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서신

‘모세의 신앙과 삶’

하나님은 빛이시다 2023. 1. 1. 14:39

모세의 신앙과 삶

히브리서 11: 23-29

 

오늘로부터 2023년도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이 한해 동안 여러분이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든지,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풍성하게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2023년도를 시작하면서 가장 얻고 싶은 것이 무엇입니까? 금은보화입니까? 성공과 성취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금은보화성공과 성취도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그 믿음, 우리가 고백하며 살고 있는 그 믿음이 가장 가치 있고 가장 소중합니다. 이 믿음보다 더 가치 있고 귀한 것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이 믿음을 말할 때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지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되면 그 믿음은 반드시 우리를 변화시키게 됩니다. 이 변화를 성경은 거듭남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들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는 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진 성도가 되고 믿음으로 거듭난 성도가 되어서, 2023년도를 살아가면서 믿음의 열매, 의의 열매, 거룩한 열매들을 많이 맺으며 살아가는 복 된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새해를 시작하는 이 첫날 아침에 우리는 모세의 믿음과 삶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 모세가 믿음을 가지고 성령으로 변화된 삶을 살게 되었듯이, 우리 모두도 믿음으로 변화된 삶을 살아가는 한 해를 만들어 가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모세의 삶을 살펴보면 40세까지는 애굽의 왕자로써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이 모세가 나중에 세상 부귀영화를 버리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산 사람이 되었습니다. 모세에게 이런 변화는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모세가 믿음을 가진 사람이 되고 믿음이 가져다주는 변화를 경험하는 과정 속에는 심한 삶의 좌절과 고뇌와 아픔들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믿음을 가진 모세는 단 한 번도 그 믿음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사람들을 보면 너무 쉽게 믿고 또 너무 쉽게 믿음을 떠납니다.

심지어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이 자신은 수십 년 동안 교회를 다녔지만 진리를 모른 채 다녔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이단의 가르침 속에서 참 된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며 성도들을 유혹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가진 믿음은 모세가 가진 믿음과 아주 대조적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은혜에 믿음의 기초를 두었다면, 이런 사람들은 자기 이해와 깨달음에 그 믿음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까?

우리는 지식에 우리 신앙의 기초를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단들은 거의 다 지식에 그 신앙의 기초를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신앙의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로 선물로 주시는 믿음에 우리 신앙의 기초를 두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에 신앙의 기초를 두었던 모세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모세가 가지고 살았던 믿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이 히브리서 11:24-26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첫째, 모세는 거절하는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모세는 먼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었던 그 모든 특권들을 거절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둘째 모세는 함께 하는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세상에서 낙을 누리며 사는 삶보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더 좋아하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셋째 모세는 바라보는 믿음을 가졌다고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상을 바라보는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고 합니다.

 

이런 믿음을 가지고 살았던 모세의 생애는 정확하게 3등분으로 구분됩니다.

첫째는 40년 동안 애굽의 왕자로 산 삶입니다. 둘째는 40년 동안 광야에서 목동으로 산 삶입니다. 셋째는 시내 산에서 사명을 받고 40년 동안 사명자로 산 삶입니다.

 

이제부터는 모세가 살았던 구체적인 삶을 살펴봅니다.

첫째,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산 40년의 삶입니다.

 

성경은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살았던 40년의 삶에 대해서는 철저히 침묵합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공생애 이전 30년의 삶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듯이, 모세의 40년 삶에 대해서도 철저히 침묵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삶이나 신약 12제자들의 삶에서도 동일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살았던 40년의 삶을 알려면 성경 외 다른 기록을 살펴보아야 합니다. 1세기에 살았던 유대인의 랍비이며 역사학자였던 요세푸스의 증언에 따르면, 모세가 태어나기 직전에 하나님께서는 한 선지자를 애굽에 보내셔서, 앞으로 이스라엘 민족 가운데 한 아이가 태어날 것인데, 그는 덕망을 뛰어난 사람이 될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일으켜서 애굽 인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할 것 이라는 예언을 하게 했다고 합니다.

