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의 계명
요한1서 4:7-12
성경은 인류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어떻게 증거하고 있습니까?
요한복음 3:16절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한1서 5:6-8절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는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였느니라.”그리고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1서4:10 절에서는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들을 보면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어떻게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까?
인류를 사랑하사 성자 하나님을 사람으로 세상에 보내주신 사건 속에 나타났다고 하고 있습니다. 성자이신 예수님께서 피조물과 똑 같이 사신 그 삶 속에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죄를 대신 지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어주신 그 삶 속에 나타나 있다고 합니다.
오늘은 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살펴보는 시간을 가지려고 합니다.
먼저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첫째, 겟세마네 동산에서 하신 기도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것이 왜 사랑이고 고난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내용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당시 예수님께서 기도하셨던 그 잔은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까?
이 잔은 아무 죄도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는 잔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겟세마네의 기도를 사랑이고 고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죄가 전혀 없으신 예수님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는 것이 쉬운 일이었겠습니까?
이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 일이 예수님께 얼마나 어려운 일이셨으면 예수님은 이 일을 가지고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셨겠습니까? 또 이 일 때문에 ‘고민하고 슬퍼 하사’ 아무 도움도 주지 못할 제자들에게 ‘나를 위해 깨어 있으면서 기도해 달라.’라고 까지 부탁하셨겠습니까? 그리고 히브리서를 보면 이 때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였다.”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고민하신 모습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성경 어디를 봐도 예수님께서 이렇게 자기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신 일을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통곡하며 기도하신 것은 오직 겟세마네 동산에서 뿐이십니다.
의사였던 누가는 예수님께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이렇게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애쓰고 힘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 방울 같이 되더라.” 현대 신학자는 사람에게서는 ‘피 방울 같이 떨어지는 땀’이 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실적인 기록일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의학전문서적에는 매우 희귀한 현상이기는 하지만 ‘히마티드로시스’ 즉 ‘피 방울 같이 떨어지는 땀’이 나올 수 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언제 ‘피 방울 같이 떨어지는 땀’이 흘러내릴 수 있다고 합니까?
인간이 견디기 힘들 정도로 극도의 긴장상태가 되고, 여기에 감정적인 과로까지 겹치게 되면, 땀샘에 있는 작은 모세혈관들이 파괴되는 현상들이 나타나더라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파괴된 모세혈관을 통해서 흘러나온 피가 땀에 섞여서 마치 ‘피 방울 같이 떨어지는 땀’ 이 흘러내리게 된다고 합니다.
이런 의사들의 증거를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셨는지를 알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우셨으면 ‘힘쓰고, 애쓰시며, 통곡하시며 기도하셨을 뿐 아니라’ 땀샘에 있는 모세 혈관이 파괴되어서 ‘피 방울 같이 떨어지는 땀’이 뚝뚝 떨어져 내릴 정도로 기도 하셨겠느냐? 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 이 일이 이렇게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마 이 일을 통해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사람들 대신 죄인이 되심으로, 거룩하신 성부 하나님과 처음으로 분리되시는 일이 일어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이 죄인이 되심으로 거룩 그 자체이신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예수님께서는 이 괴로움을 참지 못하시고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라고 부르짖어 기도하셨겠습니까?
우리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면서 부르짖으셨던 이 예수님의 부르짖음보다 이 세상에 더 처절한 부르짖음이 있겠습니까? 이 세상의 그 어떤 아픔도 고통도 고난도, 겟세마네에서 동산에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심으로 겪으셨던 예수님의 아픔과 고통보다 더 크지 못할 것입니다.
전에 세월 호 사건으로 사랑하는 자녀를 잃은 부모들이 겪었던 그 아픔과 고통도, 일본 앞 바다에서 일어난 진도 9.5의 지진이 가져온 쓰나미로 사랑하는 가족을 잃었던 그 슬픔과 고통도, 북한 잠수정에 의해 두 동강난 천안 함에서 자녀를 잃었던 그 부모의 슬픔과 고통도, 결코 거룩하신 성자 하나님이 사람들 대신 죄인이 되시므로 성부 하나님과 분리되시면서 겪었던 그 고통과 슬픔보다 크지 않을 것입니다.
