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서

구원해 주시는 은혜

하나님은 빛이시다 2019. 7. 15. 08:01


구원해 주시는 은혜

시편 91:14-16

 

어떤 새 한마리가 그 둥지를 썩은 나무 가지 위에 짓고 있었습니다.

이를 지켜보고 있던 한 농부는 그 새가 짓고 있던 둥지를 헐어 버렸습니다. 그 새는 다음 날 그 나무의 다른 가지 위에 둥지를 지었습니다. 하지만 농부는 그것도 헐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새는 마침내 다른 안전한 나뭇가지로 옮겨가서 둥지를 지었습니다. 그것을 본 농부는 빙그레 웃으며 새가 둥지를 짓도록 놓아두었습니다.

 

이 때 새는 농부가 왜 힘들여 지은 둥지를 헐어버리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는 압니다. 그 썩은 나무 가지에 둥지를 지으면 그 새와 장차 태어나게 될 그 새의 새끼들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농부는 새가 안전한 나무 가지 위에 둥지를 지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썩은 나뭇가지 위에 지은 둥지들을 헐어버렸던 것입니다.

 

사람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때때로 어려움을 만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물질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고, 요즘은 건강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새의 입장에서 보면 농부가 왜 힘들게 지은 둥지를 헐어버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의 입장에서 보면 다릅니다. 농부는 그 새와 앞으로 태어날 새끼 새의 안전을 생각해서 썩은 나무 위에 지은 둥지를 헐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다가오는 어려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이 우리 삶에 다가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다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어려움들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보면 그렇게 해야만 하신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예를 구약성경에 나오는 욥의 삶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욥은 자신의 삶에 다가온 다중적인 고난 때문에 견디기 힘든 극한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욥은 어떻게 그 삶에 찾아온 이런 고난들을 극복하게 됩니까? 자신의 삶 속에 왜 그런 고난이 왔는지 이유를 몰라 고민하는 욥에게 하신 하나님의 질문을 통해서입니다.

 

욥기 38장을 보면 하나님은 욥에게 이런 질문을 합니다.

그 질문은 피조물인 욥은 전혀 알 수 없는 것이며, 오직 창조주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것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욥에게 이 세상 창조와 주권적인 섭리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에 대해 물었습니다. 예를 들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너는 어디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해 네가 알거나 깨달은 것이 있으면 말해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네가... 아침에게 명령하였느냐? 네가 새벽에게 그 자리를 일러 주었느냐? 네가 홍수를 위하여 물길을 터 주었으며, 우레와 번개의 길을 내 주었느냐?’라고 물으셨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질문을 들으면서 욥이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물으시는 그 모든 질문들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 살아가고, 또 유한한 생애를 살아가는 피조물인 자신은 전혀 알 수도 없는 문제, 전혀 대답할 수도 없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일들은 시간과 공관을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만이 알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욥은 이 하나님의 질문을 듣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 중에는, 사람들이 이해하고 해석하고 깨달을 수 있는 일들이 있는가 하면, 사람들은 전혀 알 수 없는 일 즉 하나님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들이 또 있다는 것입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이 당하고 있는 고난이라는 것입니다. 자신은 죄를 짓거나 범죄하지 않았는데 마치 죄인처럼 고난을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자신이 알 수 없는 일들에 대해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을 들으면서, 시간과 공간의 제한 속에서 살고, 또 유한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이 볼 때에는, 자신에게 왜 그런 고난이 왔는지 그 이유도 그 원인도 전혀 알 수 없지만, 자기보다 더 지혜가 크시고, 또 이 세상의 창조주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편에서 보면, 자신에게 그런 애매한 고난을 주실 수 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욥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런 깨달음을 갖게 되자, 이제까지 자신의 삶에 찾아온 고난의 문제를 가지고 친구들과 무지한 논쟁을 해 온 자신이 너무 부끄러워졌습니다. 그래서 욥은 더 이상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되지 않겠다.”고 하면서 회개하게 됩니다.

