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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 해답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0. 3. 7. 17:00



사랑이 해답이다

요한14:7-12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파랑새를 쫓아다니는 순례자와 같습니다.

사람들은 부와 명예와 권세를 얻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것을 잡으려고 쫓아갑니다.

그러다가 어렵게 어렵게 그것을 얻게 되면 행복해 집니까? 이 때 깨닫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행복은 소유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으며, 명예와 권세를 얻음에도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인생의 참 행복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인생의 참 행복은 사랑하며 사는 삶 속에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처럼 서로 사랑하며 사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을 주고받을 때 행복을 느낍니다. 이렇게 주고받는 사랑이 너무 좋아서 결혼도 하는 것 아닙니까?

 

성경이 가르치는 중심적인 내용이 무엇입니까?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합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6:4-5) 그러면서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살라고 합니다. 또 이 말씀을 네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라고 합니다. 그러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똑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35-38절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에 참 행복이 있다.’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주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22:39-40절입니다. /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 사람들은 그 이웃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단서가 붙어 있습니다. 그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고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웃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간은 사랑이라는 양식을 먹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인간은 밥을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라 사랑을 먹고 사는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은 이 사랑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내용은

첫째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둘째는,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사랑입니다.

셋째는, 우리 이웃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사는 사랑입니다.

 

첫 번째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살펴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요한복음 3:16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14:9-10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이 말씀들은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시는 모습 속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신 분이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지요.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시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가 있습니다.

첫째로는, 성자 하나님께서 그 신성을 부인하셔야 했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해서 성자 하나님께서는 그 신성과 그 권세와 그 특권들을 다 내려 놓으셔야 했습니다. 이 희생적인 자기 부인의 사랑이 우리 구원의 시초입니다. 성자 하나님의 이 결단은 놀랍고도 경이로운 일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의 희생적인 헌신의 이야기를 종종 듣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그 사람들로 하여금 그런 헌신의 삶을 살게 했습니까? 그것은 사랑 받을 자격이 없는 자기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위대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성자 하나님이 신성을 부인한다고 그냥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이 세상 질서 속에서 하나님이 사람으로 태어나시기 위해서는 둘째로는, 여자의 태를 빌리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브리엘 천사를 마리아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만유의 주인이시지만 그렇다고 만사를 자기 멋대로 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그 권세와 능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이 세상의 폭군과 같은 그런 군주가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실 때 자유의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비록 하나님이실지라도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아가는 개인의 의사에 반하는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천사 가브리엘을 마리아에게 보내셔서 마리아의 의사를 묻고 그의 허락을 받으셨던 것입니다.

 

셋째로는, 그런 다음에 비로써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되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 되셨다는 이 말은 그 시작이 사람에게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우리의 다른 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지만 그 시작이 완전히 다르십니다. 우리는 사람의 아들딸로 이 세상에 태어났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세상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을 신학적으로는 성육신이라고 합니다.

그 뜻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과 요한1서에서는 이 성육신의 역사 속에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아멘.

 

이와 비슷하게 이 세상 속에는 두 부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한 부류는 그 부모로부터 사람의 아들로 태어난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가 다 이렇게 태어났습니다. 이렇게 태어난 사람들을 육에 속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이라고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의 중요한 특징은 이 세상에 속하여 이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이 세상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목적 삼고 살아가는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에서 부자가 되는 것, 세상에서 명예를 얻고 권세를 얻는 것 등등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사람들도 처음에는 모두 다 육신의 부모로부터 땅에 속한 사람으로 태어났습니다. 그러다가 다양한 방법으로 복음을 접하고 예수님을 믿고 성령으로 거듭나게 된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성육신과 고난이 자신을 위한 희생임을 아는 사람들이며,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영광의 보좌에 앉으심이 나에게 하늘 소망을 주기 위한 은혜의 사건임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예수님이 다시 오셔서 죄악 된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땅 위에 메시야 왕국을 세워 주실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장차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받고 영생하도록 살아가게 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이 세상에 속하여 이 세상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입니까? 아니지요. 우리는 하나님께 속한 성도로서 예수님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메시야 왕국을 바라보며 삽니다. 또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그날 누리며 살게 될 천국의 삶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아멘.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은혜들이 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주어진 은혜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하나님의 사랑을 찬양하며 사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지요.

