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의 미를 거두는 신앙
욥기 8:7
이 세상에는 신이라고 불리는 것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신이 참 신이 되려고 하면 반드시 두 가지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이 세상을 창조한 창조주가 되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 아니고 다른 무엇에 의해 창조된 피조물은 참신이 될 수 없습니다. 둘째는 영원히 사시면서 역사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다 주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역사와 우주의 시작과 끝을 주관하지 못하는 존재는 참신 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고 섬기며 사는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이 세상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으로 알파와 오메가 즉 역사와 우주의 시작과 끝을 다 주관하고 계신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에 대해 요한계시록 22:13절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
하나님이 ‘알파와 오메가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말의 뜻은 무엇입니까?
그 시작도 중요하지만 그 끝도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보시고 판단하실 때에는 시작만 보시는 분이 아니시고 시작과 함께 그 과정과 그 끝을 다 함께 보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작도 좋아야 하지만 그 과정도 좋아야 하고 또 그 끝도 좋아야 합니다. 이런 믿음의 삶에 대해 히브리서 3:14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예한 자가 되리라.”
이렇게 볼 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성도는 어떤 사람들입니까?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이면 금상첨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많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최소한 어떤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합니까? 시작은 비록 좋지 않더라도 그 끝은 좋은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왜요. 이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인정하심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을 보면 어떻습니까?
드물게 그 시작도 좋고 끝도 좋았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시작은 좋았으나 그 끝이 좋지 않은 사람, 반대로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그 끝은 좋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시작도 좋지 않고 그 끝도 좋지 않은 최악의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물론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이 되면 가장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는 못하여서 비록 그 시작은 좋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 끝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복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벌써 2018년 한 해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이 때 우리는 지나가는 2018년을 믿음으로 잘 마무리 하고, 다가오는 2019년은 믿음 안에서 금년보다 더 나은 한 해가 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소원을 가지고 오늘 우리는 ‘끝이 좋은 신앙,’ 즉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신앙’에 대해 살피면서 은혜를 나누길 원합니다.
1.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들
성경을 보면 시작은 좋았으나 그 끝이 좋지 않은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사울 왕
그 대표적인 사람은 바로 사울왕일 것입니다.
그러면 사울 왕은 어떤 사람입니까? 사울은 아버지가 암나귀를 잃고 그 나귀를 찾아오라고 하자 한 사환을 데리고 그 지파 사람들이 사는 베냐민 땅을 물론 에브라임 산지와 살리사 땅으로 두루 다니며 찾았을 정도로 부모에게 순종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찾았는데도 암나귀를 찾을 수 없자 그는 자기를 보내 놓고 걱정하실 부모님을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을 정도로 부모님의 마음까지도 능히 헤아렸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갔던 그 사환이 이 인근에는 사무엘이라는 선지자가 있으니 그 선지자에게 물어보면 좋은 결과가 있을지 모른다는 말을 듣고 예물을 준비하고 사무엘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은 그 때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초대 왕을 삼으라는 계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정중하게 이 사실을 사울에게 알립니다. 이 때 사울은 “나는 이스라엘 지파 중 가장 작은 베냐민 지파 사람이 아니니이까? 또 나의 가족은 베냐민 지파 모든 가족 중에 가장 미약하지 아니하니이까? 그런데 당신이 어찌 내게 이같이 말씀하시니이까?” 라고 하며 겸손해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사울 왕이 기름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불량배들이 반대하며 저 샌님 같은 사울이 자기들의 왕이 되는 것을 싫어하고 멸시하였습니다. 사울은 이때도 겸손과 절제의 미덕을 보여주었습니다.
이 뿐이 아닙니다. 이 사울은 얼마나 키가 컸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어깨 윗부분이 더 있을 정도였다고 하며, 또 이 사울이 얼마나 잘생겼든지 성경은 그가 아주 “준수한 소년”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왕을 뽑으려고 할 때 사울보다 더 적격인 사람이 없어 보일 정도로 사울은 여러 가지 면에서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이렇게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었을 정도로 모든 조건을 구비하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사울이 나중에는 그를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게 됩니까?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은 신정국가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왕은 신의 대리자가 되어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하나님 대신해서 그 나라를 공의로 다스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세움을 받았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지 않고 자기 뜻대로 백성들에게 인기 있는 방법을 택하여 살았습니다.
