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어떤 목마름이 있습니까?
전도서 1:2-11
오늘 우리가 살펴보려고 하는 전도서는, 잠언과 함께 솔로몬이 노년에 기록한 성경입니다.
그래서 잠언과 전도서에는 솔로몬이 자신이 살아온 삶을 회고하면서, 인생이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교훈적인 가르침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르치는 접근 방식은 완전히 다릅니다.
- 예를 들자면, 잠언의 경우에는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라거나, “내 아들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1:7,10)라는 식으로 직설적이고 교훈적으로 말합니다.
- 그러나 전도서는 다릅니다. 전도서는 “능력이 있고 돈이 좋다면 한번 실컷 모아봐라.” “그래서 돈을 가지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지 한번 느껴봐라.”라고 먼저 말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돈을 모아 보았더니 어떻더냐? 결국은 헛된 일이지 않더냐?‘라고 말합니다.
또 “젊고 즐길 수 있을 때 쾌락을 즐기면서 살아봐라.” 라고 합니다. 그리고 난 후에 “쾌락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허망하더냐?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 같이 미련한 일이 아니더냐?”라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이렇게 먼저는 “뭐든지 할 테면 해봐라.” “네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을 해 봐라.” 라고 부추겨놓고는 “그래 해 보니 어떻더냐? 허무뿐이지?” “해 아래에서 하며 사는 그 모든 일들이 다 그렇게 헛된 것뿐이다.” 라고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전도서는 인간이 이 세상에서 추구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소망과 행복들을 다 말해주고 난 후에 그 어느 것도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간이 해 아래에서 수고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수고가 결국은 헛된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면 솔로몬은 이 전도서를 통해 우리에게 무슨 가르침을 주려고 이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까? 오늘은 이 문제를 살펴보겠습니다.
1. 전도서는 우리 마음속에 목마름을 갖도록 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는 “해 아래에서” 라는 단어입니다.
전도서에는 이 단어가 29회나 반복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해 아래서’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이유는 ‘해 아래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말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해 아래에서’ 일어나고 있는 삶에 대해 말한 후에 그와 대비가 되는 ‘해 위에서’의 삶에 대해 가르쳐 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전도서를 보면 ‘해 아래서’ 살아가는 ‘헛된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솔로몬이 말하려고 하고 있는 내용이 아닙니다. 먼저 해 아래서 살아가는 ‘헛된 인생’에 대한 이야기를 해 놓고 그와 대비되는 ‘해 위에서’ 사는 인생 ‘헛되지 않은 인생’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를 읽을 때에는 생각을 하고 읽어야 합니다.
전도서가 모든 인간이 집착하며 살아가고 있는 물질과, 쾌락과, 지혜와, 성취욕과 같은 것들을 다루고 있는 이유는, 인간이 살아가면서 목적을 두고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는 이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낱낱이 폭로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지고 다루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삶의 목적을 삼고 살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가를 깨닫게 해 주어서, 이 허무한 삶 너머에 있는 허무하지 않는 삶에 대한 목마름을 갖도록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허무한 모든 삶의 본 모습들을 폭로하고 있습니다.
솔로몬이 전도서 1:2절에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라는 말로 전도서를 시작하고 있는 이유는 전도서를 읽는 그 독자로 하여금 이 세상에는 참된 것이 없다는 것을 먼저 알고 읽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난 후에 하나하나 구체적인 예를 들어 보여주면서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증명해 나가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이런 논증을 따라 읽어가는 독자들의 마음속에는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 그러면 우리로 헛된 삶을 살지 말고 그냥 죽으란 말이냐” ‘내가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참된 가치는 어디 있다는 말이냐,’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아야 하고 또 어떤 길로 가야만 한단 말이냐,’ 라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이런 생각들은 결국 그렇다면 헛되지 않은 참된 인생은 어디에 있는가? 라고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됩니다. 솔로몬은 이렇게 독자들이 참된 인생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라고 전도서를 기록해 전해 준 것입니다.
그러면 왜 솔로몬은 사람들의 마음에 참된 인생에 대한 목마름을 주려고 하고 있습니까?
첫째,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힘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큰 힘은 바로 목마름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면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냅니다.
우리 전 시대를 살다가 무엇인가 큰 업적을 이루어 낸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 모든 사람들에게는 나름대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 목마름을 채우기 위해서 수고하고 노력하다가 큰 업적을 이루어내었습니다.
인류 최초로 하늘을 난 사람은 ‘라이트형제’ 즉 ‘윌버 라이트’와 ‘오빌 라이트’입니다.
