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통제하며 사는 삶
야고보서 3:1-6
1. 말(말씀)의 어원을 살펴봅니다.
히브리어 다바르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다바르는 ‘말’이나 ‘말씀’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또 ‘만물’이라는 의미도 가지고 있는 단어입니다. 우리가 볼 때에는 ‘말’과 ‘만물’은 별 연관성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말과 만물이 같은 단어를 쓰고 있습니다.
말과 만물이 다바르라는 같은 단어를 쓰고 있는 이유를 알려면 하나님의 창조사건까지 거슬러 올라가 봐야 합니다. 하나님의 창조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을 보면 이 세상이 어떻게 창조되었다고 합니까? 창세기 1:3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고 하고 있습니다. 1:9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1:11절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가진 열매 맺는 나무를 내라 하시니 그대로 되어’라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창조된 천지만물은 상호 밀접한 관계 속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으로 창조된 천지만물이 다바르라는 같은 단어를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어원적인 살핌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자 빛이 생겨났습니다. 궁창이 생겨나라. 말씀하시자 하늘이 생겨났습니다. 뭍이 드러나라 말씀하시자 땅에 생겨났습니다. ‘하늘에 새가 날고, 바다에 고기가 헤엄치고, 땅위에 각종 동물들과 식물들이 있으라.’ 라고 하시자 그 말씀하신 그대로 하늘에 새가 날고, 바다에는 고기가 헤엄치고, 땅위에는 각종 동물들과 식물들이 자라났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곧 바로 그대로 되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말씀에는 창조주의 권위와 신적인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런 창세기를 읽으면서 이 세상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창조된 것을 믿습니다.
또 우리는 복음의 약속을 읽으면서 우리 주 예수님이 우리 구주가 되시고 예수님을 믿음으로 죄에서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습니다. 또 계시록을 읽으면서 장차 예수님이 재림하심으로 죄악된 세상은 심판하시고 예수를 믿고 있는 우리들은 구원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리고 기도하면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믿고 우리 삶의 문제들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주는 자가 받는 자 보다 복되다고 하신 말씀을 믿고 손을 펴서 구제하고 선행을 베풀며 사는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 말씀의 능력에 대해 히브리서 4:12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과 생각을 판단하나니’ 하나님은 말씀으로 물질세계에 속해 있는 이 세상 만물들을 창조하시고, 그 창조된 세계 속에서 역사하고 계실 뿐 아니라, 영적 세계에 속해 있는 우리의 영과 혼도 창조하시고, 그 창조하신 영과 혼과 마음과 생각 속에서도 역사하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지금 무엇을 살펴보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는 창조의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신앙은 어떤 신앙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 신앙은 철저히 말씀중심의 신앙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 중심의 신앙이 바른 신앙입니다. 아멘.
구약성경에 다바르라는 단어가 있다면, 신약성경에는 ‘포네’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포네’는 말이라는 의미와 ‘망아지’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 ‘말’과 ‘망아지’는 별 연관성이 없어 보입니다.
‘포네’라는 단어가 말과 망아지라는 의미를 함께 가지게 된 배경은 이렇습니다.
오늘날 대표적인 운송수단은 자동차, 기차, 배, 비행기와 같은 것들입니다. 운송수단은 곧 힘입니다. 이런 운송수단을 많이 가진 나라가 힘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 때에 대표적인 운송수단은 망아지였습니다.
당시에는 망아지가 바로 힘과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이렇게 볼 때 이 ‘포네’라는 단어를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당시 사람들은 망아지가 힘과 능력을 보여주는 상징이었듯이, 사람들이 사용하며 사는 말에도 이런 힘과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포네라는 단어를 말에도 사용하고 망아지에게도 사용했습니다.
이런 어원적인 살핌을 통해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의 말씀에 창조주의 능력이 담겨 있듯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들이 하며 사는 말에도 힘이 있고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의미입니다.
