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숙으로 나아가라
요한1서 2:12-17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과 구분점이 무엇입니까?
아마 외모이고, 사회적인 지위이고, 그 사람이 이룬 성공과 부일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사람들을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 구분점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이 외모이고, 사회적인 지위이고, 그 사람이 이룬 성공과 부입니까?
이런 구분들은 이 세상 속에서만 유효하다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은 이 세상에 속하여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도 책임 있는 한 사람의 시민으로 살아가지만, 이 세상 너머에 있는 세계 즉 장차 우리들이 가게 될 하늘과 지옥까지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장래에 하늘에 가고 지옥에 가도록 구분 해 주는 요인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가 가진 믿음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는 믿음의 유무에 따라 우리는 천국에 가기도 하고 지옥에 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우리가 사람을 보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나 구분점이 무엇이 되어야 합니까?
바로 믿음입니다. 그 사람이 믿음을 가진 사람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우리가 사람들을 구분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해야 합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우리가 사람들을 보는 방법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이나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은 사람으로 보입니까? 아니면 전혀 다른 사람으로 보입니까?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차이가 확실했던 시대는 그 신앙이 살아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과 성도들의 차이가 불확실했던 시대는 그 신앙이 타락했던 시대였습니다.
이것은 교회 안에서도 같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오래 된 목사와 장로와 신앙의 연조가 짧은 성도들의 신앙이 확실히 차이나는 교회는 그 신앙이 살아 있는 교회이고, 목사와 장로와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신앙이 별로 차이가 나지 않는 교회는 세속화된 교회일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1서에서는 이런 성도들의 신앙의 문제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1.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의 모습입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1서 2:12-13절에서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을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의 세 부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아비들이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이 구분은 그 사람이 실재로 자녀이고 아비이고 청년이라는 물리적인 구분이기도 하겠지만, 또 그 사람이 가진 신앙의 상태에 따른 구분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구분을 통해 사도요한은 지금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첫째는, 교회 안에는 어린 자녀와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 청년과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 성인들과 같은 신앙을 가진 성도가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은 청년의 신앙으로 성장해야 하고, 청년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성인의 신앙으로 성숙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성장과 성숙을 이뤄 나가야 할 책임이 각 성도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2.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사도요한은 또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2:15-16절입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요한은 당시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던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 아버지를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사도요한만 이렇게 구분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바울도 사람들을 두 부류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❶ 사도 바울도 로마서 8:5절 이하의 말씀에서 ➀ 육체를 따르는 자와 영을 따르는 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➁ 육신의 일을 생각하는 자와 영의 일을 생각하는 자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육신의 생각은 하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하지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 그러면서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을 주지만, 육신의 생각은 그 결과가 사망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일이고,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하고 있습니다.
❷ 또 갈라디아서 5:17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➂ 육체의 소욕과 성령으로 구분하고 있습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렇게 볼 때 이 세상에는 서로 다른 두 부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한 부류는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이고, 다른 한 부류는 세상에 속하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런 구분은 예수 믿는 성도들 안에서도 존재하고 있는 구분입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의 마음 안에도 이런 육과 영의 갈등이 존재하고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도 이렇게 육에 속한 모습과 영의 속한 모습이 함께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본래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죄 사함 받고, 구원을 받아,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런 우리 안에는 ➀ 본래 우리가 소유하고 있던 육체적인 본성이 있고 ➁ 또 성령으로 거듭난 영에 속한 본성이 함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두 서로 다른 본성이 갈등하며 사는 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우리가 이런 존재라면 이런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있는 육체적인 일을 버려 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육체의 일을 버려 나가는 그 만큼 성령 안에서 거듭난 본성으로 채워나가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성장이고 우리 신앙의 성숙입니다.
❶ 성경은 우리가 버려 나가야 할 육체의 일에 대해 이렇게 증거 합니다.
요한 1서 2:16절에서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다 육체의 일이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서 5:19절입니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란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짖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육체의 일을 버리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도 못하고, 구원을 받지도 못하고, 결국 지옥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육체의 일을 버리는 것이 왜 이렇게 중요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육체의 일을 버리지 않고서는 영에 속한 사람으로 성장하고 성숙해 나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이것이 우리가 하늘에 속한 사람인지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우리가 영에 속한 사람인지 육에 속한 사람인지를 구분해주는 시금석이 되기 때문입니다.
