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변화와 삶의 결단
시편 145:18-20 146:1-5
성경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까?
로마서 10:17절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을 듣게 될 때, 그 말씀이 증거하고 있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기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고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불경을 아무리 잃고 들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생겨나지 않고, 코란을 아무리 암송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생겨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오직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생겨납니다.
여러분은 모두 큰 믿음, 견고한 믿음 가지길 원하시겠지요?
그러려면 하나님이 주신 성경말씀을 많이 읽고, 많이 듣고, 많이 배워야 합니다. 왜요.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배울 때 믿음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성경이 증거하고 계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5:3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을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신약성경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약성경의 중심적인 주제 또한 예수님이십니다. 신약성경은 초림의 주로 오신 예수님을 전해주고 있으면서 또 재림의 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신구약 성경이 전해주고 있는 중심 메시지는 바로 우리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공부할 때 예수님을 믿는 믿음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성경 말씀을 읽고 들을 때에는 성령의 조명을 받아서 읽고 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2:3절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이 말씀에 의하면 그 누구라도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이는 예수님을 구주로 주님으로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면 성령은 어떤 분이십니까?
성령은 삼위일체 하나님 중 한분이시며 영으로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이 성령의 가르치심을 받고 살려면, 먼저는 아담 안에서 죽었던 우리의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을 성경은 거듭남 혹은 중생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두 번 태어나는 것입니다.
첫째는 육신의 부모로부터 육체를 가진 한 사람으로 태어납니다.
둘째는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을 통해 영에 속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납니다.
이 두 번의 태어남을 통해 비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자녀의 신분으로 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는 어떤 삶의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까?
우리는 시편 145편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에게서 일어나는 변화를 살펴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까?
첫째,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을 찬양하고 선포하게 된다고 합니다.
145:4절입니다.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리로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죄인으로 태어나게 됩니다. 그 이유는 우리 조상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범죄했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해서 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 기쁨이 있고 찬양이 있겠습니까?
물론 사형수들에게도 나름대로의 기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사형수도 사랑하는 가족의 애정이 가득담긴 편지를 받을 때는 기쁠 수 있습니다. 또 비록 감옥 생활이지만 자신을 배려해 주는 동료가 있고 교도관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로 인해 기쁨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 가족이 모두 다 평안하게 잘 있다는 소식은 기쁨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쁨들은 일시적인 기쁨입니다.
현실로 돌아오면 곧 바로 자신이 사형수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고 기쁨은 상실하게 될 것입니다.
아담의 후손으로 태어난 사람들이 바로 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아담 안에서 이미 사형 선고를 받고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사형이 집행 되는 날을 기다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예외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예수를 믿는 성도들에게는 찬양이 있고 기쁨이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내가 받아야 할 그 모든 죄를 대신 지시고, 내 대신 십자가에서 형벌을 다 받아 주신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 안에서 죄의 문제가 다 해결되었고, 죄가 다 처리된 의인의 신분으로 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죄 사함을 받은 기쁨, 죄의 형벌에서 구원함을 받은 기쁨을 가지고, 예수님을 찬양하면서, 예수님이 행해 주신 일들을 세상에 전하며 사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전에는 마귀의 자녀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사형수였는데, 이제는 무죄한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였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복을 받은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죽음에 매여 절망하며 살았는데, 이제는 생명 안에서 영생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원수지간이었는데 이제는 하나님과 화목을 이룬 자가 되었습니다.
어디 이것뿐이겠습니까?
이 외에도 수를 셀 수 없는 은혜들을 하나님께서는 예수를 믿는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이 모든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우리 구주가 되시는 예수님을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4절의 말씀과 같이 ‘대대로 주께서 행하시는 일을 크게 찬양하며 주의 능한 일을 선포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까?
둘째,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게 되고, 기도응답을 경험하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18-19절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에게 간구하는 모든 자 곧 진실하게 간구하는 모든 자에게 가까이 하시는 도다.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하나님이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줄 것이라는 이 약속보다 우리에게 더 큰 힘이 되고 더 큰 위로가 되는 말씀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믿음의 기도를 드리면, 하나님은 이런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고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이 약속의 말씀을 믿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기도 했겠습니까?
그리고 약속하신 대로 기도를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왔겠습니까?
누가복음 11:1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이 직접 기도 응답을 약속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열린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이렇게 기도응답에 대한 확실한 말씀을 주셨는데도 기도응답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한 비유의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이 세상의 아버지들도 그 사랑하는 아들이 구하는 것을 할 수만 있으면 다 해 주고자 한다. 하물며 하늘에 계신 전능하신 너희 아버지께서 그 사랑하는 아들이 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겠느냐?”