창세기 1:2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창조함을 받았다는 의미에 대한 다양한 견해가 있어 왔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건전한 해석은 하나님의 형상은 사랑, 감정, 성품, 의지와 같은 사람들이 가진 내면적인 성품을 말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모양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어떤 모양도 가지고 있지 않으시지만, 사람들은 입, 코, 눈, 귀, 손, 발과 같은 구체적인 모양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차이점에서 볼 때 사람들이 하나님을 닮은 모양대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입, 코, 눈, 귀와 같은 신체의 기능들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정리하면, 우리들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게 창조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영혼과 성품과 인격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이며, 우리 신체의 기능과 역할들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능력이 있듯이 사람의 말에도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MBC에서는 2012년 한글날 특집으로 말의 힘에 대한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그 실험방법은 두 개의 플라스틱 용기에 새로 지은 하얀 쌀밥을 넣어두고 한 쪽 용기에는 ‘고맙습니다.’ 라는 긍정적인 말을 기록해서 붙여두고 다른 쪽 용기에는 ‘짜증나’ 라는 부정적인 말을 기록해서 붙여두고는 시간이 날 때마다 한쪽 용기에는 고맙습니다. 라고 하고 다른 쪽 용기에는 짜증나 라는 말을 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1달을 한 후에 그 결과를 확인해 보니 ‘고맙습니다.’ 라는 긍정적인 말을 해 준 용기의 밥에서는 구수한 누룩 냄새가 났고 ‘짜증나’ 라는 부정적인 말을 해 준 용기에 있던 밥들은 썩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 실험은 하나님의 말씀에 힘이 있듯이, 사람들이 하며 살아가는 말에도 힘이 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런 증거들은 우리가 하며 살아가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며 사는 말은 어디서 나옵니까?
우리 생각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생각한대로 말을 하며 삽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말을 바꾸려면 먼저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긍정적인 생각 속에서 긍정적인 말이 나오고 부정적인 생각 속에서 부정적인 말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생각은 어디서 나옵니다.
우리 존재 자체 속에서 나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냐? 에 따라서 생각이 달라집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가 가장 먼저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우리 존재를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이런 존재의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느냐? 거듭나지 못했느냐? 에 따라서 우리 생각이 달라지고 우리가 하며 사는 말이 달라집니다.
성경은 이렇게 예수 믿고 거듭난 사람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1:12-13절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사람들이 되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말에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고 될 수 있으면 긍정적인 말을 하고 좋은 말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좋은 말을 하며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우리 삶 속에 있어지기를 소원합니다.
우리나라 연예인 중에 악성 댓글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하는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악성 댓글을 단 사람은 가볍게 그런 글을 올렸는지 모르지만 그 댓글이 당사자에게는 비수가 되고 칼이 되어서 그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선조들은 말만큼 가벼우면서도 또 무거운 것이 없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만큼 우리는 말을 조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이렇게 큰 힘을 가지고 있는 우리의 언어가 타락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아담의 범죄 안에서 죄인이 되고 타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죄인이 되고 타락한 존재가 된 우리들이 하는 생각과 하며 사는 말이 함께 타락했습니다. 우리가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되었을 때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도 죄에 오염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사람들이 하며 살고 있는 말을 보면 압니다. 사람들이 하며 사는 말을 보면 긍정적인 말을 더 많이 합니까? 부정적인 말이 더 많이 합니까?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을 훨신 더 많이 하고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하며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계명을 보면 00을 하라 라는 긍정적인 개명보다 00을 하지 말라 라는 부정적인 계명이 훨씬 더 많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자녀를 교훈하는 말들을 보아도 긍정적인 말보다는 부정적인 말을 더 많이 합니다. 그래서 이 부정적인 말들이 비수 같이 자녀들의 마음을 찔러 아픔을 경험하게 하고 상처를 주는 것이 우리 삶이 아닙니까?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내가 하루 동안 하며 사는 생각과 말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제가 부정적인 생각과 말을 더 많이 했을까요? 긍정적인 생각과 말을 더 많이 했을까요? 제가 말은 많이 통제하며 살지만 제 생각은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런 제가 하루 동안 부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했을까요? 긍정적인 생각을 더 많이 했을까요? 물론 믿음 안에서 긍정적인 생각도 많이 하게 되었지만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부정적인 생각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생각을 많이 하며 사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제가 아무런 의식도 없이 살면 주로 어떤 말을 하며 살게 되겠습니다.