이 죄인의 고통을 조금 맛본 루터의 절망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사도바울의 탄식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예수님을 믿기 시작할 때 이 고통을 경험한 바 있습니다. 그 때 우리 심정이 어떠했습니까?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고, 살아서 하며 사는 그 모든 삶이 무의미 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려고 드린 그 기도가 얼마나 어렵고 힘든 기도였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담고 있는 기도이고,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의 크기를 잘 보여주는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 큰 고통과 슬픔을 자청하신 것입니까?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저주 속에 살고 있는 인류를 사랑했기 때문입니다. 아담 안에서 죄인이 됨으로 저주받고 형벌 받아야 할 인류를, 다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로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서 자청하신 것입니다. 아멘.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디서 나타나고 있습니까?
둘째,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재판받으심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는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가 전혀 없으신 분이시지만, 우리를 대신해서 죄인이 되셨기 때문에, 마치 자신이 죄인이신 것처럼 인류의 죄에 대한 재판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예수님은 어떤 재판을 받으셨습니까?
첫째,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법정에서 종교적인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둘째, 예수님은 빌라도의 법정에서는 정치적인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당시 유대 왕이었던 헤롯 안디바의 법정에서는 또 재판을 받으셨습니다.
이 모든 재판을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최종적으로 가야바의 법정으로 이송되셔서, 종교지도자들의 선동을 받은 민중들의 고발을 받아 십자가형을 선고 받으셨습니다.
당시 예수님을 심문한 유대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발견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빌라도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이 당시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예수님을 시기하여서 모함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종교지도자들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군중들을 향해 이렇게 물었습니다. ‘명절에 죄인 하나를 놓아주는 관례가 있는데 이 관례대로 내가 이 예수를 놓아주려고 하는데 너희들은 어떻게 생각하느냐?’ 라고 물었습니다.
빌라도가 왜 이 말을 했겠습니까?
대제사장들은 무죄한 예수님을 시기하여서 고소하고 있었지만, 백성들은 예수님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빌라도는 ‘이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할까?’ 라고 백성들에게 물은 것입니다.
그런데 백성들의 입에서는 전혀 의외의 대답이 나왔습니다.
대제사장들의 사주를 받아 동원된 백성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강도로 잡힌 바라바를 풀어달라고 요청’하였던 것입니다.
빌라도는 백성들의 이런 요청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의 요구가 거칠어지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면 폭동까지 일으킬 것’ 같음을 보고 위협을 느껴서, 백성들의 요구대로 강도인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님을 채찍질하고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선고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로마에 반역한 정치범이 되셔서 십자가형을 받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건들 즉,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시기로 결정하신 사건과, 실재로 우리 대신 죄인이 되셔서 그 죄에 대한 심문을 받고 재판을 받으신 예수님을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며, 아담의 죄로 죽어가고 멸망당해 가는 우리들을 그대로 내 버려두시지 않으시고, 성자 예수님을 인간의 모양으로 이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 대신 죄인이 되게 하시고, 죄인이 되심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불리 되게 하시고, 또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죄인처럼 재판을 받게 하시고, 결국 죄인으로 십자가형을 언도 받고 죽으시게 하셨겠느냐? 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삶 속에서 우리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셋째, 가시관을 쓰시고 채찍에 맞으시는 고난 속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먼저 채찍질입니다.
빌라도가 예수님을 로마에 반역을 꾀한 정치범이라고 판결하고 군병들에게 내어주자, 군병들은 정치범을 다루는 매뉴얼에 따라서 예수님을 채찍질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먼저 죄수인 예수님의 윗옷이 벗겼습니다. 그리고 그 두 손은 포개어 머리위로 올리게 한 후 벽에 달려 있는 끈으로 묶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준비가 끝나자 채찍질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당시에 채찍질은 40에서 하나 감한 39대까지 때릴 수 있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이 사용하던 채찍은 가닥이 다섯인 채찍이었습니다. 그리고 각 가닥의 끝에는 동물의 뼈나 작은 금속 덩어리를 달아 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채찍으로 때리면 채찍이 몸에 감기면서 그 끝에 달린 단단한 물체들이 연한 살 속에 박혔다가 빠지면서 심한 상처를 남겼습니다. 그러면 그 상처에서는 많은 피가 흘러내렸습니다.
이 채찍질을 거듭하게 되면, 결국에는 살 껍질이 벗겨지고, 속살이 들어나고, 더 심한 경우에는 혈관이 터지고, 뼈가 들어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아주 드문 경우지만 채찍 끝이 배에 박혔다가 빠지면서 살이 찢어지고 그 찢어진 살 사이로 창가가 흘러나오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 흘러나온 창자는 다시 집어넣고 붕대로 그 상처를 싸매 준 후, 다시 때려서 결국 39대를 다 채웠다고 합니다.