이보다 더 확실한 기도 응답에 대한 말씀이 있겠습니까?
이런 말씀들을 들을 때 우리는 마음으로 어떤 각오와 결단을 하게 됩니까?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신다고 이렇게 분명하게 약속하시고 계시니, 나도 이제부터는 늘 기도하면서 살아야지,’ 라고 하는 각오와 결단을 하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기도응답을 약속해 주고 계신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고 기도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그 삶 속에 하나님이 주시는 기도응답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기도생활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반드시 응답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믿음의 기도가 하나님의 손길을 움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믿고 기도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가 지지난 주에 살펴본 히브리서 11장의 말씀에 따르면, 기도응답에 대한 실상을 가지고 기도하라는 말씀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를 아주 사소한 일로 생각하고, 별 효과도 없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기도에는 엄청난 힘이 있고 놀라운 역사가 따르게 됩니다. 기도는 절망적인 중병도 고치게 하고, 불가능한 일도 가능하게 하며, 심지어 죽었던 자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 기도를 듣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이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에는 아무 능력이 없지만 우리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은 능력이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실적으로 보면 전혀 불가능할 것 같은 문제를 가지고도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가진 고질적인 문제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슨 일이 일어나면 기도하기보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라면 이렇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행동보다 기도가 우선되어야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까? 우리는 늘 기도하며 사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우리의 거룩한 습관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이런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가장 먼저 나는 지금부터 기도하며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늘 깨어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들만이 자신의 기도에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경험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들은 그 자식이 잘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잘 되기를 바라고 계십니다. 또 부모들은 그 자녀들의 요구와 필요를 채워주는 삶을 삽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도 우리가 필요해서 구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너희 필요를 기도로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우리가 믿음으로 이 말씀에 순종하여 기도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예비하신 좋은 것들을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될 수 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우연히 좋은 일이 그 삶 속에 일어났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도하는 사람들은 다릅니다. 그 모든 일들이 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이고,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심으로 된 일임을 믿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기도하면 응답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기도생활에 헌신함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려고 예비하신 은혜와 복들을 다 받아 누리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멘.
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될 때 어떤 변화가 일어난다고 합니까?
셋째 사랑으로 보호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20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의 가장 큰 차이점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가 부모 앞에 당당하게 나아가듯이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나아간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중에 오늘 교회에 올 때 두려워 떨면서 나온 사람이 있습니까? 그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지요.
그런데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하지 못합니다.
이 사람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무서워합니다. 그래서 교회 나오는 것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구원 밖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두려워합니다. 믿음을 가지기 전에 가졌던 루터의 두려움이 바로 이런 두려움이었으며, 어거스틴이 가졌던 두려움이 바로 이런 두려움이었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들과 믿음이 없는 사람들의 차이를 20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그 사랑의 대상이 된 자녀들은 보호해 주시고 승리하는 삶을 주시지만, 하나님은 그 심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람들은 멸하시는 분이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멘.
또 시편 1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 복 있는 사람들은 시냇가에 심겨진 나무와 같으나, 하나님 밖에 있는 악인들은 마치 바람에 나는 겨와 같다.’고 합니다.
또 시편 23편을 보면 하나님을 자신의 인생의 목자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푸른 초장과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으며 산다고 합니다.’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내게 되더라도 결국 원수의 목전에서 잔치 상을 받게 되는 승리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의 부모가 되셔서 은혜를 주시고, 우리의 목자가 되셔서 우리들을 늘 인도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런 은혜 충만한 삶에 대해 시편 146:5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아멘. 이왕 우리가 예수를 믿는 신앙을 가졌다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이런 신앙 즉 하나님을 자기 도움으로 삼으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는 신앙을 가지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잠시 잠깐의 삶을 보면, 현실 속에서는 악인들이 더 잘되는 것 같고 권모술수에 능한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아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이 세상을 주권적인 섭리로 다스리시는 하나님, 결국 선악 간에 공평하게 보상해 주시는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약 하나님의 보상이 이 땅에서 주어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천국에서 그 보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1:23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바울은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 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며......’라고 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평생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었습니다. 바울은 그 믿음의 수고와 헌신에 대한 보상을 이 세상 속에서는 전혀 받지 못하고 산 것 같습니다.