이런 사울을 행해 사무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과 그 말씀을 버리고 백성들의 요구를 따라 살았습니다. 그러다 결국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패하여 처참하게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울은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그 시작은 좋았으나 그 끝이 나빴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우리가 이런 사울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아무리 그 인격이 온유하고 겸손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훌륭한 인격을 가진 사람이라도 믿음이 그 삶을 뒷받침해 주지 않으면 하나님께 인정받는 삶을 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사람들에게 인기 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는데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과 그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믿음으로 순종하여 사는 사람들의 삶을 인정해 주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엘리 제사장 겸 사사
또 그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 중에 엘리 제사장도 있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시대의 끝에 사사로 부르심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엘리 제사장도 보면 그 시작은 참 좋았던 사람입니다. 이 엘리는 제사장의 집안에서 태어나 평생 동안 백성들의 존경을 받는 제사장으로 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엘리 제사장을 인정하셔서 50이 넘은 나이에 이스라엘을 구원할 사사로 부르셨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사사로 부르심을 받아서 외적으로는 블레셋의 침입에서 그 백성들을 구하였고, 내적으로는 하나님께 냉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을 지도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해 나와서 백성들은 평화를 누리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엘리 제사장도 그 시작이 좋았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엘리 제사장도 그 끝은 비극으로 끝났던 불행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엘리 제사장이 불행하게 된 원인이 무엇입니까? 엘리 제사장에게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엘리는 이 두 아들에게 신앙교육을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엘리의 아들들은 엘리 제사장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제사장이 되었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였고, 또 여호와께 드리는 제사를 멸시하였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엘리의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아버지의 성공에 빌붙어서 그 혜택만 누리며 살려고 했던 불량배들이었다고 합니다.
이런 엘리 제사장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사자를 보내 경고하셨지만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다시 어린 사무엘에게 말씀을 주셔서 경고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나이 많아 노인이 되어 있던 엘리의 말을 그 자녀들은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엘리 제사장은 믿음이 없었던 아들들과 함께 비극적인 생애를 마감하게 됩니다.
우리가 이런 엘리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가진 신앙도 중요하지만 또 우리 자녀들에게 바른 신앙을 물려주는 것도 부모로서 중요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앙은 언제 물려주어야 합니까? 어릴 때 부모님의 말씀을 잘 따를 때 자녀들에게 신앙을 키워주어야 합니다. 이 때 신앙교육에 실패하면 나이 들어서 신앙교육을 한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성도들을 보면 자녀가 어릴 때 신앙교육보다 공부를 더 강조합니다.
그래서 신앙교육에 실패하는 가정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엘리 가정을 통해 교훈을 받아서 어릴 때 자녀들에게 신앙을 물려주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래서 자녀들의 신앙이 부모의 신앙보다 더 좋은 복된 가정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솔로몬
그 시작은 좋았으나 끝이 좋지 않았던 사람 중에 대표적인 사람은 솔로몬일 것입니다.