 

그러면 사람들이 세상에 속한 사람인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를 어떻게 구분됩니까?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며 삽니다.

 

우리가 이런 기준의 차이를 어디서 볼 수 있습니까?

유대인들을 1년에 세 차례 율법으로 정해 놓은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이 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헌신의 표시로 성전에 있는 연보 궤에 헌금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일 때 헌금을 준비해서 오듯이, 유대인들도 그렇게 연보를 준비해 가지고 왔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명절이 되면 연보 궤 앞에는 헌금하는 사람들의 긴 행렬이 늘어서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1장을 보면 이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준비한 헌금을 연보하기 위하여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한 가난한 과부가 서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다가 부끄러운 듯이 두 렙돈의 헌금을 하고 돌아갔습니다.

 

이 모습을 보시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오늘 연보함에 넣은 모든 사람들의 헌금보다 이 가난한 과부가 더 많이 넣었다.’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부자들은 많이 가진 재산 중에 일부를 연보했지만, 이 가난한 과부는 자기의 모든 소유 곧 그 생활비 전부를 넣었다.‘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사람들은 연보하는 액수를 보지만, 예수님은 연보하는 희생과 헌신을 보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람들과 예수님의 다른 점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하늘에 속한 사람들의 중요한 차이입니다.

 

제가 처음 예수를 믿게 되었을 때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 바로 성육신 사건입니다.

이 성육신 사건을 보면서 드는 의문은,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오실 정도로 내가 그렇게 가치 있는 존재냐 하는 것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보아도 나는 생각이 특별하지도 않습니다. 살아가는 삶도 별것 없습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꿈과 이상과 비전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나는 성자 하나님이 나를 위해 성육신해서 오실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렇게 가치 없는 나를 위해 예수님이 사람이 되어 오셨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로마서 5:5-10절에서는 이렇게 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바 됨이니,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살고 있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원수로 살아갈 때,’ 예수님이 그런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대신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 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다고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 놀라운 사랑을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부어 주심으로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아멘,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 우리 마음에 그 사랑을 부어주실 때 알게 됩니다.

 

이렇게 성령이 부어주시는 사랑을 경험했던 사도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고린도후서 5:14절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바울이 살아온 삶을 보면 그는 예수님을 대적하고 교회를 박해하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시는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바울을 사랑하셔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까지 찾아가서 만나주시고, 구원해 주시고, 이방인의 사도라는 직분까지 맡겨 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랑어린 예수님의 배려에 감사하고, 또 성령이 부어주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강권함을 받아서, 그는 자유인이었지만 스스로 그리스도의 종 되길 자처했고(고전 7:22), 복음의 일군으로 마땅히 누릴 수 있는 자기 권리(權利)를 쓰며 살지 않았고(고전 9:1), 다른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면서(고전 15:10).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육체에 채우려고 했다(1:24)고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살았던 삶입니다. 이것이 또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이기도 합니다.

찬송가 299장을 보면 하나님 사랑은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그 가사를 보면 하나님 사랑은 온전한 참 사랑이며, 하나님 사랑은 햇빛과 같으며, 그 사랑 앞에는 풍파도 그치며 어두운 맘도 환하니 그 힘이 크도다.’라고 찬양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다 알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베풀어주시는 사랑을 조금 맛보며 살 뿐입니다. 그 조금 맛본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 사랑 앞에서는 세상 풍파도 잔잔해 지고, 어두움 맘도 환하게 밝아집니다.’ 우리는 이 사랑의 노예가 되어, 바울처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강권하심을 받아서 하루하루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중요하면 요한계시록 2장에서는 너는 처음 사랑을 버렸다.”라고 책망하시면서 촛대를 옮길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촛대는 교회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을 잃어버린 교회는 교회로 인정해 주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볼 때 에베소교회가 얼마나 훌륭한 교회입니까?