채찍이 다섯 가닥이었기 때문에 한 번 때리면 다섯 대를 맞는 것과 같은 효과가 있었습니다.
이렇게 계산해 볼 때 예수님이 39대를 다 맞으셨다면 사실은 195대를 맞은 것이 됩니다. 정치범으로 고소되어 빌라도에 의해 사형 언도를 받은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우리 대신 채찍질을 당하신 것입니다.
다음은 가시관 쓰심입니다.
예수님을 채찍질 한 군병들은 예수님을 더 우스꽝스럽게 만들기 위하여, 상처투성이가 된 예수님께 왕의 예복 대신에 홍포를 걸치게 하고, 그 손에는 왕의 홀 대신에 갈대를 쥐어 주고, 그 머리 위에는 왕의 관 대신에 가시덤불로 만든 가시 면류관을 만들어 씌웠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의 머리와 이마에서는 피가 흘러내리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몸에서 혈관이 가장 많은 곳이 바로 머리입니다.
이 머리에 가시관을 씌워 놓았으니 얼마나 피가 많이 흘러 내렸겠습니까? 이 때 흘러내린 피는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오면서 얼굴과 목과 어깨를 적셨습니다. 군병들은 예수님의 머리에서 피가 더 많이 흘러내리게 하기 위하여, 예수님의 손에 들려주었던 갈대를 빼앗아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나는 갈대는 약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치면 부러집니다. 그러나 열대지방에서 나는 갈대는 강하여서 회초리로도 사용될 정도였습니다. 이런 갈대로 가시관을 쓰신 예수님의 머리를 때렸으니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군병들은 잔인한 장난을 하다가 실증이 나자, 예수님 어깨에 덮어주었던 자색 옷을 벗겼습니다. 이때 입혔던 자색 옷은 예수님의 몸에 난 상처에 달라붙어서 마치 붕대 구실을 해 주고 있었는데, 이 옷을 벗기자 딱지가 벗겨지고 살이 찢어지는 고통과 함께 다시 예수님의 몸에서 피가 흘러 내렸습니다.
예수님은 왜 이렇게 혹독한 채찍질을 당하시고 가시관을 쓰신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까?
이사야서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는 나음을 입었도다.”
이 이사야는 예수님이 이렇게 채찍에 맞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라고 합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예수님께서 이렇게 채찍에 맞으시고 가시관을 쓰신 것이, 나를 위한 대속적인 고난이심을 믿고, 그 육체의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예수님의 이 대속적인 고난은 지금도 동일한 효력이 있습니다.
오늘 날도 예수님의 대속적인 고난이 나를 위한 고난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능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믿음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믿음 안에서 저주가 물러가고, 질병을 고침을 받아, 하나님께서 주시는 건강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채찍에 맞으심과 가시관을 쓰신 고난 속에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 죄인되었던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깨닫고 믿음으로 화답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 누리 살아가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아멘
또 하나님의 사랑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넷째, 십자가에 우리 대신 죽으신 고난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이 빌라도 궁에서 군병들에게 고난을 당하신 후에 나무로 된 가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가셨습니다. 세로로 된 십자가는 이미 골고다에 있습니다. 이 나무로 된 가로 십자가는 한 2m정도 되는 나무였기 때문에 그렇게 무거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얼마나 기진맥진하셨든지 이것을 지고 가면서 수도 없이 넘어지셨습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를 지고 가야 했던 길도 그렇게 먼 길이 아니었습니다.
골고다는 예루살렘 성 바로 밖에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이 자꾸 넘어지시는 바람에 시간이 지체되고 있었습니다. 그 다음 날은 유월절이었기 때문에 그 날 해 지기 전에 사형 집행을 다 마쳐야 했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에 왔던 구레네 사람 시몬을 잡아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게 했습니다.
이 때 예수님의 상태는 서 있는 것도 힘든 상태였습니다.