솔로몬의 출생은 그다지 좋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범죄로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런 솔로몬이었지만 하나님의 선하신 예정하심이 있어서 그는 태어날 때부터 다윗 왕의 후계자로 지목을 받았고 또 다윗 왕이 건축하고자 했던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이 솔로몬은 20세에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이 때 솔로몬은 하나님께 일천 마리의 번제를 드리게 됩니다. 그러면 번제는 어떻게 드렸던 제사입니까? 번제를 드리는 사람이 해야 했던 일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흠 없는 짐승을 택해야 했습니다. 솔로몬은 흠 없는 제물 일천 마리를 택하여야 했습니다. 두 번째는 그 제물을 회막 문 앞에서 드려야 했습니다. 일천 마리 제물을 택하여서 회막 문 앞까지 이끌고 와서 드려야 했습니다. 세 번째는 제사 드리는 사람이 제물에 안수해야 했습니다. 솔로몬은 제물로 죽어갈 1,000마리 짐승의 머리 위에 손을 얹고 안수해야 했습니다. 이때 그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자기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는 일을 했습니다. 네 번째는 제사 드리는 솔로몬이 직접 그 1,000마리의 제물을 죽이고,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떠서, 제사장에게 주면 제사장은 그 피를 받아서 뿌리고, 또 각을 뜬 제물을 받아서 번제단위에서 불살랐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드렸던 번제의 규례로 볼 때 일천 번제를 드리는 일은 비록 20대 청년 솔로몬에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손수 일천 마리의 짐승을 죽이고, 껍질을 벗기고, 각을 떠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왕이 된 직후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그날 피곤하고 고단하여 마치 파김치가 되어 깊은 잠에 빠져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 밤에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속에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네게 무엇을 하여 줄꼬, 너는 구하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찾아오셨을 때 솔로몬이 구한 것이 무엇입니까? “주의 종 내 아버지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 앞에서 행함으로 주께서 그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그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항상 주사 오늘과 같이 그의 자리에 앉을 아들을 그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버지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 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께서 택한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그들은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듣는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일천 번제를 드린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스라엘의 위대한 왕이었던 아버지 다윗의 뒤를 이어 자신이 20세에 왕이 되었는데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끌고 재판할 능력이 자신에게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이스라엘 왕으로 세워주신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간절한 솔로몬의 마음을 받으시고, 솔로몬에게 원하였던 지혜와 총명한 마음도 주시고, 또 솔로몬이 구하지 아니한 부귀와 영광도 함께 주셨던 것입니다.
이런 솔로몬을 보면 솔로몬은 정말 그 시작이 좋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청년의 때 1-2년을 먼저 하나님을 위해 바치고 난 후 자기 삶을 시작하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신학교에 가보면 젊은 나이에 자신의 전 생애를 하나님께 바쳐 드리는 청년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또 자신의 청춘과 삶을 하나님께 바치는 선교사님들도 있습니다. 솔로몬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솔로몬이 나중에 어떻게 됩니까?
솔로몬은 인간적인 지혜로 살다가 보니, 또 하나님께서 주신 많은 물질이 올무가 되어서, 또 많은 이방여인과 결혼한 것이 올무가 되어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지게 되었고, 또 여호와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지 못하고, 또 왕비들이 이방 신을 섬기는 일에 동참하고 참여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범죄 함으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셔서 그가 죽은 후 그 나라를 둘로 나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도, 솔로몬은 뉘우치지도 않았고, 눈물로 회개하지도 않았으며, 노년이 되어서야 그 길을 돌이켜서 전도서를 통해 인생의 허무함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이 올바른 삶임에 증거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은 20대 청년 때 하나님께 일천 번제를 드렸던 그 신앙 그 열정을 다 잃어버린 왕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 솔로몬은 그 시작은 좋았으나 그 끝이 나빴던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솔로몬에게서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세상적인 지혜와 성공 그리고 부와 재물이 우리를 행복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적인 성공이나 부와 재물에 너무 집착하는 생애를 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성공과 부와 재물은 일천 번제를 드렸던 솔로몬의 그 열정까지 빼앗아 가 버릴 정도로 그 유혹과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 것을 경계로 삼아서 이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신앙을 빼앗기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2.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끝이 좋았던 사람들
성경을 보면 그 시작은 별로였으나 그 끝이 좋았던 사람, 시작 미약했으나 나중 창대케 된 사람, 처음에는 믿음 없었으나 나중에 믿음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불신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브라함은 그 시작이 별로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믿음이 없는 가정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만나서 믿음을 가지게 되고 나중에는 믿음의 조상으로 불릴 만큼 믿음에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믿음은 처음부터 그렇게 완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나고, 믿음을 갖게 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본토 친척’까지 떠난 사람이었지만 그 당시 그 믿음은 온전했던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갈 곳이 어디인지 전혀 알지 못하고 가던 중 하란에 도착하여서는 더 이상 가지 않고 수년간을 머무르게 됩니다. 창세기 12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재차 약속의 땅으로 떠나라고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야 그 조카 롯을 데리고 다시 떠났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가나안 땅에 도착하자마자 그 땅에 기근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기근이 들면 그곳에서 살던 사람들보다 아브라함 같이 이주해 온 사람들이 더 살기 어려워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그 기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웠으면 하나님이 약속한 땅을 떠나 물이 풍부하다고 알려지고 있는 애굽으로 피신을 가게 됩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으로 가는 노중에 한 소문을 듣게 됩니다. 애굽 왕은 아름다운 여자가 있으면 다 자기 아내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그 바로의 명을 거역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는 참 아름다운 여인이었습니다. 그 나이 이미 60세가 넘었는데도 그 아름다움은 여전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나의 아내라고 하지 말고 누이라고 하여 혹 무슨 일이 일어날 때 나로 죽음을 면하고 살 수 있게 해 달라’고 합니다. 요즘 이렇게 남편이 부탁하면 그 부탁을 들어줄 아내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는 아브라함의 요구를 들어주었습니다.