 

이것은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보내실 때에도 같았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시고, 세례요한을 보내시고, 깨어 있는 종들을 보내시고, 심지어 동방박사까지 보내셔서 그 백성들에게 메시야의 탄생을 미리 알려 주셨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왕이 오신다는 소식을 들었던 헤롯은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가 이스라엘의 왕인데 자기 외에 다른 왕이 태어났다는 말을 듣고는 어떻게 했습니까? 동방박사들에게 그 별이 나타난 때가 언제인지 자세히 물어보고, 그때를 기준으로 하여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두 살 이내의 어린아이들을 다 죽이라고 명령했었습니다.

 

이것은 애굽 왕 바로의 경우도 같았습니다.

요세푸스의 증언에 의하면 애굽 왕 바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구원해 줄 사람이 올 것이라는 예언의 말씀을 전해 듣고, 그 즉시 산파들을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여아가 나면 살리고 남아가 나면 죽이라라는 반인륜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이 일을 행치 않았습니다. 그러자 바로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직접 명령하기를 너희 중에서 아들이 태어나거든 나일 강에 던지고 딸이 태어나거든 살려두라.”라고 하면서, 만약 나의 이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있으면 그 온 가족을 멸한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이 때 아므람의 아내이며 모세의 어머니였던 요게벳이 임신을 하게 됩니다.

아내의 임신 사실을 안 아므람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애굽 왕 바로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미워하여 노예로 삼고 각종 고역을 시키더니 이제는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라는 명령까지 내리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요게벳이 남아가 아닌 여아를 낳게 해 주시기를 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던 아므람의 꿈에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아므람아 바로가 아무리 내 백성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아 보려고 해도 그 시도는 이루어지지 못할 것이다. 이스라엘은 앞으로 더욱 더 번성하게 될 것이다. 네 아내 요게벳이 네가 아들을 낳아 줄 것인데 그 아들이 선지자의 예언대로 내 백성의 구원자가 될 것이며, 그 형 아론은 내 앞에 특별한 제사장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서 바로와 그 신하들이 네 아들을 죽이려고 하겠지만, 너는 그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아이를 낳아 키우게 될 것이고, 그 아이는 너희가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방법으로 양육될 것이다.라는 말씀을 주셨다고 합니다.

 

요세푸스 또 기록하기를 요게벳은 임신을 했는데도 전혀 임신한 표시가 나지 않았고, 입덧도 하지 않았으며, 산통도 하지 않고 출산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이웃 사람들조차 요게벳이 임신하고 아들을 낳았는지 알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아므람은 아기 모세를 숨겨서 키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므람의 가족들은 늘 불안한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혹시 이 일이 알려지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민하던 아므람은 전에 하나님께서 이 아이는 네가 알지 못하는 방법으로 양육 될 것 이라고 하신 말씀을 기억해 내고, 자신들이 불안해하면서 키우는 것 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방법으로 키우시도록 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노아의 방주를 닮은 갈대상자를 만들어서 그 안에 모세를 넣어서 갈대숲 사이에 두고 미리암에게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도록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갈대상자가 나일 강에 물놀이를 나온 하셉수트공주에게 발견됩니다.

하셉수트공주는 갈대 숲 사이에 있는 예쁜 상자를 발견하고 호기심이 생겨서 시녀를 보내서 그 상자를 건져 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건져 온 갈대상자 안에는 너무 잘생긴 아이가 방긋이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하셉수트공주는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를 보는 순간 강한 모성애가 일어났고, 이 아이를 자신이 양육하여야겠다는 주체할 수 없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바로 그 때 모세는 울기 시작하였고 하셉수트 공주는 배고파 울고 있는 그 아이에게 젖을 먹여 줄 부인을 데려 오라고 하였습니다. 요세푸스의 증거에 의하면 이 때 그 시녀들이 애굽 여인을 불러왔는데 모세는 그 애굽 여인을 거절하고 그 젖도 먹지 않으며 더 큰 소리로 울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또 다른 부인을 불러오면 모세는 똑 같이 고개를 돌리며 울고 그 여인의 젖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때 이 모든 일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있던 미리암이 달려가서 여왕님 이 아이는 히브리인의 아이여서 히브리 여인을 불러온다면 젖을 먹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라고 했고, 하셉투스 공주는 그러면 네가 빨리 가서 히브리 여인 한 사람을 데려 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미리암 공주의 말을 듣자마자 집으로 달려가서 그 어머니를 데려왔고, 요게벳이 와서 젖을 물리자 모세는 방긋 웃으며 그 젖을 먹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요게벳은 모세의 유모가 되어서 하셉투스공주로부터 유모의 삯을 받으며 모세를 키웠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서 하셉투스공주의 양아들이 된 모세는 젖을 때 후 애굽 궁에 들어가서 40세가 될 때까지 애굽 왕자의 신분으로 살았습니다. 이 때 모세는 철저히 애굽 사람으로 살았으며, 다른 기록을 보면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서 애굽의 군대를 지휘하여 승리한 전쟁에 대한 기록도 나오고 있습니다.

