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문 밖으로 나아 가신 예수님
히브리서 13:10-17
1. 히브리서의 저자와 독자의 상황
저자입니다.
히브리서는 누가 쓴 것인지 또 그 독자가 누구인지에 대해 논란이 많은 서신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로 거론되고 있는 사람은 대략 일곱 명쯤 됩니다. ‘바울, 바나바, 누가, 클레멘트, 실라, 아볼로, 브리스길라’라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입증된 것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구약성경에 아주 능통한 사람이 기록한 서신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고 있는데 그 인용하고 있는 내용들을 보면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정말 탁월한 사람의 기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8:24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에서 난 아볼로라 하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이르니 이 사람은 언변이 좋고 성경에 능통한 자라.’ 이 말씀에 근거하여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대한 이해가 아주 탁월하고 능통하였던 아볼로가 히브리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이 히브리서를 기록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히브리서를 읽어보면 바울서신과 같은 점도 있지만 바울서신과 다른 점 또한 많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바울이 기록한 서신들을 보면 히브리서와 같이 구약성경을 탁월하게 인용하고 능통하게 인용하고 있는 곳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이 히브리서를 바울이 기록하였다고 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입니다.
히브리서에서는 구약의 제사 제도와 율법을 많이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제사 제도와 율법에 익숙하였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 이 서신의 대상이었다고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이 히브리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던 바울의 기록이라기보다는, 유대교 신앙에 정통하고 있었던 아볼로의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 더 합리적으로 보입니다.
당시 상황입니다.
히브리서 10:32-34절입니다. ‘전날에 너희가 빛을 받은 후에 고난의 큰 싸움을 견디어 낸 것을 생각하라. 혹은 비방과 환난으로써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고 혹은 이런 형편에 있는 자들과 사귀는 자가 되었으니, 너희가 갇힌 자를 동정하고 너희 소유를 빼앗기는 것을 기쁘게 당한 것은 더 낫고 영구한 소유가 있는 줄 앎이라.’
이 말씀을 보면 히브리서는 그 가진 신앙 때문에 박해받고 있는 상황을 염두에 두고 기록한 서신 같아 보입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에게는 전날에 ‘고난의 큰 싸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도 ‘신앙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고, 환난을 당하고, 사회적으로는 소외되고, 세상 사람들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은 심지어 믿음 때문에 ‘감옥에 갇히기도 했으며, 소유하고 있었던 재산을 박탈당하기도 했던’ 아주 어려운 상황 속에 있었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이 사회 주류계층으로 살고 있습니다.
기독교인 대통령도 있었고, 우리나라 군대의 사성장군 중에 거의 절반이 기독교인이라고 합니다. 국회의원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 CEO 들은 어떻습니까? 학교 선생님들은 어떻습니까? 오늘날에는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기독교인들이 있으며, 그것도 우리 사회에 큰 영향력을 미치며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직장을 구할 때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차별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내가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불이익을 당하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가 기록될 당시 상황은 지금 우리 사회와 달랐습니다. 1세기 당시 유대인 공동체 안에서 기독교인들은 사회의 소외계층이었습니다. 당시 유대인 사회의 주류계층은 유대교 신자들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처음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하나님을 섬기는 같은 종교로 여겼었습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유대교와 기독교를 서로 다른 종교로 인식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유대교는 유일신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기독교회는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때부터 유대교에서는 기독교를 이단시하게 됩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부터, 유대인들로부터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유대교는 로마가 예외를 인정해 주는 신앙이었지만, 기독교는 로마가 인정해 주는 신앙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에게도 박해를 받게 되었습니다.
전에 수단에서 회교도인 한 여성이 기독교인과 비밀 결혼을 했다고 재판에 넘겨져서 채찍질 100대 형을 받았고 그래도 돌이키지 않으면 사형을 집행하라는 선고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이 여인은 임신 8개월 상태였기 때문에 아기를 출산할 때까지 그 형의 집행이 연기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20개월 된 첫아들과 함께 여자교도소에 수감 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 들은 국제 인권 단체들이 들고 일어났고, 결국 수단 정부는 이 여인에게 형을 집행하지 못하고 국외로 추방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회교와 같이 종교사회였던 유대교에서도 같았습니다.