애굽에 도착하자 정말 그곳에는 물이 풍부하여 방목하기 좋았고 또 양식도 풍부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염려 했던 일이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바로 궁으로 보내야 했습니다.
이 때 아브라함이 할 수 있었던 일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온 것을 뼈저리게 후회하면서 하나님께서 도와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기도에 응답하셔서 아브라함은 많은 재물을 얻어서 애굽에서 나올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 예기치 못한 일을 당하면서 많이 배우고 또 그 신앙도 많이 성장하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달리진 것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가 우물을 놓고 다툴 때 아브라함은 그에게 가나안 땅을 약속하신 하나님을 믿고 롯에게 먼저 선택할 기회를 주는데서 나타납니다.
우리 같으면 어떻게 했겠습니까? ‘이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나에게 약속하신 땅이니 너는 가나안 땅을 떠나 너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고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롯이 약속의 땅 가나안을 선택할 가능성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롯에게 먼저 선택할 우선권을 준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에서의 실패하는 삶을 통해 하나님의 섭리와 역사, 그리고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돌보심에 대해 확신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선택의 우선권을 롯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당시 아브라함의 믿음이 완전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후에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온전히 믿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을 이룰 것이라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은 계속 자식이 없자 롯을 그 기업을 이어갈 후계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롯이 떠난 이후에는 그 집에서 길리운 믿음 좋은 종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기업을 이어갈 것이라고 하시자 나중에는 그 몸을 통해 난 이스라엘을 그 기업을 이어갈 자로 생각합니다. 이런 아브라함에게 네 아내 사라가 낳은 자가 네 기업을 이어갈 자가 될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서야 믿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라는 아브라함보다 더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을 후계자로, 엘리에셀을 후계자로 생각할 때 사라는 아직 자녀를 낳을 수 있는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기를 통해 후손을 주실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경수가 끊어지고 더 이상 자녀를 생산할 수 없는 처지가 되자 사라는 믿음을 잃고 그 종 하갈을 통해 후손을 얻고자 하고 그 자녀 이스라엘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사라였기에 구약에 나타나신 성자께서 아브라함에게 오셔서 “명년 이맘 때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라는 말씀을 듣고 웃었습니다. 사라는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하게 된 때가 벌써 언제인데, 나도 늙고 아브라함도 늙었는데 어찌 그런 일이 있을 것인가 생각했습니다. 사라의 이 불신앙에 대해 책망을 받고 그 후 ‘능치 못함이 없으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과 사라가 같은 믿음을 가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그 믿음대로 이들에게 이삭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이 인정해 주실 정도로 완전해 진 것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완전한 믿음은 이삭이 청년이 되었을 때 그를 내가 지시하는 산에서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서 이삭을 드릴 때 나타났습니다. 이 일로 인해 아브라함은 신구약 모든 성도들의 믿음의 조상이 된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아브라함을 보면 배울 점이 무엇입니까?
누구나 그 시작부터 완전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이 부족해도 실망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지금은 부족하지만 내년에는 더 나아지면 되고, 또 그 다음해에 더 나아지면 되는 것입니다. 또 우리 믿음이 퇴보하지 않고 성장하고 있다는 것은, 우리 믿음이 살아 있다는 증거라는 것입니다. 성장하고 성장하다가 보면 우리들도 결국 아브라함과 같이 장성한 분량의 믿음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설사 이 땅에서 우리 믿음이 장성한 분량에 이르지 못하여도 걱정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살아 있는 이 믿음을 인정해 주시고 우리를 완전에 이르게 하실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 우리는 육신을 입으신 예수님이 어떠하셨던 것처럼 우리도 그런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 안에서 천년만년 하늘나라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입니다.
