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서신

‘공동체와 함께 하는 신앙’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9. 3. 19:41

공동체와 함께 하는 신앙

히브리서 11: 23-26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어떤 시대입니다.

개인주의가 아주 광범위하게 퍼져있는 시대입니다. 개인주의는 개인의 도덕적 가치를 중요시하며, 개인의 이익을 공동체의 이익보다 우선시하게 합니다.

 

그래서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와 개인의 인권을 아주 중요시합니다.

개인주의 사회에서는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의한 양심적 병역 거부가 용인됩니다. 개인이 저지른 강력범죄까지도 다양한 이유로 선처받기도 합니다. 심지어 동성애라는 비정상적인 생활까지도 개인의 선택으로 보고 법률로 보호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 이전 시대 사람들은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어떤 사람이 사회적인 규범에서 벗어난 생활을 하게 되면, 누군가가 나서서 그 잘못된 점을 알려주고, 바른 생활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이 시대는 다릅니다.

나도 다른 사람의 삶을 간섭하려고 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내 삶을 간섭하는 것도 아주 싫어합니다.

 

오늘날은 누가 몸에 해로운 담배를 피워도 간섭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소수 차별금지법을 제정하여 동성애를 법으로 보호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법이 제정되면 어떻게 됩니까? 소수의 동성애자들은 법의 보호를 받게 되겠지만, 동성애가 죄라고 가르치는 다수의 교회는 실정법을 어긴 범법자가 됩니다. 이런 비상식적인 일이 문명이 발달하였다고 하는 서구에서는 이미 일상이 되어 있습니다.

 

이런 개인주의는 우리 삶과 우리 신앙 속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성도들이 큰 교회를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군중 속에 자신을 숨길 수 있는 은닉성에 있습니다. 그래서 개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예배할 수 있는 규모가 큰 교회를 선호합니다.

 

이런 개인주의 신앙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이겠습니까?

개인주의 신앙은 교회의 중요한 공동체성을 무너뜨립니다. 교회의 공동체성이 무너지면 결국 교회도 무너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 된 교회, 거룩한 공교회에 대한 꿈과 이상을 잃지 않아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를 살펴보려고 합니다.

모세가 가지고 살았던 신앙을 보면, 먼저 모세는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 개인적인 신앙의 결단은 당시 신앙공동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하나 되어 함께 고난도 받을 각오까지 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내는 일 즉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이루어 가는 일에 자신을 바칠 각오를 하게 됩니다.

 

이런 모세의 삶을 히브리서 11:24-2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이것이 모세가 가지고 살았던 신앙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모세의 신앙을 통해, 우리들이 가져야 할 신앙을 살펴 보겠습니다.

 

첫 번째, 모세는 개인적으로 결단하고 믿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모세의 삶을 오늘 우리말로 표현해보면, 모세는 예수 믿고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모세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는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그 신앙의 출발점에 확실한 구원신앙을 가졌고, 구원신앙이 모세의 신앙생활을 견인해 주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은 누구나 예외 없이 이 구원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신앙을 갖지 않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어느 교회에 평생 충성스럽게 하나님을 섬겨 온 장로님이 죽음을 앞두고 있었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은 장로님이 유언처럼 남겨 주시는 아름다운 신앙고백을 듣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심방을 가서 장로님은 이제까지 충성을 다해 모범 된 신앙생활을 해 오셨는데, 하고 싶은 말이나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으면 한마디 해 주세요.’라고 요청했다고 합니다.

 

그랬더니 그 장로님이 나는 예수를 믿지도 않으면서 평생 동안 하나님과 교회를 섬겨 온 것이 너무 힘들었다.’ 고 하면서 이제 곧 죽으니 이제야 쉴 수 있게 되었다.’라고 하더라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거기 모인 목사님과 유족들이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요즘 흔한 노인성 질환 중에 치매라는 것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도 치매에 걸립니다. 성도가 치매에 걸려서 신앙을 부인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이런 모습은 별로 덕스럽지 않게 보이겠지만, 제 생각에는 아마 하나님께서는 치매라는 병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니 용납해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치매에 걸리지도 않았는데도 주를 부인하고 신앙을 부인하는 것은 안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어떤 사람이 평생 하나님을 믿어왔다면, 그 사람은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왔다는 말이 됩니다. 그런데 평생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살아온 성도가 예수님을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구원신앙이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고, 성령을 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말합니다. 이 모든 것을 통칭해서 우리는 구원신앙이라고 합니다.

