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지기로 살아가는 삶
베드로전서 4:10-11
최근 우리나라에서는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특히 많이 일어나고 있는 사고는 바로 화재 사고입니다. 화재는 1년에 4만 건에서 5만 건이 일어나고 있으며, 가정집에서도 야산에서도 장소를 불문하고 무 차별적으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근자에 일어난 화재 사건 중에서 가장 많은 인명 피해를 낸 사건은 바로 2017년 12월 말에 있었던 제천 스포츠 센터 화재 사건입니다. 이 화재 사건에서는 무려 사망자가 29명, 부상자가 37명이나 되었습니다.
어떻게 단순한 건물화재인데 이렇게 많은 인명 피해가 났습니까?
그 이유는 화재 초기에 건물주가 곧바로 화재 신고를 하지 않고, 자체 소화전으로 화재를 진압해 보려고 했으나 화재 진압에 실패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건물주는 119에 신고한 후에 건물 안을 다니면서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일을 했습니다.
화재 신고를 받은 제천 소방서 직원들이 현장에 도착해 보니, 1층에는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고, 또 여러 개의 LPG 가스통까지 발견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차량 들을 이동시키고, 폭발의 위험성이 있는 LPG 가스통을 제거하는데 40분이나 걸렸습니다. 이렇게 화재 진압이 지체되었던 40분 동안 불길은 건물 전체를 삼키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중에 화재를 다 진압하고 보니 2층 여탕과 3층 남탕은 전혀 불탄 흔적이 없는데도 거기서 사망자가 가장 많이 나왔다고 합니다. 목욕탕 안에서 목욕을 하고 있던 사람들은, 탕 밖의 불길과 연기를 보고 그곳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가 연기에 질식사한 것입니다.
만약 당시 소방관들이 2. 3층에 있었던 바깥 유리창을 깨고 구조에 나섰더라면, 연기로 인한 질식사를 막을 수 있었고, 인명 피해도 많이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날 화재 현장에서는 그 누구도 그렇게 해 보려고 시도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 제천 스포츠 센터 화재 사건을 보면서 우리는 두 가지 부족한 점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스포츠 센터 주인의 부족한 모습입니다.
스포츠 센터 주인은 자기가 맡은 일에 대한 투철한 책임 의식과 사명 의식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스포츠 센터 주인이라면 자기가 운영하고 있는 그 센터의 운영뿐 아니라 안전까지 책임지려고 하는 의식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책임 의식만 있었어도 그렇게 많은 인명 피해가 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의 부족한 모습입니다.
소방관들은 화재가 발생했을 때를 대비하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는 전문가들이어야 합니다. 만약 이 사람들에게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투철한 사명 의식이 있었다면, 불길이 거세다고 밖에서 물만 뿌리고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목욕탕 바깥쪽에 있는 유리창이라도 깨고 사람들을 구해보려고 했을 것입니다.
만약 그랬더라면 목욕탕 안에 갇혀 있던 많은 사람들이 그 깨어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가 있어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연기에 질식해서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깨어진 유리창으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 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 소방관들에게는 이런 사명 의식, 직업의식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리창을 깨고 그 안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해 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목욕탕 안에서 죽어간 것입니다.
이런 사명 의식, 직업의식을 교회에서는 ‘청지기 의식’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청지기 의식이란 무엇입니까? 청지기란? 말의 의미는 ‘맡은 자’ ‘보관자’ ‘관리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청지기라는 말은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내 인생에 주인이 아니고, 내 인생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것입니다. 나는 내 인생의 참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내 인생을 위탁받아서 관리하고 있는 관리자라는 의식입니다. 이것이 청지기 의식입니다.
이 청지기 의식은 우리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에서도 통용되는 의식입니다.
나의 가정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맡아 관리하는 가정이며, 나의 직업은 하나님으로부터 내가 맡아서 일하는 나의 천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맡은 가정이나, 직장에 충실하는 것이 바로 청지기 의식입니다.
청지기 의식의 근본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데서 출발합니다.