시작은 좋지 않았으나 그 끝이 좋았던 사람에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도 있습니다.
야곱도 성장하는 믿음을 가졌던 대표적인 사람입니다. 야곱은 그 어머니 태에서 있었던 싸움에서 져서 장자로 태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런 야곱을 위안이 되었던 것은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이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로 흘러가고 있었습니다.
자녀를 축복하는 권한을 가진 아버지 이삭은 들사람이요 사냥꾼으로 사내대장부다웠던 에서를 더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조금해 진 야곱은 에서에게 팥죽 한 그릇을 주고 장자의 명분을 사기도 하고, 에서인 것처럼 변장을 하고 아버지 축복을 가로채기도 하였습니다.
이 눈물겨운 노력이 화근이 되어서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는 형을 피해 밧단 아람에서 살고 있는 외삼촌 집으로 도망가게 됩니다. 여기서 야곱은 20년간 눈물겨운 처가살이를 한 후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이런 야곱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복수하려고 오는 형 에서였습니다. 야곱은 이 절대 절명의 위기 속에서 하나님께 생사를 건 기도를 하였고, 하나님의 은혜로 에서와 화해를 하기는 하였지만 여전히 에서는 야곱에게 두려운 존재였습니다.
그래서 에서와 같이 돌아가지 못하고 세겜에서 장막을 치고 거주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 세겜은 야곱에게 수치의 장소가 됩니다. 이곳에서 그 딸 디나는 겁탈을 당하게 되었고, 이에 분노한 레위와 시므온은 세겜 족속을 속여서 죽이는 살인자가 됩니다. 당시 가나안 사회에서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을 그 이웃이 대신 보복해 주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가나안 사람들이 세겜 족속을 대신해서 보복해 올까 두려워서 하나님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야곱이 밧단 아람으로 떠날 때 서원한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급히 장막을 걷고 벧엘로 떠나가게 됩니다.
아브라함 때 큰 기근이 있었듯이, 이때도 가나안 땅에는 큰 기근이 찾아왔습니다.
그래서 야곱의 아들들은 양식을 구하려고 애굽에 갔다가 국무총리가 되어 있는 요셉을 만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애굽에 들어가서 살게 됩니다.
야곱이 애굽에 가서 애굽 왕을 만나고 한 말이 무엇입니까?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 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은 그 험악한 세월을 보내면서 사기꾼 같은 그가 이제는 거룩하고 영성이 풍성한 족장으로 변호되어 갔습니다.
우리가 이런 야곱의 생애를 보면서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믿는 우리들이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어려움들이 꼭 나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난의 삶이 용광로와 같이 우리를 연단하여서, 우리에게서 죄를 제거해 가고, 경건하고 거룩한 성도로 변화시켜 가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로마서에서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시편에서는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라고 고난이 가져다주는 유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2018년을 어떻게 사셨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사셨습니까? 그러면 이 시간 한 해 동안 은혜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을 믿고 살았지만 살아온 한 해가 고난의 연속이었습니까? 그러나 낙심하거나 실망하거나 좌절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 아들까지 내어 주시면서 사랑해 주셨습니다.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은 주시고 아픔을 주실 때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 분명한 이유가 있으실 것입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가 얻게 되는 유익이 고난과 아픔보다 더 크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통을 주고 아픔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닙니다.
고통과 아픔을 통해 주시고자 하신 더 나은 은혜와 축복들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고난은 우리에게서 죄와 악을 제거해 내는 것입니다. 고난은 우리 마음과 인격을 연단하고 단련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거룩한 사람, 경건한 사람으로 변화시켜 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고난을 주시는 이유입니다.
말씀을 정리합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합니까?
시작도 좋고 끝도 좋은 사람이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시작은 별로였더라도 그 끝은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전하고 듣는 우리 모두는 이렇게 끝이 좋은 신앙,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신앙생활을 하는 복 있는 성도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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