 

이 때 모세어떤 삶을 살았겠습니까?

이 때 모세는 하나님과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았습니다. 이 때 모세의 삶은 세상 속에서, 세상의 가치관을 가지고,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습니다. 모세가 세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던 이런 삶은 세상이 부러워하는 삶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삶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님의 생각을 담고 있는 성경이 이때 모세의 삶에 대해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것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예수의 마음을 가졌노라 라고 할 정도로 하나님과 일치된 마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런 사도바울이 예수 믿기 이전의 자신의 삶에 대해 무엇이라 했습니까? 그 때 자신이 가치 있다고 여기며 살았던 그 모든 것들을, 이제는 마치 배설물 같이 여긴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바울이 가졌던 이 마음이 바로 우리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모세가 애굽의 왕자로 산 40년의 삶에 대해 성경이 철저히 침묵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 마음과 이 관점이 오늘 우리의 마음이 되고 우리의 관점이 되어야 합니다. 모세는 40세에 믿음을 가진 후 이 마음과 이 관점을 가지게 된 후에,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마음과 이런 관점으로 세상을 보고 사람들을 보는 눈이 우리들에게도 열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모세와 같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사는 첫 출발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아멘.

 

둘째, 모세가 광야에서 목동으로 산 40년의 삶입니다.

 

모세가 40세에 하나님을 믿게 된 후 그 믿음은 모세를 변화시켰습니다.

어떻게 변화시켰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보니, 전에 중요시 하던 애굽 왕자라는 지위와 명예와 부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었던 그 모든 명예와 권세와 부를 다 버릴 수 있었습니다. 또 잠시 죄악 된 세상에서 낙을 누리며 사는 것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더 좋아하도록 변화시켰습니다.

 

이런 삶의 변화가 어디서 왔습니까?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게 될 때 이런 삶의 변화가 왔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믿게 되면 이 믿음은 우리의 가치관을 바꾸어 버립니다. 우리가 전에는 육신에 속하여 무엇이든지 육신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었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우리가 영에 속하여 영적으로 보고 듣고 판단하는 눈을 갖게 해 줍니다. 그래서 우리의 거듭난 영이 우리로 하여금 영이신 하나님을 믿을 수 있게 해 주고 또 영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에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지 아니 계신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을 가진 이후에는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우리 눈으로는 직접 볼 수는 없지만, 우리가 매일 숨 쉬고 살아가는 공기가 있음을 믿고 확신하는 것 같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며 살아가게 됩니다.

 

하나님은 내 안에도 계시고, 우리가 예배드리고 있는 교회 안에도 계시고, 우리의 가정 안에도 계시고, 우리의 직장 안에도 계십니다. 모세는 이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며 살았습니다. 당시 모세가 가지고 살았던 믿음의 삶에 대해 27절에서는 모세는 보이지 아니하는 자를 보는 것 같이 하여 참았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이 믿음이 아담 안에서 육신에 속해 살던 우리를 변화시켜서 영에 속한 사람으로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육신에 속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뿐 아니라 또 영에 속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입니다. 이런 우리의 삶에 대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무엇입니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라고 하셨습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들은 떡을 먹고 살아가지만, 영혼이 거듭난 성도들은 떡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보면 육신적인 것도 중요하고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우리들도 모세와 같이 이 세상이나 이 세상의 재물보다, 하나님과 하늘나라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누리며 사는 부귀영화보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고 섬기는 삶을 더 중요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목회자인 저로서는 헌신하는 한 성도가 얼마나 교회에 큰 힘이 되는 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도에게 매이지 않고 초연하게 하나님을 바라보며 목회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개척교회 목사를 위로하려고 은혜의 손길을 베푸는 성도들이 있습니다.