❷ 육체의 일에 대해서 심리학자들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심리학자의 주장에 의하면, 사람들은 다 마음의 상처를 가지고 있는데, 그 상처의 대부분은 어릴 때 부모나 환경으로부터 받은 상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으면, ➀ 몸은 나이가 들면서 자라나 성인이 되었어도, ➁ 그 마음은 상처 받은 그 시간에 머물러 서서 성장을 멈추게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상처를 많이 받은 사람은, 몸은 성인으로 자라나지만 심리 정서적 차원에서는 어린 아이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성인아이라고 지칭 합니다.
이렇게 받은 상처가 치유되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➀ 심리적으로 성숙한 사람은 어느 정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어 내는 힘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상처를 받아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외부에서 오는 작은 스트레스도 잘 견디지 못하게 한다고 합니다. ➁ 또 성숙한 사람은 어느 정도 자기감정의 절제를 하며 살 수 있는데, 상처를 받아 심리적으로 미성숙한 사람은 자기감정을 잘 절제하지 못하고, 때로 이유 없이 화를 잘 내고, 때때로 억압되어 있던 분노의 감정을 표출하게 된다고 합니다. ➂ 또 성숙한 사람은 그 살아가는 삶 속에서 만나게 되는 문제들을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데, 상처를 받아 미성숙한 사람은 무슨 일을 만나든지 그 일을 합리적으로 판단하지 못하고 즉흥적이고 감정적으로 대응한다고 합니다. ➃ 성숙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배려하고 이해해 주는 마음이 있는데, 상처를 받아서 미성숙한 사람들은 상대방을 배려하고 생각해 주지 않고 쉽게 상대방을 비난하고 비판한다고 합니다.
이 뿐 아닙니다. 미성숙한 사람들의 특징은,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는데 쓸데없이 거짓말을 잘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며, 그 가지고 있는 자존감이 아주 낮다고 합니다. 그래서 쉽게 두려움을 느끼며, 무엇에 쉽게 빠져들어 가는 습성이 있어서 알콜이나 게임이나 도박 같은 것에 쉽게 빠지고 중독되는 특징이 있다고 합니다. 아이들이 게임과 유튜브에 빠지고, 성인들이 게임과 도박에 빠져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미성숙한 기질들은 그 크기와 강도는 서로 다르겠지만 내게 우리에게 다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누가 가장 잘 알겠습니까? 자기가 자기를 가장 잘 아는 것입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보아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그런 육체의 일이나, 심리학자가 말하고 있는 심리적 정서적 미성숙한 모습이 내게도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고민을 하기도 하고, 이 문제를 가지고 기도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우리에게 오시면 성령께서는 이런 육체의 일, 심리적 정서적 미성숙한 상태에서 우리를 성숙한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성장하고 성숙하게 해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에게서 이런 성장과 성숙이 보이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들이고, 만일 이런 성장과 성숙이 보이지 않으면 우리는 아직 육체에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❶ 그런데 로마서 7장을 보면 사도바울도 이 부분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은 보는도다.’ ❷ 이런 고민을 하며 살았던 사도바울은 또 빌립보서 1:6절에서는 또 다른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
이런 말씀들에서 우리는 사도 바울의 마음 안에는 아직 남아 있는 육체적인 이에 대한 고민도 있었고, 또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령으로 새롭게 되어 나가는 은혜의 경험도 함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이 또 우리의 신앙의 삶이기도 합니다.
3. 그런데 우리 시대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신이 어떻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사람인지 인식하지 못하고 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실재 살아가는 그 삶도 구분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시대의 실상입니다.