당시 유대인이 예수를 믿고 크리스천이 될 때에는 그 가진 신앙 때문에 당하게 되는 고난과 박해를 각오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서의 독자들은 실제로 전날에 신앙 때문에 당한 고난의 큰 싸움을 믿음으로 이겨 낸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 동안 상황이 변하여 종교적인 박해가 많이 완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며 살아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또다시 상황이 바뀌어서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사람들에게 비방을 받게 되고, 가족들로부터는 버림을 당하게 되고, 심지어 로마 당국자들에게 붙잡혀 감옥에 갇히기도 하고, 소유재산을 박탈당하게 되는 일들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그 신앙 때문에 고난을 당하게 되면 사람들이 보이게 되는 반응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고난을 당하면 당할수록 그 가진 신앙이 점점 더 강해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다른 하나는 고난을 당하게 되면 그 신앙이 흔들리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히브리서의 독자인 유대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에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섬기는 신앙에서 흔들리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까? 이 사람들은 기독교나 유대교나 다 같은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데, 유대교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나, 기독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을 섬기나 다 같은 것이 아니냐?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박해의 요인이 되었던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돌아가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대교로 돌아가기만 하면, 당시 유대교 신앙은 유대인들에게도 로마인들에게도 합법적인 신앙으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고난도 받지 않을 수 있고 박해도 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기록한 것이 바로 히브리서입니다.
2.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길
히브리서 13:12-13절 말씀은 이렇게 기독교 신앙을 버리고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받았던 사람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의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12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그 흘려주신 피로 백성들을 거룩하게 하시려고 ‘영문 밖에서 고난 당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말씀하고 있는 영문은 예루살렘 성문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 있는 골고다 곧 해골이라 부르는 공동묘지에서 ‘온 세상의 죄를 대속해 주시기 위해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관점은 두 가지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첫째, 유대인들은 성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온 세상이 구원을 받으려면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으로 나아와야 한다는 성전 중심의 사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모든 믿음과 예언들은 성전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신약의 교회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지만, 이후에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는 선교 지향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성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신약의 성도들이 교회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가 우리들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이듯이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아주 특별한 장소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성전은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성전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하고 기도할 때 늘 성전을 향해 기도했습니다. 또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이었습니다. 또 성전은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는 곳이기도 하였습니다. 또 성전은 종말론적인 예언과 약속이 성취되고 완성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성전 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던 유대인들이 볼 때 성전은 아주 중요한 곳 아주 특별한 곳이었습니다.
둘째, 유대인들은 독특한 정결 예식에 관한 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지만 이방인들은 하나님과 무관한 부정한 백성이라는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이방인들과 교제를 하면 자신들도 부정케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부정한 이방인들과는 음식도 같이 먹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들이 그 죄를 사함 받으려면 예루살렘 성문 안에 있는 성전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성전 제단에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야 죄를 사함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모든 종교 생활의 중심에는 성전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거나 기도하거나 속죄의 제사를 드리거나 또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할 때는 언제나 성전으로 나아갔습니다. 성전은 유대인들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성전 중심의 이런 관점은 예수 믿고 성령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8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나아가서 내 증인이 되라.’라고 명령하셨지만, 오순절에 임하신 성령을 받았던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사마리아에서 땅끝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성령 받은 이후에도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고 성전에 모여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런 모습 속에서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공동체는 유대인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성전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유대인의 관점을 벗어나지 못한 교회공동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스데반의 순교 사건
이런 관점을 가지고 있었던 예루살렘 교회는 언제 깨어나게 됩니까?
바로 스데반의 순교 사건 때입니다. 스데반은 초대교회 일곱 집사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스데반이 왜 순교 당했습니까? 그것은 스데반이 전한 과격한 메시지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성전을 중요시하고 성전을 자랑하던 유대인들에게 이런 설교를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중요시하고 성전을 자랑하고 있지만, 하나님은 돌로 만들어진 성전에 갇혀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라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는 하늘이 바로 그 보좌이고 땅이 그분의 발등상이시다.’라고 하면서, 성전. 성전 하면서 성전을 중요시하던 유대인들의 편견을 깨뜨려 주려고 하다가 순교한 것입니다.
이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충격적인 설교였습니다.
이 스데반으로 인해 일어난 유대인들의 교회 핍박이 얼마나 극심했든지, 사도 외에는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성도들이 별로 없게 되었을 정도라고 합니다.
스데반이 순교한 이후에 사도행전 8장을 보면 빌립이 사마리아로 가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래서 사마리아에서 큰 역사가 일어나자 사도들이 사마리아를 방문하게 됩니다.
