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생이 가야하는 길
전도서 12:13-14
왕년의 인기가수 ‘배호’는 ‘인생은 나그네길이며,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다고 노래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배호의 노래 가사를 공감하면서 즐겨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왜 사람들이 배호가 부른 그 노래를 즐겨 불렀을까요? 그것은 인생은 나그네 길이라는 말과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길이라는 그 노래 가사에 공감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 세상 사람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인생이 어디서 왔는지 모르는 것, 인생은 결국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은 인생의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는 죽음과 그 죽음 건너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전혀 모르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는 아무도 가보지 못한 길입니다.
왜요. 한 번 그 길을 간 사람들 중에 아무도 다시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번 죽으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또 무서워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시시각각으로 다가오고 있는 죽음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애써 잊고 살아가려고 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태어날 때는 공평하지 않게 태어납니다.
어떤 사람들은 좋은 가문에서 태어날 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은 다릅니다. 죽음 앞에서는 만인이 공평합니다.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찾아옵니다.
그러면 이 죽음은 무엇입니까?
죽음은 이 세상에서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아 가 버리는 폭군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영화를 누리고 살았든지, 어떤 권세를 누리는 삶을 살았든지 관계가 없습니다. 죽음은 이 세상의 아름다움도, 지식도, 부귀공명도 다 쓸모없는 것이 되게 합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희망을 가지고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까?
그 이유는 우리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인생이 아니라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또 어디로 가는지’ 분명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21세기 한국 땅 서울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이런 현실에만 매여 살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살명서 또 영원을 바라보고 살며, 오늘 함께 하는 가족과 이웃과 교우들과 함께 살뿐 아니라, 또한 믿음 안에서 하나님과 예수님과 성령 하나님과 함께 살고 또 하나님의 나라에서 우리보다 앞서 믿음으로 살았던 사도들과 경건한 성도들과도 함께 살 소망을 가지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다른 종교는 이런 것을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불교를 살펴보면 불교는 어떻습니까? 불교는 인생의 시작이 어디에 있는지, 그리고 인생은 어디로 가는지 전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인생은 윤회한다.’ ‘세상은 돌고 돈다.’라고 주장합니다. 이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다시 소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돼지로 다시 태어날 수도 있고, 혹은 개미나 풀벌레로도 다시 태어날 수 있다고 주장 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가 걸어가야 하는 인생의 길에 대해 살펴보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인생의 길을 살핍니까? 그것은 이런 살핌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신앙이 얼마나 축복된 삶인가에 대해 알아보고, 이 놀라운 복을 우리에게 허락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감사하며 그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 드리려고 이렇게 하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사람의 기원의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사람은 어디서 왔습니까?
사람의 기원에 대해 창세기 2:7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두 가지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하셨다고 합니다. 하나는 땅의 흙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생기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한편으로는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육체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생기를 통해 생령 즉 영적인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면 육신적인 특성과 영적인 특성을 함께 가진 아주 독특한 존재가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육신적인 특성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갑니다.
또한 사람들은 영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영이신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또 우리는 이렇게 육체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이 세상과 연결이 되어 있고, 영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영이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함을 받은 인간의 모습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서로 다른 육체와 영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람이 육체적인 생명만 가진 동물에서 진화되어 오늘날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자들의 주장이 허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이유는 육체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는 동물에게서 영적인 특성을 가진 사람이 나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특성은 오직 영이신 하나님께서만 우리들에게 주실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은 동물에서 진화된 것이 아니고 영이신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사람의 범죄입니다.