몇 년 전 어느 추운 겨울에,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여름에 입는 반바지에 반팔을 입고 인천 연수구의 한 슈퍼마켓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이를 이상히 여긴 주인이 먹을 것을 주고 그 여자 아이를 안심시킨 후에 아동학대로 의심된다며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 여자아이는 11살이나 되었으며 그 아이는 먹지 못해서 당시 아이의 몸무게가 13kg 정도 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경찰이 그 아이의 부모를 찾고 보니, 그 아이의 부모는 당시 30대 초반이었으며, 아이를 집에 가두어 두고 학교도 안보내고, 먹을 것도 잘 주지 않고 때리고 학대해 온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아이는 너무 배가 고파서 화장실 쇠창살문으로 탈출하여 슈퍼에 왔으나, 너무 힘이 없어서 과자 봉지를 뜯어 먹지 못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 아이의 사건이 일어나자 교육청에서는 각 학교마다 공문을 보내서, 가정에서 학대 받으며 학교도 다니지 못하는 아이들이 더 있을 것이라고 보고, 무단 결석자 전체를 전수 조사하도록 했습니다. 그 결과 수많은 어린 아이들이 부모의 학대와 폭력으로 고통당하고 있다는 것이 들어나서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우리를 경악케 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서울 신학대학에서 교수로 활동하고 있는 부천에 있는 어느 목회자의 가정에서, 자녀를 때려서 죽게 하고, 그 죽은 자녀의 시신을 11개월 동안 방안에 방치 해 놓아서 백골이 된 상태로 발견이 되었습니다. 이 일은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성도들의 민 낮을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세상 사람들과 기독교인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 사람들의 목표는 세상 속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데 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다릅니다. 기독교인은 나의 성공과 가족의 행복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경우가 오게 되면,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 나의 성공까지도 포기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세상에서 성공한 것보다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존귀하게 보십니다. 하나님은 온 천하보다 한 사람을 더 가치 있게 보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하나님의 가치관을 함께 공유하고 살기 때문에,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공까지도 포기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부천에 있는 그 목사님을 보면, 독일에서 신학공부를 할 때 아내가 유방암에 걸리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 세 자녀가 있었다고 합니다. 이 때 이분이 정상적인 신앙인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맞습니까? 디모데전서 5:8절에서는 이런 상황 속에 있게 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그런데 이분은 가족을 선택하지 않고 박사 학위를 선택하여서 학위는 받았지만, 그 때문에 아내는 세상을 떠나고 자녀들은 부모의 돌봄을 받지 못하고 자랐습니다. 이것이 이후 불행한 가정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사실 세상 사람들과 기독교인은 전혀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세상에서의 성공과 성취를 그 목적으로 삼고 살아가지만,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가치관을 함께 소유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 살아가는 삶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 그런데 기독교인들이 가진 가치관이 세상 사람들과 같다면 이것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신앙이 타락했거나 세속화 된 것이 아니겠습니까?
부천에서 살고 있는 이 목사님의 삶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나 자신의 모습을 돌아보게 됩니다. 나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나에게는 세상 사람들과 다른 점이 있기는 한가?
성도와 세상 사람들이, 교회와 세상이 유사해진 이런 모습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됩니까?
첫째, 이 시대가 확실한 종말 시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성경은 종말 시대의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가,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는 시대라고 합니다. 그래서 종말 시대였던 노아 시대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과 아무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둘째, 이 시대 성도들이 가진 신앙이 세속화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한 사람은 배 위에 있고 한 사람은 바다 물에 빠져 있다고 칩시다. 그러면 배 위에 있는 사람이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을 건져 내는 것이 쉽겠습니까? 바다에 빠져 있는 사람이 배 위에 있는 사람을 끌어 내리는 것이 쉽겠습니까?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배 위로 구원해 내는 일보다, 신앙이 없는 세상이 신앙을 가진 성도를 바다로 끌어내리는 것이 훨씬 더 쉽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시대는 어떤 시대라는 것입니까? 세상이 성도들을 교회를 바다로 끌어 내려서 세속화시킨 시대라는 것입니다.
셋째, 그래서 이 시대에는 참된 믿음을 찾아보기 어렵게 된 시대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누가복음 18:8절에서 예수님은 ‘....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인자가 올 때 즉 예수님이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시는 그날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보기 어려운 시대가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참된 믿음의 사람들을 어디서 찾아야 합니까?
우리는 참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교회에서 찾아서는 안 됩니다. 말세에는 참된 믿음을 성경 속에서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성경이 증거 해 주고 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4. 그렇다면 종말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이 성령 안에서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숙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육체의 일을 버리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 갈 수 있습니까? 고린도전서 13:11절입니다.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이 말씀을 보면,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의 일을 장성한 어른이 된 후에는 버렸다고 합니다.
여기서 ‘버렸다.’는 말은, ‘그것이 더 이상 내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해체해 버렸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잘라 내 버렸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어른이 된 후에 세 가지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합니다.
첫째, 어린아이와 같이 말하는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둘째, 어린 아이같이 깨닫는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셋째, 어린 아이같이 생각하는 것을 버렸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가 자라서 성인이 되면 저절로 그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이 어른과 같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영성 혹은 영적 성장은 무엇입니까?