이 깨달음과 이 회개가 욥이 그 당하고 있는 고난을 극복하고 다시 하나님의 은혜로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서 빌리그래함 목사님은혜의 시작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과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악 됨을 보는데서 시작된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되는 시작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는 것과, 그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으로 자신의 죄악을 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우리 삶에 어려움이 올 때 우리들은 욥과 같이 믿음의 눈을 들어서, 우리를 사랑하시고 계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으면 그 사랑하는 독생 성자 예수님을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내어주신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현실의 어려움만 바라보지 않고, 현실의 어려움을 바라보던 눈을 들어서, 우리에게 다가온 그 어려움까지 다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믿고 바라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되는 믿음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어려움을 당하면 당할수록 이전보다 더 간절하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로 한걸음씩 한 걸음씩 가까이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있는 사람들의 중요한 삶의 특징입니다.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시편 91편의 말씀은, 우리가 이렇게 인생을 살아가다가 어려움을 만나고, 힘든 일을 만나게 되었을 때,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고, 우리를 구워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1절에서 13절까지 말씀하고 있습니다.

 

1절 말씀을 보면 성도들은 어떤 사람들이라고 합니까?

성도들은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는 자이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서 사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지존자의 은밀한 곳, 전능자의 그늘 아내에서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에 대해 2절 이하에서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2/ 하나님은 피난처와 요새와 같이 우리가 의뢰할 수 있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이시라.’

3/ 하나님은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져주시는 분이라고 합니다.

그가 너를 새 사냥꾼의 올무에서와 심한 전염병에서 건지실 것임이로다.’

4/ 하나님은 그의 날개깃으로 우리를 덮어주시고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신다고 합니다.

그가 너를 그의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의 날개 아래에 피하리로다.’

그러면서 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밤의 공포와 낮에 날아오는 화살과 전염별과 각종 재앙에서 지켜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래서 수천 명 혹은 수만 명이 내 옆에서 엎드러질지라도, 그 재앙이 내게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면서 악인들에게는 재앙이 임하나 나는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와 거처로 삼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들에게 명령하사 지켜 주실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베풀어주시는 은혜의 역사에 대해 말씀하고 난 후, 14절 이하의 말씀에서는, 성도들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사는 이유와 조건에 대해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살게 되는 조건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들을 누리며 살게 된다고 합니다.

 

14절 앞부분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이 시편 91편이 우리들에게 하고 있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이 시편은 우리들에게 너희는 무엇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늘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 속에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이 세상의 그 무엇보다 더 사랑하며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베풀어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게 되는 방법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어떤 대상을 사랑하게 되면 나타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변화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마음속에 우리가 사랑하는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생각이 넘쳐나고, 선한생각이 넘쳐흐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나의 형편과 처지를 넘어서는 값비싼 물건도 선물로 사주는 것입니다. 값비싼 물건을 사서 선물 하고서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사랑은 우리의 마음 안에 아낌없이 주고서도 또 더 주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다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도, 이와 같은 마음이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신앙생활 하는 모습이 남다릅니다. 그러면 어떤 면에서 남다를까요?

 

먼저는 헌금하는 모습이 남다릅니다.

중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헌금을 할 때 즉흥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집에서 나올 때 이미 정성스럽게 헌금을 준비해 가지고 와서 하나님을 향한 내 마음과 믿음과 사랑을 담아 헌금을 드립니다.

이것 뿐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가 특별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늘 예배를 사모합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방금 예배를 드리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저녁에 또 가정에서 가정 예배를 드리기도 합니다. 또 교회에서 정한 예배 시간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홀로 있는 시간에 하나님께 찬양을 올려 드리기도 합니다.

또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하루 몇 번 예배를 드려도 예배를 부담으로 느끼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예배를 드려도 남다르게 드리고, 헌금을 해도 남다르게 하고, 기도를 해도 남다르게 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쳐서 이렇게 남다른 섬김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과거에 우리 조상들은 시대변화를 읽지 못하고, 당파싸움만 하다가 나라를 일본에 빼앗긴 일이 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이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했습니까? 빼앗겨 버린 조선이라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 일본 사람들이 알게 되면, 곧 바로 순사에게 잡혀 가서 고문을 당하거나 삶의 불이익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남녀의 사랑에 빗대어서 표현하기도 하고, 또 꽃을 사랑하는 마음에 담아 표현하기도 하고,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에 담아 표현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무리 일본 정부가 억압을 해도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은 다양한 방법을 통해 드러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신앙생활을 통해서, 가정생활을 통해서, 직장생활을 통해서 드러나게 됩니다.