이런 바울이 그 인생의 끝 날에 무엇이라고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디모데후서 4:6절 이하입니다.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사도바울은 죽음 이후에 주시는 하나님의 보상을 확신하며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이 믿음 이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사는 믿음의 보상을 비록 이 땅에서 받지 못하더라도, 하늘나라에서는 반드시 받게 될 것이라는 이 믿음, 이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이 내게 맡겨주신 일에 충성하고 헌신하며 살겠다는 각오와 결단을 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믿음 안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변화가 무엇입니까?
첫째, 나를 위한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들을 찬양하고 선포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 기도하며 살게 되고 기도응답을 경험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사랑으로 보호해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믿음 안에서 이런 변화를 경험한 우리들이라면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합니다.
이제 남은 시간 동안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변화를 경험한 사람들이, 어떤 각오와 어떤 결단을 하고 살아야 하는 지를 이어지는 시편 146편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살아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첫째는 우리는 늘 하나님을 바라보고 그 베풀어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살아야 합니다.
시편 146:1-2절입니다.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성도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들이 발을 딛고 살아야 하는 곳은 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 세상으로 세상으로 빠져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런 우리들의 모습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요한 1서 2:15절에서 이런 경계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너희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우리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계속 누리고 살려면, 먼저는 나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내 맡기는 믿음의 위탁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않겠다는 각오와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실 이 세상이 따르며 사는 신은 사단 마귀입니다.
이 세상의 정치, 문화, 사회의 배후에는 사단 마귀의 원리와 가치관이 지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세상을 죄와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곳, 그래서 결국 하나님이 심판하실 곳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도들은 이런 세상을 사랑해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사실 죄는 죄 아래 팔려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달콤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죄를 즐기고 죄악 된 삶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자신의 행동이 잘못 되었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그것이 주는 기쁨과 즐거움을 극복하지 못하고 계속 죄악 된 삶에 머물러 사는 것입니다.
시험기간이 다가오면 부모는 자녀에게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열심히 공부해라.’라고 합니다. 그러나 부모가 집을 비우면 자녀는 어떻게 합니까? 지금은 시험기간이라는 것도 잊고 아무도 보지 않으니 즐거움을 주는 게임에 빠져 하루 종일 게임만 합니다. 학생이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렇게 할까요? 아닙니다. 자신이 죄인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죄는 사람의 말초신경을 자극하여 짜릿함과 달콤함을 줍니다.
그러나 그런 삶에 머무르게 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러야 합니다. 그 대가가 무엇이겠습니까? 학교성적이 아주 엉망으로 나오는 것이 바로 그 대가입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죄를 지으며 사는 대가가 사망이라고 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니라.’라고 아주 분명하게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죄에는 이렇게 반드시 그 대가가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죄악 된 세상 속에 계속 살 수 있는 것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들 역시도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예수님처럼 거룩하게 변화된다면 우리는 죄악 된 세상에 더 이상 머물러 살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물고기가 오염된 물속에서 살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어도 우리는 아직 죄인이기 때문에 예수를 믿은 후에도 이 세상 속에서 죄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우리들이 믿음으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갈 때 반드시 해야 될 일이 무엇입니까?
이 세상을 사랑하던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삶으로 바꾸어 나가야 합니다.
세상 것을 의지하며 살던 삶을 버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는 삶으로 변화시켜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은 매일 매일 이 세상을 떠나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믿음의 결단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곧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받은 사람들이라면 가장 먼저 해야 될 일은, 이 세상 친구들에게서 떠나서 하나님을 믿는 친구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은 어떻게 이방나라 바벨론에서 믿음으로 살 수 있었습니까?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따라 살기로 뜻을 정한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믿음의 친구를 가지고 동역 자를 가지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또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살아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둘째, 자신과 그 살아가야 하는 삶을 완전히 하나님께 맡기고 사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3-4절입니다. ‘귀인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의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그 날에 그의 생각이 소멸되리라.’
믿음을 가진 사람들은 자신과 그 삶을 하나님 아닌 다른 것에 맡겨서는 안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부자청년은 영생을 얻고 싶어서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그런데 자신과 그 삶을 예수님께 완전히 맡기지 못하고, 그 의지하며 살아온 돈에 자신을 맡겼습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부자청년을 보고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부자는 그 눈에 보이는 돈을 믿고 의지하며 살기가 쉽지,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사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자라고 다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는 다 하실 수 있다.’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부자였던 루디아도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부자였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도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부자였던 요셉과 니고데모도 천국에 들어갔습니다. 기독교 역사를 보면 부자이면서도 천국에 들어간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부자청년도 돈을 믿고 의지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고 의지하였더라면 천국에 들어갔을 것입니다. 문제는 부자가 재물이 아닌 하나님께 전적인 위탁을 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데 있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의지해야 합니까?