얼마나 능력 있는 교회였습니까? 에베소 교회는 예수님께서 친히 네 행위와 수고와 인내를 안다고 하였던 교회가 아닙니까?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하고, 자칭 사도라 하는 거짓된 자들을 드러내었던그런 교회가 아닙니까? 또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않은 것을 안다고 칭찬했던 교회가 아닙니까? 만약 21세기 한국 땅에 이 에베소교회와 같은 교회가 있으면 모든 교회들은 이 에베소교회를 본받으려고 하고 에베소 교회를 벤치마킹하려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이렇게 훌륭한 에베소 교회를 행해 예수님은 촛대를 옮기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는 교회여도,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어도, 사랑이 없으면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 나라의 중요한 특징은 바로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시기에 모든 일을 사랑으로 하십니다.

비록 우리가 볼 때 어떤 일들은 사랑으로 하시는 것 같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들까지도 그 배후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가 이해하지 못했던 일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이스라엘보다 더 악하고 포악한 민족에게 이스라엘이 멸망을 당하도록 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도 그렇지 않습니까?

성자 하나님의 성육신이, 십자가에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심이 사랑 같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들이 죄인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비롯된 일들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사는 가치관이 하나님의 가치관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를 평가할 때 그 규모나 하는 일이나 업적 등으로 평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시는 기준은 그 규모나 하는 일이나 업적이 아닐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기준에서 볼 때, 하나님이 교회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은 사랑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랑의 중요성을 잘 알았던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마음대로 하라 이 말의 참 의미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정말 마음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 어떤 삶을 살아도 상관이 없다는 말입니까? 그런 말씀이 아니지요.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까?

요한 1서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 죄를 속해 주시기 위하여 그 아들을 사람으로 보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또 그 아들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화목제물로 십자가에 우리 대신 내어 주신 그 놀라운 사랑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먼저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해 주시는 놀라운 사랑을 입은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그 하나님의 사랑에 반응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게 됩니까?

이런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며 살든지 자기를 사랑해 주신 그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입었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잘 알고 있었던 어거스틴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멋대로 하라.’ 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내 멋대로 사는 삶은 어떤 삶이겠습니까? 그 무엇을 하며 살든지 하나님을 위해 살게 되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무슨 일을 하며 살든지 하나님을 위해 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살기에는 허물이 많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사실 하나님과 원수가 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야 할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어떻게 그 죄와 허물에서 벗어났습니까?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와 허물을 다 사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이사야서 53:5-6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죄는 우리에게 큰 고통을 줍니다.

죄가 주는 고통이 얼마나 컸으면 사도바울은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잇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는 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라고 탄식했습니다.

 

이런 우리 인간의 죄는 예수님에게도 큰 고통이셨습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얼마나 큰 고통이셨으면,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땀방울이 핏 방울 같이 떨어지도록 힘쓰시고 애쓰시며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라고 기도하셨겠습니까?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께 가장 어려웠던 일은 아마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이보다 충격적이었던 일은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므로 거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 받으셔야 했던 일이실 것입니다.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우셨으면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라고 절규하셨겠습니까?

 

이 예수님의 십자가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죄의 담을 무너뜨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이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하였습니다. 로마서 8:15절입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 이 은혜가 바로 예수님의 성육신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의 결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 구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채찍에 맞으시게 하심으로 우리가 각종 질병에서 고침을 받고 건강을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셨습니다. 이사야 53:5절입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배반한 영적인 죄 때문이지만, 예수님이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 육신의 저주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채찍에 맞으시고, 그 살점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하신 것은 우리를 육체의 질병에서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저는 요즘 그 육체로 내 대신 채찍으로 맞아주신 이 예수님을 많이 묵상합니다.

