라는 어떻게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까?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도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사라는 그 남편 아브라함을 자기 남편으로 보았을 뿐 아니라, 또 자기와 그 가정의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주인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라는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그렇게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교회 목사님이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은 대단한 일입니다.

왜요. 이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그 가지고 있는 신앙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교회 사모님이 목사님의 말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도 대단한 일입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에게 순종하는 삶을 통해서 그 가지고 있는 신앙이 바른 신앙임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사라는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신앙을 통해 그 자신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는 바른 신앙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또 사라의 순종하는 믿음은 어디에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둘째, 창세기를 보면 사라의 순종하는 믿음의 삶을 잘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잘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이 자기에게 나타나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가야할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이 때 사라는 순종하여 함께 떠났습니다.

 

여성분들의 입장에서 이것이 쉬운 일이었을까요? 아닐까요?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살고 있는 집을 옮겨 이사를 가게 될 때 여성들이 고려하는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래서 이사 갈 집은 보통 여성이 오케이 해야 계약이 됩니다. 그런데 사라는 이사 가야할 곳이 어딘지 따지지도 묻지도 않고 순종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처음에는 하란까지 갔습니다. 그리고 이 하란에서 몇 년 머물게 됩니다.

하란은 당시 바벨론 문명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최북단의 변방이었습니다. 그 너머에 있는 땅에는 다른 문화를 가진 다른 민족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소아시아 쪽으로 가면 헷 족속이 살고 있었고, 그들이 들어가야 할 가나안 땅으로 가면 아모리 사람들이 살고 있었고, 그 너머에는 애굽 족속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하란까지 와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오래 동안 머물며 동정을 살피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브라함은 다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또 하나님이 내게 말씀하셨다고 하면서 이제 하란을 떠나야겠다고 했습니다.

이 때 그 시아버지와 시동생 가족들은 우리는 하란에서 살고 떠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사라는 이때도 아브라함을 따라 문화가 다르고 민족이 다른 곳, 그 가는 목적지가 어디인지 알도 수 없는 곳을 향해 순종하여 따라 갔습니다.

 

가나안 땅에 기근이 들어서 애굽으로 내려갈 때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때 사라는 이곳이 하나님이 약속한 땅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그런데 왜 약속의 땅을 떠나려고 하느냐?’라고 따져 물을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라는 따져 묻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애굽으로 내려가다가 이상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애굽 왕 바로는 예쁜 여자만 보면 자신이 취한다는 것입니다. 사라는 정말 예뻤던 것 같습니다.

이 때 사라는 60대 중반이 넘은 할머니였는데도 마치 미혼 여성처럼 보일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사라에게 무슨 요구를 합니까?

당신이 내 아내라고 하면 애굽 왕 바로가 나를 죽이고 당신을 빼앗아 갈지 모르니 당신은 이제부터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동생이라고 해 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정말 해서는 안 될 요구였습니다. 그런데도 사라는 아브라함의 이 부당한 요구까지 순종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애굽 왕 바로의 궁으로 끌려갔을 때에도 이 약속을 끝까지 지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블레셋 땅에 가서 우거할 때에도 동일한 요구를 또 다시 했습니다.

이 때 사라는 정말 할 말이 있지 않았겠습니까? 사라는 애굽에서 그러다가 낭패를 당한 것도 잊었느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때도 사라는 그 남편의 요구에 순종하는 삶을 택하게 됩니다.

 

사라의 순종하는 삶은 끝이 없습니다.

당시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들판에서 목축을 하며 살았던 아브라함의 가족들은 다른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적었습니다. 그런데 가끔씩 여행자들이 아브라함의 천막 근처를 지나갔습니다. 그럴 때면 아브라함은 지나가는 손님을 대접한다고 하면서 사라에게 고기를 잡고 음식을 요리해 오라고 요구했습니다. 이때도 사라는 순종했습니다.

 

사라도 한 사람의 여성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어떻게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습니까? 그 비결을 베드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남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자기 가정의 주인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종이 주인에게 순종하듯이 그렇게 아브라함에게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베드로 전서 3:6절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딸이 된 것이니라.’

 

그렇다면 순종하는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왜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남편과 자기를 동등한 위치에 두는 사람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동등한 입장에 서면 동등한 자기 권한을 주장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남편보다 자기를 위에 두는 사람은 순종할 수 없습니다. 위에 있는 사람은 명령은 해도 순종하지는 못합니다.