 

이 구원신앙을 모세와 연관시켜서 설명해 보겠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났지만, 바로의 딸인 하셉수트 공주의 양아들이 됩니다. 그래서 애굽의 왕자로 살게 됩니다. 이런 모세가 40세가 되었을 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게 되면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고 하는 신분을 거절하게 됩니다. 이것은 애굽의 왕자가 누리며 살 수 있는 이 세상의 권세와 부와 명예를 다 버린 것이며, 또 애굽 사람들이 섬기며 사는 그 모든 신들을 다 버렸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모세의 신앙은 이렇게 애굽의 부귀영화와 애굽의 신들을 거절하는 결단 위에 세워졌습니다. 이렇게 모세는 확실한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게 되더라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변함이 없었습니다. 모세의 신앙은 세상 조건이나 형편에 흔들리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오늘날에는 믿음이 있다.’고 하면서, 그 형편이 나빠지면 신앙을 부인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까? 이런 사람들은 믿음을 가질 때, 믿음으로 구원도 받고, 하나님이 주시는 것도 얻고자 신앙생활을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 바라고 목적했던 것을 얻지 못하게 되면 신앙까지 흔들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모세와 사람들의 다른 점입니다.

모세는 신앙생활의 시작에 애굽의 신들과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특권을 버렸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믿고 섬기는 삶을 살겠다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이렇게 신앙의 결단을 한 모세가 깨달은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시려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자신이 이 사명 받았음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좋은 기회가 왔습니다.

모세는 애굽 사람이 이스라엘 사람을 괴롭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모세는 이 일에 개입하여서 애굽 사람을 죽이고 이스라엘 사람을 구해 줍니다. 그다음 날에는 이스라엘 사람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동족끼리 싸우지 말라?’는 권면을 해 줍니다.

 

모세가 왜 이런 일을 했겠습니까?

하나님이 자신을 이스라엘 백성들의 구원자로 세우셨다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런 모세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한 일을 소문내었고 결국 바로까지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모세는 바로를 피하여 미디안 광야로 도망가서 40년을 숨어 살게 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모세는 40년 동안, 미디안 땅에서 살면서도, 그 가진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어떻게 그 믿음을 지켜나갈 수 있었습니까? 모세가 가졌던 믿음은 처음부터 무언가를 얻고자 믿었던 믿음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받은 사명을 알리는데 실패한 이후에도 믿음을 잃지 않았습니다.

 

요즘 성도들은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는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자격이 있다.’ ‘또 나는 장차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천국에 가게 된다.’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요즘 성도들은 신앙의 시작과 결과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신앙에서는 그 시작도 중요하고, 그 결과도 중요하지만, 현재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과정도 중요합니다. 바른 신앙은 그 시작과 과정과 결과가 한결같아야 합니다.

 

하박국 선지자가 살았던 시대는 환난의 시대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원수들은 마치 어부가 그물을 펼쳐서 고기를 잡듯이, 그렇게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나라들을 파멸시키고 그 백성들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새들이 들판에 있는 곤충들을 잡아먹듯이, 그 가는 곳곳마다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병대와 군대가 한번 지나가면 약탈과 파괴로 그 땅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이런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래서 당시 이스라엘 땅에는 무화과나무나 포도나무나 감람나무의 열매가 다 없어졌다고 합니다. 밭에는 먹을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짐승의 우리는 텅텅 비어 있었다고 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어떤 고백을 하였습니까?

비록 그 삶의 현실은 절망적일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나로 나의 높은 곳으로 다니게 하시리로다.”라고 하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전쟁의 폐허더미를 두 발로 밟고 서서, 폐허로 변한 그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에 계신 하늘을 바라보며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우리의 삶이 비참하다고 해도 이보다 더 비참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이런 찬양을 하지 못합니까? 하박국 선지자는 당장 먹고 마실 것이 없는 전쟁의 폐허 속에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신분이 가져다주는 그 모든 혜택을 포기하고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고향과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난 후에 가나안 땅에서 평생 나그네와 우거하는 자로 살면서도 구원의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런 감격 적인 찬양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우리는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을 바라보고 땅에 소망을 두고 살기 때문입니다. 이런 우리에게 이런 제자들에게 주신 예수님의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 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세와 아브라함과 하박국은 모두 그 신앙의 시작에 세상을 부인하고, 하늘을 바라보고 사는 결단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신앙생활을 시작할 때, 세상을 부인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세상 속에서 얻게 되는 유익을 바라보고 신앙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다른 점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사는 한 한결같은 믿음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결같은 믿음을 가지려면 하늘을 바라보고 살아야 하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우리 중에는 아직 이 믿음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더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라도 결단하고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는 구원신앙 안에서, 땅을 바라보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사는 성도들이 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직 우리에게는 기회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죽게 되거나, 예수님이 재림하시게 되면 그 기회는 끝이 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기회가 있을 때 잡아야 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 소망을 두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의 결단을 해야 합니다. 아멘.