맨몸으로 걸어가는 것도 힘들 정도로 기진맥진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쇠약해 진 몸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영화를 보면 20-25cm나 되는 큰 대못을 예수님의 손바닥에 박는 것으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대못을 손바닥에 박으면 그 몸무게 때문에 손바닥 살이 찢어져서 죄수는 곧 땅에 떨어지게 됩니다. 사실 대못은 손과 손목 뼈 사이에 박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또 두 다리는 포개놓고 그 위에 또 하나의 대못을 박았습니다.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은 십자가에 올라 선채 못 박히는 것이 아니고, 양팔과 발에 박힌 단 세 개의 대못으로 몸무게가 60kg인 사람은 60kg의 무게를, 80kg인 사람은 80kg의 몸무게를 지탱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 몸은 앞으로 쳐졌다고 합니다. 그러니 그 손목과 발이 받았던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이 고통은 죽은 그 순간까지 계속되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래서 죄수는 손목이 너무 아프고 고통스러우면 두 발로 온 몸을 버티면서 손목은 아픔을 잠시 참기도 하고, 혹은 오른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왼 쪽 손목의 아픔을 참고, 왼쪽으로 몸을 기울여서 오른쪽 손목의 아픔을 참았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쥐가 나서 몸이 뒤틀리는 고통을 당하면서 몸은 마비되어 갔다고 합니다.
보통은 사람은 이 십자가 위에서 3일에서 1주일 정도 살아 있었다고 합니다.
이 기간 동안 피와 물은 몸에서 점점 빠져 나가서, 목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심한 갈증을 느끼게 되고, 이렇게 진액이 다 빠져서 죽게 되는 것이 십자가형이었다고 합니다. 얼마나 처참한 형벌이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그날 오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왜 이렇게 빨리 돌아가셨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형을 받기 이전에 이미 그 받으신 고난들로 몸이 약해 질대로 약해져 있으셨습니다. 그래서 오래 버틸 수가 없으셨습니다. 로마 군병들이 예수님이 정말 죽었는지를 확인하려고 옆구리에 창을 찔러 보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과 함께 달린 두 사람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병들이 그 사람들의 뼈를 강제로 꺾어서 죽였습니다. 그래서 “그 뼈를 꺾이지 않았다”는 메시야 예언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면 왜 군병들은 산 사람의 뼈를 꺾어서 죽였습니까?
그 다음 날이 유월절이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은 절기에 사람을 부정케 하는 시체를 만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월절이 되기 전에 미리 시체를 다 처리해 버리려고 강제로 뼈를 꺾어서 죽였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죽으신 날이 바로 고난 주간의 금요일입니다.
이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구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마다 붉은 십자가를 높이 세워놓고 우리 죄를 지시고 우리 대신 죽으신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죄를 사해 주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 대신 죽어주신 것을 믿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속죄와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입니다.
다음에 살펴볼 것은, 사랑의 계명을 주심입니다.
십자가에서 사랑을 보여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마태복음 22:37-40절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이 두 계명이 율법과 선지자 곧 성경의 요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에베소 교회는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네 행위와 수고와 네 인내를 알고, 또 악한 자들을 용납하지 아니한 것과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의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과 또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안다.’고 하셨을 정도로 믿음과 헌신된 삶이 대단했던 교회였습니다. 만약 오늘날 이런 교회가 서울에 있다면 사람들은 이 대단한 교회로 몰려갔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런 에베소 교회를 책망하고 계십니다.
2:4절입니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으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에베소 교회는 모든 면에서 아주 모범적인 교회였지만 처음 사랑을 버린 교회였다고 책망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 5절에서는 ‘회개하고 그 처음 사랑을 회복하지 않으면 네 촛대를 옮기겠다.’고 하셨습니다. 촛대를 옮기겠다는 이 말씀은 더 이상 교회로 인정해 주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이 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성도들은 십일조를 드리고, 예배에 참석하고, 전도에 힘쓰면 하나님 좋아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믿음보다 사랑을 더 강조하셨습니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면 사랑이 없으면 좋은 믿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절입니다.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렇게 사랑을 강조하고 계십니까?
사람들이 사랑하고 사랑 받는 것이 필요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사랑이 필요해서 그러신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가 사랑받기를 원하듯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사랑 받기 원하셔서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성삼위 하나님 사이에는 놀라운 사랑의 교제가 늘 있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랑 안에서 이미 만족하고 계시며, 더 이상의 다른 사랑을 필요치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처럼 뭔가 사랑이 부족해서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라고 요구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신 것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우리들을 위해 사랑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무슨 말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떻게 우리를 위한 일이 됩니까?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요한1서 4:12절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만일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느니라.”
어느 때나 하나님을 본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머무신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완성되고 성취되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에베소 교회가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을 사랑하는 첫 사랑을 회복해야 한다고 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이 머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이런 사람들 안에 온전히 완성되고 성취되기 때문입니다.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면 이렇습니다.