이렇게 육체적인 특성과 영적인 특성을 함께 가진 존재로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그 특성대로 두 가지 영역과 관계하면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 하나의 영역은 하나님께서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며 살라”고 하신 대로 이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육체적인 삶의 영역입니다. 다른 하나의 영역은 하나님을 따라 영적인 존재로 창조된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을 섬기며 살아가는 영역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두 영역을 함께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지 않는 삶을 통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섬기는 삶을 살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은혜로 만물의 영장으로 창조함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이 금지 명령에 순종하며 살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조상 아담과 하와는 어떻게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금지하신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대로 그 즉시 아담과 하와의 영은 죽은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죽음은 우리가 말하는 죽음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육신이 그 주어진 생명을 다 살고 죽는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죽음은 선악과를 따 먹고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영이 그 생명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공급받지 못하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마치 나무에서 떨어져 나온 가지는 그 가지가 가진 생명을 다하게 되면 죽듯이, 그렇게 죽어가는 존재가 된 것을 죽음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범죄한 이후의 사람의 상태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람의 영이 죽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은 사람에게서 영적인 특성이 죽어 완전히 없어졌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영적인 특성을 가진 존재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사람의 영이 죽었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영적 생명의 공급자 되시는 하나님의 영과 우리의 영이 단절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 사람은 범죄 이후에도 여전히 영적 특성을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영적생명을 공급받지 못하여서 그 영이 죽은 상태에 이르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후 사람들은 여전히 영은 가지고 있으되 영적인 능력은 완전히 상실했습니다.
사람들은 영적인 눈이 감겨진 영적 소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영이신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고, 또 영이신 하나님이 계시는지도 잊어버리고 사는 무신론적인 존재가 된 것입니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눈은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하고, 그 마음으로는 깨닫지 못하는” 영적인 우맹 자가 되고 저주 받은 존재가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중요한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의 영이 없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은 그대로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그 영은 영적인 능력을 완전히 박탈당하여서 아무런 쓸모도 없고 또 무능력한 영이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우리의 영을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신학적으로 전적 부패 혹은 전적 무능상태가 되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그 영이 죽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같이 의를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상실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로우심 같이 지혜롭게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같이 거룩함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입니다. 이것을 범죄한 아담과 하와의 모습입니다.
범죄 한 아담의 후손들
성경이 증거 하는 바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에 태어난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담과 하와의 형상을 따라 태어나지 않고 아담과 하와가 범죄 함으로 그 영이 죽고 또 육체가 죽어가는 존재가 된 그 형상을 따라 태어났습니다.
여기에 대해 창세기 5: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아담의 계보를 적은 책이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의 모양대로 지으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고 그들이 창조되던 날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그들의 이름을 사람이라 일컬으셨더라. (범죄한 후) 아담은 130세에 자기의 모양 곧 자기의 형상과 같은 아들을 낳아 이름을 셋이라 하였고”
하나님께서 첫 사람인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때에는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 영이 살아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범죄 하여 그 영이 죽은 아담과 하와가 낳은 후손들은 그 영이 죽고 그 육체 또한 죽어가는 아담의 형상을 닮은 존재로 태어났습니다. 이것이 이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의 절망적인 운명이고 또 예수 믿기 이전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셋째, 사람의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영이 죽어 있는 사람, 그리고 그 육체도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가장 복된 소식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창세기 3:15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그 내용은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을 통해 구원자 메시야를 보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그 메시야를 자신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는 사람들을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복음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말씀을 ‘최초의 복음’ 혹은 ‘원시복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이후 모든 인류는 이 복음의 말씀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 에 따라서 그 운명이 180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 이 원시복음의 약속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믿음을 의로 여겨 주실 뿐 아니라 그 죽었던 영을 다시 살려 거듭나게 해주십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영적인 눈을 뜨게 되고, 영적인 귀가 열리게 되고, 영적인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마음을 갖게 되어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이 구원을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하였고, 바울은 새로운 피조물로 창조함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요한복음 3:5절입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고린도후서 5:17절입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그래서 이 세상 속에는 살아가는 사람들은 다음의 두 부류의 사람들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복음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다른 하나는 아담의 죄 아래서 저주받고 멸망 받을 죄인들입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볼 때 이 두 부류로 구분해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그래야 우리는 우리와 같이 예수 믿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가 하는 것을 알게 되고, 또 예수를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이 얼마나 절망적이고 비참한 사람들인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사람 중에 아직도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으며 그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복음을 증거 하려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사람이 구원 얻을 수 있는 기회는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삶 속에서 예수를 믿지 않으면 다시는 기회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지금이 바로 이런 은혜를 받을 때이고, 또 지금이 바로 그 구원의 날인 것”입니다.