성경은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만약 신랑과 신부가 상대방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믿고 의지하고 있다면 이런 부부를 온전한 부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해서 결혼한 부부들이 왜 싸웁니까?
그것은 서로를 믿고 서로 의탁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부부는 늘 서로를 불신하기 때문에 다툼과 싸움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이런 가정에는 죄가 개입되기 쉽고 유혹이 개입되기 쉽습니다. 그래서 이런 가정들은 쉽게 깨어지는 것입니다.
부부가 서로를 믿고 전적으로 의탁하는 가정에서는 다툼과 싸움이 잘 일어나지 않습니다.
행복한 부부가 누구입니까? 자기주장이 강한 부부입니까? 아닙니다. 서로를 인정해 주고 서로 자신을 내어 맡기고 의지하며 사는 부부입니다. 이런 부부는 둘이 아니라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서로 협력하며 살아가는 부부가 됩니다.
예수님과 우리의 관계도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 있을 때 행복할 수 있으며 그 주시는 믿음의 복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예수님 밖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리 많은 약속들이 있어도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성경이 약속하고 있는 복을 누리고 살려면 예수님 안에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사람들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전적으로 맡기는 위탁의 결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맡기고 사는 삶에 대한 한 예화가 있습니다.
한 어린 아이가 친구들과 나무 타기 놀이를 하다가 그만 자기도 몰래 높은 나무 가지에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친구들과 경쟁을 하느라 이 아이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아주 높은 가지에까지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그 나무 가지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얼마나 무서웠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울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 아이의 아버지가 나무 아래에서 아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들아 아빠 믿지, 그만 울고 나를 믿고 뛰어 내려라, 내가 너를 안전하게 받아 줄게?” 이 때 이 아이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아버지를 믿고 뛰어 내리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아버지를 믿지 못하겠기에 뛰어내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고 자기를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아들은, 아버지를 믿고 눈을 감고서라도 아버지를 향해 뛰어 내립니다.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성경에 약속해 주신 말씀들을 믿고 순종하여 살게 됩니다.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이 바로 이렇게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예수를 믿는 우리들이 믿음으로 결단하고 살아야 할 삶은 어떤 삶입니까?.
셋째, 하나님을 믿고 오직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겠다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
5절입니다.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삶에 가장 큰 도움이 어디서 온다고 생각합니까?
여러분은 그 살아가는 삶의 소망을 어디에 두고 살고 있습니까? 우리가 바른 믿음을 가진 성도라면 나의 삶에 최고의 도움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며, 나의 궁극적인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사는 사람들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다.”고 합니다.
노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지 않는 사람들은 아브라함과 노아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 수가 없습니다. 또 다른 성경 말씀을 보면, “에녹은 육십 오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사는 사람들만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 수 있고 하나님과 동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사업을 하는 사람들 중에 동업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동업은 마음과 뜻이 같을 때만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동업이 어렵다고 하는 것입니다. 목회를 하면서 보아도 가장 어려운 것은 나와 마음과 뜻과 같이 하여 줄 사람이 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마음과 뜻을 같이 했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들을 가나안으로 인도했던 갈렙입니다. 갈렙은 여호수아와 견줄만한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갈렙은 자신을 나타내지 않았고 여호수아의 사역에 평생 협력자와 조력자로 살았습니다. 갈렙은 정말 아름다운 동역 자였습니다.
또 아브라함과 함께 여호와 하나님을 믿고 살았던 사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과 부부사이이면서도 아브라함을 그의 삶의 주인으로 섬기며 순종하는 삶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베드로전서 3:6절입니다.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순종한 것 같이 너희는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하면 그의 땅이 된 것이니라.’ 사라는 정말 아브라함에게 아름다운 인생의 동반 자였습니다.
인생의 참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을 인정해 주고 동역 자가 되어 주는데 있습니다.
신앙의 참 아름다움은 하나님을 그 삶의 중심에 두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삶에 달려 있습니다.
오늘 이 주일 아침에 함께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 우리들이 가진 신앙은, 사람이 중심이 되어 살아가는 인본주의 신앙을 극복하고, 철저히 하나님을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신본주의적인 신앙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누가 왕좌를 차지하고 앉아 있습니까?
하나님이십니까? 혹 우리의 자아입니까? 우리 마음의 왕좌에 누가 않아 있느냐? 하는 것에 따라서 우리의 삶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이제 새롭게 시작 된 2021년도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마음의 왕좌에 하나님을 앉히고,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우리에게 주어진 또 한 해의 삶을 살아가겠다는, 믿음의 결단이 있어지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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