죄악된 세상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인 말을 훨씬 더 많이 하며 살아갈 것입니다. 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긍정적인 말을 하며 살려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인위적으로라도 의식적으로라도 긍정적인 말을 하며 살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조금은 더 긍정적인 말을 하며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이런 노력을 하며 살아야 합니까?
우리가 한번 두 번 한 그 부정적인 말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파괴하기도 하고 다른 사람과의 사이를 갈라놓기도 하고 사람들 사이에 긴장감이 감돌게도 하고, 사람들의 반발과 반항을 불러일으키는 등등 우리 삶에 아주 나쁜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에 힘이 있다는 것을 믿고 있는 우리들은 될 수만 있으면 긍정적인 말을 하며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을 하고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는 비로써 말을 바꿀 수가 있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을 바꿀 수가 있습니다. 아멘.
과학의 발달
과학이 발달되어 오면서 사람들은 녹음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하며 사는 음성을 녹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음성 뿐 아니라 영상까지 녹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기술들이 점점 발달해 오면서 요즘에는 스마트폰을 통해서 실시간 영상통화까지 가능하게 되었고 이것이 더 발달해서 요즘은 줌(ZOOM)이라는 어플 하나만 깔면 실시간 교육은 물론 그룹토의까지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과학의 발달은 장차 어디까지 나아갈까요?
심지어 과학자들은 이런 예측까지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녹음기를 통해 사람들이 하는 말을 녹음하여 재생할 수 있는 것처럼, 앞으로 과학이 더 발달하게 되면 우리보다 앞서 살았던 사람들이 하며 살았던 말을 그대로 재생 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예를 들면 아담이 했던 말을 재생해 내고 노아가 했던 말을 재생해 내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근거하여 이런 예측을 합니까?
사람들이 하며 사는 그 모든 말들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너지 보전의 법칙에 의해서 사람들이 한 말의 에너지는 없어지지 않고 어디엔가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에너지를 모아낼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면 아담이 전에 한 말들을 노아가 전에 한 말들을 다시 재생에 낼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이미 이런 일들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차 이 세상에서 살았던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인데, 그 때에 사람들이 자기 입으로 그 하며 살았던 모든 말들을 심판장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이실직고(以實直告) 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마태복음 12:36-37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라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나온 말들이 없어지지 않고 그대로 보관되어 있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시 재현될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재현되어 지는 말을 가지고 심판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한 말도 기억해 내지 못합니다.
이런 우리가 어떻게 일평생 하며 산 말들을 다시 기억해 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며 산 말을 다 기억해 내는 것은 우리 능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12장의 이 말씀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우리가 한 말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서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없어지지 않고 보존되어 있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대로 재현해 낼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말에는 에너지가 있고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유한한 사람들이 하며 사는 말에도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는 에너지 보존의 법칙에 따라 없어지지 않고 있다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다시 재현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어떠하겠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도 에너지가 있고 창조주의 능력이 있어서 하나님이 한번 하신 말씀은 없어지지 않고 이 세상이 끝날 때까지 계속해서 능력으로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이 한번 하신 말씀은 폐하여 지는 일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셨든지 언제나 그대로 성취됩니다. 아멘.
2. 말에 대한 야고보서 3장의 교훈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이해를 가지고 야고보서 3장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야고보서 3장의 말씀에서는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첫째, 말의 실수가 없도록 하라고 합니다.
사람들이 여러 명 모이게 되면 말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들이 한두 명씩은 꼭 있게 됩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그 모임의 분위기를 띄워주고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기도 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재미있는 사람이어서 어디를 가나 환영을 받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말을 많이 하면 할수록 말의 실수도 많아지게 됩니다. 사람들이 얼마나 말실수를 많이 하며 살았으면 우리 조상들은 ‘침묵이 금’이라는 교훈까지 주지 않았습니까?
이런 연장선상에서 하였던 말이 야고보서 3:1절 말씀입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그리고 이어지는 2절에서는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로, 사람들은 누구나 ‘말에 실수가 많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면 ‘그 온 몸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너희는 할 수 만 있으면 말을 많이 해야 하는 선생이 되지 말라. 라고 한 것입니다.