 

이런 하나님의 말씀을 살피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나를 어느 위치에 두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나는 순종하는 삶을 살수도 있고 불순종하는 삶을 살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정에서뿐 아니라 교회에서도, 직장에서도 동일합니다.

 

교회에서는 어떤 사람들이 순종하는 삶을 삽니까?

목사님을 존중하고 자신을 그 아래에 두는 겸손한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자기보다 나이가 더 어리다고 자기 아랫사람으로 보는 성도들, 목사님의 하는 것을 보니 자기 보다 더 못하다고 생각하여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이 하는 사람들은 순종할 수가 없습니다. 요즘은 각 교회들마다 이렇게 교만한 사람들로 인해 다툼과 분쟁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여러 교회가 흔들리고 혼란스러워 지는 것입니다.

 

빌립보서에서는 우리 주 예수님의 순종하는 삶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으로서 성부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과 모든 면에서 똑 같으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그런 예수님께서 어떻게 성부하나님의 뜻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 수 있으셨다고 합니까? 그것은 자기의 신성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진짜 종으로 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빌립보서 2:5-8절 말씀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종은 주인이 무슨 일이든지 시키면 어떻게 합니까?

주인이 무슨 말을 하든지 예이-’ 라고 대답하며 순종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은 그 주인이 말도 안 되는 일을 시킬 때에는 어떻게 합니까?

종이 그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니 나는 그 일을 순종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합니까? 아닙니다. 종은 그 요구가 말도 안 되는 요구인줄 알면서도 예이-’ 하고 순종해서 그 일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종입니다.

 

어떤 여자 목사님이 교회에서 집사로 있을 때, 이 순종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깨닫기 전에, 그 남편 되는 장로님과 20년을 다투고 싸우며 지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싸움은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회자가 된 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이 순종하는 삶에 대한 말씀을 깨닫게 되었고, 그 후에는 남편이 무슨 말을 해도 예이-’ 라고 하면서 순종했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먼저는 자신이 행복해지고, 나중에는 남편도 서서히 변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더 이상 남편과 싸우고 다투지 않게 되었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누리며 살아가는 행복을 누리며 사는 가정이 되었다고 합니다.

 

전에는 자신이 목사가 되었는데도 남편인 장로님이 늘 자신을 무시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달라져서 그 남편 장로님이 자신의 목회에 가장 든든한 후원자가 되어주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남편 되는 장로님은 아내에게 어디 가서 신앙 간증 할 기회가 있으면 당신은 종의 입장에 서서 예이-’ 라고 순종한 그 간증을 하라.‘고 한답니다. 그것이 자신의 가정을 변화시켜 주었듯이, 또 다른 사람들의 가정도 변화시켜 줄 것이라고 한답니다.

 

정말 사라는 그렇게 살았습니다.

남편이 이사를 가자고 하면 사라는 종이 주인의 말에 예이-’ 라고 하며 순종하듯이 그렇게 순종했습니다. 남편이 오늘 집에 손님이 많이 올 것이니 음식 준비를 하라고 하면 종이 주인의 말에 순종하듯이 그렇게 예이-’ 라고 하며 순종했습니다. 심지어 자기 한 목숨 부지하고자 이제부터는 내 아내라고 하지 말고 내 동생이라고 하라라고 할 때에도 종이 주인의 말에 순종하듯이 그렇게 예이-’ 라고 하면서 순종했습니다.

 

오늘 설교에서는 다른 것은 다 잊어버려도 종이 주인에게 예이- 라고 하며 순종하는 이것 하나만 기억하면 됩니다. 이것이 사라의 순종하는 신앙이었습니다. 이런 사라였기에 하나님은 이 사라의 신앙을 모든 여성들이 본 받아야 할 신앙이라고 하면서 이 사라를 열국의 어미로, 열국의 믿음의 어머니로 삼아주셨습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오늘은 아브라함과 사라의 순종하는 신앙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아브라함, 그 남편 아브라함의 말에 종의 입장에 서서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라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셨습니다.

 

우리 모두 이 두 사람처럼 믿음 안에서 순종하는 신앙을 가지고, 순종하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함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과 사라를 존귀하게 여겨 주심같이, 우리 모두도 하나님이 존귀하게 여겨 주심을 받으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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