넷째, 사람의 죽음입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 즉 예수를 믿고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나,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여전히 그 영이 죽어 있는 사람들 모두 다 그 육체의 생명이 다하게 되면 육체적인 죽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이것을 우리는 죽음이다. 혹은 사망이다. 라고 합니다. 사망은 우리 육신의 생명이 다하고 죽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죽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람은 창조 될 때 영과 육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는데 사람이 죽을 때 이 영과 육의 분리되는 현상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사람의 육체는 그 근본이 되는 흙으로 돌아가서 소멸되고, 사람의 영은 영이신 하나님이 소멸될 수 없는 분이시듯이 소멸되지 않고 살아남아서 ‘낙원’이나 ‘음부’로 가게 됩니다. 이 때 예수를 믿고 그 영이 다시 살아난 사람들의 영은 ‘낙원’으로 가게 되고, 예수를 믿지 않아서 여전히 아담의 죄 가운데에서 살고 있는 불신자들의 영은 ‘음부’로 가게 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강도를 보십시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달려 죽어가던 한 강도는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라고 비난하였습니다. 그 때 다른 한 강도는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하나는 그 사람을 꾸짖어 이르되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의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하고 이르되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며 그 자신이 가진 믿음의 고백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강도의 믿음의 고백을 들으시고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게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 강도가 구원을 얻기 위해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이 강도가 아무 것도 한 일이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었을 뿐입니다. 이 강도는 그 믿음으로 낙원에 들어갔고 믿음이 없어서 예수님을 비난하였던 다른 한 강도는 아담의 죄에 함께 속하여 음부로 내려 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죽으면 가게 되는 이 낙원과 음부는 사람들이 영원히 거하는 곳이 아닙니다. 낙원에는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할 수 있는 곳이며, 음부 또한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어떻게 압니까? 요한계시록 1:18절입니다.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니”라고 합니다.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지셨다고 하십니다.
열쇠는 무엇하는 것입니까? 열쇠는 닫힌 문을 열고 들어갈 수도 있게 하고, 또 문을 닫는 기능도 합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다는 말씀은, 사망과 음부에는 들어갈 수도 있고 나올 수도 있는 곳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권세가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진 부활하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누구도 죽음 건너편에 갔다고 돌아온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한 번 죽으면 다시 살아 돌아올 수 없게 하는 것이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죽음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죽은 건너편의 삶, 즉 우리가 전혀 알 수도 없고 경험해 볼 수도 없는 죽음 너머에 있는 삶에 대한 성경은 무엇이라 증거합니까? 성경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일생을 마치고 죽게 되면 모든 사람들이 가게 되는 곳은 단 두 곳뿐이라고 합니다. 그 하나는 낙원이고 다른 하나는 음부입니다. 그리고 낙원은 예수를 믿고 죽은 성도들이 가는 곳이고, 음부는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들이 가는 곳입니다. 사람들이 육체의 생명을 다하여 죽게 될 때 모든 사람들은 이 낙원과 음부에 가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시고 이 세상 역사를 종지부 찍을 때까지 그곳에서 부활의 날을 기다리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섯째, 사람의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부활이란 무엇입니까?
부활은 그 영이 낙원에 있던 성도들과 그 영이 음부에 있던 불신자들의 영이 다시 신령체와 결합하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부활체는 영적 존재이면서 또한 신령한 육체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물론 이 세상 속에서의 예수님의 부활,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순교자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 부활은 일부의 부활입니다. 인류전부의 부활은 백 보좌 심판 때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예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벽으로 막히고 문이 닫힌 곳을 통과하여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신령한 육체를 입고 있으셨기 때문에 제자들에게 보일 수도 있으셨으며 또 음식도 잡수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가 부활할 때도 이와 같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영이 신령한 육체와 다시 결합하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사도 바울은 “하늘의 속한 형체도 있고 땅에 속한 형태도 있다”고 하면서 “부활도 그와 같으리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않을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한 영의 몸도 있느니라.”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리하면 이렇게 됩니다.