이것은 우리들의 삶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으면, 그 사랑은 우리의 말과 우리의 행동과 우리의 태도를 통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때 더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뜻을 다해, 정성을 다해, 삶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때, 하나님도 우리를 그렇게 사랑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아멘.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할 때,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분이심을 우리는 어떻게 압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주신 말씀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나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고, 나를 경멸이 여기는 자를 내가 경멸이 여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또 다른 곳에서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입을 것이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말씀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는 만큼 하나님도 우리를 사랑해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존중히 대하는 만큼 하나님도 그렇게 우리를 대우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도 더 사랑하므로 하나님의 남다른 사랑을 받고 살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가지 더 알고 있어야 할 것은, 사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조건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사랑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은 어떤 면에서는 짝사랑과 같은 사랑입니다.

로마서를 보면 하나님은, 우리가 연약하고, 경건치 않을 때, 죄인이 되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을 때,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아무런 자격이 없을 때,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그 크신 사랑을 십자가에서 먼저 보여주셨다고 하십니다.

또 요한 1서의 말씀을 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아무런 이유도 조건도 없이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다.’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을 반역하고, 하나님의 복음의 원수로 살고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우리들을 위해, 일방적인 사랑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을 짝사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 하나님의 사랑을 믿지 못하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지도 않고 있고, 오히려 아들의 생명을 주시면서 자신을 사랑해 주신 하나님을 대적하고 거절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여전히 죄인들을 짝사랑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예수를 믿는 우리들은 누구입니까?

이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알고, 믿고, 응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 우리들을 향해 시편 91: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여러분은 지금 무슨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까?

무슨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습니까? 자신의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무슨 문제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러나 염려하지 마십시오. 사람이 해결 할 수 없는 문제라도 우리 하나님은 해결해 주실 수 있으십니다.

- 물론 우리가 어려움을 당할 때, 우리의 가까운 친구나, 친척 가운데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들을 통해 우리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에게 이렇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친구나 친척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한 사람도 없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 그리고 또 어떤 문제들은 사람이 아무리 도와주려고 해도 도와 줄 수 없는 문제들도 있습니다. 이 때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못 도와주시고, 못 해결해 주실 문제가 없으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방법을 동원하여 우리를 도우실지는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도울 능력이 충분히 있으신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가 나를 사랑한 즉 내가 그를 건지리라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도울 때 어떤 사람들을 돕습니까?

사랑이 가고 애정이 가는 사람들을 도와주지 않습니까? 미운 짓만 하고 있는 사람, 늘 나의 험담만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아무리 그 형편이 어렵다고 하면서 도와달라고 애원해도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은 도와주기는 고사하고 내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하며 고소해 하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 하나님께서도 그러신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에, 부모가 자기를 닮게 태어난 자녀를 사랑하듯이 모든 인류를 다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모든 인류가 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십자가에서 인류의 죄를 다 사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이시라도,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 하나님과 특별한 사랑의 관계에 있는 사람들에게 더 큰 애정을 가지고 계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성경 속에서 수도 없이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증거들을 종합해 볼 때 우리는 이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구원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힘이고 능력이다.

-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나의 자랑이고 나의 영광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말씀을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우리가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다면 그런 우리는 결코 망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다른 사람들보다 더 많이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더 크신 은혜를 입고 사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결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나는 그 누구보다도 더 하나님을 사랑하리라.

- 나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에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으리라.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삶이, 하루아침의 결심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보고, 늘 기도하고, 늘 예배드리고, 경건의 훈련을 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과의 깊은 사랑의 관계 속에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참빛교회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성공적인 인생을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방법을 배우십시오. 그리고 구체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사십시오, 이것이 성공적인 인생을 사는 비결이고 지혜로운 성도로 살아가는 지혜입니다. 이 말씀을 전한 저나 이 말씀을 듣고 있는 우리 모두는 누구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생의 삶 속에서 늘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을 경험하며 살 수 있게 되시길 바랍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사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4절 하반 절입니다. 그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그를 높이리라