이들은 어렸을 때 프로펠러가 달린 장난감 비행기를 아버지에게 선물로 받으면서 비행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고 싶다는 목마름을 가지고 수없이 실수하며 글라이더 비행기를 만들고 만들었습니다. 결국 이 목마름은 자신들이 만든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게 했고 이들 형제는 1909년 말까지 유럽과 미국의 항공기 산업을 주도하는 인물이 됩니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사용하고 있는 핸드폰은 어떻게 만들어지게 되었습니까?
스티브잡스는 마이크로 소프트 사의 빌 게이츠와 컴퓨터라는 새로운 기기 운영체계를 놓고 경쟁하게 됩니다. 여기서 스티브잡스가 먼저 상업용 맥캔토시 프로그램을 만들어 앞서 나갔지만 빌게이츠가 대중화 된 가정용 사무용 윈도우 프로그램을 내 놓음으로 승자가 됩니다.
이 일로 충격에 빠진 스티브 잡스는 가정과 사무실에 비치되어 있는 컴퓨터를 모든 사람들이 휴대하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기기개발에 목말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정력과 노력을 쏟아 부어 만들어 낸 것이 바로 아이폰입니다. 그는 컴퓨터와 전화기를 하나로 합친 복합전자기기인 아이폰을 세상에 선보이게 됩니다.
우리들은 신앙의 사람들이기 때문에 교회의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은 교회를 개척하고 성장시키기 어려운 시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교회가 개척되고 성장하고 있다면 그것이 보여주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그 교회에는 교회 부흥을 애타게 목말라하는 목마름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교회 부흥을 목말라하는 그 기도와 수고와 헌신을 받으시고 은혜와 능력을 주셔서 결국 교회로 부흥하게 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전도를 잘하고 또 어떤 사람이 죽은 영혼을 살려내는 전도자가 됩니까?
믿지 않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런 전도자가 되지 못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을 바라 볼 때 “내가 저 영혼을 건지지 않으면 안 되겠다.” ‘내가 어떻게 하든지 저 영혼을 내가 건져 내야 되겠다.’라고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영혼을 살려내는 전도자가 됩니다.
우리나라 부흥사 중 한 사람이었던 신현균 목사님은 민족 복음화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고 ‘하나님 한국을 저에게 주세요.’라고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장로교가 세워지는데 큰 역할을 한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는 “주여, 저에게 스코틀랜드를 주시옵소서. 그렇게 아니하시려면 제 생명을 취해 가소서.”라고 부르짖어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런 목마름이 있어야 사람들을 살려내기도 하고 나라를 구해내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집단은 목마름이 있는 집단입니다.
과거에 이 땅에 민주주의를 이루기 위해 동분서주했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정착하고 꽃을 피울 수 있을까? 라고 하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과거 독립운동 했던 분들을 보면 우리나라의 독립을 목말라 하는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어떻게 하면 내 한 몸 잘 먹고 잘사나’라는 생각을 하며 살아갈 때, 독립 운동에 헌신했던 사람들은 나라의 해방과 독립을 목말라 했습니다. 그래서 각종 핍박과 회유와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기 가정과 자기 재산과 심지어 자기 생명까지 바치며 나라의 독립을 위해서 헌신했습니다. 그분들의 덕분에 우리나라는 독립 국가를 이룰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왜 무기력합니까?
우리가 무기력한 이유는 우리에게는 이런 목마름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입술로는 “예수 우리 왕이여, 이곳에 오셔서 왕으로 우리를 다스려 달라.”고 찬양은 잘합니다. 또 “주님 없인 살수 없네. 내 주는 아신다.”라고 찬양은 잘합니다. 그러나 이런 찬양의 고백은 우리 입술의 고백일 뿐이고 우리 마음과 우리 가슴은 그렇게 느끼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나는 배울 만큼 배웠고, 돈도 있을 만큼 있고, 뭐 특별한 부족함도 없다.”고 하면서, 하나님에 대해서도 예수님에 대해서도 그렇게 주리고 목말라 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역할에 대해 로마서 3:20절에서는 이렇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보면 볼수록 율법이라는 거울을 통해 ‘나는 절망적인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도무지 구원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을 바르게 보고 바르게 이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을 목말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도바울이 고백하기를 내가 탐내지 말라는 10계명을 깨닫지 못했을 때는 ‘나는 살았었다.’고 합니다. 그때에 ‘나는 하나님을 법을 다 지킨 의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0계명에서 말씀하고 있는 ‘네 이웃을 집을 탐내지 말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라고 하는 말씀을 깨닫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알았다고 합니다.
이 때 바울이 깨달은 것은 무엇을 탐내는 마음 그 자체가 죄라는 것입니다.