예수 믿는 성도들이 이 땅의 삶을 다 살고 죽을 때 영과 육이 분리되어서 육은 그 본질인 땅으로 돌아가고 예수를 믿고 성령으로 거듭난 그 영은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성도들의 영을 위해 예비해 두신 장소인 낙원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이란? 이렇게 해서 낙원에 있는 성도들의 영이 신령한 영체와 다시 결합되어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이 때 성도들의 영은 땅에 속한 육체를 다시 입고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거룩한 하늘의 영체를 입은 존재로 홀연히 변화하게 되는데 이것이 부활인 것입니다.
이것은 불신자들의 경우도 같습니다.
불신자들도 이 때 다시 부활합니다. 여기서 불신자라는 말은 교회를 다니지 않았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 다닌 유무와 상관없이 예수를 믿고 그 영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경험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불신자들이 부활한다는 말은 무엇입니까?
이 때 불신자들의 영도 영체를 입고 다시 살아나게 되는데 이것을 불신자들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부활에는 두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 믿는 성도들의 부활이고, 다른 하나는 불신자들의 부활입니다. 이 두 부활에 대해 요한복음 5:28-29절에서는 이렇게 증거 합니다.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예수를 믿었던 사람들의 영은 생명의 부활로 다시 살아나지만,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갖지 못했던 불신자들은 심판의 부활로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백 보좌 심판입니다.
히브리서 9:27절에서는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라고 말씀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로 백 보좌심판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모든 사람들은 부활한 이후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서 선악간 그 행한 일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이 심판에 대해 성경은 무엇이라 증거하고 있습니까?
열 처녀의 비유에서는 우리의 바른 믿음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때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는 것입니다. 등과 기름을 가진 사람은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등은 가지고 있으되 기름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은 혼인 잔치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등은 무엇입니까? 등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시편 119: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라고 명확하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름은 무엇입니까? 기름이 성령이라는 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다 인정하는 견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가진 사람 또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은 구원을 받고 천국혼인잔치에 참여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가지고 있으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천국혼인잔치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달란트의 비유에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대해 말해주고 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들은 그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지만, 악하고 개으른 종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양과 염소의 비유는 우리 삶의 태도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25:31절입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구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구분하는 것과 같이 하여” 심판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이 때 사람들을 심판하는 기준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어떤 일을 하였느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을 예수님께 한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어떤 믿음을 가지고 또 어떤 생활태도를 가지고 살았느냐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심판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일곱째 천국과 지옥입니다.
백 보좌 심판 판결에 따라 예수를 믿는 믿음을 가지고 산 사람들은 천국에 들어가고, 예수를 믿지 않은 사람들은 지옥으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이 천국과 지옥은 한 번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없는 곳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을 때 사람의 몸에서 분리된 그 영이 들어가는 낙원과 음부는 들어가기도 하고 나오기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러나 음부에 있는 영이 영체를 입고 부활한 이후에 들어가게 되는 천국과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나올 수 없고 그 한 번의 선택에 그 사람의 영원한 운명이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천국이 축복인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은 영이 신령한 영체로 부활한 후 들어가게 되는 천국은 그 사람의 영원한 거처가 되기 때문에 천국은 축복인 것입니다. 만약 천국에 들어간 사람이 또 실수로 죄를 범하게 되고 그래서 천국에서 쫓겨나 다시 지옥으로 들어가게 될 확률이 몇 천 억분의 일이라도 있게 된다면 천국도 완전한 축복의 장소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혹시 우리가 그 저주 받게 되는 당사자가 될 수 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이 축복인 것은 한번 천국에 들어간 영혼은 영원히 천국에서 성삼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락을 누리며 영원히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멘