영성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➀ 내가 전도를 잘한다고 영성이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➁ 내가 기도를 많이 한다고 영성이 뛰어난 것이 아닙니다. ➂ 내가 예배에 잘 참석한다고 영성이 뛰어난 것도 아닙니다. ➃ 내가 맡고 있는 직분이 목사이고 장로라고 해서 그 직책이 영성을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➄ 내가 하고 있는 충성도 나의 영성을 보장해 주지 못합니다.
부천에 있었던 그 목사님은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헬라어 기초 문법책을 세상에 내 놓을 정도의 학자였습니다. 그것이 그 분의 영성을 보장해 주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영성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속사람의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성령이 사람의 마음에 오셔서 변화시켜 주시는 심령의 상태가 바로 영성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영성은 변화된 그 사람의 심령이나, 성령을 통해 열매를 맺어 나가는 그 삶을 통해 드러납니다.
성경이 가장 고집이 쌘 사람으로 기술하고 있는 사람이 야곱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이 힘들고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 성령 안에서 점점 변화되고 성숙해 가더니 나중에는 거룩한 족장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야곱은 세계제국의 군주 애굽 왕 바로에게 영적 축복을 하고, 그 자녀들의 장래를 예언적으로 축복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이렇게 변화시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변화시키지 못할 사람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들에게 역사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적인 어린 아이의 일을 벗어버리고 성숙한 성인으로 자라나게 하십니다.
5. 21세기 교회 즉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입니까?
사도요한의 공동체에서 성도가 되려면 그 믿음이 확실해야 했습니다.
당시에는 ‘나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면 곧 바로 박해와 핍박이 따랐던 시대입니다.
그래서 확실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만이, 그 가진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릅니다.
오늘날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다른 목적을 가지고 교회 구성원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신앙이 있는 사람들과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함께 하며 교회를 섬기고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두 부류 사람들로 이루어진 오늘날 교회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첫째, 오늘날 교회에서는 불신자들이 교회에 들어와도 교회 안에서 영적으로 거듭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둘째, 영적으로 거듭났다고 하더라도 영적인 어린 아이가 청년으로 자라고 청년이 성인으로 자라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셋째, 더 큰 문제는 교회에서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직분이 그 사람의 영적 상태를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심각한 문제는 영적으로 거듭난 사람들이 청년이 되고 성인이 되어 교회에서 직분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❶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이 교회 안에서도 인정을 받고, 그런 사람들이 교회에서 중요한 직분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가령 그 학벌이 높다든가?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업가라든가? 다른 사람이 부러워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 인정을 받는 다는 것입니다. ❷ 그래서 영적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일지라도 신학교 교수가 되고, 큰 교회 담임 목회자로 청빙을 받고, 또 각 교회에서 장로 권사의 중직을 받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주어진 상황에 잘 적응해 나갑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고 장로가 되어도 그 직분을 행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처신이 뛰어나고 또 일을 효율적이고 능률적으로 할 수 있도 있습니다.
❶ 이런 사람들은 경험하고 배워서 축적해 온 그 역량으로 무엇을 하든지 나름대로 성과를 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삶도 잘 절제하여 살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이 처신할 수 있습니다. ❷ 그러나 문제는 상황이 악화되어 그 감추어져 있던 육체의 일이 드러날 때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종 다툼과 분쟁의 모습들은 그 감추어져 있던 육체의 일이 들어난 모습니다.
이런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고린도 교회를 통해 교회 안에서 이런 일들이 일어났던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정말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였습니다. 문제가 많다는 것은 고린도 교회는 아직 육신의 일을 버리지 못한 교회라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문제가 고린도 교회만의 문제이겠습니까?
이것은 오늘날 모든 교회, 모든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입니다. 고린도 교회에서 일어난 모든 문제들은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해서 일어난 문제들이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성장하지 못한 성도들이나 교회에서는 오늘날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교회 안에서 이런 문제들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육체를 죽이고 성령으로 충만해 지는 것에 그 영의 성장과 성숙이 달려 있습니다. 우리의 육체가 죽고 약해지면 약해질수록 하나님의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강하게 역사하실 때 그 성령 안에서 우리의 인격이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구약성경을 보면 욥은 정말 ‘의롭고, 경건하고, 하나님을 경외하고, 흠이 없고, 똑똑한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욥이었기 때문에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잃고도 하나님을 향해서는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온 몸에 병이 든 처참한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욥과 같은 고난을 당하게 되면 마음이 약해집니다. 그런데 욥은 그 고통 가운데에서도 자신의 의로움, 자신의 정당함을 포기하지 않고, 그 친구들과 긴 논쟁을 하고 변론을 합니다.