사도행전 10장을 보면 고넬료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11장을 보면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것과 거기서 이방인들과 함께 음식 먹은 것을 문제 삼고 비난합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부정한 이방인들과 함께 교제하고 또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느냐? 라고 하며 비난했습니다.
이 비난을 듣고 베드로가 한 말이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사실 나도 이방인의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부정한 짐승과 정결한 짐승의 환상을 보여주시면서 나를 설득하여 ‘가라’고 하시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고넬료의 집에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는 가서 간단히 복음만 전해주고 나오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가 전하는 말씀을 듣고 있는 그 사람들에게 전에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심과 같이 성령을 부어주셔서 그들을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시는데 ‘내가 무엇이 간데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있었겠느냐?’라고 한 것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었습니까?
유대인들은 ‘거룩하신 성령은 죄인인 이방인들에게는 임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고넬료의 사건을 통해서 깨닫게 된 것이 무엇입니까? ‘부정한 이방인들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를 믿게 되면, 하나님이 그 이방인들도 거룩한 백성으로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제 이방인들에게도 생명 얻을 수 있는 회개의 역사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고넬료 사건을 통해 예루살렘 교회는 비로써 사도행전 1:8절 말씀을 이해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는 복음을 가지고 ‘예루살렘과 유대뿐 아니라, 사마리아와 땅 끝에 사는 이방인들에게까지 나아가라.’고 하신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후 초대교회는 비로써 이방인들에게 전도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유대인이 가지고 있던 성전 중심의 편견, 이스라엘 민족 중심의 편견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인류 구속의 역사를 비로써 온전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4. 영문 밖으로 나아 가신 예수님
이런 배경에서 나온 말씀이 바로 히브리서 13:12 절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의 피로서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유대인들이 자기 죄를 사함 받으려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떠나, 동물의 제물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문 안에 있는 성전으로 나아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류의 죄를 속해 주시기 위하여 성전으로 가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 반대로 예루살렘 성안에서 붙잡혀서, 예루살렘 성문 밖으로 나가셔서, 유대인들이 가장 부정한 곳으로 여기는 곳인 골고다 즉 공동묘지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내어주며 무엇을 보여주려고 했겠습니까?
유대인의 의식법으로 보면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한 곳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메시야가 아니라.’는 이야기를 백성들에게 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십니까?
메시야로 오신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정한 영역이라고 보는 공동묘지에서 죽으심으로, 그 부정한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죄를 사해 주신 메시야시라고 하고 계신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 부정한 사람들을 거룩한 백성 삼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씀하고 있는 그 영문 안은 성전과 제사장과 제단과 제물 등등을 다 갖추고 있는 유대교를 상징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던 영문으로 들어가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 히브리서 저자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유대교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었던 유대인 성도들에게, 너희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영문 안으로 상징되는 유대교로 다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한 것입니다. 유대교가 성전에서 드리는 제물과 제사와 각종 의식을 통해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 거기에는 예수님이 계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문 밖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기도하고, 섬기고, 죄 사함을 받으려면 예수님이 계신 영문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영문 밖에 하나님도 계시고,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도 있고, 죄를 사해 주시는 속죄도 있고, 죄로부터의 구원도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는 박해를 피하기 위해 유대교로 돌아가고자 하는 유혹을 받고 있지만, 유대교를 상징하는 예루살렘과 그 성전은 더 이상 하나님을 예배하는 장소도 아니고, 하나님을 섬기는 장소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만나고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고 그 주시는 속죄의 은혜를 경험하려면 영문 밖으로 나가신 예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영문 밖은 이 세상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이 또 보여주고 있는 의미는, 성문 밖에 있는 이 세상에는 본래 하나님도 없고, 부정하며, 죄 가운데서 아무런 의미도 없이 살아가는 그런 곳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그 부정한 세상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인류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하게 해 주시려고, 친히 십자가를 지시고 영문 밖 곧 세상을 향해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 속에서도 가장 절망적인 곳인 골고다로 나아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영문 밖으로 나가신 이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고 모시기만 하면, 그 장소가 어디이든지 관계없이 그곳이 곧바로 하나님이 계신 곳 즉 하늘나라가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신 그곳이 바로 하나님께 예배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나님이 주시는 죄 사함과 속죄가 이루어지는 곳이고, 하나님을 섬기고 믿음으로 헌신하며 살아가는 거룩한 곳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이와 같은 말씀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인이었던 한 여자가 예수님께 ‘우리가 이 산 즉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합니까? 아니면 예루살렘에서 예배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당시 유대인의 성전은 예루살렘 성안에 있었지만, 사마리아인의 성전은 그리심 산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너희가 예배해야 할 곳은 ‘이 산도 아니고 예루살렘도 아니고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 이후에는 하나님의 임재나, 죄로부터의 구원은, 더 이상 어떤 특정한 장소나 어떤 특정한 공간에서만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계신 그곳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죄로부터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은 교회를 성전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교회를 예배당이라고 부릅니다. 오늘날에는 하나님께서 장엄하게 오케스트라를 갖추고 있는 그런 교회에만 임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소수의 사람들이 모여 예배드리는 개척교회에도 임재하고 계시고, 단 한 사람을 앞에 놓고 설교하고 기도하며 섬기는 선교 현장에도 함께 하십니다. 이런 관점에서 주신 말씀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그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라는 말씀입니다.