사람들에게는 다 이름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이름은 무엇입니까? 이름은 그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그 사람을 지시해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할 때 그 의미는, 그 이름으로 불리고 계신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기드온이 그가 경험한 하나님을 여호와 샬롬 이라고 불렀는데, 이 말씀은 기드온이 전에는 하나님을 알되 두려우신 하나님으로 알았는데, 그 하나님을 직접 만나 뵙고 보니 평강을 주시는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이 만난 하나님의 이름을 여호와 샬롬이라고 부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고 할 때 또 하나 더 알아야 할 것은, 여기서 안다라고 하는 단어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지식적으로 안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지식적으로 아는 것을 가지고 안다. 라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안다.’ 라는 말씀을 쓸 때에는 체험하고 경험하여서 아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보면 종종 사람들이,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 ‘나는 하나님을 믿고 있다.’라고 말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하시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이 차이가 바로 안다라고 하는 의미의 차이에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있는 것을 가지고 나는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과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안다고 아시기 때문에 이런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바리새인들입니다.

바리새인들은 나는 조상들로부터 하나님에 대해 배웠고,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있고, 또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통해서 나는 하나님을 철저히 섬기고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바리새인들에게 나는 너희를 알지 못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은 바리새인들이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경험한 일이 없고, 개인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한 일도 없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바리새인은 지식적으로는 하나님을 알고 있었고, 하나님이 주신 율법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이 하나님을 만나거나 하나님을 실재로 그 삶 속에서 경험하며 살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런 바리새인들을 보고 나는 너희들을 알지 못한다.‘ 라고 하신 것입니다.

 

시편 91:14절 말씀에서 그가 내 이름을 안즉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안다라는 이 말씀은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매 라는 말에 사용된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안다는 이 말은, 남녀가 하루 밤을 함께 지내면서 서로가 서로를 속속들이 다 경험해서 아는 것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내 이름을 안즉이라는 이 말은, 우리가 하나님을 경험하고 체험하여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잘 알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렇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 아들 독자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드릴 때, 하나님의 진짜 요구는 이삭을 진짜 번제로 바치게 하는 것에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얼마나 믿고, 어디까지 그 하시는 말씀에 순종하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각을 뜨려고 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이런 행동을 제제하시면서 수풀에 예비해 두신 수양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여호와 이래의 하나님, 즉 앞서 행하시며 준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경험하여 알게 된 것입니다.

 

또 사라의 몸종으로 있다가 아브라함의 후처가 된 하갈도 하나님을 경험하였습니다.

하갈은 자기가 아브라함의 자녀를 임신한 것을 알고 그 여주인인 사라를 멸시하다가, 사라의 학대를 견디어 내지 못하고 그 집에서 도망쳐 나왔습니다. 이 때 하갈은 술길 샘물 곁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이 때 하갈은 그가 만난 하나님에 대해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고백하였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갈은 늘 자기를 보살펴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하나님을 만나셨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고, 또 그렇게 만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면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나고 경험하여서 그 하나님의 이름을 알까요?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그 삶에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그 삶에서 경험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보는 시편 91편의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들을 높여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을 어떻게 경험하여 알게 됩니까? 우리는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의 경험하기도 하고, 기도를 할 때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혹은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면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하나님을 경험하며 살 수 있도록, 늘 하나님을 예배하고, 늘 기도하고, 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면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바리새인들과 같이 형식적이 되지 않고, 실재적인 관계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들의 신앙을 인정해 주시고, 이런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풀어주시고, 이런 사람들을 높여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늘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누리며 살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 하나님의 높여주심을 경험하면서 사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사는 방법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셋째, 늘 기도생활을 하며 살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15절 앞부분입니다. 그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그에게 응답하리라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간구와 기도의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기도와 간구의 다른 점은 기도는 한 번 기도한 것도 기도입니다. 그러나 간구는 늘 기도생활을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구원해 주시는 은혜를 입고 사는 방법이 다양하겠지만, 오늘 이 말씀은 늘 기도하며 사는 사람들의 기도에 응답함으로 구원해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처럼 우리는 기도생활을 통해서,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하심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성도들이, 가장 하기 힘든 일 중 하나가 바로 기도라는 것입니다.

- 과거에 전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때는 저녁만 먹으면 날이 어두워지기 때문에 밖에서 활동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두 태양이 뜨고 지는 것에 맞추어 생활하였습니다. 그래서 너나 할 것 없이 모든 사람들이 일찍 집으로 귀가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시에는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저녁 시간이 참 길었습니다. 이 긴 저녁시간을 이용하여, 가족과 대화도 하고, 또 함께 예배도 드리고 기도도 할 수 있었습니다.