이 탐심이 다른 모든 죄의 근원이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제 1계명은 ‘네 마음에 다른 신을 두지 말고 하나님만 섬기라.’는 계명입니다.
그런데 하와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탐심이 들어가자 지엄하신 하나님의 명을 어기고 자기가 따 먹어서는 안 되는 선약과를 따 먹고 죄를 범한 것입니다.
제 2계명을 보면,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골로새서 3:5절에서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라고 하였습니다. 탐심이 각종 우상숭배를 만들어 낸다는 말씀입니다.
제 3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탐심은 자기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팔게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기도 치게 하는 것입니다.
제 4계명에서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탐심은 주의 날에도 돈을 벌거나 재미를 보거나 자기를 위해 시간들을 사용하게 하다는 것입니다.
제 5계명에서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부모의 재산에만 관심을 가지고 부모님을 모시는 것은 부담스럽다고 기피하게 만듭니다.
제 6계명은 ‘살인하지 말라’고 엄명하셨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전쟁을 일으켜 사람을 죽이고 자기 유익을 위해서 마약을 팔아 사람들을 망치고 몇 푼의 돈을 빼앗으려고 살인하고 강도짓까지도 하는 것입니다.
제 7계명은 ‘간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예쁜 여자를 보면 참지 못하게 하여서 자신과 남의 가정을 망가뜨리며 또 수많은 남녀를 매춘행위로 내모는 것입니다.
제 8계명은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탐심은 남의 물건에 손을 대게 합니다.
제 9계명은 ‘거짓증거를 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탐심은 자기에게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의인도 악인이라고 거짓증언을 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탐내지 말라’는 제 10계명을 범하면 다른 모든 계명들이 함께 다 무너지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도 동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에 대해 모를 때에는 “나는 꽤 착한 사람이고, 어디에 내어놓아도 괜찮은 사람이라.”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을 알고 나면 그 율법의 거울 앞에서 자기 자신의 죄악 된 모습을 보게 되고 그 깨닫게 된 죄악 된 모습으로 인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낼꼬.” 라고 탄식하며 죄와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주실 구원을 목말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 보면 “구하라 주실 것이요, 찾으라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열릴 것이니”라고 하셨는데 그러면 어떤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게 됩니까? 우리 속담에 ‘목마른 사람이 샘을 판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무엇인가를 간절히 아쉬워하는 사람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 때 아쉬워하는 사람이란 바로 무엇인가를 목말라 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목말라 하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을 찾게 되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되며, 또 올바른 일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이 결국 의로운 일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우리가 목말라 해야 할 바른 대상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우리에게 목마름이 있다고 해서 그 모든 목마름이 다 같은 목마름이 아닙니다.
- 어떤 사람들은 술에 목마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술에 중독이 되어서 술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있다가 술만 먹으면 힘이 솟아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 또 어떤 사람들은 노름에 목마른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노름에 중독이 되어서 화투장을 손에 쥐면 신들린 사람처럼 신바람이 나 하다가 화투장만 손에서 놓으면 맥이 풀려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 또 어떤 사람들은 일에 중독이 되어 일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무엇인가를 할 때에는 생동감이 넘치지만 일을 다 끝내고 나면 다시 무기력해 져서 말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사람이 가진 목마름이 무엇이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미래와 가치가 달라집니다.
이 세상에는 돈이 최고인줄 알고 돈에 목말라 하는 사람, 명예가 최고인줄 알고 명예에 목말라 하는 사람, 권력이 최고인줄 알고 권력에 목말라 하는 사람, 멋진 남자와 예쁜 여자가 최고인 줄 알고 멋지고 예쁜 사람에게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 가득합니다. 그런데 이런 목마름은 사실 허망한 목마름이요 마치 바닷물을 마신 것과 같아서 마신 후에는 더 큰 갈증을 불러오는 목마름입니다.
마태복음 5:6절 말씀을 보면 우리가 어디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고 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하나님의 복을 받으며 살 사람들은 어떤 사람이라는 것입니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서 살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면서 살까?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드러내는 삶을 살까? 라고 하는 의로운 일에 목말라 하는 사람들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 삶을 보면 어떻습니까?
우리는 의에 대한 목마름이 전혀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아무 생각도 없는 사람처럼 살 때가 많지 않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현실에 만족하는 사람처럼 그래서 마치 아무것도 더 필요한 것이 없는 사람처럼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말씀을 읽고 듣고 배우는 이유는 우리 자신의 본 모습을 돌아보고 하나님 앞에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목마른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창세기의 아벨의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들도 아벨처럼 더 나은 예배를 드리고자 하는 목마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노아의 이야기를 읽으면 노아의 믿음과 순종하는 삶을 나도 살았으면 좋겠다. 라고 하는 목마름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세를 보면 하나님이 모세 한 사람을 통해서도 그렇게 큰일을 행하셨는데 나는 이게 뭔가 나도 더 기도하고 더 잘 믿어서 모세와 같이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목마름이 일어나게 됩니다.