 

두 번째, 모세는 신앙공동체의 일원이 되어 살아가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모세는 신앙의 결단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려고 했습니다.

모세는 이런 자신의 의도를 알려주기 위해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 사람에게서 구해주기도 하고, 다투는 이스라엘 사람을 화해시켜 보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이제까지 애굽의 왕자로 살아온 모세를 그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애굽에서 살지 못하고 미디안 광야로 도망간 것입니다.

 

신앙공동체가 중요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신앙은 공동체 속에서 자라고, 성장하고, 온전해집니다칼빈은 그의 기독교강요에서 교회를 모든 성도들의 어머니라고 했습니다. 또 교회는 성도들의 구원과 양육과 연합의 수단이 된다.’라고 하면서, 믿음을 가진 성도들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를 부정합니다.

이런 사람들중에는 무교회주의자들이 있습니다. 개인주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교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그래서 혼자 예배드리거나 큰 교회에 가서 예배만 드리는 생활을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참된 믿음은 신앙공동체 속에서 고백 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을 가진 우리를 신앙공동체 안으로 인도하셔서, 기르시고, 보호하시고, 양육하십니다. 신앙공동체는 우리 신앙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 줍니다.

 

믿음은 사람들을 보는 우리 관점을 바꾸어줍니다.

모세가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당시 세계 최강대국 중 하나였던 애굽 백성 된 것과 또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된 것을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신앙을 가진 이후에는 애굽에서 노예같이 살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였습니다.

 

우리들도 같지 않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을 존경합니까? 우리나라 경제계의 거목인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이나, 현대의 고 정주영 회장과 같은 분들을 존경합니다. 그러면서 그분들이 이룬 성공 신화를 자신도 이루어 보고자 꿈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 그 관점이 달라집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을 존귀한 하늘 백성으로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상속자로 보게 됩니다. 신앙은 이렇게 사람들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을 변화시켜 줍니다.

 

뇌성마비 지체장애인으로 태어났지만 신앙으로 그 장애를 극복한 송명희 시인이 있습니다. 누가 봐도 그녀는 불공평해 보입니다. 그런데 이 자매는 공평하신 하나님이라는 시를 썼고, 최덕신 씨가 여기에 곡을 붙여 아름다운 복음송이 탄생하지 않았습니까?

 

나 가진 재물 없으나, 나 남이 가진 지식 없으나, 나 남에게 있는 건강 있지 않으나, 나 남이 없는 것 있으니, 나 남이 못 본 것을 보았고, 나 남이 듣지 못한 음성 들었고, 나 남이 받지 못한 사랑받았고, 나 남이 모르는 것 깨달았네,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가진 것 없지만, 공평하신 하나님이 나 남이 없는 것 있게 하셨네.

 

여러분들은 누구에게 더 마음이 갑니까?

대 기업을 이룬 총수들입니까? 자신의 믿음을 아름다운 시로 고백한 송명희 시인입니까?

여러분들은 누구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까? 대 기업의 총수와 같은 삶입니까? 아니면 송명희 시인과 같은 삶입니까?

 

여러분 중에 어떤 사람은 목사님 저는 장애인으로 산 송명희 시인보다는 대기업을 이룬 총수 들와 같은 삶을 살고 싶습니다.’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은 각 개인의 선택입니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이 할 수만 있으면 모세가 가졌던 관점을 공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는 칭함 받기를 거절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였습니다. 믿음이 모세로 하여금 사람을 보고 세상을 보는 눈을 달라지게 했습니다.

 

사람의 기준으로 보면, 애굽의 왕자로서 정치적인 실권을 가지고, 애굽의 부와 명예를 누리며 사는 것이 훨씬 좋아 보입니다. 노예같이 동원되어, 성곽을 쌓고, 신전을 건축하고, 나일강 둑을 보수하며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훨씬 나빠 보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다릅니다.

애굽에서 고난당하는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택한 사람들이고,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보였습니다. 신앙이 모세에게 이렇게 변화시켜 준 것입니다.