여러분은 다 한번쯤은 누구를 사랑해 보셨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가 사랑하는 상대방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함께 있을 때나 혹 멀리 떨어져 있을 때도 그 마음 안에는 그 사랑하는 사람이 들어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늘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고, 그 사랑하는 사람과 또 함께 있고 싶어 하고, 만나서는 해어지기 싫어하고, 또 헤어지면 곧 바로 생각나는 것이 바로 사랑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을 늘 곁에 두고 함께 있고 싶어서 결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와 같은 일이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늘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게 되고,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늘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모시고 늘 하나님과 함께 생활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지는 심령천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하늘나라는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수 없나니 바로 너희 마음 안에 있느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안에 이루어지는 심령천국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시고, 또 우리 마음 안에 들어와 계신 그 하나님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심령천국이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신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임하게 된다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사랑이 필요해서 그런 요구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들을 위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우리 마음 안에 하나님이 와 계시게 되고, 그 오신 하나님을 통해 우리 심령 속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잘 아시기 때문에 그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심령 천국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바로 구원받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비록 그 삶이 부하든지 가난하든지 관계없이 이미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초막이 궁궐이나 관계없이 그 살아가는 삶이 곧 바로 하늘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오늘 날 세 가지 모양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째는 우리 심령 안에 이루어진 심령천국입니다. 둘째는 이렇게 심령 천국을 이룬 성도들이 모인 교회입니다. 셋째는 성도들이 앞으로 가서 살게 될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들어와 계시고, 이렇게 해서 그 마음에 심령천국이 이루어진 사람들이,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나라 표상인 교회의 성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믿음으로 교회의 성도가 된 사람들이 앞으로 올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될 천국백성들입니다. 아멘
하나님께서 에베소교회를 향해 그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그 촛대를 옮긴다고 하신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첫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이고,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심령천국을 잃어버린 사람이고, 이렇게 심령천국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결국 교회도 될 수 없고, 장차 도래하게 될 하나님 나라도 잃어버리게 될 성도들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그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이것입니다.
지금 내 마음 안에 심령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심령천국이 이루어진 사람들에게는 장차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 심령 천국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안에 주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에베소교회를 향해 ‘첫 사랑을 회복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잃어버린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이 에베소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아멘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래서 그 마음속에 하나님이 와 계시고, 그 와 계신 하나님을 통해 그 마음속에 심령 천국이 이루어진 사람들은, 늘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그 마음중심에 두고 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들을 믿고 또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래서 그 마음에 하나님도 와 계시지 않고, 그 마음에 심령 천국도 이루어지지 않은 사람들은, 하나님과 영적 세계에 대해 전혀 모르기 때문에, 오직 이 세상을 그 마음에 두고 살게 됩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이 세상이 부와 명예와 업적과 성취를 위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중에 어떤 부류의 사람이 되어야겠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를 다 취하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단호하게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언젠가는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중 더 사랑하는 것을 선택하고 덜 사랑하는 것은 버리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영생을 얻기 위해 찾아온 부자 청년을 예로 들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부자 청년은 하나님도 사랑하고, 믿음도 좋고, 신앙생활도 아주 열성적이었습니다. 이 청년보다 신앙이 더 좋아 보이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청년에게 “네 소유를 다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고 너는 나의 제자가 되라.” 라고 하실 때 근심하며 예수님을 떠나갔습니다. 이 청년이 가장 사랑하고 있었던 것은 바로 그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던 그 많은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하나님도 사랑하였지만 재산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였습니다. 이런 청년을 보면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니라.”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랑의 비밀이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에게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까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리 신앙의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비밀이며 신비입니다. 이 사랑의 비밀을 아는 사람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리고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은 우리의 사랑이 필요해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우리를 위해서 그렇게 요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우리들이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게 하시기 위해서 그렇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전하는 저나 또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신 대로 오직 하나님만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너무 사랑하고 있었기에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이삭을 내게 번제로 바치라고 하시는 말씀에도 순종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도 아브라함처럼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길 바랍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되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율법주의란 무엇입니까? 사랑 없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그러면 은혜란 무엇입니까? 무슨 일이든지 사랑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길입니다.
우리 모두는 그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할 뿐 아니라, 이 세상이 귀중히 여기는 부모, 자녀, 명예, 돈, 성공 등등보다도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삶을 살므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루어지는 심령 천국을 우리들도 이루어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뿐 아니라, 예수님이 재림하신 후에 주실 천년 왕국에서, 또 천국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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