만약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이라면 나는 내 멋대로 살아도 됩니다. 주인에게는 자기 것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며 살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그러나 내 인생의 주인은 우리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참 주인은 나에게 생명을 주시고, 건강을 주시고, 또 다양한 재능들과 환경들을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알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뜻대로 내 인생을 관리하면서 살아가는 청지기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청지기로 무엇을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까?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시간을 관리하며 살아가는 청지기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들에게 공평하게 24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공평하게 받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부자라고 더 많은 시간을 주시지 않고, 권력자라고 더 많은 시간을 주신 것이 아닙니다. 할 일이 많고 바쁜 젊은 사람들이라고 더 많은 시간을 주신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는 성도라고 더 많은 시간을 주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하루 24시간을 나는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똑같이 하루 24시간을 받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이 시간들 중에서 많은 시간을 하나님을 위해 쓰며, 또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는 전혀 시간을 쓰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그 시간을 어디에 쓰며 살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들은 세상일을 하며 사는데 시간을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들은 오락을 즐기는 일에 시간을 다 써버리고, 어떤 사람들은 빈둥빈둥 놀면서 허송세월하는데 시간을 다 써버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그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우리는 착하고 충성되다는 칭찬을 받을 수도 있고, 악하고 게으르다는 책망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또 우리가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받으며 살 수도 있고, 저주를 받으면서 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시간의 청지기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지 않고, 그 시간을 잘 활용하며 살아갈 책임이 주어져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의 청지기가 된 우리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합니까?
에베소서 5:16-1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라”
우리는 시간의 청지기로서 주어진 시간, 주어진 세월을 아껴야 한다고 합니다.
여기서 ‘세월을 아끼라’는 말씀은 ‘기회를 사라’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을 때 그 기회를 사서 선한 일을 하며 살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부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을 때 그 기회를 사서 열심히 공부하라는 뜻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할 수 있는 건강과 시간을 주셨을 때 그 기회를 사서 열심히 일하라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의 교회에서 헌신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을 때 그 기회를 사서 주를 섬기고 주의 교회를 섬기는 일에 헌신하고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기회를 사라는 이 말씀에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기회를 헛되이 보내지 말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시간을 맡아서 살아가고 있는 청지기라는 의식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이 시간을 아껴서 하나님을 위해 살고, 교회를 위해 살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시간을 사용하여서 내게 맡겨주신 일들을 성실하게 행하며 살라는 것입니다.
학생들은 열심히 공부하고, 직장인들은 직장에서 맡은 일에 열심을 다하며 사는 것이, 바로 시간의 청지기로 살아가는 우리가 가져야 할 올바른 삶의 자세입니다.
또 우리는 청지기로 무엇을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까?
둘째,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재능(은사)을 관리하며 사는 청지기입니다.
성경에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능이나 은사를 달란트라고 말합니다.
성경은 달란트의 비유를 통해 우리가 가진 재능과 은사를 어떻게 사용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달란트 비유를 통해 보여주고 계신 것이 무엇입니까?
첫째, 우리가 가진 모든 재능과 은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다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께 받은 이 재능이나 은사를 하나님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이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여 남기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에게 재능과 은사를 주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받은 재능과 은사를 가지고 한 일들을 결산하는 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이 오면 그 받은 재능을 활용하여서 많이 남긴 사람들은 칭찬해 주시고, 충성스럽게 헌신한 사람들에게는 그 헌신에 합당한 상급을 주시지만,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전혀 활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둔 사람들에게는, 그래서 아무것도 남긴 것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은사를 남기는 삶을 살 수 있습니까?
그 방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를 사용하며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과 은사는 사용하지 않으면 우리는 남길 수가 없습니다. 재능과 은사를 많이 사용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남기게 되어 있습니다.
달란트 비유를 보면 한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를 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이 말씀에서는 이 두 사람의 차이점이 무엇이라고 합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께 받은 달란트를 곧 바로 사용하여 장사를 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한 사람은 그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곧 바로 땅에 묻어 두었다고 합니다.
이 두 사람에 대한 주인의 평가는 어떻게 나타나고 있습니까?
그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여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는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라는 칭찬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받은 달란트를 사용하지 않고 땅에 묻어 둔 사람에게는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내가 알았느냐 그러면 마땅히 내 돈을 치리하는 자들에게나 맡겼다가 내가 돌아와서 내 원금과 이자를 받게 하였을 것이니라.”라는 책망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왜 주인에게 책망을 받았습니까?