찬송가 438장의 ‘내 영혼이 은총 입어’ 라는 찬송의 가사를 보면
1절에서는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 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3절에서는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그 어떤 곳이라도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에 이루어진 변화입니다.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은 어느 특정한 공간을 거룩하게 여기시고 거기 계신 분이 아니십니다. ‘높은 산이든지 거친 들이든지 초막이든지 궁궐이든지’ 그 장소가 어디이든지 관계없이 ‘내 주 예수님을 모시며 살아가는 그곳이 바로 하늘나라’인 것입니다. 아멘.
그래서 오늘날 교회 형태를 보면 아주 다양합니다.
아프리카 오지에서는 큰 나무 밑의 그늘이 곧바로 교회입니다. 우리나라 강원도 오지에서는 사람들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교회 건물을 따로 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살고 있는 가정집이 곧바로 교회인 곳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도시에서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대형교회들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히브리서 독자들은 박해를 피해 보려고 예루살렘으로 상징되는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유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유대교는 당시 로마가 인정해 주는 합법적인 종교였기 때문에, 이들이 유대교로 돌아가기만 하면 더 이상 박해와 핍박을 받지 않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은 세상을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해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루살렘 성안에 있는 성전의 제단으로 나아가신 것이 아니라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으로 십자가를 지고 나아가셨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 밖에 살고 있는 영혼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로 나아가셨다고 합니다.
5.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하는 우리들
이어지는 13:13절의 말씀을 보면, 우리들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이 치욕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야 할 곳도 예루살렘 성문 밖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런즉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그러면 우리들은 왜 영문 밖으로 나아가야 합니까?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그 길이 바로 천국 가는 길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고 있는 성도들이 해야 할 일은, 자기 자신의 몫으로 주어져 있는 치욕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나아가는 그 길이 바로 천국가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치욕의 십자가는 부끄러움의 십자가를 뜻합니다.
당시 사람들을 십자가에 매어 달 때 벌거벗겨서 매달았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고통의 십자가일 뿐 아니라 부끄러움의 상징이었던 치욕의 십자가였습니다.
이것이 보여주고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 그 길은 이렇게 고통의 길이며, 부끄러운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들은 그 고통의 길, 그 부끄러움의 길을 앞서가신 예수님을 따라 우리들도 가야만 하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앞에는 편안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길도 열려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만 먹으면 편안하고 안락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술 마실 때 우리도 술 마시고, 세상 사람들이 싸울 때 우리도 싸우고, 세상 사람들이 여행가고 즐기며 살 때 우리도 그렇게 놀면서 신앙생활 할 수 있습니다.
우리라고 그 편안한 삶을 모르겠습니까?
다른 사람들이 다 가고 있는 그 길을 우리라고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살게 되면, 신앙 때문에 겪게 되는 갈등은 많이 완화되지 않겠습니까?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같았습니다.