성경말씀은 읽고 배우게 되면 우리 마음 안에서는 이런 목마름들이 생겨나고 또 성경은 우리가 목말라하며 살아야 할 바른 대상이 무엇인지를 깨닫게도 해 주는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하루라도 일찍 이런 목마름을 갖도록 해 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6절 말씀을 보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도 의에 주리고 목말라 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목마름들도 너무 늦게 가지게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솔로몬은 언제 이런 목마름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나이 들어 늙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그 때였습니다. 그는 젊은 날을 수천의 궁녀들과 함께 쾌락을 누리며 사는데 다 허비하였습니다. 이런 솔로몬의 인생을 솔직하게 평가하자면 그는 실패한 인생입니다.
우리가 언제 이런 목마름을 가지게 되느냐에 우리의 인생이 달려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의 목마름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목마름의 경험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만약 20대 초반에 이런 목마름을 가진 사람들은 그 살아가는 일생 동안 얼마나 큰일을 해 내겠습니까?
예수를 믿지 않더라도 사람의 나이가 50이 넘고 60을 넘어서면 자연히 그 살아온 시간들을 되돌아보며 목마름을 가지게 되는 것이 우리인생입니다. 술에 찌들어 살고 죄를 먹고 마시며 살던 사람들도 나이가 들어가면서, “이게 내가 살아온 인생이란 말인가? 나는 실패한 인생을 살았어.”라고 하며 그 잘못 살아온 인생을 한탄하게 됩니다.
이 때 인생의 허무함을 깨닫고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가 되어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냥 죄 가운데 살다가 지옥을 가는 것입니다. 이 때라도 깨닫고 예수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은 부끄러운 구원일지도 구원은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렸을 때부터 사무엘처럼 다니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목마름 하나님의 의에 대한 목마름을 가지게 된다면 이런 사람들은 그 주어진 삶 속에서 대단한 일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볼 때 전도서는 인생을 어리석게 살아버린 한 늙은이의 후회스러운 고백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어린 학생들이나 아직도 젊고 패기만만한 청년들에게는 이 말씀이 그렇게 실감이 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이가 60이 넘고 70이 넘으신 성도님이 이 전도서를 읽으면 ‘그렇지 인생은 정말 그런 거야.’ 라고 하며 전도서의 말씀들이 쏙쏙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통해 이 전도서를 기록해서 우리에게 주신 목적이 무엇이겠습니까?
인생살이 70이 되어서야 깨달을 수 있는 것을 그 이전에 깨닫도록 해 주시려는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전도서는 ‘인생살이의 예습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서는 나이 많으신 분들도 읽어야 하지만 젊은 사람들도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만약 젊은 사람이 전도서를 읽고 그 기록된 말씀들을 이해하게 되면 내가 살아야 할 인생을 미리 예습 하고 사는 겪이 되는 것입니다.
2. 전도서는 우리 마음이 영원한 것을 갈망하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가 묻는 질문 중 하나는 “영원한 것이 무엇이냐?” 라는 것입니다.
전도사 1:4절입니다.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그러면 영원한 것이 무엇이냐? 라는 것을 묻게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자세히 관찰하여 보니 이 세상이 모든 것 즉 태양도, 물도, 땅도 바다도 영원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잠시 잠깐 살다가 죽게 되는 우리들이 영원 앞에 서게 되면 깨닫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인생은 너무 짧고 허무하고 무의미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을 위해 아등바등하면서 매일 반복적인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을 보면 믿는 사람들이나 믿지 않는 사람들이 똑 같은 삶을 살아갑니다. 학생 때는 똑같이 공부하고 때가 되면 똑같이 직장에 가고 때가 되면 똑같이 결혼을 하고 때가 되면 똑같이 자식 낳아서 기르고 또 때가 되면 똑같이 늙고 병들어 죽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은 주일에 놀러가지만 믿는 사람들은 주일에 교회에 간다는 것이 다를 뿐입니다.