 

제가 예수를 믿은 후에 가지게 된 한 가지 버릇이 있습니다.

저는 어느 곳에 가든지 사람들을 볼 때 예수 믿는 사람과 예수 믿지 않는 사람을 구분해 보는 습관이 있습니다. 지하철을 타고 갈 때도 사람들을 구분해서 보는 것이 습관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을 보면, 예수를 믿고 있다고 말은 하면서도, 예수 믿는 형제에게 친근함을 느끼지 않고, 잘 사는 형제, 말을 잘하는 형제, 분위기를 잘 띄우는 형제에게 단짝처럼 달라붙는 것을 보게 됩니다. 제가 볼 때 그보다 더 꼴불견이 없어 보입니다.

 

그러면 저는 그 사람이 정말 예수를 믿는 사람인지 궁금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존재인가는 아는 사람이라면 그렇게 행동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이 얼마나 존귀한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40세에 확실한 구원신앙을 가졌고, 이 신앙은 모세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광을 알아보게 했습니다.

 

또 믿음은 우리들에게 가족을 바라보는 눈을 바꾸어 줍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는 세 가지 유형가족 관계를 맺고 살아갑니다. 첫째는 육신적인 가족이고, 둘째는 영적인 가족이고, 셋째는 이중적인 가족입니다. 이 이중적인 가족은 육신으로도 가족이면서 또 영적으로도 가족인 사람들을 말합니다.

 

육신의 가족은 하나님께서 창조 질서 속에서 맺어주신 가족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실 때 흙으로 창조하셨지만, 아담의 후손 된 우리들은 육신의 부모를 통해서 창조하십니다. 우리의 부모님들은 하나님의 도구가 되어 우리에게 생명을 부여해주신 분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신의 가족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의 가족을 외면하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는 육신의 가족에 대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영적 가족은 하나님이 구원계획 속에서 맺어주신 가족입니다.

예수님이 전도하실 때 그 어머니와 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 예수님은 여기서 영적인 가족에 대해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우리가 깨달을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육적인 가족보다 영적인 가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언제 예수님처럼 이런 가족관을 가지게 됩니까? 그것은 우리가 이 세상보다 하나님 나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을 가질 때입니다. 이때 우리는 영적 가족의 참된 가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 가족의 이상을 이 땅에서 실현했던 공동체가 바로 예루살렘교회 공동체였습니다.

이 예루살렘교회 공동체는 하나님이 에덴에 세웠던 공동체를 그 원형으로 하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이 영적 가족 공동체를 이상으로 삼고 있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는 영문 표기를 참빛장로교회(chambit presbyterian church)라고 쓰지 않고, 참빛공동체 교회(chambit communiti church)라고 표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일은 21세기라는 상황 속에서 이 영적 가족 공동체의 이상을 실현해 나가는 교회를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이중적인 가족은 육신 적으로도, 영적으로도 가족이 된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는 이런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참 귀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육신 적으로도 신앙공동체 안에서도 한 가족이 되어 살아갑니다. 우리는 이 특별한 가족들을 주신 것을 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는 개인주의가 극에 달해 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시대 속에서 우리가 가장 시급하게 회복해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 영적인 가족 개념입니다. 이 영적인 가족 개념은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마음이고, 또 하나님께서 예수 믿는 우리가 가지고 살기 원하시는 마음입니다. 이 영적 가족 개념의 회복에 교회의 미래가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신앙을 가지게 되면 이렇게 가족을 보는 눈이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영적 가족이 얼마나 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모세는 이런 변화를 경험한 하면서 어떤 결단을 하였습니까?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우리도 이 영적인 공동체 이상을 이 땅 실현해 나갈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 모세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고난까지 기뻐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모세가 신앙의 결단을 할 때 개인적으로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을 거절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 결단은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 공동체였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하는 신앙으로 나아가게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모세는 이 일 때문에 바로의 칼날을 피해 광야로 도망가서 살아야 했습니다. 40년이 지난 후 하나님께서는 이 모세를 다시 부르셔서 애굽에서 고난받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해 내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모세는 전에 자신이 젊고 힘이 있을 때에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받아주지 않았는데, 이제 80세가 된 노인을 받아주겠습니까? 라고 하며 애굽으로 가기를 거절합니다. 이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는 내가 너와 함께해 줄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고,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성취하기 위하여 고난도 기쁘게 받을 각오를 하고 애굽으로 가게 됩니다.