또 말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둘째, 말은 통제하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말을 통제하기가 어렵습니까?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은 아담 안에서 타락한 우리 마음에서 나오며 성숙되지 못한 우리의 인격에서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쁜 말을 통제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들이 우리의 타락된 마음에서 나온다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은 불만에 찬 우리 마음에서 나오고 싫어하고 미워하는 우리 마음에서 나오고 이기적인 우리들의 마음에서 나오기 때문에 좋은 말이 나오기가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며 살아가는 말을 보십시오.
좋은 말을 많이 하며 삽니까?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하며 합니까?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하며 삽니다. 듣기 싫은 말을 듣고 마음에 상처를 받으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좋은 말을 많이 하며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그 인격이 성숙해져서 말을 자제하고 말을 절제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들도 말을 자제하지 않고 생각나는 대로 말을 막 쏟아 낸다면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많이 하며 살게 될 것입니다.
전에 극장에서 상영된 영화중에 ‘지옥에서 온 할머니’ 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영화를 인터넷으로 보다가 다 보지 않고 꺼버렸습니다. 왜요. 이런 것도 영화라고 만들었나?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돌이켜 생각해 보니 사람들이 그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감정을 여가 없이 쏟아내게 된다면 아마 우리 사회가 이 영화와 같은 사회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또 말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셋째, 말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말을 어떻게 통제할 수 있습니까?
성경은 말에게 재갈을 물리듯이, 그렇게 너희 입에 재갈을 물려 말을 통제하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 제주도에 가서 말을 타볼 기회가 있어서 타 보았는데 말이 참 순하더라고요.
그런데 그 말들이 본래 그렇게 순한 말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말들을 보십시오. 야생말을 길들이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야생말들을 길들이려면 먼저 그 입에 재갈을 물려야 합니다.
그런데 말들은 쉽게 재갈을 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마부는 말에게 물도 주지 않고, 음식도 주지 않으면서, 말을 고통스럽게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말들에게 물과 음식을 조금씩 주면서 길들여 나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후에 비로써 재갈을 물릴 수 있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말들은 왜 재갈을 물려고 하지 않습니까?
재갈을 물게 되는 것이 말들에게는 아픔을 주고 불편함을 주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말들은 재갈을 물지 않으려고 격렬하게 거부합니다. 그러다가 일단 재갈만 물게 되면 곧 바로 온순한 말이 된다고 합니다. 왜요. 그 주인이 재갈로 말들을 길들이게 되는데, 재갈이 주는 아픔 때문에 주인의 말을 듣는 온순한 말이 된다고 합니다.
만약 우리가 사용하며 사는 언어들에 재갈을 물려서 제어할 수 있다면 이런 사람들은 그 자신의 삶도 능히 굴레 씌울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야고보서 3:2절입니다.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그러면 왜 우리는 우리가 사용하며 사는 언어에 재갈을 물려 절제해야 합니까?
그것은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에는 힘이 있고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말에는 어떤 힘이 있습니까? 우리의 통제 되지 않은 혀 놀림은 우리의 구원을 허사로 만들기도 합니다. 우리가 살아온 경건한 삶을 파괴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지켜온 신앙을 침몰시켜 버리기도 합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해 버리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혀의 힘과 권세에 대해 잠언서 18:21절에서는 이렇게 전해 주고 있습니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가 죽고 사는 것이 혀에 달려 있고, 사람들은 혀의 열매를 먹으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말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말에 대해 어떤 교훈을 주고 있습니까?
넷째, 말을 통제해야 파선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4절입니다.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서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바다에서 운행하는 배는 그 크기가 크다고 꼭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큰 배라도 폭풍이 치고 바다가 요동을 칠 때에는 그 파도쳐 오는 물결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침몰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배가 폭풍에 방향을 잃고 그 옆면으로 폭풍을 맞이하게 되면 아무리 큰 배라도 그 배는 뒤집히거나 부서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풍랑 속에서 배가 파도쳐 오는 물결을 향해 나아갈 수 있도록 방향을 잡아 주는 것이 바로 작은 키입니다. 배는 키가 지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혀가 우리 몸에서 이 키와 같은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 혀의 말을 따라 우리의 삶이 나아간다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며 사는 말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이 경건한 사람인가? 성숙한 사람인가? 좋은 사람인가? 를 어떻게 압니까? 그 하는 말을 들어보면 알게 됩니다. 왜요. 말은 비록 작은 혀를 통해서 나오지만, 그 말을 하게 하는 기관은 바로 우리의 뇌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뇌는 무엇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까?