그러면 정말 예수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똑같습니까?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무엇을 하든지 사명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 다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어떤 공사 현장에서 인부들에게 일을 시켰는데, “땅을 팠다가 다시 묻고 묻고 나면 다시 그 옆의 땅을 파서 다시 묻는 일”을 시켰다고 합시다. 매일 같이 똑같은 일을 반복하도록 하니까? 나중에는 인부들이 지쳐버렸습니다. 그래서 항의하기를 “아무리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나는 이렇게 무의미한 일은 더 이상 못하겠소, 라고 하며 대들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장소장이 와서 설명을 해줍니다. “여러분, 지금 우리는 가스가 새는 곳을 찾고 있는 중입니다. 그 샌 가스가 터지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게 됩니다. 그러니 한시도 지체하지 말고, 어서 가스관을 따라가면서 땅을 파서 가스가 새는 곳을 확인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지금 하는 일에 많은 사람들의 생명이 달려있습니다.”라고 해 주었습니다.
현장 소장이 이렇게 인부들에게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의미를 알려주었더니 조금 전까지 그렇게 불평하던 인부들은 이후 아무 불평도 하지 않고 이전보다 더 열심히 일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을 살면서 공부도 하고 돈도 벌고 결혼도 하고 자식도 낳아 기르지만 그런 일들을 세상 사람들과 똑 같은 의미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결혼을 해도 믿음으로 사명을 따라 결혼을 하고 공부를 해도 믿음으로 사명을 생각하며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져도 믿음으로 사명을 따라 직업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들은 그 직업이 무엇이든지 관계없이 사명이라고 하고 또 천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내가 있는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처럼 이 세상만을 위하여 살아간다면 장차 아무런 보상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과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간다면 우리가 믿음으로 산 삶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 있을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보상에 대해 고린도전서 15:58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니라.”
하나님께서 이 세상 속에는 영원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이 세상 나라와 대비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가 있음을 가르쳐주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생각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가기에는 우리 인생이 너무 짧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다 살고 난 후에 후회하지 않으려면 지금부터라도 목마름을 가지고 영원에 계신 하나님을 위해 살기 시작해야 합니다.
3. 전도서는 우리로 하여금 새것이 찾도록 해 주고 있습니다.
전도서가 우리에게 제기하고 있는 또 하나의 주제는 ‘무엇이 새것이냐?’하는 것입니다.
전도서 1:9-10절 말씀을 보면 “이미 있던 것이 후에 다시 있겠고, 이미 한 일을 후에 다시 할지라.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나니, 무엇을 가리켜 이르기를 보라 이것이 새것이라 할 것이 있으랴. 우리가 있기 오래 전 세대들에도 이미 있었느니라.” 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해 아래는 새것도 없다.”고 합니다.
모든 것이 다 ‘전부터 있던 것’들이며 모든 것이 다 ‘돌고 도는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전도서가 해아래 새것이 없다고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지만 우리 하나님께는 새로운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5:17절 말씀을 보면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면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과거에는 별 쓸모가 없는 사람이었는데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갖게 되자 이전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은 과거에는 인격 파탄 자였는데 그런 사람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고 믿음이 들어가니까 그 성품이 새로워졌다는 것입니다. 과거에는 죄와 악으로 가득 찬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는데 복음이 전해지고 믿음이 들어가자 이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새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5절 말씀을 보면 “보좌에 앉으신 이가 이르시되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니 기록하라” 하셨습니다. 에스겔서 36:26절 말씀을 보면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라고도 하셨습니다.
기독교는 복음으로 사람들을 이전과는 전혀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가는 운동을 합니다.
복음 안에는 사람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 안에서 마음을 새롭게 하시면 누구나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새로운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서는 다릅니다. 그 누구에게든지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기만 하면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전도서가 이 세상 안에는 해 아래에는 새것이 없다고 강조한 것은, 저 세상 안에는 하나님 안에는 새것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 주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 안에서 복음 안에서 새롭게 되어가는 사람들이, 장차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인 하나님의 나라를 누리며 사는 사람들이 됩니다. 아멘.
말씀을 맺습니다.
무엇엔가 목이 마른 사람은 그것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바칩니다.
그리고 그 목이 마른 크기만큼의 그 결과물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 때 중요한 것은 어떤 목마름을 갖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돈에 목마른 자가 아니라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이어야 하고, 우리의 영적 목마름은 늙어서가 아니라 젊어서 일찍 가져야 하며, 해아래 존재하는 이 세상에는 새것도 없고 영원한 것도 없지만 해 위에 존재하는 저 하늘나라에는 모든 것이 새 것이고 영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마름은 하나님과 그 나라에 대한 목마름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이 주신 사명과 의로운 삶에 대해 목마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참된 것 영원한 것을 목말라하는 큰 목마름들이 이 말씀을 함께 나누고 있는 저와 여러분들의 삶 속에 있게 되시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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