이 때 저는 은혜를 베풀고 있는 그 사람에게도 감사를 표하지만, 그 보다 더 큰 감사를 섭리로 인도해 주시고 계신 하나님께 돌려 드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담임 목회자가 가장 원하는 것은 사실 성도의 숫자가 늘어 교회가 부흥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오직 교회 성장에만 목을 매지 않고 하나님이 바라고 원하시는 설교를 하려고 하고, 또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믿음이 한 단계 한 단계 더 높아져 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이 일을 위해 제가 하나님 앞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설교 준비하고 기도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어느 누가 알아주겠습니까? 가장 가까이 있는 세탁소가 알아주겠습니까? 미술학원이 알아주겠습니까? 오히려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고 하며 답답해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제 마음 속에는 이런 확신이 있습니다.

어디나 계신 하나님,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계시는 하나님께서는 저의 그런 삶의 모습을 다 보고 계시고 다 알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지고 오늘까지 지내오고 있습니다.

 

다윗은 베들레헴이라는 작은 시골 마을에서 믿음으로 그 아버지의 양을 치며 살았습니다.

아무도 이런 다윗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알아주지도 않았습니다. 심지어 이런 다윗을 아버지 이새도 형제들도 무시했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그런 다윗을 우리 하나님께서는 알아주시고, 사무엘 선지자를 보내셔서 기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으셨던 것입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것 같이 믿으며 40년의 세월을 인내할 때 이런 모세를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세를 알아주시고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런 은 이 세상을 목적삼고 사는 사람들은 살 수 없는 삶입니다.

오직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 그 영혼이 거듭난 성도들만 살 수 있는 삶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바라보며 살고 있습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차이를 가나안 땅을 탐지하러 갔던 12명의 정탐 군들을 통해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을 바라보고 살았던 10명의 정탐 군은 무엇을 보았습니까?

이들은 가나안 땅의 상태와 그 살고 있는 사람들과 군대의 강하고 약함 등을 세세히 보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그 분석한 결과에 따라 이성적인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았던 여호수와 갈렙은 달랐습니다.

이들은 가나안 땅의 형편과 그곳 사람들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이들은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고 계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또 그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을 믿고 신뢰했습니다.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차이입니다.

모세가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삶을 살았다는 증거가 무엇입니까? 모세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세상에서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했다.”고 합니다. 이런 삶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그 목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삶입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사는 사람들만 가질 수 있는 마음입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마치 보는 같이 믿고 버림받은 것과 같은 광야 40년의 삶을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살아야 할 믿음도 바로 이런 믿음입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가 다 이런 믿음으로 세상을 이기고,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삶을 살 뿐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믿음의 삶을 보시고 하나님이 옳다 인정해 주시는 성도로 살아갈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셋째, 모세가 사명자로 헌신하였던 40년의 삶입니다.

 

모세가 사명자로 40년 동안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그 동력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바로 상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믿음이었습니다. 히브리서 11:6절에서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11:26절에서도 똑 같이 “....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하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믿음은 상 주심을 바라보는 믿음인데, 모세는 이 믿음을 가지고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상주시는 하나님이심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께서 한 부자 청년에게 네 제물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와서 나를 쫓으라.” 라고 하실 때 부자청년은 재물이 많은 고로 근심하며 떠나갔습니다.” 이것을 보고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 보다 더 어렵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때 베드로가 예수님 보시옵소서. 우리가 우리의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라고 고백했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현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라고 이 세상에서 받을 복과 천국에서 받을 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이후에도 끝까지 이 믿음을 버리지 않았고 심지어 나중에는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했다고 합니다. 베드로가 이렇게 예수님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베드로는 그 믿음의 삶을 보시고 이 땅에서도 상을 주시고, 하늘나라에서도 상을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면서 그 당하는 고난의 삶을 믿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다.