지옥이 저주인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를 믿지 않고 죽은 영혼들이나 바른 믿음을 가지지 못한 영혼들이 영체와 결합하여 부활한 후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들어가게 되는 지옥은 그 사람들의 영원한 거처가 됩니다. 만약 이렇게 해서 지옥에 들어간 사람이 그 지옥의 고통 중에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회개하여서, 몇 천 억년이 지난 후에라도 다시 지옥에서 나와서 천국으로 갈 수 있는 확률이 0.00000001% 라고 있다면 지옥도 완전한 저주의 장소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지옥에서 나와 천국으로 들어갈 확률이 적지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옥이 저주인 것은 한 번 지옥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 회개하고 나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은 완전한 저주의 장소가 되는 것입니다. 한 번 지옥에 들어간 사람은 꺼지지 않고 불타는 지옥에서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상태로 영원히 고통하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누리게 될 천국의 아름다움과 행복은 이 땅의 언어로서는 표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 영이 하나님이 계신 3층천까지 갔다가 온 사도바울은 천국 혹은 낙원의 아름다움에 대해서 사람의 말로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곳이라고 하였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천국생활이 너무 단조로울 것 같아서 지루하다거나 별 의미가 없는 삶일 것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이 염려는 기우였다는 것을 우리가 천국에 들어가 보면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천국에서 우리는 날마다 시간마다 분초마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그 나라가 이렇게 좋은 나라였다는 것을 새롭게 깨닫고 새롭게 감격하고 새롭게 놀라면서 기쁨과 희락이 충만한 삶을 살게 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지옥에서의 생활은 다릅니다.
지옥에 간 사람들도 죽지 않는 영체를 입었기 때문에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몸으로 마치 모든 것을 녹이는 용암보다 더 뜨거운 불구덩이 속에서 물 한 방울만 입에 넣어주면 좋겠다고 하면서도, 그 물 한 방울을 입에 넣지 못하는 고통을 당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 생활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전에 복음 전도를 듣고 예수 믿지 않은 것을 이를 갈며 후회하고 또 내가 왜 그 때 그렇게 열심히 전도하던 그 전도함을 듣고 외면하였던가? 라고 후회하며 슬피 울며 통곡하며 보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옥을 이렇게 표현하더라고요.
음식을 할 때 후라이펜에 기름을 두르고 온도를 높이면 뜨거운 기름이 막 튀어 오릅니다. 그 뜨거운 후라이펜에 생선을 구우려고 얹어 놓으면 생선에 있는 수분이 그 뜨거운 기름 때문에 막 튀어 오르게 되는데 마치 지옥은 그와 같은 곳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뜨거운 후라이펜 위에 있는 생선과 같이 사람들은 지옥에서 고통당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예수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이 별로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 날이 되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만약 우리에게 그 날 예수를 믿고 그 영혼이 거듭난 성도들이 누리는 행복과 예수를 믿지 않은 불신자들이 경험하게 될 저주스러운 삶을 미리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에 대해 히브리서 12:2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을 보면 예수님도 그 앞에 있는 기쁨의 날을 바라보고, 오늘 당하게 되는 십자가의 부끄러움을 참으셨다고 합니다. 우리들도 예수 믿는 우리가 천국에서 누리며 살게 될 행복한 삶과 불신자들이 지옥에서 살게 될 저주스러운 삶을 바라보면 오늘 우리의 신앙생활이 확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들이 살아가야 할 인생의 길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나의 인생길을 살피면서 이르게 된 결론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일생의 삶을 사는 동안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의 요구에 부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에 대해 오늘 우리가 본문으로 삼고 있는 전도서 12:13-14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 것이니라.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야 할 인생의 길을 함께 묵상한 우리 모두는, 우리 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은혜로 예비하신 그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오늘 나에게 주어진 삶을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들이 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가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약의 복 있는 사람 (0) | 2019.11.07 |
---|---|
구원해 주시는 은혜 (0) | 2019.07.15 |
유종의 미를 거두는 신앙 (0) | 2018.12.21 |
기도의 사람 다윗 (0) | 2018.12.09 |
당신에게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까? (0) | 2018.11.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