이 사람이 그 주인을 자신은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이익만 취하려고 하는 고리대금업자와 같은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정말 그 주인이 고리대금 업자와 같은 사람이었다면 이 종에게 한 달란트를 맡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차라리 고리대금업을 하는 사람에게 맡겨서 원금과 이자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돈을 고리대금업자에게 맡기지 않고 이 청지기에게 맡겼다는 것은 그 주인은 종이 생각하듯이 그렇게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 에 따라서 우리의 행동이 달라집니다.
만약 우리가 충성된 사람이라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얼마나 충성된 분이신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게으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예수님을 세상일은 전혀 하시지 않으시고 사람들을 가르친다고 돌아다니기만 하신 아주 나태하고 게으르신 분으로 보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자신의 안경으로 다른 사람들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방이 어떤 사람이냐 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입장에서, 우리가 가진 관점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을 보고 평가하며 삽니다.
요즘 우리나라 상황이 이런 것을 보여주고 있지 않습니까?
여당은 여당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하고, 야당은 야당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똑같이 2024년이라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으면서도, 그 보는 관점과 시선과 이해가 너무나도 다릅니다. 똑같은 사건을 보고 대처 하는 입장이 서로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당면한 가장 시급한 문제는 북한 핵 문제입니다.
이 북한 핵 문제를 보는 여야의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남한과 북한의 현실을 바라보는 시각도 완전히 다릅니다. 이 사람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이념이라는 안경을 쓰고 우리의 현실을 보기 때문에 그 보는 관점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러면 정치들만 그렇습니까?
아닙니다. 기업주들은 기업 주의 입장에서 모든것을 보고, 노조는 노조의 입장에서 모든것을 봅니다. 소상공인들은 소상공인의 입장에서 모든것을 보고, 종업원들은 종업원의 입장에 모든것을 봅니다. 부모는 부모의 입방에서 모든것을 보고, 자녀는 자녀의 입장에서 모든것을 봅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 바람직한 입장이 무엇입니까?
나의 입장만을 강요하고 주장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주장과 입장에도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기업주는 기업주의 입장이 있겠지만 노조의 입장도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고, 노조는 노조의 입장이 있겠지만 기업가의 고충과 어려움을 이해하려는 이런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기업가와 노조 사이의 문제는 이 외로 쉽게 해결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서로 다른 입장과 이해에서 서로가 한 발씩 물러서서 여유를 가지고 융통성을 발휘한다면, 서로의 입장 차이를 해소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 정치처럼 끝까지 자기주장만을 고집한다면, 나라의 미래는 어두워지고, 기업은 쇠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우리나라 자동차 산업은 이제까지 승승장구해 왔습니다.
한미 FTA 협상을 통해 가장 많은 혜택을 본 분야가 자동차일 것입니다. 자동차는 반도체와 함께 우리나라 무역의 효자상품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가 무엇입니까? 자동차 산업에 종사하는 강성 노조들이 때때로 한 치의 양보도 없는 극한 투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잘못 하면 지금은 잘 나가는 자동차 산업이지만 그 미래는 어두워질 수 있습니다. 삼성도 전과 같지 않은 기업 환경속으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전에 삼성은 유일하게 무노조 기업이었는데 이제는 노조가 설립되어 파업까지 계획한다고 하니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장담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경우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학생들은 누구나 지금 내가 할 일은 공부라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해야될 공부에 열심인 학생들이 많습니까? 아니면 오락을 즐기며 시간을 허비하는 학생들이 더 많습니까?
직장인들이라면 자신이 맡은 일에는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직장인들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되려고 합니까? 아닙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좀 더 쉬려고 하고, 근무 시간이 끝난 후에 즐길 일만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충성된 사람이면 우리 눈에는 충성된 사람들이 보이고 또 그렇게 사는 삶이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게으른 사람이면 우리 눈에는 게으른 사람들이 보이고 또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지혜로워 보입니다. 이렇게 자신과 똑같은 사람들만을 바라보고 사니 그 삶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삶의 변화가 일어나려면 나와는 다르게 살고 있는 성실한 사람, 충직한 사람들을 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도전을 받고 삶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알고, 믿고 있습니까?