 

모세가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써 누릴 수 있는 모든 특권들을 거절할 수 있었던 것도, 애굽에서 고난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자처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스도를 위해 받는 고난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길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믿음을 보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았기 때문인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이 땅에서도 복을 주시고, 또 하늘나라에서도 복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면, 기쁜 마음으로 주를 위해 희생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헌신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먼저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눈이 열려서 하늘나라와 이 세상을 비교해 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의 가치와 이 세상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비교해 볼 수 있는 믿음의 눈이 열려야 합니다. 그 때 우리는 더 가치 있는 하늘나라와 그 나라에서 받게 될 상급을 받기 위하여, 그보다 가치가 적은 이 세상의 금은보화들을 버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모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모세는 이 세상 나라와 하늘나라를, 이 세상 나라의 가치와 하늘나라의 가치를 동시에 볼 수 있는 눈이 열려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늘과 땅이 차이 나는 것처럼, 하늘나라와 이 세상나라의 가치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엄청난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더 가치 있는 하늘나라를 택하고 가치가 덜한 이 세상 나라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뒤 늦게 신학교에 가서 보니 신학교는 나이 많은 사람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대기업의 전무로 있었던 사람, 의사, 현직대학교수, 군의 고급 장교 등 사회적으로 꽤 괜찮은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도 여러 명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이 왜 뒤 늦게 신학교에 왔을까요?

당시 이 사람들이 신학을 하면서 교회에서 전도사로 섬길 때 받게 되는 사례는 100만원도 채 안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 적은 월급을 받으면서도 신학을 하고 또 전도사로써 교회를 섬기는 것입니까?

 

그 이유는 이 사람들은 대기업의 전무로 있는 것보다, 신학을 하고 전도사로 섬기는 일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들은 대기업의 임원이나 대학교수로 사는 것 보다 목회자로서 복음을 전하고 성도들을 섬기며 사는 일을 더 가치 있게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보다 가치가 덜한 대기업의 임원이나 대학교수 자리를 버린 것입니다.

 

모세도 같았습니다.

모세는 믿음을 가진 후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덜 가치 있어 보이는 바로의 아들이라는 신분과 그 누리며 살 수 있는 모든 특권들과 부와 보화를 버렸던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쉬운 결단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왜요. 당시 애굽은 세상의 진귀한 보화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던 나라였으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앞서 있었던 선진국이었기 때문입니다.

 

에스겔서는 보면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당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있던 두로에는 진귀한 보화들을 많이 있을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 두로를 취하기 위하여 몇 년 간 모든 머리털이 무지러졌고 모든 어깨가 벗겨지도록 힘든 싸움을 해서 정복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두로를 점령하고 보니 거기에는 원하던 보화들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느브갓네살이 애굽과의 전쟁에서 그 보상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가 점령한 애굽에는 각종 진귀한 보화들이 많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 모세에게 애굽은 정말 자랑할 만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믿음을 가지게 된 후 어떻게 변했다고 합니까? 26절입니다. 그 많은 애굽의 모든 보화들보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더 큰 재물로 여겼다.”고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주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이런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가장 가치 있는 일로 여기십니까?

사람들이 무엇을 가치 있는 일로 여기느냐에 따라서 그 삶이 달라집니다. 성공과 부를 얻는 데 최고의 목적을 두고 있는 사람은 그 목적하는 성공과 부를 얻기 위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성공과 부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 외 다른 것들은 기쁘게 희생합니다. 성공과 부를 얻을 수 있는 수단과 방법은 다 동원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모세는 성공과 부를 얻는데 최고의 가치를 두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인생의 최고의 가치를 하나님께 두었습니다. 그래서 바로의 공주의 아들 됨과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서 누릴 수 있는 그 모든 특권을 포기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또 모세는 애굽이 그에게 줄 수 있는 모든 보화보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실 상을 더 귀하게 여겼습니다.

 

모세는 이렇게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둔 신앙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도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 최고의 가치를 둔 신앙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이 신앙이 우리의 삶에 영향력을 미쳐서 우리들도 2023년도 이 한해 동안 하나님께서 인정하셨던 믿음, 모세와 같은 믿음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안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모세와 같이 결단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말로는 하늘나라가 가장 중요하고, 하나님 나라에 가장 최고의 가치를 두고 산다고 하면서도 사실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쫒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마치 이 세상 삶에 하늘나라의 영광이 함께 있는 것처럼 세상영광을 쫓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우리는 어떤 믿음을 가져야겠습니까?

우리 모두는 모세와 같이 믿음으로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이 세상의 모든 보화보다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을 더 큰 보화로 여기며 살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세가 이 땅에서도 보상을 받고 또 하늘나라에는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된 것 같이, 우리 모두도 이 땅과 하늘나라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상을 받아 누리며 사는 축복된 성도들이 다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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