채찍이 예수님 몸에 감기면서 채찍 자국이 선명하게 나고, 채찍을 거두어들일 때 살가죽이 벗겨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그 몸서리치는 고통을 내 대신 다 받아내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지냅니다. 그러면서 내가 너의 병을 대신 지고 채찍에 맞았으니 너는 질병에서 놓여나 고침 받아라.’ 라고 하시는 음성 듣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아멘.

 

우리가 살펴본 첫 번째 내용이 우리를 사랑해 주신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두 번째 내용은 우리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사랑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내용은 우리 이웃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입니다.

 

시간이 많이 지나갔습니다. 자기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개념만 살펴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사람들이 그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먼저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자기가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지, 자기가 얼마나 하나님과 사람들의 사랑 받고 있는 존재인지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이웃에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도 존귀하게 보고, 가치 있게 보고, 사랑하는 삶을 살게 되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전에 상대를 가리지 않고 무참하게 죽였던 지존파 사람들을 여러분도 잘 알고 있으실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어린 시절 받은 마음의 상처로 인해, 자기 자신과 그 살아온 삶을 저주하고 미워하였던 사람들입니다. 사람에 대한 이 미움이 적개심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적개심이 다른 사람들을 잔인하게 죽이면서도 전혀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게 했습니다.

 

이들은 왜 그렇게 잔인한 사람이 되었습니까?

그것은 사랑 그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도 모르고, 부모의 사랑도 모르고, 자기 자신도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이웃에 사는 사람들을 사랑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래를 볼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룬 나라입니다.

우리나라는 국민 소득이 3만 달라가 넘어선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이 말은 우리나라 국민의 평균 연봉이 약 3,500은 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는 아주 낮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가 우리보다 소득수준이 낮은 태국 말레이시아보다 낮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나라는 그간 경제적으로는 번영을 이루어 내었으나 그 마음 즉 심성은 이전보다 더 각박해 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심성이 이렇게 각박해 진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 전 시대에는 우리를 먼저 생각하고 공동체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무엇을 하든지 개인이 우선입니다. 이 개인주의의 만연이 사람들의 심성을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서로 돕고 사랑하며 함께 협력하여 살아가는 삶을 잃어버렸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악화된 상황을 어떻게 개선할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가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이듯이 내 이웃에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 앞에 존귀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기초적인 이해와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사회적인 분위기가 형성되면 아마 우리나라 사람들의 삶의 만족도도 높아지고 행복지수도 높아질 것입니다.

 

사실 지금 이 세상은 우리가 마음을 주고 정을 주며 살 수 있는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그런 세상 속에서 우리가 마음을 주고 정을 주고 살게 되면, 우리 주변에는 그런 우리를 이용하려는 사람들, 어떻게 해서든지 우리에게 사기를 쳐서 이익을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상 속에 살면서도 우리는 왜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않습니까?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 말을 조심하고 행실을 조심하며 삽니까?

 

그 이유는 바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상 역사의 주권자로 계심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우리 마음에 평강을 주고 우리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믿음을 주고, 소망을 주고, 또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우리 가슴을 뛰게 하고 우리 삶에 끝없는 선한 동기를 부여해 주기 때문입니다. 총 정리하면 사랑이 하나님과 그 하나님의 사랑이 이 세상의 모든 문제의 유일한 해답입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어떻게 사랑해 주셨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죄와 죄의 저주와 죄가 가져다주는 고통과 허물에서 벗어나는 것도, 우리가 죄를 사함 받고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며 살게 된 것도, 또 우리가 육체의 질병에서 놓여나 건강한 삶을 살게 되는 것도, 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우리를 사랑해 주신 사랑에 근거합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이 하나님의 사랑은 대상과 조건과 상태에 따라 변하게 되는 그런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세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사랑이고 또 이 세상이 시작되기 이전의 영원에서 이 세상이 끝난 후에 오게 될 영원까지 이르게 되는 한결 같은 사랑, 변함없는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3:1절을 보면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사랑하시되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고 합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되 태초부터 영원에 이르기 까지 한결 같은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멘.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의 이 놀라운 사랑을 확신하며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한 주간의 삶도 믿음으로 사랑을 실천하며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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