또 여러분들의 눈에는 어떤 사람들이 주로 보입니까? 학생들이라면 그 눈에 공부 잘하는 학생이 보입니까? 공부하지 않고 노는 학생이 보입니까? 성인들이라면 그 눈에 성실하고 책임성 있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게으르고 요령 부리는 사람들이 보입니까?
왜 우리가 바라보며 사는 사람들이 중요합니까?
그것은 내가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가지고 보며 사느냐에 따라서 나도 그런 사람이 될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내 눈에 공부 잘하는 친구가 보이면 나에게 공부 잘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눈에 성실한 친구가 보이면 나에게는 성실함을 좋아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내 눈에 까불며 노는 친구가 보이면 내 마음에 그런 학생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내 눈에 늘 지각하고 결석하는 친구가 보이면 나에게도 그런 게으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또한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결석하는 학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보고 살아야 하겠습니까?
믿음을 가진 우리 눈에는 늘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위해 희생해 주신 하나님이 보이고, 그 하나님이 베풀어 주신 은혜가 보이고 깨달아지게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 눈에는 하나님을 위해 충성하고 헌신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보이고, 또 우리 눈에는 생활도 성실하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그런 친구가 보이게 되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사는 성도가 되고, 하나님께 충성하며 헌신하는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고, 학교에서는 공부 잘하는 학생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장래가 보장되어 있습니다. 또 이런 사람들이 장차 하나님 앞에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는 칭찬을 받게 될 것입니다.
또 우리는 청지기로 무엇을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까?
셋째, 우리는 하나님께서 맡긴 재물을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내가 수고하고 내가 노력해서 재물을 모았으니 이 재물은 내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재물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우리는 잠시 잠깐 그 재물을 맡아서 살아가는 관리자들입니다. 우리가 재물을 관리하는 자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재물의 청지기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재물의 청지기라는 사실을 아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이것을 알아야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재물을, 재물의 참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의 뜻대로 잘 관리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재물을 어떻게 얻느냐?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얻은 재물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며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그 사람이 재물을 모은 것만 보고 존경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진정으로 존경해야 할 사람은 그 모은 재물을 어디에 어떻게 쓰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재물을 선한 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에 쓰려고 하면 특별한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이런 각오와 결단도 없이 우리는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을 위해 그 재물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여기서 가까운 어떤 교회는 교회를 새롭게 건축하게 되었는데 학원을 하는 어떤 성도 한 분이 10억 원의 건축헌금으로 내놓았다고 합니다. 재물을 자기 것으로 아는 사람들은 죽었다가 깨어나도 이런 헌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이런 헌신은 자신은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의 맡아서 관리하고 있는 청지기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는 헌신입니다.
제가 다닌 우리 교단신학교인 총신 신대원은 그 땅이 아주 넓습니다.
그런데 그 땅은 어느 장로님이 신대원 부지로 기증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당동에 있는 총신대학교 부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렇게 재물을 하나님을 위해 사용한 이런 사람들의 소식을 들을 때 어떤 마음이 듭니까?
감사하고, 기쁘고, 축복하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왜요. 우리는 그분들의 헌신 속에서 재물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소식을 들을 때 우리들만 도전을 받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도 이런 소식을 들으면 도전을 받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신앙이 무엇이기에 저 사람으로 하여금 그런 헌신을 하게 했는가?라고 생각하며 의아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 중에 기독교 신앙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고, 또 기독교 신앙에 대한 궁금한 마음도 생겨서 그것을 알아보려고 교회로 나오는 사람들도 있게 됩니다.
그러면 이렇게 재물의 청지기로 사는 사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디모데전서 6:17-19절입니다.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제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그 얻은 재물을 가지고, 주를 위해 쓰고, 선한 사업을 위해 쓰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쓰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이렇게 주를 위해 자신의 재물을 쓰는 사람들은 장차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되고, 장차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믿음으로 그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헌신을 정도에 따라, 하늘에서 누리며 살게 되는 영광이 달라지게 됩니다. 또 하늘에서 기거하며 살게 될 그 처소도 달라 지게 됩니다. 장래 천국에서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두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 생명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기쁘게 믿음으로 재물의 청지기로 헌신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또 우리는 청지기로 무엇을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까?