편안하고 안락한 삶을 살기 위하여 유대교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고, 또 그런 삶을 동경하며 유혹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런 성도들에게 준 말씀이 14절입니다. ‘우리가 여기에는 영구한 도성이 없으므로 장차 올 것을 찾나니’
유대인들은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 성을 영구한 도성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서는 지상에 있는 예루살렘 성은 영구한 도성이 아니라고 합니다. 장차 도래하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이 영구한 도성이며, 그 영구한 도성으로 가는 길은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아 가신 예수님을 따라 예루살렘 성 밖으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하늘나라로 가는 길은 이 세상에서 당하며 사는 고난과 갈등과 박해를 피함으로 가는 길이 아니고, 비록 세상 속에서는 갈등과 고통이 따르고 수치와 부끄러움이 따르겠지만 예수님이 가신 그 길을 우리도 쫓아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주기철 목사님은 찬송가 158장 ‘서쪽 하늘 붉은 노을’이라는 찬양을 통해, 자신이 이렇게 신앙을 지키며 예수님과 함께 고난받으며 갔던 그 길을 영문 밖의 길이라고 찬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예수님과 함께 한 걸음 한 걸음 믿음으로 고난을 당하며 걸어가는 그 길이 바로 천국 가는 길이고, 그 길 앞에는 우리들이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열려 있는 길인 것입니다.
천국은 장차 우리들이 가게 될 곳이지만, 그 천국에 들어가는 문은 우리들이 이 세상 속에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그 삶 속에 열려 지는 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천국 문을 열고 닫는 권세를 베드로에게 주시고, 또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태복음 16:19)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그 길은 우리들이 두 가지 산 제사를 드리며 가야 하는 길입니다.
첫째, 찬송의 제사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영문 안에 세워진 성전에서는 동물의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영문 밖으로 나아가는 이 길에서는 더 이상 동물 제사는 드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친히 유월절 어린 양이 되셔서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십자가에서 사랑과 구원을 베풀어 주신 예수님을 향해 찬송의 제사를 드리며 나아간다고 합니다. 이 찬송의 제사가 세상을 향해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라고 합니다.
둘째, 사랑과 선행의 제사입니다.
16절입니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서로 나누어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우리 삶의 주변에는 언제나 가난한 이웃, 고통당하는 이웃이 있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어 주는 구제와 사랑을 통해 복음을 전해 주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랑이 사람들의 마음을 열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를 움직이는 선행의 제사라고 합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이 두 가지 제사를 드리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치욕의 십자가를 피하지 않고, 예수님이 앞서가신 발자취를 좇아, 한 걸음 한 걸음 걸어가는 그 길이 바로 천국 문이 열려지는 길이 되고, 하늘나라로 나아가는 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무슨 재물이 많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하는 일은 아주 작은 선행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라고 하시면 우리는 단지 믿음으로 순종하여 나아 가면 됩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나도 따라간다는 심정으로 순종하여 나아가면, 결국 그 순종하여 나아가는 그 걸음 앞에 하늘 문이 열리고, 그곳에 하늘나라가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길은 좁고 협착한 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예수님이 먼저 가신 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가다가 보면 그 길 끝에 계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길입니다.
복음 송을 보면 ‘우리가 걷는 이 길은’이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가 개척 초기에 아주 많이 불렀던 찬양입니다. 그리고 그 당시 우리교회 홈페이지를 열면 이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도록 해 놓았던 곡입니다. 오늘 이 곡을 한 번 불러 보려고 합니다. 그 가사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우리가 걷는 이 길은 보기에 좁고 험하며 찾는 이 매우 적어서 외로웁지만
이 길 끝에는 우리 주님이 계셔 우리를 그 품에 안아 주시리
세상 사람들 우리들을 보면 어리석다고 조롱하지만, 이 길을 가는 자마다 영원히 주와 살리라.
우리는 함께 이 길을 선택한 형제자매요 영원한 주의 나라의 백성이기에
서로 도우며 서로 손을 잡아 주며 이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세상 사람들 우리들을 보면 어리석다고 조롱하지만, 이 길을 가는 자마다 영원히 주와 살리라.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꿈, 예수님의 비전을 함께 품고, 예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며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게 된다면, 우리들이 부족하면 하나님이 우리를 돕는 사람들을 붙여 주실 것이고, 우리들의 힘이 약하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협력자를 보내주실 것이고, 우리들이 낙심하게 되면 하나님이 우리를 위로해 줄 사람들을 우리에게로 인도해 오실 것입니다.
저는 이제까지 목회를 해 오면서 이런 분들을 많이 만났고, 지금도 만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예수님을 따라 영문 밖의 길로 나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은혜를 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드는 이 믿음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 자취를 쫓아, 한 걸음 한 걸음 영문 밖의 길로 나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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