- 그런데 오늘날은 12시를 넘기고 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만드시고, 자연을 만드실 때, 왜 해가 일찍 뜨고 또 일찍 지게 하셨겠습니까? 그 이유는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게 하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연구에 의하면 아이들의 키는 저녁 10시부터 새벽 2시 사이에 가장 많이 자란다고 합니다.

이 때 깊은 잠을 자는 사람들의 키가 잘 큰다는 것입니다. 10시에 깊은 잠을 자려면 최소한 9시 경에는 잠을 자야겠지요.

 

그러면 이렇게 일찍 자는 것은 키가 크는 시기에 있는 아이들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어른들도 같습니다. 어른들도 건강하게 살고 장수하면서 살려고 하면, 모두 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삶의 습관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주신 자연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서에 순응하여 살려고 하는 것도 바로 믿음입니다.

 

미국에서 온 어떤 교수님의 말을 들으니 보통의 미국사람들은 정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더라고 했습니다. 대다수의 미국사람들은 그 자녀들을 위해서 자신들도 자녀들이 잘 때 같이 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자는 시간이 9시를 넘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저녁 9시에 아직 직장에서 퇴근도 하지 않은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혹 퇴근을 했다고 해도 이렇게 살려면 저녁시간을 활용해서 하는 모든 일들을 포기하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중에는 12시를 넘겨서 자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가 아는 몇몇 목사님들에게 저녁 몇 시쯤에 잠자리에 드는지 물어본 일이 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이 12시 전후에 잠자리에 든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러면 새벽기도를 위해 일찍 일어나야하는데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부분이 낮에 존다고 하거나, 오전에 잠을 잔다는 분도 있었습니다.

 

저녁 12시가 넘은 시간에 밖에 나가보면 그 때까지도 자동차들이 대낮같이 많이 다닙니다.

그 시간에 인터넷 방에서는 밤을 새우는 사람들로 초만원을 이루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의 생활 패턴이 우리로 기도하기 힘들게 하는 것입니다.

 

정말 바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기도를 생활화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 우리가 기도의 끈을 잡고 있으면 하나님과 늘 가까이 하며 살 수 있고, 기도의 끈을 놓으면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아야 합니다.

- 우리가 기도의 끈을 잡고 있으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역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또 우리가 기도의 끈을 잡고 있으면, 우리에게 다가오는 환난과 어려움에서 우리를 건져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또 우리가 늘 기도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도 있고, 무병장수의 복을 받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구원하심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기도를 생활화 하며 사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를 생활화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를 생활화 하며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더 잘 알게 되고, 그 알게 된 하나님을 더 사랑하게 되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으며 살게 됩니다.

 

기도를 영혼의 호흡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호흡을 하지 않고 살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호흡을 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영혼의 호흡인 기도를 하지 않는 사람들의 신앙은 죽은 신앙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건강한 영혼을 소유하려면 기도를 생활화해야 합니다. 기도생활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기도생활에, 우리의 영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그 신앙이 다르고 그 생활이 다릅니다.

그리고 우리 하나님께서도 기도하는 사람과 기도하지 않는 사람을 완전히 다르게 대우하십니다. 성경을 보면 늘 기도하며 살았던 다윗을 존귀하게 여기시고, 기도하지 않고 살았던 사울 왕을 버리셨습니다.

우리는 기도를 생활화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기도를 생활화 할 때 우리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응답과, 환난에서 구원해 주시고 건져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누리며 살 수 있게 됩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이 불신의 세상 속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힘들고 어렵습니다. 그러나 힘들고 어렵다고 신앙생활을 그만두거나, 포기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내 한 사람도 믿음으로 살기도 힘든 세상에서, 어떻게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며 살 수 있습니까? 그것은 예수를 믿는 우리들을 도와주시려고 우리 안에 또는 이 세상에 임하여 계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이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살 수 있습니까?

오늘 시편 91편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첫째,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셋째, 늘 기도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알고,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삶을 살므로, 시편 91편을 통해 약속하고 있는 이런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복된 성도의 삶을 살 수 있게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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