넷째, 우리는 하나님이 맡겨주신 복음을 전파하며 살아가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복음이란 무엇입니까?
복음은 복된 소식, 기쁜 소식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 기쁜 소식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게 된다는 하나님께서 전해 주신 구원의 약속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종들을 통해서 이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전해 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또 우리에게도 명령하시기를 전에 너희가 복음을 전해 받은 것같이, 너희도 이 복음을 전해 주는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우리를 가족 중에서, 이웃 중에서, 먼저 택하고 불러주신 이유입니다. 이렇게 볼 때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복음의 증인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이 복음을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성경을 보면 이렇게 그 맡은 복음을 충실히 전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오늘날도 복음 전도에 충성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두부를 나누어 주면서 전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 가진 재능을 기부하여서 전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밥을 사주고 선물을 사주면서 사람들을 사귀고 전도합니다.
왜 이런 사람들은 이렇게 전도에 힘쓰고 있습니까?
그 받은 복음이 너무 귀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간을 드려서, 물질을 드려서, 내가 할 수 있는 각종 수고와 노력과 헌신을 다하면서 전도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웃 사람들에게 김치를 해 주면서 전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삿짐을 날라 주면서 전도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노인들의 말동무가 되어주고 집안청소를 해 주면서 전도합니다.
이렇게 전도에 힘쓰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주시는 약속의 말씀이 있습니다.
디모데후서 4:8절입니다.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도니라" 전도에 일생을 바쳤던 사도바울은 그런 자신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의의 면류관을 예비하고 기다리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의의 면류관은 자신에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같이 전도에 힘쓰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예비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서 12:3절입니다.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사람들에게 전도해서 그 사람들로 하여금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한 자들을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늘의 별과 같이 천국에서 영원토록 영광스러운 빛을 발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전도하는 사람들이 받게 되는 영광입니다.
우리들도 전도에 힘써서 하나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주시는 이런 은혜와 영광들을 다 받아 누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는 청지기로 무엇을 관리하며 살아야 합니까?
다섯째, 우리는 하나님이 주신 우리 몸을 잘 관리하며 살아야 하는 청지기입니다.
우리 몸은 하나님께 받은 몸이며 또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몸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받은 우리 몸을 성경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시는 성령의 전이라고 하십니다. 고린도전서 6:19-20절입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가 우리 몸에 대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한다고 합니까?
우리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말은 우리의 몸일지라도 우리가 마음대로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 계시는 성령 하나님의 인도를 따라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1:20-21절입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바울은 자신의 몸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므로, 살든지 죽든지 상관 없이 오직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다는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온전하게 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시기 위해서 우리에게 직분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중에는 목사의 직분도 있고, 장로의 직분도 있고, 권사의 직분도 있고, 집사의 직분도 있습니다. 이렇게 직분을 받은 우리들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합니까? 고린도전서 4:1-2절입니다.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분을 맡은 우리들은 직분을 맡았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직분을 맡은 자답게 충성해야 한다고 합니다. 맡은 자에게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은 충성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 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일군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의 몸을 가지고 누구를 위해 살아야 합니까?
우리에게 몸을 주신 하나님을 위해서, 우리 죽을 몸을 구원해 주신 예수님을 위해서, 우리 몸 안에 내주하시면서 인도해 주시는 성령 하나님을 위해 살아야 합니다. 또 예수님께서 피로 값 주고 사신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우리에게 명령하신 복음 전도를 위해서, 우리 몸을 사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삶이 바로 청지기로 살아가는 삶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청지기입니다. 오늘 살펴본 바에 의하면 우리들은 어떤 청지기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시간의 청지기, 재능의 청지기, 복음의 청지기, 재물의 청지기, 몸의 청지기, 직분의 청지기들입니다.
우리는 나의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내게 은혜로 주신 것이며, 나는 하나님의 청지기로 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것을 늘 기억하고, 칭찬받는 청지기로 살아가기를 결단하고, 성실하게 충성하며 살아가는 이 한 주간의 삶이 될 수 있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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