이런 욥이 언제 깨어집니까?
욥기 38장을 보면 이런 욥에게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질문하십니다. 그런데 그 질문한 내용은 피조물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아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욥기 42장을 보면 욥은 하나님의 질문을 받고, 한 말도 대답하지 못하며 회개합니다.
1-5절입니다. ‘욥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이르되 주께서는 못 하실 일이 없사오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에서 회개하나이다.’
욥은 자기가 세상에서 누구보다 똑똑한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똑똑함은 큰 자랑거리였습니다. 그래서 욥은 그 처참한 고난 중에서도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고 친구들과 논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고 나니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스로 한 그 모든 말들을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 앉아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 중 하나였던 욥이 그 자랑을 포기했다면 누가 세상일을 가지고 자랑할 수 있겠습니까? 이 세상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가 자랑하고 싶으냐? 그렇다면 ‘주 안에서 자랑하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주 안에서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를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자랑하면 자랑할수록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만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한 신자들에게는 자랑할 것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신앙이 성장하고 성숙하면 세상 자랑은 없어집니다.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세상에 있는 것들이 좋아 보이면 어린 아이와 같은 신자라는 것입니다. 반대로 세상에 있는 것들에 아무 흥미도 느끼지 못하게 되는 사람들이 성숙한 신자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해 권면하기를, 너희가 분쟁하는 사람, 세상의 것을 탐내는 사람, 음행하는 사람, 우상 숭배하는 사람들과는 관계를 단절하라고 합니다. 거룩한 사람들은 이런 사람들과 만나거나 함께 하거나 교제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너희 중에 다툼을 일삼는 사람이 있고 고소고발 하는 사람들이 있으면 그런 사람 곁에는 가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고린도교회를 향해 이런 말씀을 주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0:23-24절 말씀에서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0:31-33절 말씀에서는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게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얻게 하라.’고 권합니다.
이런 말씀들은 그 살아가는 삶의 목적이, 세상에서 이루는 업적과 성공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 이웃에게 유익을 주고, 공동체에 기쁨을 주고, 덕을 세우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는데 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또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계속해서 성장하고 성숙해 나아야할 것에 대해 이렇게 교훈합니다.
에베소서 4:13절에서 이렇게 권면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속임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시라.’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교회의 크기, 성도의 숫자, 그 받는 사례금의 액수, 그 사역에 나타나는 능력과 역사로 구분합니다. 그래서 목회자들은 더 큰 교회, 더 많은 사례비, 더 좋은 승용차로 그 이룬 성공의 정도를 따집니다. 성도들도 자신이 그런 큰 교회에 다닌다는 것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집니다. 마치 자기가 그렇게 큰 교회나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성공과 실패는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고, 무엇을 이루고, 무엇을 성취했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진정한 성공과 실패는 우리와 우리교회가 영적으로 얼마나 성장하고 얼마나 성숙하였느냐? 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첫째, 영적 성장은 우리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영적으로 거듭나고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하면, 성도들이 반드시 맺어야 하는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열매를 맺지 못한 것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영이 죽었거나, 아니면 알곡이 아니고 가라지이거나, 아니면 내용이 없는 외형적인 신자 즉 쭉정이 일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구원을 받을 수 없고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둘째 영적 성장은 우리의 세상 속에서의 사명과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얻은 성도가 되어야, 나는 다른 사람들을 생명으로 구원해 낼 수가 있습니다. 또 내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한 성도가 되어야, 다른 사람들을 영적 성장과 성숙으로 이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내게 없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영적 성장과 성숙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영적 성장과 성숙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기회 있을 때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수고하고 애쓰고 노력함이 있어야 합니다.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이뤄나갈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과 수고를 통해 어린 아이가 자라 청년이 되고, 청년이 자라 성인이 됩니다.
이런 신앙의 성장과 성숙이 우리 신앙에서도 있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우리의 영적인 성장과 성숙을 교회 앞과 세상 앞에 보여주며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이런 복된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신앙생활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공동서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의 방향키 (0) | 2020.08.16 |
---|---|
순종하는 믿음 (0) | 2020.08.10 |
사랑이 해답입니다. (0) | 2020.03.07 |
안개 같은 인생 (0) | 2019.12.22 |
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방법 (0) | 2018.08.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