 

이런 모세의 삶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개인적인 신앙은 반드시 공동체 신앙으로 나아가야 하며, 신앙공동체는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이루어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해 기쁘게 고난 받고,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은 물가가 많이 올라서 모든 것이 비싸졌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면 돈이 아주 많이 들어갑니다. 땅도 비싸고 건축비도 많이 듭니다. 그런데도 교회를 건축하려고 하는 교회들이 있고, 또 이미 건축 중에 있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광야에서 모세가 성막을 지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 마음에 자원하는 사람들이 기쁘게 바친 물건들을 모아서 성막을 지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를 건축할 때 그 모든 비용을 누가 부담합니까? 그 교회 성도들이 다 같이 부담합니다. 제직회에서 교회 건축을 추인할 때 성도들은 나도 교회 건축을 위해 일정 부분 헌신하겠다.’는 마음으로 찬성해 줍니다.

 

교회는 국가가 세금 매기듯이 강제적으로 헌금하게 하지 않습니다.

각성도들이 기도하며 자원하여 건축헌금을 합니다. 지금 잘 지어진 교회들은 많은 성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언제나 성도들의 헌신을 생각하며 교회들을 봅니다.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은 어떤 사람들입니까?

자기가 가진 물질을 하나님이 필요로 하시는 일에 쓰려고 준비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그 일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아낌없이 헌신합니다.

 

한국 장로교회가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되었을 때 선교사님들이 다 통합 측에 합류했습니다. 그래서 합동 측에는 교회만 있고, 교육기관도 없고, 신학교도 없고, 아무런 재산도 없었습니다. 그때 백남조 장로님이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교 부지 18,000평을 기증하셨고, 그곳에 오늘날과 같은 교단 신학교가 세워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 된 사람들은 십일조만 내면 내가 할 일은 다 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을 위해, 주의 복음 전파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헌신을 하고자 그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성전에 계실 때 사람들이 성전 연보 궤에 구제헌금을 내고 있었습니다.

많은 부자들이 줄을 서서 구제헌금을 하고 있었는데, 한 여인도 동전 두 렙돈을 헌금하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다른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가난한 중에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

 

이 여인은 재물이 두 렙돈 밖에 없었던 가난한 여인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무슨 생각을 했다고 합니까? 자기보다 더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그 두 렙돈을 구제헌금으로 바칠 생각을 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위해 고난의 삶을 자원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의 신앙과 헌신을 인정해 주셨던 것 같이, 예수님도 이 여인의 신앙과 헌신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아멘.

 

이 세상에 속한 사람들은 이 세상 물질을 자기 소유로 알고 삽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들은 다릅니다. 어느 시편 기자는 내 소유는 이것이니 하나님의 말씀을 지킨 것이니이다.”라고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이 시편 기자는 자신이 가진 물질을 자신의 소유로 보지 않고, 하나님 말씀대로 쓴 물질을 자신의 소유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이 가지고 사는 물질관이 되어야 합니다.

 

이 외에도 하나님을 위해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선교사로 외국에 나가서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건강한 몸과 그 소유한 물질을 가지고 장애인을 돌보고, 노인들을 돌보고, 어려운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면서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교회를 위해, 복음 전파를 위해 일생을 바치고 고난을 자처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다가 붙잡혀서 매를 맞고 빌립보 지하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때 어떤 감사를 했습니까? 자신이 주를 위해, 주의 복음 전파를 위해 고난받을 수 있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영광을 돌리는 찬양을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바울의 기도와 찬양을 들으시고 땅을 흔드시고 옥문이 열리게 하심으로 응답해 주셨습니다. 이 일을 보고 놀란 간수가 그 집 사람들을 다 데리고 와서 함께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구원을 받게 되지 않았습니까?

 

이런 사람들은 왜 주를 위해 받는 고난까지도 기뻐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것은 주를 위해 받는 고난이, 희생이, 헌신이 얼마나 영광스런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죄악 된 세상에서 낙을 누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받는 삶을 택하였던 이유가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장차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실 상이 있다는 것을 믿는 사람들, 장차 하나님이 주실 상을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은, 지금도 모세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주를 위해 받게 되는 고난까지 기뻐하는 성도의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 믿음이 저와 여러분이 가지고 살아가는 믿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습니까?

첫째, 개인적으로는 구원신앙이 확실했던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둘째, 이 개인 신앙은 공동체와 함께 하는 신앙으로 발전해 나갔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상주심을 바라고, 내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받게 될 고난까지도 기뻐하는 신앙을 가졌습니다.

 

저와 여러분도 모세가 가졌던 이런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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