우리의 뇌는 우리 마음의 통제를 받고, 우리 속사람의 통제를 받고, 우리 영의 통제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그 속사람이 변화된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를 그 하며 사는 말을 통해서 표현하게 되고, 그 속사람이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의 변화되지 않은 것을 그 하며 사는 말을 통해 표현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도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12:34-35절입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가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이렇게 볼 때 우리가 중요하게 봐야 하는 것이 말입니까? 그 말을 하는 사람입니까?
보통 사람들은 상대방의 말에 온 신경을 집중합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하는 말보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 자체를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거짓말과 속이는 말에 휘둘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세 부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마음도 악하고, 그 행위도 악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죄인들입니다.
둘째는 그 마음은 악한데, 그 행위는 선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대표적인 사람들이 바로 거듭나지 못한 바리새인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너희는 위선자라고 하시면서 화를 선포하셨습니다.
셋째는 그 마음도 선하고, 그 행위도 선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바로 중생한 사람들입니다. 중생하여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을 세 부류로 구분해 보면 이르게 되는 결론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믿음은 반드시 중생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은 반드시 중생에서 나온 삶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멘.
이렇게 볼 때 바람직한 믿음은 중생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은 믿음으로 중생한 사람들만 그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 성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사람들이 말을 통제하며 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장차 우리 구원이 완성되는 그 날 부활하신 예수님이 어떠하심과 같이 영화로운 존재로 변화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그 속사람도 변화되지 않은 사람들은, 성화를 이루어나가는 삶을 살수도 없고, 말을 통제는 삶도 살지 못하며, 장차 이루어질 영화로움에 참여하지도 못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너희가 거듭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고 하셨습니다. 너희는 천국 백성이 아니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하는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없기 때문에 능수능란한 말에, 달콤한 말에 속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과 폐부를 다 살피시고, 우리 속사람을 다 보고 계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 대해 모르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이 인정해 주는 사람들은 거듭난 속사람에서 나온 말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말에 관한 교훈 중에는 이런 말도 있습니다.
위대한 사람들은 사상을 이야기하고, 평범한 사람들은 사건을 이야기하고, 옹졸하고 협소한 사람들은 사람을 이야기하며 산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하지 말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만 하지 말고, 기회 있을 때마다 사상을 말하고 진리를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며 사는 차원 높은 언어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말씀에 기초해 보면 야고보서 3:1절에서 어떤 선생이 되라는 것입니까?
사람들의 약점을 잡고 험담을 하는 옹졸하고 협소한 선생이 되지 말고, 또 세상 돌아가는 일들만을 말하며 사는 세속적인 선생도 되지 말고, 차라리 하나님을 가르쳐 주는 선생, 진리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선생,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새워나가는 그런 선생이 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가르침을 주고 사는 사람들은 참으로 복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 전서 5:17절에서 이런 말씀을 했습니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에게는 더욱 그리할 것이니라.’
교회에서 잘 다스리는 장로들은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합니다.
이런 분들은 하나님 나라에서 정말 존귀한 사람들이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에 더하여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더욱 더 존경해야 할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렇게 존경하라고 합니까?
다니엘서 12:3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지혜 있는 자, 말씀과 가르침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옳은 대로 돌아오게 한 사람들은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라고 합니다. 하늘의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을 비취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굳이 성경에서 경계하고 있는 선생이 되려고 하면 이런 선생이 되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하며 살아가는 말에는 능력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말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말을 통제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이를 위해서는 먼저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합니다. 타락한 사람에게서는 타락한 언어가 나오고, 중생한 사람에게서는 중생한 언어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믿음 안에서 우리가 사용하며 살아가는 말에 재갈을 물려서 말을 통제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에 대한 말을 줄이고, 세상 돌아가는 상황에 대한 말을 줄이고, 오히려 하나님을 말해주고, 진리를 말해 주며 사는 차원 높은 언어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복 있는 삶이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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